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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권세(마가복음 1장 21~28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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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권세(마가복음 12128)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본문 말씀에서는 한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온전하고 깨끗한 정신의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특별히 말씀의 권세가 나타나 있어, 이번에는 '말씀의 권세'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묻고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귀신을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까? 내 눈으로 보았어야 귀신을 믿지, 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마는 확실히 귀신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있다고 말씀하셨고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귀신도 믿어야 합니다.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귀신이 사람을 홀리고 장난치는 데에 제일 성공하는 때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도록 만드는 때라고 하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분명히 귀신이 있고 귀신의 유혹도 있는데 이 악령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귀신이 얼마든지 쉽게 넘어뜨릴 수 있고 장난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내가 악령의 역사를 믿지 않는다면 벌써 귀신에 홀려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때가 '내가 성공했다. 저런 사람은 쉽게 넘어뜨릴 수 있다'고 귀신이 쾌재를 부를 수 있는 때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어떠하든,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귀신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내게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고 하여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드는 것은 다시 한번 시험에 넘어지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특별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복음서를 읽어보십시오. 온통 귀신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부정한다면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이요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지요. 벌써 귀신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 내가 실증을 얻었든 못 얻었든, 나와 관계가 있었든 없었든 일단은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몇 종류의 귀신들을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대로만 생각해봅시다. 이 시간에 성경 외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귀신학이나 귀신론을 말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과 관계된 귀신 이야기만 합시다. 우선 23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누가복음 721절에서는 '악귀' 들린 자가 나옵니다. 악한 귀신, 악귀가 있습니다. 악하다고 한 것은 사람을 악한 길로 빠뜨리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722절에서는 단순하게 '귀신'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귀신과 우리 사람과의 관계 역시 몇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단순히 귀신들린 사람이 있습니다. 귀신의 장난, 귀신의 작용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사람입니다. 제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합니다. 바로 정신이상자입니다. 정신병에 걸린 것과 귀신들린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것이 우리 교역자들로서는 제일 어려운 점입니다. 귀신들렸다는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가만히 보니 단순한 정신병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정신병이 들었다고 하는데 보통 정신병이 아닙니다. 정신병원에서 고칠 성격이 못되는 병이 들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교역자들은 이런 경우를 곧잘 만납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강의할 때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는, 목사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지 못하면 목사 사표를 내야 한다, 기도를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쫓아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많습니다. 지금은 부목사님, 전도사님, 여러 교역자분들과 함께 수고하고 있지만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에는 저 혼자서 목회했었습니다. 그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멀쩡한 사람이 귀신들렸습니다. 그것도 몇 사람이 잇달아 걸립니다. 그 귀신을 내쫓는 시간에 제가 하도 흥미로워서 녹음을 해두었습니다. 귀신과 앉아서 나누는 이야기를 녹음하였는데 그것 참 신기롭습니다. 귀신을 내쫓고 나서 본정신으로 돌아온 사람에게 이것을 들려주면 그 사람에게도 큰 은혜가 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은혜가 됩니다. 또한 교역자의 값이 올라갑니다. 권세가 생깁니다. 당시에 교회에 계셨던 분들은 잘 압니다.

그 때에 세 건을 취급했었는데, 일년에 몇 번이고 계속 일어납니다. 지금도 계속 있는데 제가 직접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교역자들이 충분히 다 할 수 있는 일이고 여러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닙니다마는 교역자들이 못할 때에는 문제가 됩니다.

영적 권세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단순히 귀신들린 것과 정신병을 식별해야 되는데 그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정신병과 귀신들린 것은 별도입니다.

당시에 있었던 일 중에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어느 여학생이 정신이 돌았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4개월 있었는데도 안되고, 정신병원에 가서 4개월 있었는데도 소용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제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 아버지가 상당한 분입니다.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마는 어떡하겠느냐고 통사정을 합니다. 부모 되는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지금 같으면 거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받아들이고는 그 대신에 조건을 걸었습니다.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겠습니까?"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면 매일 새벽기도회에 데리고 나오십시오. 그것뿐이오." 다음날 새벽기도회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딸아이를 앉혀놓고 예배를 봅니다. 예배를 마친 다음에 강대상 앞으로 오게 하여 잠깐, 5분 동안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 끝났습니까?"하고 묻습니다. "내일 또 오십시오." 이렇게 왔다갔다하기를 다섯 번 하였더니 정신이 깨끗해졌습니다. 그제서야 지난날에 귀신이 자기를 괴롭힐 때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제가 그것을 녹음해놓았는데 희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건강을 찾은 뒤 그 여학생은 부모님이 뭐라고 해도 교역자와 결혼하겠다고 고집하여 지금 목사 사모가 되어 있습니다. 그 여학생은 단순하게 귀신들렸던 것입니다.

