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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일과 하늘 일(요한복음 3장 9절~15절)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 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의 본문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개탄하는 말씀이요 탄식하는 말씀이요 매우 슬픈 마음으로 주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l2절)." 오늘은 이 말씀에 대하여 공부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아는 것, 본 것, 경험한 것, 확실한 것, 아주 뚜렷한 사건을 말하고 있는데도 상대방이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이 단절된 관계가 우리를 매우 가슴아프게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인격을, 자신의 존재를 내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확인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웅겔스마(Ungelsma)는 이렇게 말합니다. 'To know self is to be known by another.'-'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알려진 나를 아는 것이다.'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흔히들 군중 속의 고독을 운위하면서 세상에 나 혼자인 듯이 말합니다마는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다 쓸쓸해서 하는 말이요, 역설적인 넋두리입니다. 어쩔수없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말이 다른 사람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가 경험한 것, 내가 확실하게 본 것을 말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이 증거를 받아들여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내 존재 자체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는 자기 존재의 상실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현대를 일컬어 '단절의 시대'라고 합니다. 지나온 시대를 통틀어 아마도 지금이 가장 대화가 안 통하는 시대일 것입니다. 의사소통에 대하여, 심리학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연구하고 배우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현대가 가장 communication이 안 되는 시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단절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언어의 단절입니다. 말이 안 통합니다. 용어가 틀립니다. 계층간에 다르고, 연령 간에 다르고, 직업간에 다릅니다. 정말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왜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까?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요즘의 젊은이들이 쓰는 말 좀 들어보십시오. 정말 모르겠습디다. 얼마 전에도 젊은 사람들이 모여 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대빵 좋다'라는 말이 자주 나오더군요. 도대체 '대빵'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대빵'이라는 말은 일본어로 '철판'이라는 뜻이거든요. '대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시는 분이 있기에 제가 스스로 설명을 만들었습니다. 부끄러운 것도 모르는 사람을 얼굴에 철판 깔았다고 하지요. 그것을 '대빵'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어찌어찌 달라져서 '대빵 좋다'라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고, 간신히 엮어 설명을 합니다마는, 도대체 이것이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Nobody knows.-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언어이기는 합니다.
쓰는 대로 통하면 좋은 언어요, 통하지 않으면 죽은 언어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통하지 않는 데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빵 좋다' 할 때에도 '아, 아주 좋다는 말이구나'라고 알아들을 수 있다면 된 것입니다. 어느 나라 말이든 상관할 바 없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했으면 족한 것입니다. 이렇듯 언어의 문제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과 말하다가 '야, 그거 무슨 말이니?'하고 물어보십시오. 대번에 '알 필요 없어요' 할 것입니다. 멋모르고 물어보았다가 무안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대가 틀리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학문의 단절입니다. 전부가 각기 협소한 의미에서 전문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용하는 말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법과를, 어떤 사람은 의과를, 어떤 사람은 문과를 전공합니다. 그리고 의사끼리도 내과와 외과가 서로 틀립니다. 자기 분야만 열심히 연구해서 박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는 의사가 세상에서 제일 무식합니다. 자기의 전공분야만 연구하느라고 다른 것은 들은 일도 없고 본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공부 많이 한 사람일수록 대화가 안됩니다.
간혹 보면 남편과 대화가 안 통한다느니, 남편이 집에 오면 말이 없다느니 하며 불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저부터도 집에 가서는 말을 잘 안 합니다. 밖에서 너무 말을 많이 하다보니 집에서는 말을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듣는 것도 짐스러우니까요. 그리고 실은 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휴식인 것입니다. 여기다 대고 아무리 뭐라고 해도 더는 입력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전문성, 전문적인 위치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오히려 협소해지고, 나아가 대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야기가 안됩니다. 안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마주앉기만 하면 그저 수지가 맞느니 안맞느니 증권이 어떻다느니 하는데, 공부하는 사람은 딴소리를 합니다. 그러니 통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학문의 전문화가 언어의 단절을 가져오게 했다는 말입니다.
