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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수 없는 신분(4장 8~11절)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저 먼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 가보면 아직도 씨족공동체적인 종교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만 해도 그런 곳이 더러 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깊은 종교적 인습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로부터 떠나 또다른 공동체로 영입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온 가정이 철저하게 한 우상을 섬긴다고 합시다. 이런 가정에서 그 구성원 중의 하나가 예수를 믿으면 그는 가정에서 완전히 소외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쫓겨나기까지 합니다. 어릴 적에 저의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삼대 독자였습니다.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겠습니까? 이런 아들이 그런 옛날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습니다마는 우리 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 얼마동안은 술과 담배를 묵인했습니다.
그러다가 안되겠다 싶어 어느 때에 회의를 열어 이것을 금하기로 결정했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기독교가 술 담배를 인정하던 그 시절에 예수를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 매를 맞고 쫓겨나서 한 달 동안이나 집에 못 들어가셨답니다. 애지중지하는 삼대 독자 금지옥엽을 그토록 무섭게 체벌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천하의 불효라고 노발대발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한 공동체로부터 정신적으로 일단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는 다른 공동체에 예속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예속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참 힘들이지 들 않고 예수를 믿습니다. 간혹 본인은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자녀들에게는 나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직장 안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해서 크게 핍박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면서 오히려 믿는 사람을 더 좋게 이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참 좋은 세상에서 예수 믿고 있는 셈입니다. 그 옛날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동남아시아 같은 곳에서는 예수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죽이는 데가 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비슷한 일이 더러 있었습니다. 얼마전 방글라데시에서 십년 간 일해온 선교사가 원주민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고생 끝에 한 사람을 전도해 놓았더니 선교사도 추방당하고 그 사람도 쫓겨났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인데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저 내가 아는 것 중에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전에는 주일이면 야외로 놀러 나갔지만 이제는 교회에 나간다 하는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고들 생각합니다. 사실은 엄청난 변화가 있어야 하고 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엇비슷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이 확실해야 진실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선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섬기던 나의 주, 나의 주인으로부터 완전히 떠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기에 나에게는 예수만이 소중합니다. 절대적으로 소중합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합니다. 이전에 좋아하던 것들은 이제 다 시시합니다. 이전에 좋아하던 것이 아직도 좋다면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성향, 취미, 가치관, 목적이 다 변해야 합니다. Christian value orientation-사회학적으로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기독교적인 가치로 바뀌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그 가치가 평가됩니다. 그것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사실상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알게 됨으로 해서 오랜 기간 방황하던 사람이 이제 예수께 모든 생각과 지식의 초점을 모으게 됩니다. 만족합니다. 다시는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올바르게 예수 믿는 사람의 자세가 이렇습니다. 이제는 예수의 능력과 은혜를 알았기에 죄의 사슬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를 알고 진리를 알았기에 거짓과 헛된 일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율법의 속박에서 떠나게 됩니다. 율법은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이 아무리 나를 공갈 협박하여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게 되어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없어집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만이 중요합니다. 심지어는 예수까지 자기 중심으로 믿습니다. 내 목적,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하수인으로 맞이하는 것이지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나의 중심이 되고 나의 주가 될 때에 비로소 예수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 원칙이 이것입니다. 옛것이 여전히 좋고, 거기에 여전히 매력을 느낀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로 돌아가려 한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옛것을 상기시킵니다. 너희들이 옛날에는 이러했으나 지금은 변했다는 것을 누누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첫째, 옛날에 너희들은 종이었다고 합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생각의 자유도 없고 가치관의 자유도 없고 의지의 자유도 없습니다. 끄는 대로 끌려가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들이 되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어째서 다시 종으로 돌아가려 하느냐-돌아갈 수 있는 성격의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종의 신분이 자녀의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자녀의 신분을 받은 사람이 그 생활이나 생각하는 것이 여전히 종과 같고, 또 종으로 다시 돌아가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둘째, 전에는 우상을 섬겼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가는 비참한 인간이었습니다. 우상의 노예, 우상의 하수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다시 우상을 섬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간혹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상을 섬기거나 그 방법이 아직도 우상숭배 하던 방법에 매여 있는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셋째, 전에는 율법에 매여 있었으나 이제는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율법주의자로서 율법의 강한 속박에 매여 있었습니다. 매여 있다가 자유를 얻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는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살기 시작했습니다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무지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가 다시 어리석음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넷째, 전에는 유치한 자였는데 다음에는 성숙해졌다고 합니다. 몽학선생 아래 있던 어리석은 자였습니다마는 이제 성숙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치한 짓을 하고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또다시 몽학선생 밑에 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이냐-돌아갈 수 없는 신분인데 너희들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구나 라고 사도 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놓고 다시 한번 하나하나 생각해봅시다. 8절에서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란 곧 우상입니다. 거기에 종노릇하였다고 합니다. 우상이라는 것,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사실 우상은 없습니다. 귀신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섬기는 그것이 있지 않습니다. 마치 있는 것처럼 섬길 뿐입니다. 오래 전에 길을 지나가다 보았던 광경입니다. 좁다란 골목 안에서 한 할머니가 자동차 앞에 제삿상을 차려놓고 열심히 빌고 있습디다. 과일과 여러 종류의 음식을 잔뜩 차려놓고는 거기다 대고 사고 없게 해달라며 기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경하던 동네아이들이 빌고 있는 할머니 몰래 뒤에서 사과를 하나둘 훔쳐냅니다. 정말 볼만합니다. 잠시후 할머니가 사과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는 돌아서서 마구 욕을 합니다. "이 고연 놈들 같으니!" 한참 아이들에게 욕을 퍼붓고는 다시 빌고, 욕을 하고, 다시 빌고는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느라니 '내가 귀신이라 해도 저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듭디다. 도대체 정성이 없습니다.