둘째로, 귀신들린 사건으로 말미암아 병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귀신이 장난을 하는 것입니다. 귀신 때문에 병이 걸립니다. 어떤 사람은 복통을 하고 어떤 사람은 눈이 어두워집니다. 약을 먹어 고칠 병이 아닙니다. 귀신 때문에 병이 든 것입니다.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몸이 병들게 합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보면 벙어리도 되고, 귀머거리도 되고, 마구 쓰러지는가 하면 경련을 일으키는 일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귀신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몸에까지 병이 드는 그런 일이 성경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917절에 '벙어리귀신 들린 내 아들'25절에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이 그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을 가지고 못되게 노는 귀신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불 속에도 집어넣고 물 속에도 집어넣습니다. 발악을 하게 하고 자기 몸을 심히 상하게 만듭니다(9 : 39). 이렇게 못된 장난을 하는 귀신이 있음을 성경은 말씀해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니요 귀머거리, 장님이 된 것도 아닙니다. 몸이 뒤틀리며 거품 물고 쓰러지는 것도 아니요 헛소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짱한 상태로 활동하는 고급 귀신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예수를 못 믿게 만드는 귀신입니다.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절망하게 만들어 자살을 유도하고 신앙을 뒤흔듭니다. 대표적인 예가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들어갔던 귀신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6 : 24)." 그는 악령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악령은 바로 사단입니다. 오늘도 보면,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가 그만 사단의 시험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마귀가 쓰인 사람은 눈을 보면 압니다. 교회에 나와서 강대상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비스듬히 사선으로 봅니다. 또 잠깐동안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합니다. 가려운 데가 많은지 온몸을 비틀고 긁어댑니다. 다 도깨비놀음, 귀신놀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본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눈이 풀어져 있습니다. 그 눈으로는 안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를 시험했던 것과 같은 악한 영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 악령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의 말, 행동, 얼굴, 생각, 모든 행동거지가 그 모양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다시 말하면 끝까지 회개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되는데 이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악령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어느 사이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귀신들린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를 다시 봅시다. 앞으로 계속하여 말씀드리게 되겠습니다마는 본문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말씀과의 관계를 말하자는 것이 본문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난 사람들이 무슨 말씀을 들었는가 하는 이야기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그 말씀에 대한 응답은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느꼈느냐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 말씀을 듣고 나서 교회를 나갈 때에 하는 인사가 사람들마다 전부 다릅니다. 옛날에는 흔히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하고 말했었는데 요즘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느 교회의 부흥회에 갔더니 "불이 뜨겁게 옵니다" "은혜가 많았습니다"라고 하기도 합디다마는 가까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면서 "목사님, 많이 깨달았습니다"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특별히 많이 받는 인사는 "목사님, 설교가 참 좋았어요"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좋은 이야기 듣고 갑니다" 하기도 합니다. 아주 기가 찬 인사도 한번 받아보았습니다. "목사님, 욕보셨어요!" 수고했다는 말을 욕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사의 종류도 가지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말씀에 대한 응답이 반드시 그 내용을 기억해야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까운 예로 나이 많으신 분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에 은혜 받았다며 기뻐서 얼굴이 환합니다. "무슨 말씀을 들었기에 얼굴이 밝습니까?" "가만 있자, 뭘 들었더라……?" 모릅니다.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꼭 알아야만 응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22절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라고 말씀합니다. 뭇 사람이 깜짝 놀랐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보통으로 듣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들어도 그 마음속에 벅찬 감격이 왔습니다. 화끈하고 뜨거운 무엇이 왔는데 지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권세-'에쿠시아' 참 멋있는 말입니다. '에크''로부터(out of)'라는 말이고, '우시아''본질'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질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무엇인가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 그 생명적인 존재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한 시간 동안인데 알아들으면 얼마나 알아듣겠습니까? 깨달으면 얼마나 깨닫고 기억하면 얼마나 기억하겠습니까? 그러나 회당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여기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저들은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권능에 대한 응답, 반응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달리 무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마는 보통 이런 경우에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심리학적인 용어로는 큰 감격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영적인 감격-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지식을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좋은 이야기, 매력 있는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감격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을 낳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말씀을 능력으로 받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지식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의심과 반항과 불 신앙과 증오, 이런 것들을 다 때려부수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것을 'in breaking'이라고 말합니다. 만든 용어입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해본다면 '파입(破入)'입니다. 우리 마음을 때려부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반항하려고 해도 반항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사이에 나의 마음이 완전히 깨지면서 벌써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렇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설교요 권능입니다. 설교 시간은 강의 시간이 아닙니다. 말을 잘해서 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재미있었다는 반응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저보고 그럽디다. "매우 웅변적이십니다." 그 사람 좋으라고 제가 웅변하고 있습니까? 중요한 문제는 영적 감격입니다.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필요할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이 시간에는 마음을 열고, 마음을 때려부수면서 말씀의 능력이 내 안에 확 들어와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내 속에 있는 의심이니 증오니, 막혔던 문제들이 순식간에 다 녹아버립니다. 얼음이 녹듯이 녹아버리고 불 태운 듯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에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신비로운 기쁨과 그 능력만이 남아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만이 내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이렇게 만드는 것이 설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중생케 하고 영을 변화시키고 재창조하는 역사였습니다. 저들이 이것을 완전하게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얼마간을 경험하면서 놀라고 감격해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상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표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병 고치는 일이요 귀신을 내쫓는 일입니다. 여러분, 능력으로서의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요 철학도 아니요 교훈도 아니요 교리도 아니요 어떤 이론도 아닙니다. 격언도 아니요 생활 철학도 아니요 지혜도 아닙니다. 그대로가 능력이며 힘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 : 18)"-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능력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 1 : 5)"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씀을 능력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능력으로서의 말씀은 우리 마음 안에 와서 벅찬 영적인 감격을 줄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나의 영, 나의 정신, 나의 혼이 변화됩니다.

