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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도의 여정(사도행전 14:1~7)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성공적으로 선교를 하고 그 결과로 핍박이 일어나 어려운 처지가 된 바울과 바나바는 거기서 140킬로미터쯤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가서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고니온에서 된 선교 활동과 그 결과를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7절밖에 안 되는 짧은 내용입니다 마는 아주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내용입니다.
바울은 어디에 가나 이렇게 일했고, 어디에 가나 이런 결실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바울의 전도 여행 전체를 대변하고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 내용인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정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어디에를 가나 우선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큰 핍박을 만났을 때,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발의 티끌을 털어버리면서' 이고니온으로 갑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13:52)"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교인들도 그러했고 떠나는 바울과 바나바도 그러했습니다. 핍박을 받아 쫓겨난다고 해서 비관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지 않습니다. 성공이냐 실패냐의 의심도 없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충만한 가운데서 다른 마을로 갑니다.
그리고 이고니온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주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항상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점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충만이, 가슴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충만'(充滿)이라는 것---참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도, 생각도, 뜻도, 넘치게 가득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할 수 없이, 억지로, 부득이해서, 반신반의하면서,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고 해서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하는 것도 그래요. 예배에 한 시간 왔다 가는데도 충만한 마음으로 나오는 분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시간에 늦는 법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꼭 시작한 다음에야 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늘 그래요.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항상 그런 것 같습니다. 이상하지요? 충만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가득한 마음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안 가자니 꺼림칙하고 가자니 그렇고…… 이런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게 어정쩡하니 발걸음이 늦어져 시간을 못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무릇 인간사가 다 그렇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언제나 가득한 마음으로 행해집니다. 전도 사업이 그렇습니다. 충만한 마음으로 하지 않는 전도는 소용없어요. 그런 전도는 해보아야 전도하는 사람도 피곤하고 전도 받는 사람도 피곤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남성 성가대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마는 성가대에 앉는 분들이 다 바쁜 분들입니다. 아마 저녁 식사도 못했을 것입니다.
바쁜데다가 성가대까지 하느라고 그렇습니다. 이것을 누가 하라 해서 합니까? 밤중에도 나와 연습합니다.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억지로 하라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입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특별히 복음 사업은 언제나 가득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권투 시합을 봅니다. 목사가 그런 것을 왜 보겠습니까? 일말의 진리가 있는 것 같아서 봅니다. 대체로 때리고 맞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설자의 해설입니다. 그것을 유심히 듣습니다. 가끔 보면 좀 힘이 약한 사람이 자꾸 허우적거리면서 주먹을 내두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소용없어요. 이럴 때에 해설자가 뭐라고 하는 고 하니, 단 한 번 주먹을 내밀어도 체중을 실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중을 다 실어서 힘껏 내뻗어야 맞고 떨어지는 것이지, 허우적허우적하는 것은 아무리 해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런 펀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나운서의 이 해설이 일리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거든 한 가지 일을 해도 제대로 하세요. 좀 반듯하게, 좀 화끈하게 말입니다. 자는 건지 조는 건지 알 수 없게,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게, 하나님의 일인지 나의 일인지 알 수 없게--그렇게 하면 못써요. 바울은 전도할 때에 선교여행 하면서 언제나 충만함으로 기쁨으로 했습니다. 그 점이 첫째로 생각할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어디가나 유대인들이 살고,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어요 바울과 바나바는 먼저 이런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성서해석학적으로 조금 문제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1절)"--이렇듯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라고 되어 있지만 번역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카다 토 아우토'라고 하는 이 말은 주어가 복수로 되어 있고, '아우토'는 중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함께'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과 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제 뜻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직역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가든지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하는 것은 바울의 아주 중요한 습관이요 관행입니다. 어디에를 가나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이번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어느 마을에 가든지 유대 회당이 있는 곳에 가면 으레 그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민족에 대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두고 항상 고민해온 사람입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하고 그는 로마서 9장에서도 토로하고 있습니다. 자기 민족이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회당이라고 하는 기구를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을 알고 성경을 아는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 훨씬 쉽고도 타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일단은 먼저 열린 문이거든요. 더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당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사람 모이는 곳에 가 복음을 전해야지 한 사람씩 찾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거든요. 어디든지, 시장이든 아레오바고같은 공회당이든 사람 모이는 곳이 바람직한 장소인 것입니다. 특별히 회당은 일주일에 한 번씩 안식일마다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렇게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전과 같이' 이 마을에서도 회당에 먼저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또한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고 합니다. 성공적인 전도였습니다. 전도했는데 듣는 자들이 많이 믿었어요. 일단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디에를 가나 전도에는 성공하는데 상황에는 실패하기 일쑤입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사람들이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일부는 믿고, 일부는 안 믿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앞서도 본 바와 같이 시기 질투로 인해서 바울의 전도 사역을 방해합니다. 자기네가 안 믿을 뿐만 아니라, 복음에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악이 아주 적극적이요, 핍박이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합니다.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2절)"--아주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핍박도 이렇게 되면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안 믿을 뿐만 아니라 남도 못 믿게 해요.
