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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에 선 제자(요 18:15-18)(요 18:25-27)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께서 성만찬 예식을 행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들 가운데서 나를 배반할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또 요한복음 16 : 32에서도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온다"고 제자들이 떠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에게는 "네가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고 직접적으로 경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체포되실 때, 앞에서 본대로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내리칠 정도로 예수님을 위해 용기를 부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매우 섭섭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요 18:15) 한 때는 칼까지 휘두른 베드로가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베드로 외에 "또 다른 제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될 때에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가고 이 두 제자만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것 같습니다. 이 두 제자가 그래도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던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들도 십자가를 함께 진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멀리서나마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제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상식적으로는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라고 말했을 때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제자가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혼돈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람이면 니고데모가 아닌가, 또는 예수님의 시체를 장례지낸 숨은 제자 아리마데 요셉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이상 두 사람은 대제사장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그럴듯도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두 제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따라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름을 밝히지 않고 또 다른 제자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동양적인 미덕입니다. 앞에서도 공부했지만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기록했으므로 자기 이름이 나와야 할 곳에서는 이름을 감추고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잘한 일을 말할 때에는 자기 이름을 나타내지 않음으로써 동양의 겸허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새는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면서 자기 이름만을 나타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사도 요한의 겸허와 미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되, 한 제자는 대제사장이 있는 곳까지 가까이 갔고 베드로는 밖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앞섰고 베드로는 멀찌감치 뒤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나는 이렇게 앞에까지 왔는데 베드로는 무서워서 들어오지 못했다"고 그대로 쓸 수가 없어서, 자기 이름을 더욱 숨겼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수수께끼는 요한이 대제사장과 어떻게 잘 아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과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은 유명한 사람이거나 높은 지위의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잘 아는 대로 요한은 갈릴리 어부였으므로 높은 직위인 대제사장과 알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추측을 자아내게 합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해석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사도 요한이 본래 제사장의 후예였는데, 어찌하다가 갈릴리까지 와서 어부가 되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해석에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아무리 타락을 했어도 레위 자손이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대제사장이 개인적으로 그를 알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해석을 위해서 후세 사람들이 문서들을 뒤적이어 근거를 찾다 보니 이런 생각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대제사장이 물고기를 좋아해서 요한과 연결이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옛날에는 물고기를 저장하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물고기를 즐겨 먹는 제사장과 어부가 서로 연결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요한의 아버지는 많은 어부를 품꾼으로 쓸 만큼 돈 많은 어부였으므로 그와 대제사장과는 오고가는 일이 있었을 것이며 물고기 심부름은 주로 요한이 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요한의 아버지는 대제사장에게 물고기를 단골로 대는 생선장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요한이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 그럴듯한 추리로써 마음이 편한 해석으로 여겨집니다. 어쨌든 요한이 대제사장과 같은 높은 신분이 종교적 권세로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였다고 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는 관계였기에, 요한은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근황을 보게 되었다는 그의 겸손과 솔직함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베드로는 밖에서 떨고 있는데 자신은 예수님을 더 사랑했으므로 안에까지 들어갔다고, 표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겸손하게 또 다른 제자는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결과적으로 선한 쪽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동기가 순수했느냐고 묻는다면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요한은 이런 의미에서 자기가 더 깊숙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대제사장과 알기 때문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안으로 먼저 들어간 요한은 사람을 시켜서 베드로를 들어오게 했는데 그는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고 조금 더 들어왔습니다.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요 18 : 16)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체포되어 법정으로 끌려 갈 때에 차마 떠나지를 못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베드로는 아주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용감하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까지 휘두른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는 분명히 예수께서 메시야요 유대 나라의 왕으로 오신 것을 알았는데 잡혀가시니 석연치 않은 바가 있어서 "어떻게 되나 보자"하는 생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대개 다혈질인 사람들이 쉽게 넘어지고 쉽게 부러지는데, 베드로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항상 제자 중에서도 앞장섰던 수제자였는데 이렇게 비참하게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왜입니까?
