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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따로 세우라(사도행전 13:1~3)

by 【고동엽】 2024. 3. 18.
목차

 

따로 세우라(사도행전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간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중심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안디옥교회로 넘어갑니다. 안디옥교회가 중심적인 교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마침내 그렇게 되기 시작하는 시점에 온 것입니다. 언제나 리더십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몇 사람만 모여도, 그리고 다같이 일하는 것 같아도 거기에는 으레 선두주자가 있습니다. 의견을 인도하는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Opinion leader가 있습니다. 강압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않는데 은연중에 지도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전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들 중에도 준마가 있는 것처럼 다 같은 성도들이지마는 개중에는 역시 지도자격, 주도격의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이 바른 신앙에 설 때에 전체가 바로 섭니다. 지도자급에 있는 분들이 바른 길로 인도하게 될 때에 모두가 바른 길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궂은 일에든 좋은 일에든 꼭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예수를 믿으려면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한 사람은 만나야 한다고--.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양육되고 있습니다마는 상상을 해보세요. 공교롭게 내가 만나는 교인들이 다 시원찮은 교인들이라고, 다 병든 교인들이고 문제교인들이라고 가정해봅시다. 물론 사람이라는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으로 10명이고, 많으면 150명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대체로 150에서 300 정도가 고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통하여 만나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듯 많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것 같으나 사실은 많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이 그러한데 공교롭게도 가까이 만나는 몇 사람이 다 시원찮은 교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나의 신앙도 잘못되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내가 늘 만나는 사람들이 존경할만하고 신실한 교인들이라고 한다면 나도 부지불식간에 그를 따라 신실한 교인이 되게 마련인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에는 모델이 중요합니다. 가령 맨처음에 만난 교인이 한 달에 한 번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라면 나도 한 달에 한 번 교회에 나가는 교인이 되고 맙니다. 내가 만나서 존경하는 그리스도인이 새벽에 나가고 낮에 나가고 저녁에 나가고, 아주 전적으로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운좋게도 먼저 그런 사람을 내가 만났다고 한다면 나 또한 예수믿는 것은 그런 것인가보다 하고 신앙 생활 첫걸음을 새벽부터 내딛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처음에 만난 모델이 이렇듯 중요해요. 처음에는 예루살렘교회가 중심이 되어 온 교회가 다스려지고 또 말씀 안에서 양육되었습니다마는 이제 그 주도권이 안디옥교회로 옮겨갑니다. 이 점에 우리는 주시를 해야 됩니다.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안디옥으로 옮겨갔다가 그 다음에 로마로 갔다가 그 다음에는 독일로 갔다가 영국으로 갔다가 미국으로 갔다가…… 그리고 지금은 주도권이 실종되었어요. 많은 사람이 생각할 때에 한국이 그 지도적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중심이던 교회가 안디옥교회 중심으로 바뀌는 계기가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19절에 보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교회가 분명히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선교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사 파송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네 교회에 안주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자기네 교회에 할 일이 많습니다. 예루살렘에만도 아직 안믿는 사람이 많지요. 그렇더라도 저들은 사마리아로, 가이사랴로, 그리고 안디옥으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명을 외면한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선교적 비상조치가 취해집니다. 바로 핍박입니다.

무서운 채찍을 맞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고 야고보가 죽습니다. 결국은 교회가 산지사방 흩어집니다. 사마리아로 가고 가이사랴로 가고, 그리고 구브로로, 그리고 안디옥까지 이르러 살게 되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의 3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디옥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에는 예루살렘에 견줄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런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당시의 안디옥 인구가 벌써 50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큰 도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철저하게 예수 믿고 전적으로 헌신했기 때문에 소위 '크리스티아누스' 곧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이름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126절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이 안디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이 안디옥에 머무르면서 1년 동안 전도하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가 섭니다. 그렇게 교회가 서고 크게 부흥했을 때에 저들은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을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고 걱정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여유가 있으니, 그리고 복음을 받았으니 물질로 저들을 돕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그래서 헌금을 합니다. 그렇게 모인 것을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전달하게 됩니다. 헌금만이 아니라 복음을 받은 데 대한 감사의 마음도 함께 전달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낯선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인고로 그렇듯 사랑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VIP인 바울과 바나바가 저들의 정성을 예루살렘에 전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듣고 무사히 안디옥에 귀환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25)"-1년 동안 애써서 세운 교회입니다. 많이 부흥했습니다. 헌금도 많아지고 구제도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먼 여행에서 돌아왔으니 이제는 여기서 열심히 목회하면서 교회를 더 부흥시키고 더 큰 역사를 이루어야 할 단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교회에서 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동시에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같은 분, 바나바와 같은 분들을 오래오래 모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좀더 자세히 본문의 내용을 봅시다. 헤롯이라고 하는 사람이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핍박은 잠시 멈추어지게 됩니다.