좀더 나아가서 내 몸까지 변화되기에 병이 낫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내적 변화에 대한 상징입니다. 속이 뒤집히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몹시도 중한 병에 걸렸던 사랑이 낫게 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번 여전도회에서 모셔온 저 주 안의 목사님도 그것을 간증하시지 않았습니까? 간암 환자로서 완전히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인데 침대머리를 붙들고는 죽기살기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동시에 온몸이 불덩이가 되었고 그 영적인 변화의 상징으로 하혈을 합니다. 결국은 병이 나았습니다. 새로워진 건강한 몸으로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병이 나았다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말씀의 능력이 그 영을 완전히 사로잡는 순간에 몸의 변화를 일으키고 또한 인간관계에까지 변화를 일으킵니다. 좋지 않았던 관계가 화해하는 관계, 사랑하는 관계가 됩니다. 그리하여 영계에까지 신비로운 변화를 일으킵니다.

영계에까지 나타난 변화가 바로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영계에까지 나타나게 될 때에 어떻게 되는가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순간, 말씀을 전하시는 자리에는 환자가 존재하지를 못했습니다. 병이 꼭 물러가야만 했고, 모든 의심이 사라져야만 했고, 모든 미워하는 마음이 변화해야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귀신들린 사람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습니다. 귀신이라는 것은 이중인격을 가진지라 아무 것도 아닌 척하고 앉아 있기를 잘합니다. 두 얼굴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도 어떤 때는 조용히 숨어 있습니다. 이 귀신이 사람을 비밀스레 살살 유혹하여 한 사람을 타락시키기도 하고, 인간관계를 불화(不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장난을 하여 교회를 혼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 순간에 귀신은 숨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본문의 중요한 요지입니다.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 속에서 한 사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왜 소리를 지릅니까?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아니 지르고는 못 배깁니다.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정체를 숨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노출되고야 맙니다. 여기에 큰 뜻이 있습니다.