용어만 해도 그렇습니다. '콘덴서(condens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실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전문적으로 상당히 공부한 사람입니다. 이 '콘덴서'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먼저, '콘덴서'는 전자부품의 하나를 일컬을 때에 쓰입니다. '저항 콘덴서'라고 하여 쓰입니다. 또한 렌즈의 종류 가운데 하나가 '콘덴서'입니다. '콘덴서'는 특수한 렌즈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화학분야에서는 거르는 기계를 '콘덴서'라고 합니다. 이처럼 똑같은 콘덴서인데도 쓰임에 따라서 그 뜻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진기를 사용하는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은 '콘덴서'라고 하면 당연히 렌즈만을 떠올립니다마는, 이 콘덴서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여러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같은 단어인데 그 개념은 저마다 다릅니다. 모든 말이 이와 같습니다. 자기 나름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 역시 그 나름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 쓰는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대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알아듣기 힘드니까 안하고, 말하기 힘드니까 안 하기에 대화가 단절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도덕의 단절입니다. 이것은 가치관의 단절을 말합니다.
특별히 이데올로기의 대립하에서는 이것이 더욱 심각합니다. 극렬한 대결하에서 보면 이쪽에서는 간첩이 저쪽에서는 애국자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북한에서는 애국자가 우리 나라에 와서는 간첩이요, 우리 나라에서는 애국자가 북한에 가서는 간첩일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전혀 틀립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도덕적으로 보더라도 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옳은 것인데 저 사람에게는 틀린 것이요, 이 사람에게는 선한 일인데 저 사람에게는 악한 일이 됩니다. 우리는 그만큼 복잡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빌 1:10)'라고 기도합니다. 선한 것을 분별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절대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상대화해버렸기에 그 기준이 없어졌습니다. 절대가치를 잃어버리는 순간에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가치를 잃어버리는 순간, 도덕성이 상실되고 맙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언어를 이토록 혼잡하게 하고 대화가 없는, 말이 안통하는 시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가장 슬픈 일은 언어소통의 상실에 있습니다. 언어가 언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다르기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현지 토착민의 말을 잘하는, 언어 재주가 있는 선교사가 선교활동에 성공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통계를 내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토착민의 언어를 잘 구사하는 선교사치고 선교활동에 성공한 예는 극히 적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만 잘한다고 선교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가하면 토착민의 말을 못해서 현지에서 40년을 살면서도 설교 한번을 못한 선교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토착민의 언어로 설교는 못해봤을지언정 행동으로 많은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선교사 가운데도 보면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문까지 배워서 논어 맹자도 압니다. 우리보다 더 잘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은 언제나 별 할일도 없이 나가나 들어오나 환영을 못 받습니다. 반면에 우리 나라에 와서 30년, 40년을 일하면서도 한국말로 제대로 설교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선교사가 오히려 활동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특히나 교역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는 인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은 가슴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언어의 단절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만 열려 있으면 대화는 절로 이루어집니다. 말은 안 해도 됩니다. 얼굴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눈만 마주침으로 아무 말 없이도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마음이 닫히고 나면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밤새껏 말을 해도 타인이요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싸움일 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들을 생각은 않고 각자 자기 말만 하고 있습니다. 남 말하는 도중에 끼어 들어 가만있으라고, 나 말 좀 하자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과하겠다 하고는 싸웁니다. '미안합니다'라는 사과 한마디로 끝났으면 좋을 텐데 거기서 그치지를 못하고 한마디 더하다가 싸웁니다. 사과해가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것은 용어의 문제가 아니요 전문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슴의 문제입니다. 가슴이 닫혔기 때문에 언어가 안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것입니다. 말의 유식하고 무식하고는 문제가 안됩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와 어머니를 보십시오. 무슨 말이 그리도 많은지 통하지도 않는 말을 주고받습니다 마는, 어린아이와 어머니는 잘도 통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의 말을 제멋대로 해석해가면서 듣는데도 곧잘 통합니다. 서로가 사랑하기에,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잘 통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심의 문제입니다. 공통의 관심거리를 가져야 합니다. 관심을 별도로 가진 채 대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공통의 관심을 위해서는 먼저 경험이 같아야 합니다. 경험이 다르면 안됩니다. 그래서인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잘 통합니다.
요즈음 가만히 보니 젊은 사람들의 결혼연령 차이가 옛날보다 좀 작아진 것 같습니다. 동갑이나 몇 살 차이 안 나는 사람들끼리 많이 합니다. 언어가 잘 통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나이 차이가 7년 이상이면 대화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지 대화적으로는 영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여워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어떤 분은 "우리 남편은 바가지를 긁어도 잘 참아줘요"라고 자랑합니다마는, 그것은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봐주는 것입니다. 말 같지 않으니까 대답을 안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싸운 적이 없노라 으스댑니다만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대화가 없으니까 안 싸우는 것입니다. 상대가 안 되는데 어떻게 싸웁니까? 어린아이하고 할아버지가 싸우겠습니까? 이렇듯 대화는 같은 경험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일본말을 조금 합니다.
