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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빚진 자(누가복음 7:41-50)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본문에 나타난 비유는 앞서 36절부터 시작되는 하나의 사건에 이어져서 그 사건 자체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날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이렇게 초청을 받는 경우는 몇 번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은 것은 한 번인 것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초청 받은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실 때에 초청한 그 집의 준비와는 상관없이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셨듯이 이 사건을 놓치지 않고 말씀의 소재로 삼아 그 사건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거듭 강조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우리가 대하는 모든 사물과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하고 찬양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하는 중에 일차적으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는 가능한 대로 그것을 말씀으로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바로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나타난 사건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함으로 가장 효과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게됩니다.
예를 들어 죽음을 보는 앞에서 인생을 이야기하고, 사람의 나고 죽음 그리고 부활을 설명한다면 보다 쉽게 믿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전도의 소재로 삼아 그 때마다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인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아 대접을 받고 있는 중에 한 여인이 와서는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씻기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아름답고 좋은 일로 보아주지를 못하고 시기, 질투하는 꼬여진 마음을 가지고 못마땅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이 집주인이 생각하기를 "이 예수가 저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가를 알았다면 아마 저러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것을 보면 선지자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즉석에서 비유를 들어 두 빚진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빚진 두 사람이 있어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지고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둘다 갚을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아마도 빚준 채주에게 가서 사정을 하며 갚을 기한을 조금만 더 연기해 달라고 애원을 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채주가 사랑이 많고 좋은 사람이어서 불쌍하게 생각한 나머지 둘다 탕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들려주신 다음 물으시기를 그렇다면 너희 생각에는 이 둘 중에 누가 더 저를 사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때에 시몬은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라고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네 판단이 옳다"하신 후 힐책하시면서 사랑의 두 모습을 대조시켜 나가십니다. 말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 여자가 너보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대접하겠다고 괜히 신경 쓰고 돈만 들였을 뿐 별 볼일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이 여자의 한 일이 훌륭하고 사랑함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어 가지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예수님께서는 잠깐 초대받은 그 자리에서 주고받은 짧은 대화, 조그만 사건 하나에서도 기회를 포착하시고 그 사례를 효과적인 말씀 전파의 소재와 기회로 삼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바리새인의 집에 나타난 여자의 문제입니다. 이토록 죄인으로 인정되었던 한 여자, 과연 그는 누구일까? 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예수님의 생애에 머리털로 발을 씻고 향유를 부은 사건을 두 번(요 12장, 눅 7장)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성서학자들간에는 예수님께서 두 번 당하신 일인지 아니면 한 사건을 달리 묘사한 것인지에 대하여 논란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편안한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 이 두 이야기는 분명히 다른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의 집이요, 시몬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학자들은 굳이 시몬을 마르다의 남편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무리가 있습니다. 마르다의 집에는 결코 남편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시몬이 마르다의 남편인 것처럼 하여 같은 사건으로 보려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특별히 같은 저자인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 10장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아름답게 시종 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식으로 자기의 집에 영접하여 음식을 대접하여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한 친절하고 성실한 여성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누가의 눈에 비친 마르다와 마리아는 아름다운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해서 오늘 본문에서처럼 죄인인 한 여자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위기 자체가 벌써 다르게 나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있는 내용은 죽었던 오빠를 나흘만에 무덤에서 살려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고 기뻐서 그 감격을 가지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감사와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회개와 눈물로 넘쳐있습니다. 아직은 감사의 감격이 아닌 통회의 눈물로 자신을 가누기조차 힘이 듭니다. 전혀 다른 분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누구인가를 가장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길은 마리아 중에서도 이름이 한 마디 더 붙어있는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타당이 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는 본래 그 사람은 죄인이었고 전설에 의하면 창녀라는 말도 있고, 일곱 귀신이 들렸었다고도 합니다. 그 정도로 과거가 많고 일반적으로 깨끗지 않은 여자로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할 때 막달라 마리아라는 자연스러운 해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예나 오늘이나 모든 사람이 가장 밑바닥 인생으로 생각하는 더러운 죄인은 창녀입니다. 아무튼 공적으로 인정된 죄인인 한 여인이 이제 예수님께 나아와 머리털로 발을 씻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죄인인 것은 사실이나 예수님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어느 누구보다도 최고의 존경과 깊은 사랑을 표시했습니다. 사랑은 여러 모양으로 표시됩니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기어이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하고 해야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이혼의 조건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아이 러브 유(I love you)를 하다가 헤어지기도 또한 잘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십 년을 같이 살아도 사랑한다는 말 한 번 안하지만 그러나 잘만 살아갑니다. 사랑한다고 그렇게 반드시 말을 해야합니까? 사랑하면 되는 것을…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아야합니다. 사랑하는 그 마음은 어떤 모습으로든지 표현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거짓이 없습니다. 마음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빙그레 웃기라도 해야 합니다. 세상에 가진 것 없이 봉사하는 것이 웃음입니다. 가능하다면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십시오. 그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모릅니다. 따라서 제발 하지 말아야될 것은 울고 불며 한숨짓는 일입니다. 그것처럼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우리끼리만 압시다" 하는 비밀 이야기입니다. 이 또한 남에게 비밀의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알고있으니 말하고싶어 참기가 힘들고, 둘이 한 말이니 말이 새기라도 하는 날엔 내가 한 말이 되겠으니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들어도 좋은 이야기, 언제 들어도 은혜스러운 이야기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요,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웃을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랑의 고백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는데 오늘 여기 이 여인은 한 마디의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여인은 참으로 엄청난 고백을 하고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먼저는 "울며" 그랬습니다. 이는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인간 관계에 있어서 첫째 되는 요소가 자기를 낮추는 겸손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그것이 진정 최고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는 높고 아내는 낮고, 혹은 나는 높고 남편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멀쩡한 거짓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 앞에서는 내가 작아집니다. 