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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비유(마가복음 4 : 21 - 25)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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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비유(마가복음 4 : 21 - 25)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이 등불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고있는 등불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임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 때의 등불이란 그저 조그마한 질그릇 같은 것에 기름 붓고 심지를 만들어 잠기게 한 후 그 심지 끝에 불을 붙여 밝히게 하는 정도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항상 등불이 켜져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불을 붙여 밝히는 일은 제사장의 책임인 것이며 이 일을 위해서는 자주 등잔을 살펴보아 기름을 채우고 심지를 잘 정비하여 어느 순간도 불이 꺼지는 일이 없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등잔은 곧 빛을 말함과 동시에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빛이 된다는 그러한 상징으로 생각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말씀이 마태복음 5:15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에 나타난 등불은 똑같은 표현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그 지적하는 바의 의미는 각각 다른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에 한번 비교를 해보면 마태복음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혹은 "너희는 세상의 등불이다"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의 결국도 예수님이 빛이며 또한 너희가 빛이라는 것으로 설명이 전개되겠습니다마는,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 등불은 같은 등불임에도 복음 자체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적하는 바가 조금 다른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에서 거슬러 올라가 4장의 시작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등불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씨를 뿌리는 비유에 있어서는 그 씨앗이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이 등불 비유에 있어서는 등불이 복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 거룩한 진리의 등불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는 것인가를 등불을 비유로 하여 매우 세밀하게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먼저는 등불은 반드시 비춰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디까지나 빛의 존재는 빛을 비추는데 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발하는 등불은 주위를 두루 밝힐 수 있게 언제나 높이 두어야지 말 아래에나 침상 밑에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빛이 있음으로 방향감각을 찾고 사물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가치규정이 됩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하더라도 가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기 위해서도 이것 저것 몸치장을 하고 여성들은 얼굴 화장에 많은 신경 쓰며 단장을 했습니다마는 한순간 불이 꺼지면 그 모두가 다 무효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빛은 가치의 기준이 됩니다.

나아가서 빛은 곧 생명입니다. 빛이 있음으로 생명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빛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빛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러한 빛을 두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깊은 뜻이 있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 복음이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빛이 있어서 생명이 있고 가치 기준이 있으며 삶의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 빛은 반드시 전해져야 합니다. 이 말은 이 빛 자체가 본성적으로 전파되어지도록 되어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때문에 전도도 그렇게 생각됩니다. 흔히들 부흥회나 어떤 특별한 모임이 있을 때에 보면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전도합시다'하고서는 전도 운동을 벌이는 경우가 있습니다마는 사실 그러한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복음 자체가 전도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내가 복음의 참뜻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다면 전도하지 말라고 하여도 전도하게 되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물론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전도하지 못함은 아직도 복음을 바로받아 들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라는 말 한마디 못하는 벙어리 교인은 교인이 아닙니다. 복음은 빛과 같아서 반드시 많은 사람을 향해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빛의 본성임과 동시에 빛에 대한 우리의 사명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빛은 숨겨질 수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등불을 가져왔으면 높이 등경 위에 두는 것이지 곡식을 되는 말속이나 평상 아래에 두어 주위를 여전히 어둡게 하려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이라는 것은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마는 옛날 우리 나라에서도 곡식이나 물의 양을 무게가 아닌 부피로 계산하던 시절에 가정마다 가지고 있던 하나의 계랑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상당히 큰 릇과도 같은 것으로 대체로 둥글게 된 원통모양과 사각으로 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속에 등불을 넣어둔다면, 즉 바꾸어 말하면 등불을 말로 덮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는 것인데 여기에서 이 평상이란 사실은 침상, 곧 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둘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하시는 것은 반드시 높이 두어야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무엇으로도 숨겨질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복음은 반드시 전파되어져야하며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빛이 그러하듯이 복음은 자유로운 것입니다. 따라서 공산주의 세계에서나 자본주의 세계, 미개한 사회이거나 문명사회 도시이거나 농촌을 가리지 않고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져야 하고 그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말과 평상을 두고 그 상징적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단순히 일상 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용구이기에 그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평상'이라는 것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두 가지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라고 하는 것은 거래, 곧 장사를 할 때 사용하는 하나의 계량기입니다. 