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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대 세우는 비유(누가복음 14 : 25 - 3O)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오늘 본문 말씀은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갔다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예수님의 3년에 걸친 전도 사업이 마감되어 가고 있는 즈음입니다. 어느 사건이 먼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5천명을 먹인 사건도 이 말씀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지금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동기에는 각각 다른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경험하고 아는 바와 같이 교회를 나왔다고 하여 그 처음 동기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알고 보면 교회에 나오는 것도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나오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는 남들이 따라가니 따라가기도 하고, 혹은 호기심에서 구경 삼아 가기도 하며 더러는 좋지 않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무리가 따랐다는 것은 대체로 보아 그저 좋은 마음으로 따른 것이며, 그러면서도 그 따르는 동기가 확실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저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는 확실한 고백 내지 그것을 알고 따랐느냐 할 때 그렇지는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군중심리에 의해서, 혹은 예수님께서 친히 시사하신 바대로 정치적 동기, 즉 예수님께서 빨리 세력을 갖추고 권좌에 앉아 이 나라를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자유케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의 정치적 동기가 다분히 개제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요즈음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표현하여 기복 사상에 의하여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예수님을 따라가서 복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 부하고 싶고, 병든 자는 건강하고 싶으며, 눌린 자는 높임을, 그리고 천한 자는 존귀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자기의 필요, 자기의 욕망이 동기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게 된 무리가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무리가 되어 지금 예수님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만 누구이든 예수를 처음 믿을 때의 동기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우선은 모르기 때문에 대개가 주관적인 이 모양 저 모양의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도 보면 병을 고치기 위해, 혹은 부자가 되고 출세를 하기 위해, 또는 입학시험 때가 되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하며 열심을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극단적으로 물리치거나 정죄할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마는 어쨌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바의 수준 높은 동기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속에서 이렇게 줄렁 줄렁 따라오는 무리들을 앞에 놓고 한번 다져보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따른다고 할 때 거기에는 양적인 비대와 함께 반드시 질적인 문제가 따르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저들 무리들의 마음을 한번 흔들어서 왜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도 끝가지 따를 수 있을 것인지를 다짐받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무슨 목적으로 나를 따르는 것인지 시험을 걸어, 저들로 하여금 자기가 예수를 따르는 그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한번 반성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나아가서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단순히 와아 하고 따르는 정도에 머물기를 원치 않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의 호기심이나 정치적인 소망 같은 것에도 흥미가 없으며 열심을 내는 동조자나 지지자, 혹은 학생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자입니다. 물론 열두 제자도 제자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하여 종말적인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도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그 마음의 소유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늘 만나고 헤어지며 병 고침을 받고는 배반하고, 무엇을 좀 배우고는 돌아가는, 그리고 졸업하고 끝나는 식의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는 무리들로부터 분명하게 기대하신 바는 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켜 제자로 이름하고 있습니다. 비단 교인이나 성도만이 아닌 예수의 제자! 제자란 가까이에 스승을 모시고 철저히 그의 교훈과 행동, 그의 모범적 생활을 본받으며 스승이 죽을 때에 함께 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스승이 죽는 것을 보고도 살아남는다면 그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자란 지식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배우고 전체를 헌신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제자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다 이러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날로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이렇게 지지하고 따라와 주어서 고맙다"거나 "열심히 배우라" 그리고 "열심히 따르라"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대신 매우 어렵고 무거운 세 가지 부정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러하지 아니하면 나를 따를 수 없다고 하는 세 가지 상황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첫째로 26절 말씀을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심한 어폐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부모나 형제자매를 미워해야 하며 또한 처자식을 미워하란 말인가 하는 것으로 들려집니다. 더욱이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할 때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사랑이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둘 다를 위할 수 있고, 둘 다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가 되면 부득불 하나만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중에 딸의 신랑감을 놓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견해가 다른 틈바구니에서 신부감인 딸이 마침내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 하겠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는 어디 그게 가능한 말이겠습니까? 저쪽도 아깝기는 하지만 부득불 하나를 버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양쪽 다 사랑할 생각은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시간에 가서는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각오가 없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가 아는 목사님 한 분도 일제하에서 복잡하고 어려웠던 가정형편 때문에 주위의 친구들이 다 순교를 함에도 자신은 순교대신 신사참배를 했음을 두고 두고 후회를 합니다. 공교롭게 자녀들이 말썽을 부리고는 하는데 이 목사님은 "저 말썽부리는 자녀들 때문에 나는 순교를 못했다"며 가슴아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시간에야말로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며, 만약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표현된 미워한다는 말은 우리말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와는 조금 상이한 데가 있습니다. 