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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뱀(마태복음 7 : 7 - 12 )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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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뱀(마태복음 7 : 7 - 12 )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제 주신 본문 말씀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시기 위해 돌과 뱀을 비유로 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예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기도하다가도 낙심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시는 참으로 뜻깊은 교훈의 말씀입니다. 이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예수님께서 돌과 뱀이라는 여기에까지 비유해 말씀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단순히 기도에 대한 말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매일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본 비유를 통하여 매우 단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경건한 마음으로 읽노라면 눈물겹도록 감사한 복음적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보세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하셨는데 사실을 두고 생각하면 이 말씀은 하나님 편에서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아쉬운 편은 우리이지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편에서 먼저 구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면 이는 우리가 구할 줄을 모름이요, 구할 만한 능력도 갖지 못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애원하시다시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얼마나 귀한 복음입니까? 구하라! 그리고 곧 뒤이어지는 말씀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주시기 위해서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아는 말씀 중에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6 : 8)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구하기 전에 이미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지도 않고 우리가 받지도 못합니다. 그 못 받는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발 구하기만 하라! 그러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들이 어린이들의 잘못에 대해 부득이 매질을 해야 하는 경우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이제 매를 들자마자 잘못했다며 빌어 오면 좋겠는데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그 한 마디를 하지 않는 녀석이 있습니다. 그러면 잘못했다는 말은 나와야겠고, 그렇다고 잘못을 두고 때리던 것을 도중에 그만 둘 수도 없고 하여 답답해서 하는 말이 "이 녀석아 제발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만 해라"면서 때립니다.

이는 잘못했다고만 하면 멈추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그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고 끝까지 맞는 녀석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때리던 사람이 지고 마는 어이없는 순간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꼭 주셔야 하겠는데 그러나 구한 다음에 주어야지 구하지도 않는데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구하는 마음이 되고, 두드리는 마음이 되며, 찾는 마음이 되어서 그를 통해 은혜를 알고 가치를 아는 겸손한 마음이 되었을 때에 주셔야겠다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여기에 다시 한 마디를 더해 보면 이는 "구하기만 하면 주겠다"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시기 위해서 구하라시는 말씀! 그러기에 이것이 복음이지요. 그리고 이 말씀 속에는 약속이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 우리는 그 약속의 허락을 미리 받고 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의 약속을 이미 받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기도해 보아서 주실는지, 안 주실는지 하는 불투명한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구하기만 하라! 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방법까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받을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다름 아닌 구하는 것입니다. 별나게 이런 저런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그저 구하기만 하라! 그러면 내가 주겠다며 원하는 바를 받을 수 있는 그 방법까지를 일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며,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분명히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깊이 음미해 보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 그 방해의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내면에 깔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은 율법주의적 요소입니다. 이는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생각하기를 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자격이 없다거나 내가 구하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에게 전도를 해보면 "목사님, 아예 저보고는 예수 믿으라고 하시지 마십시오. 저는 워낙 형편없이 살기 때문에 저 같은 게 교회에 나갔다가는 온 교인이 다 웃을 것입니다. 저런 놈이 교회에 다 나가나 해서 아주 교회를 버립니다. 그러니까 저 보고는 나가라고 하시지 마세요."라고 하는데 이는 얼핏 듣기에는 가장 겸손한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아주 고차원적으로 교만한 것입니다. 감히 자기 자격을 생각하며 나서겠다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래서 또 어떤 이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체면도 없다면서, 회개하고 또 죄짓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그리고 무엇을 달라고까지 하니 어쩌면 그렇게도 염치가 없을 수 있느냐며 비꼬아 말하는 것을 보게도 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염치가 없기는 없지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구해야 하고 그 구한다는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 자격을 따지자고 들면 감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 자격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십니다. 이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4 : 14)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 여기에 필요한 자격은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자격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우리의 자격으로는 결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든 적든 그 차이는 오십보 백보에 불과한 것이니 조금 낫고 덜하고는 신경 쓸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어느 누구도 자기의 자격으로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의 기록에도 보면 "구하라"고 할 때에 거기에 어떤 조그만 자격이나 조건을 논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어차피 모두가 무자격자인지라 자격을 따지기로 들자면 단 한 사람도 기도할 자격이 없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이런 저런 사람, 이런 인격, 저런 공로하며 일체의 언급이 없이 단 한 마디로 "구하라"는 것으로 끝이 났으니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으니 죄에 대한 가책이요, 무자격하다고 생각하는 율법의 요소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환경을 따지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웬만하면 자기의 힘으로 다해 보려고 하다가 정 안되면 그때에 가서 "주여!"하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마치 요즈음 젊은이들처럼 저희들끼리 먼저 연애하며 주고받고, 약속 다해 놓은 후, 사실은 결혼까지 다 해놓고서는 이제 결혼 예식을 하겠다며 부모 앞에 허락을 받겠다는 것인데 이는 다르게 말하면 비용만 주시라는 셈이니 이게 어디 되겠느냔 말입니다.