사랑 앞에서는 내가 낮아집니다. 나도 모르게 낮아지고 작아져 결국은 없어지고마는 것입니다. 체면이고 뭐고 나를 위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지는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와 눈물을 흘립니다. 회개와 진실한 마음에서의 겸손으로 마음을 전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털로 발을 씻겼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 : 15에 긴 머리는 여인의 영광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성의 머리가 길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고, 한편으로는 사치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모든 여성들은 머리를 특별히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영광스럽고 소중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더할 바 없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제 발에다 입을 맞추었습니다. 진실로 자기를 낮추고 낮추어 발에다 입을 맞추기까지 낮아진 사랑의 고백! 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의 고백입니까? 누구나 사랑을 한답시고 한 번쯤은 죽자살자 정신없이 사랑을 했겠지만 아마도 발에 입맞춘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직 거기까지는 못 갔으니 항상 불안하고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이 이 정도가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네가 내 발에 입을 맞추라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저 분의 발에 입을 맞추는 데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내 사랑의 표현이 이렇게만 나타날 수 있다면 모든 문제의 해결은 다 끝난 것입니다.
머리털로 발을 씻기고 입을 맞추었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최고의 존경이요, 헌신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목숨을 바칠 수는 있어도 이 일을 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이는 명예를 바치고 존경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하였습니다. 지극한 이 여인의 사랑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소례를 대례로 받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여인이 한 번 입맞춘 것을 예수님께서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종신토록 살 수만 있다면 세상에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는 그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하였습니다. 머리에 부었다면 몰라도 왜 발에다 부었는지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로 많은 가운데 아무래도 잘못 쓴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습니다. 대의 기록을 보면 왕들이나 제일의 귀족, 부자들은 향수로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밖에서 돌아왔을 때는 종이 주인 발을 씻기고 닦아주는데 옛날에는 비누가 없었기 때문에 씻고 닦아도 냄새가 좀 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왕이나 제일의 귀족은 발에다 향유를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을 최고의 분으로, 임금님처럼 높여드린 것입니다. 이는 가장 영광된 제일의 분으로 높이고 존경하는 의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주인 시몬은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는 이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 줄 알았더라면 만지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라는 예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을 갖게되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고는 오늘 주신 두 빚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할 중요한 문제는 죄는 빚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죄가 빚이라는 것은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죄란? 객관적으로 성립되는 것이냐, 아니면 주관적인 것이냐? 다시 말하면 죄라는 것은 그 가책, 죄의식에 관한 문제냐 아니면 죄라는 객관적 사건이 존재하느냐? 나아가서는 하나의 관계냐, 현상이냐 사건이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죄는 주관적인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며, 따라서 죄라고 하는 엄연히 나타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빚을 지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빚을 지게되면 돈으로 갚는 길 이외에는 절대로 자유할 수가 없는 하나의 객관적인 사건입니다. 설령 내가 빚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결코 빚 없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만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내 주관적인 감정이나 해석, 내 세계관, 철학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빚이라고 하는 객관적 사건이 있고 이 사실에 대한 만족한 보상이 있고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빚 자체의 객관성을 들어 곧 죄의 문제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하면 그 해결을 위해 몇 가지의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뉘우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뼈아프도록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그 길에서 돌아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는 회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아무리 철저한 뉘우침과 각오로 새 길을 간다 하더라도 어제까지의 지은 죄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나의 뉘우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죄는 죄대로 남는 것입니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보상을 해보겠다는 생각입니다. 지난날에는 내가 빼앗으며 살았으니 이제는 구제를 하고, 남을 괴롭혀왔으니 이제는 도우며 살겠다고 노력을 하며 고행을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지은 죄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인 자가 살아나지 못하듯, 내가 괴롭힌 그 사람이 과거에 당한 괴로움이 오늘에 와서 내 마음 때문에 없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는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절대로 없지 않습니다. 스스로 아무리 뉘우치며 행위를 고치고 고행을 하여도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반드시 갚아야하는 절대 빚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므로 빚진 빚의 주인인 하나님께서 탕감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크고 작은 죄의 범위를 떠나 하나님이 탕감해주시지 않고는 헤어날 길이 없는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탕감으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자유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사죄권의 문제입니다. 본문 48절에서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여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에 거기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이가 누구이기에 사람의 죄도 사하는가 생각하며 마음의 소요를 일으키게됩니다. 이는 곧 사죄권에 대한 반응이요, 시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는 몇 가지의 증거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사죄권의 행사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병 고치고 먹이며 선한 일을 했다고 돌아가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죄권의 행사였고 이 때문에 저들에게 못마땅하게 여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동격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요 12 : 50).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 : 32).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요 17 :21) 등 하나님과 자기와를 동격시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님 자신이 하시는 일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즉 자신을 하나님의 계시자로 명백하게 자처하셨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 :20)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사죄의 문제로 돌아가 어차피 탕감은 다같이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많든 적든, 크고 작고간에 다 죄인이므로 탕감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탕감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예수 앞에 나와 회개하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의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탕감 받은 그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모두가 예수의 이름으로 탕감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공로로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이 은혜가 내게 효력을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윤리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네 번째 문제는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입니다. 이를 직선적으로 이야기하면 바리새인 너의 빚은 오십 데나리온이며, 이 더러운 여인의 빚은 오백 데나리온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둘 다 빚지기는 마찬가지요, 어차피 십자가의 공로로 탕감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들 오십 보, 백 보라는 말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의 기원이 재미있습니다.