참 이상하지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안 믿을 때에 남을 못 믿게 하는 것은 내가 안 믿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안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이면 더욱 그래요.
대체로 사람은 자기가 가진 의견에 대해서 다른 사람도 동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거든요. 그래서 자기도 안믿을 뿐더러 다른 사람 믿으려는 것도 방해를 해요. 보아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상한 것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유대사람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유대사람들의 회당에 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핍박을 받고, 그렇게도 매를 맞고 고생을 하면서도 유대사람들의 회당에 또다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전도 방법이요, 열의였습니다. 순종치 않은 사람들이 핍박을 하고 선동을 해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감을 가지게 하는데도 사도 바울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의연하게 전했습니다. 이게 매력입니다. 핍박이 있으니 그 핍박으로 인해서 절대로 나약해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전도 여행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맥락입니다. 언제나 그래요. 핍박은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 때문에 중단하는 일은 없습니다. 쫓겨나는 일은 복음 전도를 중단하는 일은 없어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핍박이 있어도 핍박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는 법은 없습니다. 또 중단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핍박을 당할 때에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자세를 취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3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이같은 담력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용기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이냐?---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핍박을 당하면서 "저 사람들이 왜 그럴까? 도대체 저 사람들이 왜 그럴까? 왜 박해할까? 왜 안 믿을까?" 자꾸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여 자기를 핍박하고 모해하고 억울하게 만드는 사람들 편을 자꾸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바울도 용기를 잃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를 힘입어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칩니다. 그런 때에 스데반이 '네가 나를 때려? 아니, 이 친구가 나를 쳐? 엊그제까지도 나와 함께 하던 친구가 나에게 돌을 던지다니, 네가 그럴 수 있느냐?'--이렇게 생각했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대로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봤어요. 누가 나를 때리는지는 상관하지 않았어요.
개의치 않았어요. 그는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고난을 당하든지 그 사건 자체에 몰두해 들어가기 시작하면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왜 그럴까, 무엇 때문일까, 내가 뭘 잘못했나…… 이것저것 생각하기 시작하면 전혀 해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나약해지고 맙니다. 결국은 쓰러집니다. 우러러보세요.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 때에 그 얼굴은 변했고, 그 마음은 천사와 같아 졌습니다. 천사의 마음으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순교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것을 찾으라고 말씀합니다. 더구나 핍박받을 때, 억울하게 매맞고 억울하게 돌에 맞을 때, 욕을 당할 때, 바로 그 순간에는 특별히 하나님만 생각해야 합니다. 위를 보아야 합니다. 땅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한 것--이것이 바울의 전도 여행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늘 그랬습니다. 신령한 용기는 언제나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요, 참 용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땅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지혜나 명예나 친구의 성원에서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신령한 용기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설에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도대체 이 이고니온에서 무엇 때문에, 어떤 형태의 박해가 있었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객관적으로 유대사람들이 박해했다고 만 되어 있지, 왜 박해했으며, 어떤 모양으로 박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설에는 있습니다. 특별히 외경 가운데「바울행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고니온에서 된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주 은혜 되는 내용이라서 이 시간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회당에 가서 전도할 때에 데콜라라고 하는 젊은 여성이 먼저 손을 들고나서면서 "내가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겠습니다"하고 나왔어요.
