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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 비유(마태복음 21:28-32)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이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 아들의 비유는 종말적인 비유요 심판의 선언이 있는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대단히 심각한 최종 통첩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함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한편으로는 복음의 기록이요, 한편으로는 심판적 기록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에는 언제나 심판과 복음, 구원과 심판이 함께 하는 동반자적 입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본문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배경의 대략을 살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한 그 사건 이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거기서 맨 먼저 하신 일이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한 것입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전이 왜 이렇게 더러워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본래부터 그렇게 나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하면 자칫 몇천, 몇만이 들어가는 큰 건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를 않습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전의 그 건물 자체는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구조에 성소와 지성소가 나뉘이고 그 지성소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고 성소에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촛대가 있으며 일반 회중은 뜰에 서 있는 것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이 뜰에 서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현대 교인들은 너무 편한 자세로 예배 드리려고 해서 걱정입니다. 아무튼 예루살렘 성전은 수만 명씩 뜰에 서서 제사와 제물을 드리게 되어있는데 여기에 참석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제물을 필요로 하게됩니다. 그래서 손수 키운 것을 가져오기도 하고 사서 오기도 하는데, 이것을 제사장이 검사하여 제사에 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가려내는 것입니다.
이 때에 점이나 흠이 있어 불합격된 제물은 다시 시장까지 나가 팔아버리고 거기에 돈을 더 보태어 좋은 것으로 사와야 합니다. 그러고도 불합격하면 또 다시 가지고 가야합니다. 이렇게 되다보면 아시다시피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까지 장사꾼이 오게 마련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는 아예 성전 문 밖에 까지 와서 양의 우리를 만들어놓고 검사에 불합격되는 것은 싸게 사들이고 좋은 것은 비싸게 팔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조금씩 안으로 밀고와서 이제는 성전 뜰, 예배당 안에까지 들어왔단 말입니다. 이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점점 많은 장사꾼으로 붐비게되고 소나 양, 비둘기들을 사고 팔며 돈을 바꾸느라 장터가 되다시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될 때까지 다 알면서도 왜 묵인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이도 요즈음 표현으로 말하면 커미션(commission)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이 그 이윤의 얼마를 취하고 눈을 감아주었다는 말입니다. 이래서는 안되는 것이며 잘못된 일인줄 알면서도 짐짓 이렇게 지내는 것이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단 말입니다. 마치 당연지사처럼 벌여온 터인지라 이제는 누구도 나가라고 할 수가 없게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33세의 젊은이인 바닷가 갈릴리의 청년 예수가 나타나 장사하는 그 현장을 뒤엎고 모조리 내어쫓는 것입니다. 당시를 상상해본다면 돈 상자가 굴러 떨어지는가 하면 비둘기가 푸드득거리며 날아가고 소와 양도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는 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를 몰아내시면서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느냐"고 호통을 치십니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진정으로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은 무척 통쾌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이제야 무엇인가 되는가보다!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분명하고 이제야 그 영광이 나타나는구나! 하며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손해 많이 보았다고 하는 섭섭함과 좋은 장터를 빼앗겼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그래도 양심의 가책은 있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제일 어려운 사람은 다름 아닌 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은 해서는 안될 일을 해왔으며, 용납해서는 안될 일을 돈을 받으며 묵인해온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의 심판이 있는 것이며 한 젊은 청년에 의한 불같은 책망에도 피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와 신분을 앞세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백성들 보는 앞에서 이러한 일을 겪었으니 그 창피함이 얼마이며 체면은 또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의 소견에 체면을 챙기기 위해서 무엇인가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기껏 의논한 끝에 예수님께 나아와서 하는 말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하고 묻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냐는 말입니다.
이 때에 질문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시면서 되돌리는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 질문에 대답하면 나도 하겠다는 전제 하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을 받은 저들은 다시 의논을 하고 생각을 모읍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런데 왜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많은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분명히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고 있는데 돌을 던질터이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지 않는가.