옛날 어느 전쟁 중에서 대세가 불리하게되자 도망가는 병사들이 생겼는데 나중에 역전이 되어 전쟁이 승리로 돌아가자 흩어졌던 병사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된 것입니다. 이 때에 도망갔던 자들이 누구냐고 물으니 한 사람은 오십 보 도망갔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백 보 갔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오십 보 간 사람은 나는 조금 갔고 저는 많이 갔다는 것인데, 도망간 것은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듣고있던 상사가 "오십 보, 백 보이지" 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오십 데나리온이거나 오백 데나리온이거나 빚은 빚입니다.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어 예수님의 공로로 대속함을 받아야한다는 입장에서는 한 치의 차이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결국 예수의 공로로 다같이 탕감을 받았다고 전제한다면, 결론은 많이 탕감 받는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좀더 깊이 말씀드리면 많이 탕감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깊이 뉘우치고 더 많이 회개하고 더 많은 죄를 탕감받았다고 느끼는 사람! 마치 사도 바울처럼 "나는 죄인의 괴수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나,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절규하기까지 자신을 큰 죄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회개의 깊이에서 높은 은혜를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한 예를 들어, 어떤 여인이 결혼을 하여 남편의 사랑을 받고 삽니다. 그는 인물도 잘났고 학벌도 좋으며 재주도 많습니다. 그런데 꼭 한가지 음식 솜씨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다 좋은데 '이것 한 가지'만 어쩌다 부족할 뿐이다"라며 교만하여 삽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있는 한 남편의 사랑을 크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다른 한 여인은 재주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게다가 생긴 것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편이 이런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무자격과 매력이 없음에도 나를 사랑해주는 남편이 감지덕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래도 고맙고 저래도 감사한 것뿐입니다. 한편, 이러는 아내를 둔 남편 또한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어거스틴은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의를 행하면서도 교만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구원받을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 왜냐하면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제 불능한 내가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회하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내 한 일이 죄 아닌 것이 무엇이며 내 마음에 죄 아닌 것이 무엇이더이까! 생각하면 할수록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있으니 자신을 알고 죄와 허물을 느끼면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그와는 반대입니다. 부족을 느끼면 느낄수록 절망하고 원망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도망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구원받지 못할 존재로 단정하며 절망의 늪으로 뛰어듭니다.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자기만의 결정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때는 자기의 의로 살았다는 것입니까? 근본적으로 나의 의는 없었고 그것 때문에 살아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기 더럽고 죄 많은 한 여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보시는 눈과 마음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맞아들이시는 것은 결코 윤리나 도덕적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죄인인 줄 알기에 회개하며, 부족한 줄 알기에 더욱 의지하며 감사하는, 구원받은 자의 은혜 안에서의 세계관을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44절 이하에 보면 핵을 찌르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계속하여 예수님께서는 "너"는, "저"는 하시며 비교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보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바리새인이 훌륭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을 초청하여 근사한 대접을 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냉정하게 비평하십니다. 너의 초청은 진실치 않았고 저는 진실하였으며, 너는 겉만 내세웠으나 저의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니 그 중심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우냐고 높이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저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러므로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저가 더 많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가 사실이라면 이 말씀을 듣는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좋았겠습니까? 죄스러운 몸으로 예수님께 사랑을 보였다가 예수님마저 저 비난의 대상이 되게 하여 더욱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인데 이 때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힐책하시어 할 말을 잃게 하시고 오히려 마리아를 높이 위해주시니 마리아의 감격스러움이 오죽했겠습니까? 아마도 죽자하고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빈 무덤을 보고도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고, 마침내 그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나는 증인이 되고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됩니다. 진정 낮아진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에 비교할 수 없는 더 큰사랑을 받게되는 것이 죄 사함 받은 우리들의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두 빚진 자(누가복음 7:41-50)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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