이것이 계기 되어 많은 사람이 "나도 믿겠소" "나도 믿겠소"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온 성이 이렇게 되니까 유대사람들이 질투를 하게 되고 마침내는 관원들을 총동원해서 큰 핍박을 가하게 되는데, 맨 처음에 손을 들고 나왔던 이 여자를 화형에 처하기로 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태형을 가했습니다. "많이 때려서 내 쫓아라"--그래서 매맞고 쫓겨나게 되고 그 여자는 화형을 당합니다. 장작더미 위에 기둥을 세워놓고, 그 기둥에다 사람을 뒷짐지어 묶어놓은 다음에 장작더미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데 이 여자가 하늘 문을 향하여, 하나님께 그리스도께 기도를 합니다. 그렇듯 장렬하게 순교하려 하는 그 순간에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습니다. 불이 꺼졌습니다. 그 때문에 여자는 풀려났습니다. 이후 그 여자는 남장을 한 채 멀리 가 있는 사도 바울을 따라갔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을 시중들고 복음 전하는 자의 대열에서 함께 일했다고 하는 기록입니다. 대단히 아름다운 이야기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의 모습을 이 외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여자가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의 바울의 모습은 키가 작고 눈썹이 치켜 올라 서로 맞서고 큰 코에 약간 대머리요, 건강하게 생기고 인자한 얼굴이었다 합니다. 때로는 사람으로 보이고, 때로는 천사의 얼굴로 보였다고 합니다. 바울의 초상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도 이것이 바울에 대한 이고니온에서의 인상입니다. 자, 이제 또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이렇게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주께서 저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주사--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이적과 표적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요, 자기들이 하고자 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복음을 전학 담대하게 충만하여 복음을 전했더니 보너스로 이적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적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역사가 크게 나타날 때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때에, 신앙으로 인한 무서운 담력이 역사 하는 바로 그런 순간에 하나님께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적과 표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큰 보너스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지금 사도 바울이 가고 있는 일이 주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들과 동역, 동사하시고 계심을, 함께 하시고 계심을 증거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 표적과 함께 용기가 생깁니다. 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내가 하는 일이 곧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그런 확증을 얻으면서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도 가만히 보면 그런 일이 많아요.
병에 걸렸는데 기도하면서 낫는 분이 있습니다. 자, 기도와 함께 나았을 때, 이런 능력을 체험했을 때에 경험하는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 내일 내가 죽든 말든 그것을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일 병이 재발하든 안 하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늘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 그것을 체험하고 그것을 확증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적으로 병 고침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그 병으로든 다른 병으로든 어차피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적과 함께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얼마나 더 큰 용기를 얻겠습니까? 또 이 이적을 통해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도 주님께서 친히 함께 역사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님께서 나에게 역사 하시고 계시다는 그 감격을 얻게 됩니다. 이래서 더욱 믿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가지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 늘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에는 재미있는 말씀 한 구절이 있습니다. 3절 끝에 보면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로고테스 카리토스 아우투"라고 표현되는 이 자기 은혜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은혜--나에 대한 은혜입니다. 조금 의역을 하자면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3절, 15장 15절, 갈라디아서 2장 9절, 에베소서 3장 7절 등 여러 곳에서 같은 말씀을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라고.
은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있습니다. '주의 은혜'라는 말이 있고, 문자 그대로 '은혜'라는 말도 씁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은혜도 여러 가지요, 그 중에서도 큰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은혜가 따로 있습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은혜에 대해서 간증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각자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사도 바울은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은혜의 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부터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바울이 남다른 명예를 가진 사람도 아니요, 과거가 좋은 사람도 아니요, 권세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카리스마적 권위'라고 합니다. 그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같이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가 있을 때에만 남에게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요 자격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것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그 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치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인 것처럼 모두를 사랑하신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다, 모든 되어지는 일이 다 나 때문이요, 나를 위해서 있어지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까? 바울은 은혜를 위해서 삽니다. 은혜만을 위해서 삽니다. 나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은혜는 아마도 "내가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사울아' 하고 부렸다 그것이 나에게 주신 은혜다"--여기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알아도 그만입니다. 바울에게만은 좌우간 특별한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바울에게는 특별합니다. 바울 자신에게는 엄청난 경험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그래서 바울은 내가 깨달은 십자가, 내가 깨달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 내가 받은 복음, 내가 이해한 진리…… 이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넘쳐서 그는 이 은혜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내게 주신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데, 여기서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신 은혜를 증거 하는 데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황이 변하든 안 변하든, 상대방이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핍박이 있든 없든, 내게 주신 은혜를 증거 하는 데 있어서는 항상 여전합니다. 꼭 같습니다.
이래서 위대한 사도입니다.