그런가하면 공산치하에서도 살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유학하느라 영어도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파란만장하게 살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를 겪으면서 살았으니까요. 그래서인지 6․25를 겪지 않은 사람들, 일제하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는 '아, 이거 이야기해도 모를 텐데 내가 괜히 이러는구나' 싶어집니다. 같이 경험하지 않은 것이 통할 리가 있겠습니까? 요즘 사람들, 그 때 그 시절 많이 굶었노라 하면 "굶기는 왜 굶습니까? 냉장고에서 꺼내먹으면 되지" 합니다. 그 어려운 시절, 쌀이 없어서 밥을 숱하게 걸렀노라 하면 "밥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지요. 참 이상하시네요" 합니다. 그렇습니다. 같이 경험하지 않고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굶는다'는 것의 뜻이나 제대로 알겠습니까? 며칠이나 설명해야 알 것 같습니까? 이렇듯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미래지향적인 소원이 다릅니다. 욕망과 소원이 다르면 의사소통이 안됩니다. 꿈이 다르면 대화가 안됩니다. 이상이 다르면 대화가 안됩니다. 돈을 버는 것이 자신의 이상이요 소원인 사람과 명예를 바라는 사람과의 사이에 어떻게 대화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돈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상하다. 수억씩 없애면서 뭣 때문에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합니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요. 전혀 이상이 다르니까요. 소원이 다르니까요. 이렇게 idea가 다르고 철학이 다르고 주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면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마음의 문제요 가슴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난 이야기를 위의 시각에서 보십시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 중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원문대로 보면 '게네세나이 아노센'-'위로부터 다시 나야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가 다시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가 지금 어리석게도 '나는 늙었는데, 그래도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겠는가'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리면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답니까? 이 사람 디고데모가 예수님 앞에서 떨었나, 왜 '늙으면'이라는 말이 여기서 튀어나옵니까? 어린아이는 모태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 말은 자기 경험에 집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니고데모 자신이 늙었거든요. 그래서 어찌하다보니 '늙으면' 하고 튀어나왔지만, 그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모태에는 늙으나젊으나 다시 못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번 나왔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님께서 '이 사람.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대화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상대가 되겠습니까?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절)." 이 말씀 역시 니고데모가 알아들을 리 없지요.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라고 니고데모가 묻고 있지 않습니까? 거듭나는 일이나,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신비로운 생활과 신비로운 체험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망신을 주신 것 같습니다. 무안을 주신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10절)" --- 이스라엘의 랍비가 되어서 이 정도도 모르느냐, 그동안 무엇을 가르쳤느냐, 하고 묻고 계심입니다. 그 자신 늙었다고 생각하는 니고데모가 30세밖에 안되신 예수님께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무엇을 배웠느냐고 무안을 당한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온 세상의 이치를 다 안다고 해도 '중생'을 모른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중생의 문제를 모르고, 생명의 문제를 모르고야 어떻게 무엇을 안다고 하겠습니까?
오늘의 잠언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절)?" 여기서 땅의 일이란 세상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요, 인간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늘'이라고 할 때에 이것은 단순히 푸른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하나님께 대한 별칭으로 쓰입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함부로 부르기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여 십계명 가운데 제3계명으로 엄히 정해놓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잘못 불렀다가는 하나님께로서 벌을 받겠다고 하는 경계의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부르지를 못한 것입니다. 가능하면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 다른 호칭을 쓰려 했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요, 하늘 일은 하나님께 관한 일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잠언말씀에 담긴 뜻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욕망의 초점이 땅에 있기 때문에 설사 하늘의 일을 생각해도 땅의 시각에서. 땅의 중심에서 이해하려든다는 말입니다. 관심과 이상과 지식과 경험이 전부 땅에 매여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교회 나와서 예배드릴 때에 보면 이 말씀을 내가 구원받고, 내가 성장하고,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바로서는 데에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더군요. 그리고 때때로 보면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부지런히 받아 적는 분이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에게 "무엇을 쓰셨습니까? 왜 쓰셨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저를 실망시키기 일쑤입니다. "회사에서 직원회의 할 때에 훈시하려고요." 교회 다니기 전에는 훈시할 때마다 할말이 없어서 '에, 에……' 하다 말았는데 교회에 다니고 부터는 말씀을 적어놨다가 하니 할말이 많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글쎄요. 그것도 전도로 생각한다면. 전도라는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괜찮겠습니다 마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교회에 나와서는 부부일지라도 같이 앉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같이 안으면 서로 말씀 듣는 것을 미루게 됩니다. 자신이 들으려 하지 않고 상대에게 '잘 들어둬'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말씀은 내가 들어야 합니다.
