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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감람나무(롬11:24)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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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감람나무(롬11:24)

 

오늘의 본문에는 돌감람나무에 대한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의 직분이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는 스스로 이방인의 사도됨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본래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동족 유대사람이 예수 믿기를 간절히 바랐기에, 할 수만 있으면 유대사람을 위해서, 자기 동족을 위해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봅니다마는 이상하게도 유대사람들은 잘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방사람 만큼도 안 믿는다 하는 뜻은 아닙니다. 보세요. 바울은 성경을 알고 있거든요. 그는 유대사람의 전통을 알고 있어요. 유대사람의 전통과 성경을 아는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를 안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당연히 믿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저들은 성경을 알면서도 안 믿어요. 오히려 이방사람들은 성경도 몰라요, 전통도 몰라요, 우상만 섬겨요. 유대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야말로 개처럼 사는 거예요. 부도덕하고 비종교적이고 우상숭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옵니다. 당연히 믿어야 할 유대사람들은 안 믿고, 오히려 안 믿을 것 같은 이방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듯 유대사람한테 배척을 받으면서도 결코 그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능을 스스로 겸손히 인정합니다. 유대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분을 통해 역사 한다-이것입니다.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 있잖아요? 예루살렘에는 그런 귀한 주의 일꾼들이 있어요. 바로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에 역사 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께 맡기자. 그들에게 맡기고, 내게 맡겨진 일은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이렇듯 자기에게 맡겨진 분깃, 혹은 자기에게 맡겨진 자기 나름의 function, 자기에게 주어진 기능을 그는 겸손히 인정하게 됩니다. 대단히 중요한 결단인 것입니다. 마음은 유대사람에게 가고 싶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는 아니다. 너는 이방사람에게 가야 한다'-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15, 16절에서 그는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그도 그럴 것이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거든요. 이방 땅에서 출생했어요. 이런 문화적 상황, 문화권적 상황이 그를 이방인의 사도 되게 하는 가장 적절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바 은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방사람에게 가야 한다, 라고 이방사람의 사람됨을 스스로 만족히 여깁니다. 감사하게 여깁니다. 이쪽으로는 성공적이에요.

그런데 유대사람들 앞에서는 성공적이지 못해요. 그래서 본래 가졌던 그 마음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를 인도하신 길은 바로 이방사람들에게 있다, 하고 자기의 길을 정합니다. 그리고 만족히 여깁니다. 순종하여 충성을 다합니다.

이런 마음도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저 자기가 좋은 대로만 하는 게 아니예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예요.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좋아 보이는 것만이 사명이 아닙니다. 효과적 부름이 있어요. effective calling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가-그것을 분명히 알고, 그 길로 내 몸과 내 정성을 다 쏟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회개하지 않는 유대사람들한테 계속 집착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집착을 포기합니다. 생각을 온전히 이방사람에게로 돌립니다. 그러면서 그는 멀리 내다봅니다. 유대사람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반드시 저 유대사람을 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당장 나가서 부딪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먼훗날에 이루어질 그 목적을 향해 오늘 내가 해야 할 process,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높은 strategy, 선교전략입니다. 이는 신앙적 이해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세요. 실제로 유대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사람으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야 저들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그는 두 가지 길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Christendom, 참으로 훌륭한 기독교의 세계, 예수 믿는 사람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Christian model입니다. Christendom으로서의 하나의 표본, 이것을 보이겠다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하면 이방사람에게 예수를 전해서 저들이 예수를 잘 믿도록 만들고, 잘 믿어서 복 받고 잘살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함으로써 유대사람들을 시기 나게 하겠다는 거예요. 질투 나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나도 예수 믿어야겠다-이런 마음을 가지게 하겠다는 것이지요.

 

현재 이스라엘나라에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예수를 믿고 복 받았는데, 우리는 예수를 배척하다가 이 꼴이 뭐냐, 라고 저들은 말합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깨닫기 시작했어요. 사실이 그렇거든요. 좀더 겸손하게 생각하면 그것, 옳은 말이거든요.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고 잘살고, 그렇게 번영하고 복 받았는데, 예수 믿은 나라마다, 예수 믿은 민족마다 그렇게 잘사는데 유대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이켜볼 때에는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이 방법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assimilation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 이 교육이라고 하는 것에는 assimilation이 있고 dissimilation이 있습니다. assimilation -자꾸 좋게 보여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흠모하고 사모하고 좋아 보여서 모방하고 닮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이것이 바로 assimilation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좋은 모델을 보이는 길밖에는 없어요.