히브리 말에 있어서 이 "미워한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증오한다"는 뜻의 어원을 가진 말이라고 합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학술적인 이야기입니다마는 그러나 그 뜻하는 바는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자기 목숨, 부모와 처자, 형제 자매 등을 사랑할 수 있어야 곧 예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를 둘째, 세째로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의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를 똑바로 사랑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는 27절에 기록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자기 십자가 를지고 나를 쫓지 않는 사람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자꾸만 십자가를 벗으려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마는 그래서는 예수의 제자가 될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따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벗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요 그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가 아닌 나의 십자가입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각자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면 나의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자신의 십자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내가 그 십자가를 지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벗어버리자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분명해야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생각을 해야지 벗고 따르려 해서는 안됩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벗으려 하다가 더 큰 화를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벗어보겠다며 도망갔다가 엄청난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느냔 말입니다. 아무리 괴롭고 답답하며 쑤시고 아파도 내 몫에 태인 십자가는 내가 져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 십자가를 벗으려 하거나 벗기 위해 따르는 것이라면 그는 결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33절에 기록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향한 애착심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소유라는 것은 비단 물질뿐만 아니라 명예와 이 세상으로 끌리는 여타의 모든 애착심을 말합니다. 요즈음 보면 오락 좋아하다가 교회에 제대로 못나오는 분이 많고, 취미 생활에 너무 빠져 신앙 생활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교회에 나오는 시간에 텔레비젼 프로가 제일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도 말썽입니다. 오늘도 보면 돈을 사랑하고, 사업을 사랑하며 심지어는 자기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분명히 신앙 생활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로 해야 될 줄을 알면서도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냥 한번 뚝 꺾어 깨끗이 치워버리면 정말 시원하게 신앙 생활을 하게 될텐데 여전히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령들을 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버리라고 하시는 것이겠는가 할 때 본문에 나타난 바의 그 이유는 참된 종교란 상당한 댓가를 지불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 생활에 대하여 공짜를 바라지 마십시오,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의 말에도 "요즈음 사람들은 너무 공짜 신앙을 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무엇이든 너무 쉽게 되기를 바라고 마술적으로, 혹은 기적적인 결과를 바랍니다마는 그 모두가 다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진정 참된 신앙 생활을 원한다면 상당한 댓가를 지불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하고 진리를 찾을 생각을 할 것이란 말입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하나님을 좀더 알았으면 좋겠는데 기독교를 어떻게 하면 빨리 알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얼마나 읽어 보았습니까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안 읽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얼마나 믿었습니까 하였더니 한 일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다시 예를 들어 영어 공부를 몇 년이나 하셨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래도 몇 년 했지요"합니다. 다시 제가 있다가 "그래서 지금 외국인을 만나서 영어를 잘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아! 못하지요"하는 것입니다. 10년 동안이나 영어 공부를 하고서도 외국 사람을 만나면 인사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처지에 어떻게 생명의 진리인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몇 시간 내에, 일문일답으로 이해 되어지기를 바라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생각이며, 진리에 대한 모독이요, 기독교에 대한 모독입니다. 여려분, 신앙은 일생동안의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상당한 값을 지불할 각오를 가지고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가 누구입니까? 그는 다름 아닌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어떤 무신론자는 기록하기를 현대 교인들은 체면이 없다는 것인데 그 하나는 열심히 회개한 다음에 또 죄짓고 그리고 또 회개하고,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몇 십년 동안 그 짓을 하면서도 여전히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체면이 없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셨다는 이야기는 입버릇처럼 하면서 자기는 고스란히 평안 무사하기만 바라고 있으니 이것이 체면 없는 사람들의 짓이라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가장 철면피하고 체면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라며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너무 쉽게 편안하기만을 바라며 매사가 성공적인 것을 소원으로 삼고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기도를 한다니 이것이 어디 앞뒤가 맞는 이야기이겠습니까?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하는 중에 미래에 대한 비상한 각오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두를 미워할만한 가치가 있고, 십자가를 질만한 가치가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후에 더 큰것으로, 영원한 것으로 받게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미워하라, 버리라,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을때 그 말씀이 어찌 우리에게 고생과 희생만을 강요하는 것이겠습니까? 분명 여기에는 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귀한 물건을 살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을 때에는 몇십만원의 돈을 주고서도 아깝지 않는 마음으로 그 물건을 가지고 나옵니다. 이때에 돈까지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물건이 저 돈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아깝지 않게 돈을 내어주고 이 물건을 갖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의도에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에 하시는 말씀이 만약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거기에 필요한 예산을 생각해 보아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자기가 가진 것으로 그 일이 가능한지를 계산해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만약 그런 생각도 없이 망대를 짓기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그리고 그렇게 하여 짓다가 도중에 그만 두게 된다면 이 또 얼마나 미련한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도는 첫째는 망대의 가치, 망대를 세우는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며 두 번째는 먼저 예산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일단 시작을 했으면 도중에서 끝낼 수는 없는 일이니 경비는 얼마나 들겠고, 또한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인지 그것들을 미리 생각한 후에 공사를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망대를 지은 다음에 얻어지는 소득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것들이 확실해지면 이제는 서둘러 공사를 진행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망대가 무엇에 쓰여지는지,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생각지 않고 무작정 시작을 했다가 도중에 그만 두게 되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나를 따라 오려거든 그만한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망대를 짓는 이야기에 이어 전쟁에 나가는 임금의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이 두 이야기를 비교해보면 망대를 세우는 것은 건설적인 것인데 비해 전쟁에 나간다는 것은 파괴적인 내용입니다. 