절대로 숨어 있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의 본체를 드러내고야 만다는 말입니다. 그 꼬리가 드러나고 얼굴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신령한 교회에 거짓된 자가 숨어 있을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노출시키는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가정에 더러운 귀신이 숨어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곳에 이 더러운 귀신이 숨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순간 자기 본체를 드러내면서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빛 앞에서 어두움이 노출되고 참된 진리 앞에서 거짓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반드시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심판적인 요소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 교회를 한 30년 간 섬기면서 보니 가만히 있으면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었는데 그만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소란을 피우다가 결국은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의 장면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끝나는 순간에 이 사람이 왜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까? 왜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것입니까? 그런가하면 귀신은 고백을 합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24)"라고 합니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상관이 있습니다. 빛 안에 어두움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빛과 어두움이 어떻게 상관 없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순간에 더러운 귀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것은 상관치 말아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견딜 수가 없소. 이러다가 내가 쫓겨나겠소"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절대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악령의 역사는 상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이들은 쫓겨나야만 합니다. 절대로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에 귀신의 지식에 대해서 나타나 있습니다. 귀신이 아주 좋은 말을 한 마디 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거룩한 자'라는 것은 메시야를 뜻합니다. 이렇게 고상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베드로도 잘 모르는 것이고 다른 제자들은 더욱 모르는 이야기를 이 귀신이 하고 있습니다. 귀신이 유식합니다.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절에 보면 퍽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도 압니다. 귀신도 믿고 떱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 되고 맙니다. 특별히 사단은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도 귀신은 꼭 이렇게 말을 걸어옵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루터가 받았던 시험도 이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하려고 애쓰는 루터에게 사단은 "너는 죄인이다! 너 같은 죄인이 무슨 종교개혁을 한다는 것이냐?"하고 자꾸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루터는 대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는 나를 구속하셨다." Nevertheless,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악령은 언제나 우리를 정죄합니다.

귀신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고,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신다"-여기까지는 마귀가 하는 소리입니다. 이에 반하여 성령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우리를 협박 공갈하여 우리로 하여금 고개를 못들게 하고, 지옥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도록 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흔드는 것이 바로 악령의 역사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귀신은 잘 압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우리를 심판하시고 죄인을 벌하시는 것을 압니다. 또한 우리를 협박합니다. 이것이 귀신의 고백이요 귀신의 지식입니다. 물론 그 고백 자체는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시키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협박을 하고 더욱 죄를 짓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우리에게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완악하고 낙심하고 그리고 지옥의 백성이 될 수밖에 없도록 유혹하는 것이 귀신의 본능입니다. 귀신이 주로 하는 일이 이것입니다. 분명히 귀신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 나름의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주시는 말씀을 다시 한번 봅시다. 지식이 있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성경을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야 됩니다. 믿었습니까? 믿되 또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됩니다. 그래야 믿음인 것입니다.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믿고 무서워 떤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이 머리에서만 맴돌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계시를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잘못된 지식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귀신을 꾸짖습니다. 꾸짖는다는 말은 명령한다는 말입니다. 꾸짖다, '에피티마오'라는 말은 책망하면서 명령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 가지 재미있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보고 나가라고 꾸짖으시는가 하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4 : 39)." 또한 베드로의 마음속에 사단이 작용하여 흔들리고 있을 때에도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다음에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를 지게 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만류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간할 때 예수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8 : 33)."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해서 가차없이 사단이라고 부르십니다. 사단에 쓰인 사람이 사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누구로부터 '사단'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무척 섭섭해합니다마는 사단에 씌면 사단인 것입니다. 사단이 따로 없습니다.

사랑하는 베드로를 향해서도 "사단아"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우리 주제에 어찌 감히 아니라 할 수 있습니까? 그 누구도 사단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부인하는 순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인하는 그 순간에 바로 사단이 됩니다.

사랑하는 베드로를 향해서도 "사단아 물러가라"하셨습니다. "에피티마오!" 꾸짖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꾸짖는다'라는 말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그 개념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바다를 꾸짖고 귀신을 꾸짖고, 귀신에게 시험받는 자를 꾸짖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책망하는 말씀이요 심판하는 말씀이요 판단 중지령을 내리는 말씀입니다.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비타협적인 말씀입니다. 사단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나가주련? 얼마를 받고 나가겠니?" 따위의 이야기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단은 가차없이 대해야 합니다. 절대 용서 없이 대해야 합니다. 일말의 자비도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자비라고 해서 아무 때나 베푸는 것으로 아십니까? 아닙니다. 자비도 베푸는 때가 있습니다. 마귀에게도 자비를 베풀 생각입니까? 잘 모셔서 될 일이 없습니다.