목사가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에도 참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항상 마음이 고요해야 되고, 은혜로 차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항상 은혜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목사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어려운 일이 많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우선 찬송가 찾는 게 달라집니다. 어떨 것 같습니까? "이 세상 험하고" 같은 찬송가를 찾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이 그러니까 "이 세상 험하고"하게 되지요. 은혜가 충만하면 "내 영혼이 은총 입어" 합니다. 그리고 좀더 어려우면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찾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 자체가 침울해집니다. 성경 66권의 하고많은 말씀 중에 하필이면 왜 그 말씀을 전하는 것 같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이 목사의 심경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목사를 자꾸 괴롭히면서 '은혜를 전하시오'한다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위대합니다. 상황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핍박이 있어요. 억울한 고통이 있어요. 악랄하게 선동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 알면서도 여전히 머물면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내게 주신 은혜를 그대로 전했습니다. 전하는 메시지가 은혜의 메시지입니다. 모름지기 전하는 방법도, 전하는 얼굴도, 전하는 마음씨고, 여전히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위대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유대인들이 핍박을 하든 안하든 바울은 여전히 은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과 같이 그는 회당에 들어갔고, 전과 같이 그는 은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위대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본문에 보니, 복음을 전한 결과로 온 성이 둘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5절)"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4절)"----둘로 나누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심판성이 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그렇습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듣고 회개하고 은혜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내 은혜 못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다 은혜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마치 열두 사도 중의 하나가 가룟 유다인 것처럼 말입니다.
보십시오. 이고니온에서 이렇게 능력이 나타나고, 이적과 표적이 나타나는 이 위대한 역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는 믿고 일부는 안 믿습니다. 여기서도 디시밀레이션(dissimilation)이 작용합니다. 사람들이 두 패로 딱 나뉘다보니, 저 사람이 믿으니까 난 안 믿는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서로 배타적으로 나오니까 이젠 믿을래야 믿을 수가 없어요. 두 대로 딱 나뉘어 서로서로 갈라지니까 말입니다. 온 성이 둘로 나누어지면서 결국은 핍박하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바울을 핍박할 수밖에요. 또 핍박을 받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믿게 되고--극과 극으로 나누어진 상황을 간단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참 유감스럽게도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은혜의 말씀을 듣고 똑같은 체험을 했는데도 한 사람은 믿고 한 사람은 안 믿는 것--그것이 현실입니다.
본문에 보니 돌로 치려고 합니다. 돌로 치려고 하니까 도망을 갑니다.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6절)"라고 말씀합니다. 도망을 갑니다. 도망가면서 거기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이 이런 사람입니다. 바울다운 면모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 전하다가 핍박당하니까 이고니온으로 왔고, 이고니온에서 성공하고 또다시 핍박당하니까 이번에는 루스드라로 갑니다. 이렇게 도망 다니는 길에서도 전도하기는 한결같습니다. 어디 가나 전도요, 어디가나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중단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업 중단되지 않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고니온에 어떤 교회를 세웠고, 얼마나 많이 믿었다 하는 기록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고니온에는 교회가 섰고, 그 뒤에 2차 전도여행 때에도 바울은 이고니온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설에 있는 이야기이면서도 교회사에도 확실하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동서 교회가 모두 성자로 인정하는 데글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 데글리라고 하는 아주 귀한 주의 일꾼이 있었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뒤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많이 수고하고 순교해서 동서 교회가 다같이 데글리를 '이고니온의 성자'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잠깐 다녀갔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이 믿었는지 모르나 그 속에는 데글리라고 하는 추후에 큰일을 하는 주의 일꾼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눈앞에 전도의 효과가 없는 것 같아서 낙심할 때도 있어요. 누가 믿는지, 누가 제대로 됐는지 알 수가 없지마는 부지런히 전도하세요. 부지런히 뿌려놓으세요.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데글리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이 사람이 장차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큰 일을 하고 성자가 될 줄 그 때에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저 바울 앞에 앉아 있던 사람 중의 하나였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이 역사 하셨습니다.
숫자에 너무 연연할 것 없습니다.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업적에 대해서 너무 그러게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부지런히 전하고, 핍박이 있으면 도망하고--그러나 하나님의 사업은 여전하게 성합니다. 이루어집니다. 그같이 훌륭한 성자가 이고니온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대단히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지런히 뿌려놓고 수고해놓으면 하나님께서 추수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의 역사는 반드시 흥왕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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