교회를 대적하던 상황은 호전되었습니다. 이제는 마음대로 복음을 전해도 크게 방해받을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핍박 속에서는 교회가 질적으로 성장합니다. 핍박이 없어지고 평안하게 되면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양적으로 성장할 때에는 질적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교회가 평안할 때, 아무 핍박도 아무 어려움도 없을 때, 그럴 때에는 무엇인지 자꾸 문제가 생겨요. 안일해지고, 분쟁이 생기고, 시비도 있고, 문제 거리가 나타나고…… 질적으로 이렇게 떨어집니다. 이단 사설도 많고 거짓 선지자도 나타나고 거짓 교사도 많이 생겨나고, 거짓 교인들도 횡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핍박을 당하게 되면 가짜는 다 물러납니다. 다 도망가고 순수한 교인,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 순교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그 역사를 보면 이 같은 사실에 예외 없이 볼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는 교회가 양적으로 부흥하면서 때로는 질적으로 떨어져서 말썽이 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을 당하게 되면 양적으로 부흥하는 것은 잠깐 멈추지만, 순수한 신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사가(史家)인 백낙준 박사가 쓴 책을 보면 저러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1907년으로부터 시작해서 큰 부흥이 있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원산 등지에 많은 교회가 일어나고 부흥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교회에 나오게 되는데, 이렇게 되자 교회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때에 '105인 사건'이 있었다-'105인 사건'이 있기 전에는 한국교회에 소위 '개화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으려고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서양 문화가 좋아서 나오는 개화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순수하게 그리스도를 영접한 교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05인 사건이라는 큰 핍박이 있었어요. 105명이 끌려가 죽는 ,무서운 사건이 생기니까 그 때에는 소위 개화교인은 다 물러가고 순수한 기독교인만 남게 되었다고 백낙준 박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시 핍박 속에서 교회는 질적으로 성장합니다. 핍박이 멈춰지면서 양적으로 성장하는 이런 때가 되었습니다. 외적인 여건은 호전되어서 복음을 어디서나 큰 저항 없이 전할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여건보다는 내적인 여건이 더 중요합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도자가 문제입니다. 환경이 호전되었다고 자동적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으로 귀한 인재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인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몇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가 있을 때에 교회가 부흥하고 나라도 바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 믿음이 있고 중생하고 잘 훈련된 신실한 일꾼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사람 몇 사람이 안디옥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했던 것입니다. 바나바가 있고 사울이 있고, 그 위에 지명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안디옥교회는 부흥한 것입니다.