그런가하면 특별히 망대에 대한 이야기는 저들이 알고 있는 현실적인 사건을 충분히 이해하신 예수님께서 그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풀이를 해봅니다. 그 이유는 총독 빌라도가 정치적인 목적하에 외부로부터 물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물을 마실 수 없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위해 수로(水路)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공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수로 공사를 시작함과 동시에 기념탑부터 먼저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는 중간에 생각이 변하고 돈도 모자라는지라 그 공사를 중단하고만 것입니다. 이에 주석가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바로 그 일을 은근히 지적하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큰 소리 치면서 일은 시작해 놓고 마지막에는 흐지부지하게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으니 이렇게 되어서야 되겠느냐? 예수를 따르는 일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시작을 하였으면 끝을 내어야 하고, 시작할 때에는 끝낼 각오를 하고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감히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그 가치! 그러기 위해 지불해야 될 댓가!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처음부터 알고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오늘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헌신해 주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유명한 컬럼리스트인 월터리프먼은 현대사를 연구 분석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늘 이 세대는 두 사람, 두 종류의 철저하게 헌신한 제자들로 인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칼 맑스의 제자들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합니다. 칼 맑스의 제자들은 공산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그 때문에 오늘도 공산주의가 온 세계 위에 이만큼 서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전 삶을 바친 예수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전적으로 헌신한 제자들에 의해서 이 세계가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철저하게 목숨을 걸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 전적으로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첫째는 망대를 세우는 것처럼 공개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을 때에 공개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마음으로 믿고, 조용히 믿고, 은근하게 믿고 하는 식의 이야기들을 합니다마는 그런 소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한번 예수 믿는다하면 철저하게 들어 나게 믿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나이도 이제 오십이 넘은 데다가 건강도 좋지 않고 사업도 여의치 않아 괴로워하는 중에 어떤 분의 권유를 받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교회에 나와서 깜짝 놀란 사실은 자기와20년 동안이나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바로 그 교회의 장로가 되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놀란 것은 저 친구가 나하고 그렇게도 친한데 어찌하여 20년 동안이나 나에게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것으로 인해 놀랐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답답한 사정을 겪다 못해 지금 이렇게 교회에 나왔는데, 저는 교회의 장로인 가까운 친구로서 20년이 되는 지금까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한 마디도 않했으니 저가 어찌 예수 믿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진정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저 만나는 사람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계속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공개적인 신앙을 소유한 제자를 원하십니다. 니고데모처럼 밤에 찾아다니는 제자가아니요, 아리마대 요셉처럼 숨어 다니는 제자가 아니라 떳떳이 공개적으로 나는 기독교인이라는 고백을 하고 예수를 전파하는 그러한 제자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다음 두번째는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 예수의 제자가 되고, 순종하는 만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은혜라는 말을 능력이나 행복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해 본다면 순종하는 만큼의 능력, 순종하는 만큼의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말하기를 10%순종하는 사람은 1O%의 행복을, 100% 순종하는 사람은 100%의 행복을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한 시골에서 아프리카인을 위한 선교와 의료사업을 위해 헌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헌금을 담는 그릇은 우리의 주머니 모양과는 달리 조금 작기는 하지만 보통은 마치 우리가 사용하는 세수대야처럼 생긴 것이어서 헌금을 넣으면 다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헌금 그릇이 쭉 돌아가면서 헌금을 담게 됩니다. 그러는 중한 소년 앞에 이르자 이 소년이 대뜸 그 그릇 위에 올라앉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슨 짓이나며 놀라서 묻자 그 소년의 대답인즉 "저는 돈이 없으니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인데 그가 바로 맨 먼저아프리카의 선교사가 된 저 유명한 리빙스톤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어린 소년이 "나는 돈이 없습니다. 내 몸을 바치겠습니다"라며 죽기로 헌신하는 그 자세, 그 뜻을 깊이 생각해야될 것입니다. 진정 전적으로 헌신하기를 원하는 거기에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축구 선수의 이야기를 매우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훌륭한 축구 선수로 많은 표창과 상금을 받는 선수인지라 기자가 마이크를 내밀며 "하루에 몇 시간이나 연습을 하십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수가 대답하기를 "공을 차고 있는 시간은 차고 있는 시간이구요, 공을 안차면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구요, 또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하면 축구에 대해서 생각을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물 네 시간 다 연습을 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시간도 쉬지 않고 나는 오직 축구만을 생각했다는 이것이 바로 전적인 헌신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가 진정 나를 따르려느냐? 내 제자가 되려느냐? 그렇다면 나를 첫째로 사랑해야 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며, 모든 소유를 버리고 따라야 한다, 이 세가지를 잊지 말라! 그리하고야 내 제자가 될 수 있으며 또한 그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미리 알아서 그 어떤 댓가라도 지불할 각오로 출발할 것이며, 그리고 일단출발을 하였으면 마지막까지를 생각하고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질 각오와 끝을 낼 생각으로 출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주님께로부터 오는 제자의 특권과 제자의 영광, 그리고 제자의 능력을 다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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