그토록 정성이 없어서야 무슨 일인들 되겠습니까?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조금 직선적이어서 실례가 되겠습니다마는 차례(茶禮)나 제사도 그렇습니다. 제사지내는 과정을 보면 참 우습습니다. 조상님이 와서 잡수신다고 밥에 물을 말아 숟가락까지 얹어놓습니다. 잡수실 동안은 문을 닫고 밖에 나가 있습니다. 잡숫기는 무엇을 잡수십니까?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기는 짓입니다. 없는 것을 꼭 있는 것처럼 만들어서 합니다.
교인 중에 예수를 믿은 지 일 년쯤되는 분이 있었는데 그에게 큰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는 일년에 스물네 번이나 제사를 드려왔는데 예수 믿은 다음 그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정월에는 누구 이월에는 누구 하면서 조상님 각각에 대한 제사를 드려왔습니다마는 예수를 믿으면 제사를 못 지낸다고 하니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정월 초하룻날 부목사님을 모셔다가 차례 대신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목사님이 예배를 드리고 돌아간 다음에 남편이 찌뿌둥해져 있더니 꺼림칙하다며 다시 차례를 지내자고 했답니다. 그 다음해에는 제가 갔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 터라 예배를 마친 다음에 "또 뭔가를 하겠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안 하겠다고 극구 부인합디다.
그래서 제가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상님들 따로따로 할 것이 뭐 있습니까? 하려거든 초하룻날 다 모이게 하여 한번만 하십시오. 귀신님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서로 인사도 나누고 얼마나 좋습니까?" 우스갯소리처럼 한마디했더니 안 하겠다고 손을 내젓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정말로 하지 않습디다. 생각해보면 제 말이 확실히 합리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사실이지 매번 할 것이 있습니까? 일년에 한번으로 모아서 하면 다 모일 수 있어 좋지 않습니까? 하지만 보십시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이란 원래가 다 거짓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여 그 거짓에 마냥 끌려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가 하면 우상은 우리를 협박합니다. 이러면 저주를 받고 저러면 액운에 빠진다, 무슨 앙화가 닥친다, 무엇이 잘못된다 하고 협박을 합니다. 어느 날은 빨래하면 안되고 어느 날은 장가가면 안되고 어느 날은 이사가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믐날이면 트럭을 구하기가 힘듭니다. 너도나도 이날로 몰아서 이사하기 때문입니다. 힘든 일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협박과 공포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두려워합니다. 귀신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누가 반가워하겠습니까? 단지 무서워서 할 수 없이 섬길 뿐입니다.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이 때문에 생활에 많은 규제를 받습니다. 생각마저 부자유해집니다. 그 금기에 완전히 종이 됩니다. 종으로서 섬깁니다. 마치 탕자가 집을 나가 방황하면서 방탕함의 노예가 되었듯이 노예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상의 노예가 되어 지내다가 지금에 이르러 자유함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은 전도할 때에 이렇게들 말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십시다!"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으니 교회에 나갑시다!" 그러나 우리 교회사를 살펴보면 초창기에는 이렇게 전도해서는 통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우상을 많이 섬기던 때였으므로 다른 방법을 동원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 귀신 섬기느라 고생하지 말고 하나님 귀신 예수 귀신만 섬깁시다" "이 한 분만 섬기면 다른 귀신은 꼼짝을 못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게 했다고 합니다. 사실 여러 귀신을 일일이 섬기기가 힘들었습니다.