하늘로 향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직선적으로 통하는 열린 마음이 없기 때문에 땅의 일만 생각합니다. 땅 중심으로 땅의 세계관에서만 생각하고, 땅의 언어로 땅의 소원으로만 바라보기에 무엇을 듣든지 전부 땅의 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합디다. "목사님은 돈을 벌었으면 잘 벌었을 것 같아요. 설교 들으면서 가만히 보니 저런 머리로 돈을 벌었으면 잘 벌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하더군요. "글쎄요" 하고 말았지만, 보십시오. 모든 일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땅의 일을 통하여 하늘 일을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하늘의 이야기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땅의 이치를 가지고 하늘의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유입니다. 이것이 상징입니다. 비유와 상징으로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생각과 마음과 관심이 하늘에 있어야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겠는데, 생각이 땅에만 있고보니 하늘 일을 말씀하시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땅의 이야기로 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도 보면 이와 똑같이 답답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긷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그녀 역시 수준이 낮은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나 다를 바 없습니다. 물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그 여인이 다시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라고 말합니다. 저 같으면 가만 안 뒀을 것 같습니다. 호되게 한 마디 했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 앉으셔서 솟아나는 생수를 보시면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실물교육을 하시고 계십니다. 우물에서 긷는 이 물은 마신 뒤에는 다시 목마르겠으나, 내가 주는 물은 영혼 속에 들어가서 영원히 솟아나는 물이기에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런데 이 귀하디 귀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은 대낮에 물길으러 오는 것이 힘들었던 것인지,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특별히 많이 있습니다. 어리석고 우둔하고 미련한 생각들입니다.
오늘의 잠언말씀인즉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그리스도께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의 주제가 무엇인지, 그 주제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제파악을 못하면 안됩니다. 주제를 바로 알아야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해오고 있습니다. 강의할 때에 보면 학생들이 잘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고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서 어떤 패에는 답답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험을 치게 해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떤 학생은 얼마나 확실하게 알아들었는지 제가 의도했던 바를 시험지에 완벽하게 써놓았습니다. 그럴 때면 신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학생은 쓰기는 열심히 썼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게 썼습니다. 그 사람은 중심을 잃어버린 사람이요 말하려고 하는 근본의도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맥락을 잃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 모든 선교, 모든 교훈, 모든 이적, 모든 사역의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나라'라고 하니까 세상으로, 혹은 대한민국이니 일본이니 하는 세상적인 나라로 받아들이고는 이것은 전쟁 없는 사회, 평등한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말씀을 놓고도, 그 이적이 현재에 있다면 경제문제는 모두 해결될 수 있을 텐데 합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八福)'을 보십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3, 10)." 여러분, 핍박이 무엇입니까? 재산을 뺏기는 것이요, 집에서 쫓겨나는 것이요, 생명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순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슨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이것을 하늘나라 말이 아닌 무슨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순교자가 되면 기념비를 세워주겠다' 하겠습니까? '순교자의 후손은 오래오래 잘산다' 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제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중심을 두지 않고는 한마디도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빛을 말씀하시든지 씨뿌리는 이야기를 말씀하시든지 우리는 하늘나라 이야기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조용하게 하신 이야기를 접해도 하늘나라로 이해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을 보아도 하늘나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리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땅의 일을 보면서 하늘의 이치를 이해합니다. 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말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꽃을 하나 들어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입히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를 하나 들어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먹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일어 거칠어진 바다를 보며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6)"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을 의식하시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계십니다. 보시고, 들으시고, 경험하신 바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증거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을 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통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 어디를 읽든지 말씀이 통합니다. 언제 기도하든지 말씀이 통합니다. 언제 설교를 듣든지 그 신령한 말씀이 내 귀에 확연히 와 닿습니다. 마음에 와서 부딪칩니다. 이렇듯 말씀이 통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마음이 닫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오늘의 잠언말씀을 보십시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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