마태복음 26 : 58에 보면 "베드로가 멀찌기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는, 좀더 상세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따라가지 못하고 멀리서 따라갔습니다. 이왕 가는 것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 따라갔다는 것은 비겁한 태도로 아주 좋지 못한 행동입니다. 이렇게 미온적인 자세는 언제나 큰 시험을 자초하게 됩니다. 믿을 바에는 적극적으로 가까이 가며, 그리고 꾸준해야지, 차지도 덥지도 않으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씀으로 보면, 베드로는 결과를 보려고 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 봐서 예수님이 불리하면 도망가고, 이적을 행하시어 보좌에 앉게 되면 나는 수제자라고 나설 참인지도 모릅니다. 결과를 보려고 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신앙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주님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그런 신앙에 들어가야 합니다. 베드로와 같이 기회주의적인 생각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킵니다. 결과를 보겠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것으로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발상이기에 나중에는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가까이 따라가야 합니다. 문 밖에 서서 결과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생각은 함정을 자초했으며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는 행위였습니다. 적극적으로 시인하는 자에게는 시험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길만이 나의 길이요 다른 선택이 없다는 확고한 자신을 가진 자는 모든 시험을 이기고, 다른 길이 있을 것으로 망설이는 자는 반드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문 밖에 서 있는 자세, 그 상태로만 지속할 수 있었어도 좋았겠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함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이렇게까지 자기가 비겁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다가 보니 완전히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배신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완전한 헌신과 결단 없이 미온적이고 불투명한 신앙은 나도 모르게 시험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한 것에는 몇 가지 넌센스가 있습니다. 우선, 지금 베드로가 있는 자리는 빌라도의 법정이 아닌 가야바의 공회의 법정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형이라고 재판하면, 다시 빌라도 법정에 가서 결정을 해서 집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최후의 집행 장소도 아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가령 칼을 든 군인의 협박에 의해 베드로가 (본능적으로 죽음이 무서워서) 모른다고 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질문한 사람은 계집아이입니다. 한편으로는 정말 베드로가 그럴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또 하나 더 지적한다면 계집아이가 물었을 때, 그저 예수를 모른다고 하든지, 아니면 나는 제자가 아니요, 정도로 말할 수 있었는데,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지나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강하게 부인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여기까지 오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 본문에서도 표현하기를 "나는 아니라"(요 18:17)고 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33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시자, 유독 베드로가 나서서 말하기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릴찌라도 나는 죽을찌언정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여기서도「나」를 강조했습니다. 즉 베드로는 자기를 별개시했습니다. 시험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다 넘어지면 나도 넘어지리라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다 버릴찌라도 나는 아니라고 자기를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한 그 점이 오늘에 와서 넘어지는 결과가 된 것 같습니다. 남이 실수하는 것을 보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남이 죽는 것을 보고 나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나만은 아니라고 특별시하는 그 순간이 바로 넘어지는 순간입니다.
이 본문과 같은 내용으로 누가복음에서는 더욱 가슴아픈 구절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말소리가 저 쪽에 서 계신 예수님의 귀에 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기록하기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눅22:61)라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셨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가야바와 마주 서 있고 베드로는 저 뒤에 서 있는데, 계집아이 앞에서 도무지 모른다고 강하게 부인하자 예수께서 뒤돌아보신 것입니다. 이 때 주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고 베드로의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주님이 미리 경고하신 말씀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바라보는 주님의 눈길은 어떠했겠습니까? 곧이어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문 밖에 나가 통곡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바로 그 시간은 예수께서 가야바로부터 갖은 모욕과 힐난과 비판을 받는 시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일만 해도 감당키 어려운 시간에, 뒤에서 사랑하는 제자의 외면하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저가 큰 실수를 하는구나" 하고 베드로에게 마음이 쏠리셨던 것 같습니다. 이 일에 대해 디 엘 무디는 그의 설교에서 재미있는 추리를 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입을 열어 말씀은 안하셨지만 눈으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모른다니 사실이냐, 내가 너를 갈릴리 바다에서 불러 제자로 삼고 네게 베드로란 이름까지 주지 않았느냐, 바로 몇 시간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경고까지 주지 않았느냐", 우리도 동의할 수 있는 추리입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칠 때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진짜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사랑하는 제자를 염려하시어 뒤를 돌아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시험에 빠질 때가 있고 예수를 부인할 때가 있습니다.
말로, 행위로 예수 없는 생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돌아보시고 "네가 나를 모르다니 사실이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항상 내 언어, 내 행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앞으로 공부하겠습니다만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다시 갈릴리 바다로 가서 물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찾아가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어찌해서 네가 나를 모른다고 하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진정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했으면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사랑이 없으므로 약해졌고 비참해졌고 비굴하게까지 된 것입니다. 사랑은 지혜요, 능력이요, 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 사랑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마음과 행위가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같은 길을 갑니다. 절대로 헤어질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를 떠났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는 연고입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6:24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나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고 주를 따라야 주를 긍정할 수 있고, 끝까지 따를 수 있습니다. 주와 함께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주와 함께 영광이 있고, 주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주와 함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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