이 귀신을 섬기면 저 귀신이 질투하고, 저 귀신을 섬기면 이 귀신이 토라져서 말썽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 귀신 섬기랴 저 귀신 섬기랴 일년 내내 바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귀신 하나만 섬기면 된다고 하니 '그것 참 간편하구나'하여 믿게 된 것입니다. 가만히 보십시다. 귀신들을 많이 섬기던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릅니다. 일찍이 믿었던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믿습니다. 더 열심히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긴 있습니다. 어물어물 믿다가는 또 보복 당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버린 귀신한테 보복 당하면 큰일 아닙니까? 하나님 귀신한테 바싹 붙어서 열성으로 믿어야 다시는 귀신들이 얼씬거릴 엄두를 못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새벽부터 열심히 교회에 나옵니다. 행동 또한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한번이라도 귀신을 섬겼던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이사하려고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모두가 편한 날을 골라서 이사가면 됩니다. 자녀들의 혼삿날도 따로 잡을 것이 없습니다. 사실 옛날에는 빨래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머리 감는 날도 따로 있었습니다. 아기를 낳아도 언제까지는 바깥 사람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등의 금기사항들이 숱하게 있었습니다. 웬만큼 머리가 좋아서는 다 욀 수도 없습니다. 이렇듯 복잡하게, 무섭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예수 믿고 나니 마음이 자유롭습니다. 이렇듯 자유로운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말이 됩니까?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철저하게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어리석음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9절)" 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헬라어 성경의 '그논테스 데온'은 '하나님을 내가 알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그노스덴테스'라는 말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노스덴테스 휘포 데우'는 '하나님으로부터 알리어졌다'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알리어졌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아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마는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 내가 알리어졌다는 것입니다. 좀더 의역하여 살펴봅시다. 내가 하나님을 알았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아셨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그가 먼저 나를 아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가 나를 아신다는 것에 근거한 것이요,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가 나를 아신다는 그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를 관찰해 보십시오. 얼마가 지나면 엄마 아빠를 알아봅니다. "아이가 날 알아보네"하고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마는 아이가 엄마 아빠를 알아보기 훨씬 이전에 엄마 아빠가 먼저 아이를 알았습니다. 태아적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아신다'하는 그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 내가 알리어졌다면 말입니다. 좀 더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예수를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예수를 믿었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는 안 믿으려고 했습니다. 안 믿으려고 멀리멀리 도망 다녔는데 하나님께서 끌어내어 꼼짝없이 믿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나를 먼저 아셨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원래 처음 믿는 사람일수록 내가 믿었다고 큰소리칩니다. 더 오래 믿고 깊은 신앙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믿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꼼짝없이 믿게 만드셨습니다. 오늘 교회에 나온 것도 내가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분들도 내가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나올 수밖에 없도록 이끄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지에 들어가야 진실한 신앙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가 알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그렇다면 이 귀한 사랑을 깨닫고서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은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9절)."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이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바와 같이 바로 율법을 말하는 것이요 십계명을 가리킵니다. '약하고 천한'-사도 바울은 율법을 이렇듯 단호하게 평합니다. 약하다고 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약하다'의 헬라어는 '아스데네'입니다. 이 말은 능력이 없다, 힘이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협박만 했지 능력이 없습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하고 자꾸 가르쳐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 너무 협박하지 맙시다. 자녀들에게나 남편에게 너무 협박하지 마십시다. 협박은 마지막에 하는 것입니다. 협박해서 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너는 왜 그렇게 공부를 못하니? 왜 남만 못하니? 왜 그 모양이니?"하고 자꾸 협박해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싹이 노랗구나. 그래 가지고야 앞으로 이 험악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니?" 이렇게 다그치고 채근하면 아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점점 더 공부를 못하고 천성이 망가집니다. 이럴수록 아예 일찌감치 집어치우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협박은 사람을 점점 죽여버립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불안에 떨게 되면 거짓 지혜만 발동합니다. 점점 나약해집니다. 긍지와 자랑을 느낄 때에 창의력이 발동하고 두뇌회전도 잘되게 마련입니다. 조금 잘하면 "야, 참 잘했다" "너 어제보다 훌륭하구나"하고 자꾸 칭찬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꾸준히 발전해나갈 가능성이 나타납니다. "그 정도면 잘했다, 훌륭하다"하고 격려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율법도 그와 같이 언제나 부정적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이는 이로 갚는다, 눈은 눈으로 갚는다-협박을 합니다. 율법은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무능합니다.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 오직 용서,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이 사람을 구원하며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역사를 이루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율법을 약하다고 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다음으로, 천한 율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천하다'는 헬라어로 '프토카'입니다. 이 '프토카'는 재미있는 말로 원뜻이 '거지 모양' '거지꼴'입니다. 몹시 초라하고 불쌍하다는 말입니다. 결국 율법이 해 놓은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율법 자체도 초라하고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시달리는 사람들도 초라할 뿐입니다. 거지꼴로 불쌍합니다. 그래서 궁핍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럴진대 왜 이렇듯 천하고 약한 초등학문, 즉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느냐-그게 말이 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의 성숙된 자유를 지키지 못할 때, 성숙된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에는 부득불 종의 형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는 감사 감격하며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좀더 잘 믿어보려고 하다가 어느 사이에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빠져버립니다.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 다음에 율법주의에 빠지고, 형식주의에 빠지고 급기야 위선에 빠집니다. 딱한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잘 믿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내 마음이어서 입니다. 내가 더 잘하고 내가 더 선하고 내가 더 봉사하고-이러는 사이에 예수는 싹 물러가고 그 자리에 내가 떡하니 올라앉습니다.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주위에 너무도 많습니다. 시험에 드는 사람들을 보십시다.