그러니 제일 편리한 말로 "모른다"고 하자는 것입니다. 알고도 모르는 것이지만 예수님께 대답하기를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나도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너희들도 알면서 말하지 않으니 나도 알지만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진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 누구의 말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돼지에게 진주를 던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피하여 오늘 본문에는 두 아들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아들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예, 가겠습니다" 해놓고는 뒤에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 안가겠습니다" 해놓고는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이 두 아들 중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아들은 누구이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이십니다. 그랬더니 하나같이 대답하기를 "그야 말로 둘째 아들이니이다"하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강렬한 표현으로 본론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해석까지 다된 직선적인 말씀이니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다 알아듣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윌리엄 바클레이가 제시한 바와 같이 두 아들이 다 좋지를 않은데 그래도 조금 더 좋은 아들을 묻고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시키면 "예" 하고 적당히 대답해 놓고는 안 하는 아들, 순간 순간 적당히 대처하는 처세적이고 기회주의적 사고와 행동, 외식주의와 형식적인 종교생활, 여기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저 믿는다는 이름뿐 믿음의 행위도 없고 신앙인의 기쁨도 갖지 못한 채 순간 순간 종교 의식에 적당히 맞추어나갈 뿐입니다. 그래서 찬송 부를 때에 찬송 부르고 기도할 때에 기도하며, 바쁘면 그만두고 한가하면 교회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 사람이 오늘 본문의 맏아들입니다. 그런가하면 둘째 아들은 역설적입니다. 안가겠다는 대답부터 해버립니다. 이런 아들을 좋은 아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요즈음 현대인들의 생리가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라는 일은 일부러 하지 않고 무슨 일에나 일단은 제동을 걸고보는 인격이 있습니다.
만사에 순응이란 없으며 언제나 역설적이고 한 번씩은 튕겨 보아야 자기 존재가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라는 대로하면 내 존재가 죽는 것 같고 멸시 당하는 것 같으며, 노예가 되고 무능한 것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의도적인 반대도 해야하고, 돌아서서는 다시는 얼굴도 대하지 않을 것처럼 비판을 하며 그래야 자기 정체가 돋보여 영웅시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풍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곧잘 들어온 청개구리의 이야기를 알고있습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보편화된 우화이기에 우리는 빗나가는 어린이나 심술꾸러기를 보면 "청개구리같은 녀석" 또는 "청개구리 심보"라는 표현을 쓰게됩니다. 사실은 무슨 일에나 반대 아니면 좋게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은 굉장한 열등 의식의 발로요 심리적 병리 상태입니다. 첫 말에 "예" 할 수 없는 역설적이고 반항적인 마음과 성격은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좋았다는 것은 그가 뒤에 뉘우치고 갔다는 점입니다. 뒤늦게라도 뉘우치고 포도원에 들어가 일했다는 그 사실이 귀하고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시킬 때에 "예" 하고 그대로 가는 아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아들을 등장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이 세상에 그러한 아들은 없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예" 하고 간 사람은 없으며, 가겠다고 하고 가지 않은 사람과 안가겠다 해놓고 뒤에 가는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러나 저러나 대단히 유감스러운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할 때 첫말에 "예, 가겠습니다"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가겠다고 적당하게 대답은 해놓고 가지는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안가겠다는 것으로 일단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후에 뒤늦게 뉘우치고 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어슬렁거리며 뒤늦게 갔으니 제대로 일을 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라고 물으십니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동생이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가 아비를 기쁘게 하였느뇨?"라고 물으신다면 여기에는 둘 중 누구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다만 뒤늦게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을 뿐입니다.