그렇게 되니 부모님 편에서도 아예 얼굴도 보지 않고 "(no)"하고 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기도가 꼭 아쉬울 때에만 손을 내미는 식의 기도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쉽게 되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일이 있든 없든, 하나님께 대한 문안은 거르지않고 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멋대로 살며 제멋대로 뻐겨오다가 이제 마지막에 와서, 정 죽을 지경이 되면 그제서야 주여 주여 하며 밤을 새우겠다는 데 저 같으면 그런 것은 잘 들어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마는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도 들으시나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무래도 한심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 좋을 때에는 하나님 이름 한번 생각지 않고 마음대로 하다가 맨 마지막에 와서 도리 없이 죽을 지경이 되니 이제 찾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신 말씀이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구하라"는 말씀은 항상 구하라는 뜻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든지 하는 나의 환경 조건, 그리고 나의 능력이 있고 없고에 준해서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기도를 방해하고 있어요. 이제는 작은 일도, 큰 일도, 그 모두를 하나님과 의논하십시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주의 능력으로 해결을 볼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건이야 있든 없든, 하나님께 구하는 자세는 항상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이 죄인을 진정 사랑 하실까 하는 것인데 이 같은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요 불 신앙으로 마침내 기도를 방해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발걸음을 더디게 만듭니다. 그러나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너무나도 단순하게 단 한 마디로 "구하라"고 말씀하실 뿐 자격이나 환경, 사랑 받을 대상으로서의 여부를 전혀 묻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돌과 뱀에게까지 비유를 하시면서 어찌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어찌 사랑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시며 확실한 하나님 자신의 약속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신학적인 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사랑하시고 그리고 꼭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락하시고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본문에서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세 가지 표현의 말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들 세 표현을 두고 매우 재미있게 비유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아쉬운 것이 있을 때에 어머니를 찾아 해결하는 과정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하여야 할 아쉬운 것이 있는 어린이는 먼저 "엄마"하고 어머니를 찾게 되는데 이 때에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 보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리 저리 한참 동안 찾고 부르짖다가 이제 저쪽에 어머니가 눈에 보이게 되면 그 쪽을 향해 찾아가서는 어머니를 향해 뭐라고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이쪽을 향하여 얼굴도 돌려 보이지 않고 무엇인가 자기 일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아주 붙들고 잡아당기게 되는데 그것이 두드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필요를 위해 어머니를 찾고, 찾아가서 두드려 기어이 소원을 이루는 어린이와 같은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구한다"는 것은 소원을 말하는 것이요. "찾는다"는 것은 간절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가만히 앉아 마음의 소원으로만 구하고 있을 수가 없어 몸을 움직이며 찾아 나서는, 그러니까 소원보다 더 강한 간절함! 그것이 바로 찾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드리는 마음! 이것은 행동을 말합니다. 구하는 바를 위해 완전히 열려지도록 더 가까이 가면서 집중적으로 부르짖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그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 언어 행동 등 전생활로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온 인격을 기울여 하나님께로 계속 가까이 나아가는 그런 상태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주의하여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오늘 주신 이 모든 말씀 중에서 단 한 마디의 말씀으로도 자기 의에 대한 언급을 하시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어떠한 공로나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 누구도 기도할 수가 없고, 물론 응답 받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반드시 주신다는 믿음! 바로 이 믿음의 확신을 더해 주시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만은 좋은 것으로 잘해 주고 싶은 거란 말입니다. 악한 자의 마음도 그런 것이라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시는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꼭 주겠으니 괜한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하기만 하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에 야고보서 42절 말씀에도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실패했을 경우 흔히들 그 실패의 원인이 무엇 무엇 때문이라며, 이런 저런 이유들을 나열하면서도 그 실패의 원인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람은 만나 보기가 힘이 듭니다.

여러분! 혹시 가정 생활에 실패를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원인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또한 사회 생활에 실패를 하셨다면 그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내가 오늘 하루를 사는 데에도 말 실수를 했고 행동에도 실수가 있어요.

그리고 마음이 울적하다면 그 원인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정적인 생각을 해보았느냐는 말입니다.

오늘 여기 주시는 말씀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아직 받지 못함은 구하는 기도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꼭 주시려고 하시는데 받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오직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매우 강한 표현으로 "하물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됨과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신다는 것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저는 귀신 들린 딸을 가진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애원하는 모습에서(15 : 21-28) 언제나 많은 감화를 받고는 합니다. 거기에 보면 어머니인 이 여인이 예수님을 향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크게 부르짖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자들이 말리기까지 합니다. 이제 세번째 단계에서는 모처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녀에게 주는 것을 개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시며 거절을 하십니다. 만약 저의 입장이 그렇게 되었다면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까짓 것,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되잖아요?"하고서는 돌아서고 말지 그렇게까지 수모를 받으면서 무엇 하러 계속 애원을 하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개들은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참으로 엄청난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처지가 아무리 불행하고 어렵다 하더라도 지금껏 사랑이 있었기에 살아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거듭 거듭 실패를 하며 병이 들고 어쩌고 하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 만큼이나마 사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그 여인의 정신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또한 사랑하시기에 오늘 내가 있음을 우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욕심이 많기에 불평이 많습니다마는 이제 한번 겸손하게 생각해 본다면 지금 이대로의 것도 얼마나 굉장한 은혜인가 말입니다. 어디를 보나 내 자격보다는 훌륭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입니다.