오늘도 어느 교회이든지 교인이 수만 명되는 교회일지라고 그 교회에 참말로 필요한, 중요한 인물은 몇 사람입니다. 이 몇 사람이 있어서 그 교회가 되는 것이예요. 흔히 목회학에서는 responsible member라고 하는, 책임지는 교인, 영적으로나 교회 사업이나 모든 면에서 책임을 지는 교인이 있습니다. 교회를 내 집처럼, 아니 내 집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고 생명을 바치도록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어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주일날 한 번 나왔다가 돌아가는, 그런 사람들로써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교회에 이처럼 중요한 일꾼 몇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1)"-선지자로, 교사로, 그 기능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기능입니다. 선지자라고 하면 프로페테스(prophetes)-예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받아서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지금의 우리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때는 성경이 기록되던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선지자입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그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성경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프로페테스라는 말도 "말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이것이 선지자입니다. 계시를 받는 사람인 동시에 영감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영감을 받아 외치는 사람입니다. 더욱 더 그것이 중요한 것은, 지금은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 그 때에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히브리말로 된 성경이 있었는데 그것은 구약성경이었습니다. 그나마도 회당에만 보존되어 있었어요. 일반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특별한 사람이 몇 장씩만 가지고 있었어요. 구약성경 전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신약성경은 없어요. 마가복음, 마태복음…… 이런 것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으나 그 어느 곳에 놓여 있는 것이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때였습니다. 예수 사건을 구전으로 전하던 때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구약성경을 외어가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 말씀 전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성경 저자 격 영감의 사람들이었어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도 이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분은 짓궂은 소리를 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하면서 '내가복음'이라고 한대요.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라는 것은 정말 하늘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예언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느 한 교회에 매이지 않아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말하고 가고 오고 자고 합니다. 성령께 강력히 이끌리어 살았어요. 오늘의 본문을 한 절 넘으면 4절에 당장 나타납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고 말씀한 것을 비롯해서 거듭 성령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령이 마음을 여니라, 성령이 가라고도 하고 멎으라고도 하고…… 이렇게 인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지자입니다.

한편, 교사라고 하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맥락에 따라 설명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하여 예언된 바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따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사입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한국에 무당이 많습니다. 무당에 두 가지가 있는데 강신(降神)무당과 습득(習得)무당이 그것들입니다. 강신 무당은 신이 내린 무당입니다. 신이 씌어 가지고 중얼거리고 춤도 추고합니다. 그런데 습득무당은 배워 가지고 하는 무당입니다.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강신 무당은 열에 하나랍니다. 열에 아홉이 습득무당인 것입니다. 열에 아홉이 가짜라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도 두 가지인 것 같아요. '강신 목사'가 있고 습득목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아서 외치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 성령 받는 것은 하나도 없이 그저 배워만 가지고 하는 목사가 있어요. 이 책 저 책 읽어보고 이 말 저 말 들어보고 했을 뿐이어서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의 선지자들과 교사-매우 중요한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일꾼 몇 사람의 이름을 들었는데 한번 생각해 볼만합니다.

바나바,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핍박 때문에, 또 사명을 지니고 안디옥으로 온 사람입니다. 선교사로 파송되어 역사 하는데 1년 동안 있으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사람이 뒤에 온 사람이라서 혼자 오지 않고 사도 바울의 고향 다소에 들러 거기 머물러 있는 사울을 불러서 같이 왔어요. 왜요?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이서 1년 동안 여기서 전하면서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이렇게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우선 들 수 있으며, 그 다음으로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나옵니다. '니게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검다는 뜻입니다. 곧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아프리카 태생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미 인종을 추월해서 교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므온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바로 그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나 한번 그렇게 미루어본다면, 그는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졌지마는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을 뿐더러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또 다른 십자가를 지고 나서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설에 보면 그의 아내는 로마서 1613절에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의 믿음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둘이 있는데 하나는 루포요 하나는 알렉산더입니다. 이 사실도 역시 마가복음 1521절에 나타나는바 루포와 알렉산더는 중요한 선교사로 역사 하게 됩니다. 시므온은 비록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마는 그후에는 이렇듯 교회사적으로 중한 인물이 되어 나타나며, 가정 전체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쓰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 루기오는 구레네사람이라 했습니다. 시므온과 동향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마나엔-이 사람에 대한 얘기가 재미있어요.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라고 말씀합니다. 젖동생이라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상당한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도 벌써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나바, 사울,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이 지도자들이 전부가 안디옥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 다소에서 온 사람,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 이렇게 딴 데서 온 사람들이 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안디옥교회의 주인이 되고 지도자가 되고 교사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외래인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종교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본문 2절을 보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하고 말씀합니다.