그 때문에 한말 두말하면서 말로 되어 헤아린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속지 않기 위하여, 더 안 주기 위하여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장사를 의미하는 상업의 상징이요 사업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물질적인 사업이나 기업 행위에 의해서도 복음 전파가 저해를 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사업 때문에, 혹은 장사하느라, 농사일 때문에 전도를 못한다는 말은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절대로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말로 덮어 숨겨둘 수는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높은 데 있으면서 멀리, 넓게, 두루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상'이란 영어로 베드(bed)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름 아닌 침상, 혹은 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침상은 휴식을 말하는 것이요, 동시에 향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향락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여러 가지로 말할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 중에 이 침상의 용도를 보면 간혹 영화 장면 속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식탁의 의자와도 같이 쓰여져서 아예 비스듬히 누워서 뒹굴면서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침상은 침상임과 동시에 식탁의 의자 노릇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2천년 전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이것은 육체를 위한 향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역사적인 문제아가 있으니 그 하나는 칼 막스요 또 하나는 프로이드라고 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는 유물주의의 대표요 하나는 향락주의, 섹스(Sex)의 대표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이스라엘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튼 복음은 어떤 유물론적인 것으로도 그리고 어떤 향락적인 것으로도 결코 방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경우에도 이 복음의 등불은 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언제나 만물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22절 말씀을 보면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표현 그대로 보아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를 말씀입니다. 이는 직역을 해 놓았기 때문인데 누가복음 8 : 17에는 조금 달리 표현하여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감추인 것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원문을 그대로 직역을 해 놓았기 때문에 그냥 잠깐 보아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마는 직역한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빈센트(Vincent)라는 주석가는 이를 "숨은 것은 드러내게 하려 함이요, 감추인 것은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번역하고있습니다. 아무튼 헬라 원문대로 살펴보면 우리 성서에 기록된 직역이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미상에 있어서 먼저 잠시 숨겨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숨겨진 때가 있는 것은 숨겨지기 위한 숨겨짐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 잠시 숨겨졌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일이 어떤 때에는 활발하고 거침없이 전파되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잠깐이고 숨겨지는 듯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한동안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어려운 시련이 몰아쳐 오게되면 이제는 교회가 무너지려는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교회가 핍박을 당하게되면 질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비해 자유로울 때에는 양적인 성장을 합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당한다고 하여 복음 전파가 절대 중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잠시 잠깐 숨겨지는 듯이 보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잘못된 이단 사상이나 신학적으로 보아 자유주의적인 성향에 의해 복음 전파가 크게 방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대로 얼마 동안 계속 가게 되면 과연 교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염려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을 거기에서 중단하시지 않습니다. 잠깐 멈추는 것 같고, 숨어 묻히는 것 같지만 또 다시 깊은 속에서부터 여전히 솟아오릅니다. 그러기에 드러내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오히려 드러내기 위하여 잠깐 숨겨지는 복음! 그리고 더큰 복음적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잠깐 숨겨진 듯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의 교회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서, 특별히 31운동을 계기로 교회가 당한 수난은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불을 지르는가하면, 남녀를 불문하고 끌고 가 갖은 고문을 다하며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이제 교회는 없어지려나 보다 하지만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크게 부흥이 됩니다. 그러기에 한국 교회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31운동은 한국 교회의 부흥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합니다.

잠간은 숨겨졌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기 위한 숨겨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은 절대로 함부러 의역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먼저 직역을 하고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대로를 놓고 깊이 생각해 나가면 분명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어진 말씀이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모를 것 같지만 잠시 잠깐 숨겨지나 결국 드러내기 위하여 숨겨지는 것이라고 하는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선교의 방향을, 복음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등불을 보면서 가져야할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면 두말 할 나위 없이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받아들여야 할것입니다마는 문제는 진공 상태란 아무 것에게나 흡수력이 강합니다. 따라서 어둠이 짙고 보면 아무런 불빛이라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의 심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오히려 이러한 때가 더욱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찾는 강한 욕구로 인해 오히려 비 진리에 빠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보면 보다 잘 믿어 보겠다는 간절한 마음과 열렬함 때문에 오히려 가지 않았어야 할 곳을 가게되고, 배워서는 안될 것을 배웠으며, 듣지 말았어야 할 것을 들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을 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경우를 염려하여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는 것입니다.