특히 신앙적인 시험에 들어서 잘못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남보다 유달리 잘 믿으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신비주의가 있습니다. '신비'와 '신비주의'는 다릅니다. 신비주의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입니다. 자유주의는 내가 선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도 내가 기도를 많이 하고 내가 금식을 많이 하고 내가 경건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므로 인본주의입니다. 신비주의가 인본주의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공로, 내 의, 내 극기, 내 금욕, 심지어 내 경건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고 하는 생각 자체가 인본주의입니다.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에 얽힌 유명한 일화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회심을 하고 뜨거운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 말했습니다. "내가 회심을 하고 중생의 체험을 하기 전에도 선교자였으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다. 나는 예수를 열심히 믿었고 온갖 종교적 일에 몰두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들의 믿음이 아니요 종의 믿음을 가졌었노라." 아들의 믿음과 종의 믿음은 다릅니다. 종의 믿음은 억지입니다. 억지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에 무리가 따릅니다. 반면 아들의 믿음은 특권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의무라고 생각합니까? 특권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도하라고 하니까 해야지. 안 했다가 화를 당하면 어떡하나.' 억지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의 믿음입니다. '나는 공로가 하나도 없는 죄인인데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은혜스럽고 고마운가.' 이것이 특권입니다. 기도는 특권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당하게 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모든 것을 특권으로 압니다. 봉사도 특권으로 압니다. 내가 받는 사람이 되지 않고 주는 사람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도 내가 건강하여 봉사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도 내가 수고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도 내가 교회에 나갈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모든 것이 특권이요, 영광이요, 은혜요, 감사일뿐입니다. 안 하면 벌받을 것이다, 저주받을 것이다 하는 생각에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종의 믿음이요, 마땅히 우리는 종의 믿음과 아들의 믿음을 구별해야 하겠습니다.
종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 본문에서 하나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과 해를 삼가 지키니(10절)"라고 합니다. 날은 안식일이요 달은 월삭입니다. 절기는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을 가리킵니다. 해는 안식년, 즉 희년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철저히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지키느라 열심인데 그러다 보니 지키는 행위만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지켰는데 나중에는 억지로 지킵니다. 안 지키면 혼이 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며 하는 척만 합니다. 마지막에는 부득이하여 하게 됩니다. 이래가지고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스란히 형식만 남습니다. 종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쉽게도 이런 말을 합디다. 아무래도 새벽기도가 꽤 벅찼던 모양입니다. "새벽기도 누가 만들었지? 괜히 만들어서 말썽이야."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억지로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억지로 하라고 했습니까? 누가 꼭 그렇게 하라고 시켰습니까?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할 것이요 아니면 말 것입니다.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만 받아들여야 됩니다. 절대로 형식주의나 율법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매사에 다 그래야만 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일, 주일 성수 하는 일, 우리의 경건생활 전부가 절대로 의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거운 짐이 되거나 종의 선에서 지켜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부득이하여 하는 것은 안됩니다.
자유로이 지켜야 됩니다. 은혜로,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야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기쁨이 따라가야만 사랑입니다. 혹시라도 억지가 따라가면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자유로이 지켜야 합니다. 그 뜻을 알고서 지켜야 합니다. 말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담겨 있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의미를 알고 의미를 살려나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 : 11~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과 십계명을 주실 때에는 분명히 사랑으로 주시고 복받으라고 주셨습니다. 만일에 이것을 무리한 마음으로, 저주받을까봐 두려워서 억지로 지킨다면 율법주의, 형식주의, 바리새주의, 위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들의 신분에서 잠시라도 종으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은혜로 살 것이요 율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야 합니다. 한순간이라도 나 중심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일에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순종에도 감사, 봉사에도 감사, 심지어 순교에도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매를 맞고 예수의 이름으로 순교하게 된 순간에도 아마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으로 벼락을 맞아 지옥으로 떨어져야 마땅한데 이렇게 예수 믿게 되어 전도자, 사도가 되고 또 순교자까지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에 있는가-고초를 당하면서도 그는 감사하며 찬송을 부릅니다. 그 찬송이 옥문을 엽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와 찬송이, 특권에 대한 감격이 동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날 때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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