욕심 같아서는 정말 좋은 아들이 있어서 처음부터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그 뜻대로 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습니다마는 이미 그런 아들은 없었기에 아버지의 뜻대로 한 아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둘째 아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응용하시고 밝히신 대로 세리와 창기입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은 제사장과 장로,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 그 외식적인 제사장들, 근사하게 예배드리며 찬송하고 기도하며 제사 드리는 일이야 다 잘합니다. "예, 하겠습니다"라며 "아멘, 할렐루야" 소리도 큽니다. 그런데 이래놓고도 뒤에는 딴 소리 하니 그게 문제란 말입니다. 여러분, 찬송도 조심스럽게 불러야 합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이 찬송 부르고 "아멘" 했으면 그만입니다. 달리 더할 말이 남아있거나 무슨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드리는 주기도문도 그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했으면 내 할 말은 끝난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내 앞에 무슨 일이 전개되더라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찬송할 때의 마음과 기도할 때의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합니다. 찬송가 가사를 보나, 기도하는 내용을 보나, 예배드리는 자세를 보나, 이 모두는 "예" 하고 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멘"의 뜻이 "이대로 이루어지이다, 당신 마음대로 하옵소서!"라면 우리 모두는 "예스(yes), 예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아니오"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문에 그 결국은 "아니오"로 채워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리와 창기는 죄인의 대표자입니다. 특별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 사람들이 제일 천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창녀 하면 제일 천하게 보는 직업이라면 직업이고 인격입니다. 이는 몸을 팔아서 산다고 하는 옛날부터 있어온 직업입니다. 그런가하면 세리라는 것은 당시 로마를 위해 강제로 세금을 받아 가는 직업이므로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비애국자요, 폭행자이며 착취자이었기에 이는 허락 받은 강도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리와 창기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히 소외당한 죄인들의 대표자입니다. 모두가 싫어하고 멀리하며 천시하는 이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거론하시면서 "세리들과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참으로 담대하고 용감한, 죽음을 각오한 폭탄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노라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그들보다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것은 그 자리에서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장면들을 두고 슈바이처 같은 이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아예 '날 죽여라' 하고 다니셨다"라는 표현까지 하고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전혀 일리가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시의 사회 구조와 관습이 어떤 때이라고 감히 이런 말을 하고서 살아남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침없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이며 "아멘" 해놓고 가지 않는 위선과 외식의 종교 지도자들, 이들은 결국 이중적인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세리와 창기들은 벌써부터 죄인이요 드러난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며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막달라 마리아나 세리 마태가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소위 종교 지도자라는 너희들은 아직도 위선과 형식으로 굳어진 "아니오" 상태에 있지만. 너희들이 그렇게도 멸시하는 세리와 창기는 뒤늦게나마 철저히 뉘우치고 "예" 하고 갔으니 당연히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신학적인 다른 의미에서 구분한다면, 맏아들은 유대 사람을 뜻하며, 둘째 아들은 이방 사람을 의미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받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지 않았으며 종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방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유롭게 죄를 지으며 온갖 우상을 섬겨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으니 구원은 바로 이 이방 사람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발견되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복음이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복음은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안가겠다고 하였으며 반항했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뉘우치고 갑니다. 탕자가 돌아오는 것처럼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온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돌아온 아들이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맞아주지 않는다면 문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복음은 언제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는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돌아와서 일하는 흉내라도 내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아버지, 바로 여기에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안가겠다고 반항하며 무척 마음 아프게 했는데 이제 찾아온다고 그렇게 쉽게 받아줄 수가 있겠습니까? 어쩌면 아버지의 권위를 찾기 위해서라도 특별한 조처가 있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기뻐하며 영접합니다. "돌아왔느냐! 잘했다. 지난 일은 잊어버려라"고 할 뿐 과거를 묻거나 뉘우치라는 권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에스겔 18:21,22 말씀에 보면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잘못된 과거는 묻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물어야하고 책망 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묻지 않겠고 책망도 아니하시겠답니다. 그리고 영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나온 그것만을 의로 여기시고 이제 후로는 의롭다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은 안가겠다고 반항하던 아들의 태도를 본래적이 아닌 실수나 병리적 반응으로 간주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였을 뿐,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 일하는 이 시간을 출발로 그의 진실된 자기 존재를 인정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잊어버린 과거를 내가 왜 기억하며 고통스러워합니까? 하나님이 묻지 않는 과거를 무엇 때문에 내가 묻는 것입니까? 지금 주님 앞에 나왔으면 나온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의로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심판입니다. 이는 제사장과 장로, 서기관, 바리새 교인들에 대해 여지없는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남은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세리와 창기들이 회개하며 돌아올 때 아버지는 기쁘게 영접하고 있는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닙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번 회개의 기회가 있었고 계속하여 말씀이 들려지고 있지만, 끝까지 뉘우치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으며 그 심판 또한 누가 준비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할 인간을 맞기 위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늦게라도, 어느 때에라도 뉘우치고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는 묻지 않고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여기에 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여기에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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