소위 샤머니즘(shamanism)에서는 귀신을 잘 대접하여 보냅니다. 그것이 무꾸리이고 푸닥거리입니다. 음식을 차려놓고 잡귀를 대접하여 내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귀신을 내보내는 방법은 언제나 꾸짖는 것입니다. 단 한푼도 주지 않습니다. 단 한마디의 타협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냉정하게 '나가라'하면 끝납니다. 거기다 대고 뭐 조금 타협해보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가 무수합니다. 인심이 너무 좋아서 귀신에게까지 인심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덕을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도대체 어디다 대고 사랑을 운운합니까? 귀신에 쓰인 사람에게도 사랑이 있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데에 반대되는 일을 놓고 무슨 타협을 하자는 것입니까? 그 자체가 사단적입니다.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점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대개 그러다가 다칩니다. 언제나 똑바로 꾸짖는 자세가 있어야 됩니다. 악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꾸짖어야 됩니다. 한치의 타협도 없습니다. 전혀 흥정을 해서는 안됩니다. 한발도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그대로 깨끗하게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대단하십니다. 사랑하는 제자를 향해서 '사단아'라고 꾸짖으시니 말입니다. 이처럼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꾸짖어서 깨끗하게 잘라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다음에 "잠잠하라"라고 하십니다. 말을 못하게 하십니다. 언권(言權)을 봉쇄하십니다. 잠잠하라는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악령은 자꾸만 말을 하려고 듭니다. 원래 도깨비 들린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악령이 쓰인 사람이 변명이 많습니다. 이러쿵저러쿵 무슨 변명이 그리 많은지 모릅니다. 갖은 재주를 다 부리고 별소리를 다 하고 있는 귀신에게 '언권 중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말 같지 않은 말은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괜히 따라다니면서 이러네 저러네 하다가 빠져듭니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자꾸 듣습니다. 일단 들어두면 기억에 남게 되고, 기억에 남으면 내 마음이 흐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말이라고 하면 아예 듣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왜 앉아 있는 것입니까? 툭툭 털고 일어나야지요. 왜 거기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왜 호기심이 발동합니까? 모두가 귀신에 빠지는 것입니다. 악령에 빠지는 일입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는 안됩니다. 잠잠하라-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사람을 유혹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뱀이 다섯 마디의 말을 하는데 네 마디는 옳은 말이고 한 마디는 거짓말입니다. 옳은 말을 섞어가면서 거짓말을 하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지당한 말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옳은 말을 하는 체하다가 딱 한 마디의 거짓말을 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 : 4)." 거짓말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에서도 귀신이 옳은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악마의 말이 아무리 옳고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그 언권을 봉쇄해야 됩니다. 악마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은 말을 해나가다가도 어느 순간 훌렁 뒤집어놓기 때문입니다. 악령의 말이라면 무조건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 말도 듣지 마십시오. 좋은 말 나쁜 말 가려 들으면 될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이단 사상에도 좋은 이야기가 많더군요. 좋은 이야기만 골라서 들으면 되지 않을까요?"-쓸데없는 소리입니다. 귀기울이다가 그만 훌렁 넘어갑니다. 항상 나쁜 말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악한 사람의 이야기라도 일리가 있는 법입니다. 다 좋은 말이 있습니다. 요사이 무슨 애국이니 통일이니 통합이니 하는 이야기들로 시끄럽습니다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말은 독재자가다 합니다. 독재자이면서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좋은 말을 하다가 딱 한마디만 뒤집어놓습니다.

절대 악으로부터 좇아난다고 할 때에는 언권을 봉쇄해야 합니다.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27)." 놀라운 일입니다. 말씀의 능력에 이 악령도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권세를 우리가 보았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권세도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01절을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귀신을 내쫓는 권세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악령을 향하여 명령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높은 권세를 행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비겁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또한 타협해서도 안됩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사는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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