"주를 섬겨"-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헬라어로 '레이투르'라 하는 이 말은 두 가지로 번역됩니다. '봉사' 곧 섬긴다, 봉사한다고도 번역하고 일반적으로 '예배'라고도 번역합니다. 영어로는 그래서 worship라고 했습니다. service라고도 합니다. 예배한다는 것을 영어로는 그렇게 말합니다. 서비스는 곧 봉사가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주를 섬겼다는 것은 주를 예배했다는 말입니다. 주를 예배했다니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선 소극적으로 생각해보면 주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에 흔히들 무엇인가 많이 구하려 듭니다. 기도도 내 소원이 있어 가지고 무엇인가 받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간절히 달라는 것이 많아요.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그 앞에 경배하는 마음입니다. 경배하는 마음이요, 말씀을 듣는 자세요, 뜻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리워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마음에 묵상하는 것이요, 명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 주님과의 만남의 관계가 예배입니다. 이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섬긴다고 하면 꼭 물질로 섬기는 것으로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마음을 온전히 바치는 것입니다.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보이고 그로부터 음성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이것을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이 예배 중에 성령이 말씀하셨어요. 섬기되 특별히 금식하여 섬겼다 합니다. 먹는 욕망이라든가 세속적인 욕망을 다 끊어버리고 영적으로 그 심령을 깨끗케 하여 단순한 마음으로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섬겼어요. 모름지기 섬긴다는 말의 뜻을 몇 번이고 다시 음미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배라는 것은 개인적 명상이 아닙니다. 어느 사람이 골방에 들어가서 들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이 주일날 낮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 중에 주님의 지시를 받는 것입니다. 내 소원을 이루고자 간구하는 자세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섬길 때에 성령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가라사대"--그 다음 말씀을 들어봅시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부르다, call입니다. 사명이요, 소명입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전적으로 성령 주도적입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 내가 필요해서 시키는 것이니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두 사람을 별도로 세우라는 것이지요. 사울이라는 말은 히브리식 호칭이고, 바울이라는 말은 헬라식 호칭입니다. 13장 중간에서부터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됩니다. 부르기 쉬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사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성령이 말씀합니다. 일을 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생각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은사의 문제입니다. 지금 사울에게 상급 주시는 시간이 아닙니다.

사울에게 일거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을 위하여 그에 적당한 사람을 불러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일하고 싶다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키셔서 합니다.

주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셔야 됩니다. calling-소명이기고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별도로 세우십니다. 선교사,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하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따로 세우신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필요한대로 인물을 세워서 파송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을 따로 세우셔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 하십니다. 이런 때입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 순종하고 있어요. "보내니라"합니다. Sending body가 있어요. 보내는 자가 있고 가는 자가 있습니다.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보내야 갑니다. 또한 교회로서도 보내고 있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아까운 인재들입니까? "우리 교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들인데 보내다니요?"하고 불만스러울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군 말없이 보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주의 종들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도 필요합니다. 저분들이 와서 거룩한 교회를 세웠어요. 그러면 다른 곳에 가서도 교회를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냅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일에 저들이 바나바와 사울을 안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끼리 잘 믿고 지내면 그만이지, 여기도 할 일이 많은데, 하고 붙들어두었다면 틀림없이 스데반 사건이 또 생겼을 것입니다. 큰 핍박을 당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안디옥에도 할 일이 많아요.

사울이 거기 있었으면 더 큰 일을 했을는지는 몰라요. 그러나 저들은 보냈습니다. 이곳의 할일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당신들은 가서 다른 곳에도 복음을 전하십시오, 하고 보내는 마음, 참 귀한 마음입니다. 낯선 곳으로, 안일한 곳을 떠나서, 쉬운 곳을 떠나서 어려운 곳으로, 성령에 이끌리어, 충만하여 파송되는 이 바나바와 사울의 모습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위대한 사람들입니까? 본문에서 안수했다고 하는 것은 소위 임직식인 셈입니다. 이렇게 특별히 따로 세워서 임직하고 안수기도를 한 다음에 파송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디옥에 할 일이 많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에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아쉽습니다. 아깝습니다. 그래도 보냈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니까 보냈고, 이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중한 일을 감당함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섭섭하지만 파송합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저들의 기도를 받으면서, 저들의 보냄을 받으면서 낯선 곳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이래서 안디옥교회가 위대한 것입니다.

 

인종을 초월했고, 많은 중요한 사람들이 모였을 뿐만 아니라, 귀한 일꾼들이 있는 교회요, 1호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 선교의 본거지가 되는 교회, Sending body가 되는 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교회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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