따라서 나의 나됨에 대해서는 굉장한 은혜일 뿐, 개라는 소리를 들어도 좋아요. 그것은 주인의 개이기에 주인이 먹여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의 말씀입니다. 너희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왜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첫째는 꼭 주시겠다는 절대 신뢰요, 두 번째는 그것도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어느 부모가 떡을 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떡이 아니면 무엇이라도 먹을 것을 주겠지 먹지 못할 돌멩이 따위를 주겠느냐? 뿐만 아니라 생선을 달라고 한다면, 독을 피우며 물려고 하면 해로운 뱀을 주겠느냐? 그 어떤 부모가 몹쓸 것을 줄 리가 없고 해로운 것을 줄 리도 없다는 말입니다. 누가 복음 11장에 있는 같은 내용의 말씀에는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달걀을 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조금만 쏘여도 그대로 죽게 되는 그러한 독을 지닌 전갈을 줄 고약한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리가 없고, 들어주시되 더 좋은 것으로 들어주시고자 하신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더 필요한 것, 질적으로 최선인 것, 그리고 최선의 시간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하는 바를 위한 최선의 적절한 시간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이는 곧 어렸을 때에 필요한 것과 어른이 되어서의 필요한 것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달란다고 하여 그대로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시는 최선의 시간, 최선의 질, 최선의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이에 탈무드에 보면 한 랍비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어떤 랍비가 조그마한 당나귀를 타고 혼자 여행을 하다가 해가 지자 광야에서 천막을 치며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사자가 와서는 당나귀를 물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는 이제 큰일이 났구나 하고 있는 중인데 이번에는 시계처럼 가지고 다니던 닭 한 마리까지 늑대가 와서 물어가 버린단 말입니다. 이렇게 다 빼앗기고 나니 이제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자기 전에 성경을 읽어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갑작스레 회오리바람이 휙 하고 불어 등불이 꺼지는가 하면 등잔마저 쓰러져 기름까지 다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자니 이제는 그저 어둠 속에 묻혀 있을 뿐 다른 도리가 없게 된 것이지요. ! 당나귀가 없어졌지요. 시계의 몫을 하는 닭도 없어졌지요. 그리고 등불마저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 랍비의 지금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조금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에서 기도를 하고 그런 대로 하룻밤을 천막 속에서 지낸 것입니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낸 후 아침에 일어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어떤 마을 바로 옆에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마을 전체가 불이 나서 연기를 피우고 있기에 무슨 일이냐며 물어 보았더니 지난밤에 강도들이 와서는 전부를 빼앗으며 불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야 이 랍비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강도들이 지나갈 때에 나에게 당나귀가 있고 닭이 있어서 소리를 질렀으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물론 등불을 켜 놓았더라도 죽었을 것이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싹 쓸어가 주셔서 무사했구나! 오 하나님! 미처 알지 못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인 줄은 모르고, 이래야만이 사는 것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괜히 원망을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을 당할 때면 그때마다 너무 빨리 원망을 합니다마는 분명한 것은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한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기도를 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내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다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하심으로 허락 않는 응답을 응답으로 받게 됩니다. 이 때에 사도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가 아프고 괴롭지만 지금의 그대로를 그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좋은 것, 더욱 필요한 것, 가장 요긴한 것, 그리고 다함이 없는 영원한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 111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더 좋은 것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으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 신령한 것, 더 영원한 가치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다. 나는 세속적인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나는 순간적인 것을 원합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나는 지금에 안일하기 위해 구합니다마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고자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하는 바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의 "구하라"는 말씀은 오직 하나님께만 구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로 너의 소원의 방향을 돌려라! 그렇게 하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우상에게로 가지도 말고, 사람에게 묻지도 말며 오직 내게로 행하라! 내게 구하라! 내가 주겠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또한 "찾으라"는 말씀은 잃어버린 귀한 물건을 찾듯이 간절한 마음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귀중한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애써 찾아다니는 그러한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한 것이거나, 아니면 바로 되거나 틀려도 상관이 없는 그런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반드시 바르게 맺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나는 자녀인 이 관계가 파괴되면 그때엔 살수가 없어요. 그래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 오늘의 현주소로서는 살수가 없고 주를 만날 수가 없어요. 오직 이 현재의 처지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거기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두드리라"는 말씀은 찾기는 찾았으나 문이 닫혀 있어요.

그렇다면 이제 문 앞에서 열릴 때까지 계속 두드려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노라면 마침내 문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의 헬라 원문의 시제를 보면 현재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반복적인 것이요, 계속적인 것으로 일생을 두고 계속하여 구하며, 계속하여 찾고, 계속하여 두드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두고 이를 향하여 재촉하시면서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겠느냐? 또한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겠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언제나 더 좋은 것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이제 우리는 진정 더 좋은 것으로 받아야 하겠고 나아가 이미 받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결코 인색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참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들을 모두 준비해 놓으시고 이 시간도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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