듣는 것을 사모하되 참으로 잘 가려서 들어야하겠다는 말입니다. 반드시바른 빛을 찾기 위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참 진리에로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라고 한 참으로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헤아린다는 것으로 직역을 했기 때문에 이해가 쉽게 되는 것 같지가않습니다. 이를 위해 요한계시록 22:18-19에 기록된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이 말씀은 간단히 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추호도 가감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홍해를 건너갔다고 하면 건너 간 줄로 믿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면 하신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 앞에서 무슨 엉뚱한 생각으로 추리를 하며 딴소리 할 것이 아닙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고 하면 뜬 것으로 알 것이지 아마도 그 사람이 진짜 장님이 아니었겠지라는 쓸데없는 소리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헤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헬라 원문에 보면 '메트로 메트레이테' 라고 하여 잰다고 하는 뜻의 메트로와 한 말 두 말하며 액체나 곡식을 되는 말인 '메트레이테'의 두 단어가 나란히 하여 문장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로 말하면 한 자 두 자, 말로 한다면 한 말 두 말 하면서 이렇게 재고 헤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뜻은 저울이라도 상관이 없겠습니다마는 너희가 되는 말로서 너희도 됨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말을 될 때 흔들어서 가득 가득 넘치게, 후하게 되면 너희가 복을 받을 때에도 후하게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전적으로 받아들이면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저렇게 헤아려 이것은 비과학적이고 저것은 비논리적이라는 등 자꾸만 쪼개고 잘라 놓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도 그만큼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너희가 되는 되로서 너희가 됨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재는 자로서 너희도 잼을 당할 것이다! 너희가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는 언제나 전적으로 아멘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 하나님의 축복도 전적으로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려들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재앙을 가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은 시편 81:10에 기록된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하신 대로 말씀을 향하여, 은혜를 향하여, 들려 주시는 대로 다 받겠습니다 하고 넓게 넓게 열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그 열려진만큼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을 조그맣게 열고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 문을 도무지 열어 놓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함께 찬송을 불러야하는 시간임에도 겨우 한 줄을 부르고는 나머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이면 앞에서 바로 생각하기를 저 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그 마음문을 반밖에 열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자세에 있어서는 마치 대문을 활짝 열어 놓는 것과 같이 마음 문을 활짝 열어젖힌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이렇게 저렇게 비판하면서 마음 문을 좁히고 헤아리고만 있으니 그러는 동안에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어떤 때에 보면은 신학을 하지 않은 분인데도 신학을 논하면서 기독교적인 글을 많이 쓰는 분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한번은 어느 대학 교수님에게 한마디 하기를 "교수님, 이것은 우리 분야인데 철학을 하신 교수님으로서는 이 분야에 대해서는 안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많은 생각을 하셨겠지만 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우리 편에서 볼 때에는 아무래도 좋지가 않습니다."라고 하였더니 "그렇지요?"하면서 앞으로는 아무래도 그 분야에 대해서는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아들이 목사까지 되었는데도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몇 번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그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그 분의 말인즉 "내가 참 못됐습니다. 책도 조금 읽고, 신학책도 가끔 읽어보고, 철학도 조금 했다 해서 교회에 와서 딱 앉으면 목사님이 뭐라고 하시면, 아 그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음! 그거 아닌데, 소크라테스! 그 소크라테스는 내가 더 잘 아는데 그 사람은 그런 사람 아닌데"하고서는 자꾸만 이런 생각이 나서 도무지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말이 "나 이것 변변치 않은 공부 좀 한 것 때문에 예수를 똑바로 믿기를 못합니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 자체가 참 겸손한 말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마음이 활짝 열려지지 않고는 100%의 긍정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결코 자로 잴 것이 아닙니다. 모두를 그대로 믿어둘 것입니다. 확실하게 깨달아지거든 깨닫는 대로 믿고, 그렇지 않거든 아직도 내가 부족해서 그런 줄 알고 언젠가는 깨달아지리라는 생각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하거나 부인하며 비판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이 다알 수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니! 이제 전적으로 입을 열고 받으라, 그리고 충성하라! 그럴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전적인 축복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판적으로 감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감해질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기록된 말씀대로저주를 더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활짝 열린 상태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언제나 크고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깨끗하고 큰 그릇에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것입니다. 있는 자는 더 받으리라! 받고 더 크게 열면 또 더 주시고, 보다 더 크게 열면 보다 더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큰그릇을 준비하면 더 주십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이 계시의 말씀, 생명의 빛에 대해서는 언제나 활짝 열린 상태로 "말씀하옵소서, 온전히 따르겠습니다."하는 자세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8장에서 한 백부장이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는 대단한 칭찬을 듣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렇게 칭찬을 들은 백부장의 믿음이란'주님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대로 하겠습니다'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겠습니다. 내 손이 모자라면 부하들을 동원하겠습니다. 그저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났겠삽나이다"이 얼마나 환히 열려진 마음입니까?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기이해 여기실 정도로 기뻐하시면서 온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며 크게 칭찬을 하시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현재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계속 나타납니다. 생명의 빛은 항상 밝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문이 이 빛을 행하여 열려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찬란한 빛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나의 눈을 감고, 나의 귀를 막고 있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나 그 은총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의 문이 닫혀지지 않게 함은 물론 언제나 활짝 열린 상태에서 받아들임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모든 은혜를 크게 누릴 수 있는 복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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