죄송하지만 제가 본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를 한 다음에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훌륭한 교수가 되고자 했어요. 그래서 목회하는 동시에 열심히 가르쳐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교수만 하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실은 교수가 되어서 좋은 목사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학생들이 말을 안 들어요. 아무리 가르쳐봐도 안돼요.

될 것 같지도 않아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모범적인 교회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표본을 보여야겠다, 여기에 참교회가 있다, 여기에 살아 있는 교회가 있다, 이것이 진정 이 세대를 위한 바른 교회다 하는 것을 보여줘야겠다, simple, 좋은 model을 하나 보여줘야겠다, 그렇게 하기 전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렇다 저렇다 아무리 설득해도 안돼요. 심지어 학생들은 이렇게 말해요. 그래도 안됩니다, 신학적으로야 그렇지, 실제로는 안 됩니다라고요. 교회 부흥을 도모해야 된다고 얘기해도 그것 안된다니까요, 뭐 이렇게 나와요. 정말 하나를 딱 보여줘야겠습니다. 그래서 소망교회를 세운 거예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따지고, 이론으로 뭐라고 하지만 이제는 그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그러지 말고 모범을 보여주세요. 아이들한테 공부하라 공부하라 하지 말고, 저녁에는 텔레비전을 딱 끄고 책을 보며 앉아 계세요.

하다못해 잡지책이라도요. 부모가 책을 보고 있는 것을 봐야 아이들도 책을 보지요. 정착 부모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이들한테 ", 공부해라. 공부해서 남 주냐?"-그러니 이게 됩니까? 물론 맞는 말이지요.

공부해서 남 줍니까? 자기를 위한 공부요, 열심히 공부하면 좋다는 것쯤은 누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게 아니거든요. model 을 보여줘야 합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굉장히 나무라면서 "이놈아, 공부 열심히 해. 에이브러햄 링컨은 너만한 나이에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됐다더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제 아버지를 힐끗 쳐다보더니 하는 말이 "아버지, 링컨은 아버지만한 나이에 대통령이 됐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표본을 보여줘야지요. 묵묵히 좋은 model을 하나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이방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해가지고 저들이 예수 믿고 잘사는 것을, 훌륭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것을 보여주겠다' 함으로써 유대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해서 assimilation, 따라오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하나의 교육방법은 dissimilation입니다. 이것은 반대로 역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 아이들도 그렇지 않아요? 무엇을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하지요. 왜냐하면 이제는 그런 길밖에는 없으니까요. 그래, 이 유대사람들이 예수 믿게 하려면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한 사도바울은 저들로 하여금 dissimilation작용을 일으키고자 했어요.

역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들이 반발을 일으켜서 주님 앞에 돌아오도록 말입니다. 지금은 저들이 유대사람됨을 고집하고 있지만, 이방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때에 저들은 오히려 반대로 역사 한다는 거예요. 사실은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이방사람이 믿게 됐어요. 또 그 다음에는 이방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유대사람들이 안 믿었지요. 바울은 이것을 반대로 이용했어요. 저들이 스스로 유대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이것이 dissimilation 입니다. 예를 들면 가까운 곳의 사람하고는 멀고, 먼 곳의 사람하고 가까운 거예요. 그렇게 역사 하도록 바울이 해보겠다는 것이지요.

, 이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5)."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같이-, 이미 하나님을 알고 율법도 아는 사람들이 예수 믿기가 이렇게 힘들어요.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우상만 섬기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마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과 같이 특별한, 기적적인 역사가 아니

어찌 가능하겠느냐 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먼훗날에 반드시 유대사람이 돌아올 것이다-그렇게 happy end-ing, 마지막 저 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절대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달 일간지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흥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우리가 다 존경하는 훌륭한 어른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아버지하고 달랐어요.

아버지는 그에게 기대를 많이 걸었지요. 하지만 그는 실로 문제아였어요. 대학에서는 두 번이나 퇴학당했어요. 이리 방황하고 저리 방황하고 방탕했어요. 참으로 아버지 속을 많이 썩였어요. 모두가 다 걱정했어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은 그 아들 때문에 더더욱 걱정했어요. 그러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전혀 낙심하지 않았어요. 언제나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어요. 결국에 그는 나이 많아진 뒷날에 정말 돌아왔어요. 프랭클린 그레이엄-지금 그는 종족 분쟁으로 말미암아 수백만 피난민이 발생한 르완다에서 전쟁 고아들을 모아 고아원을 만들고, 그 고아들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수고하고 있어요. 또 최근에 와서는 보스니아에 가서 전쟁 중에 성폭행 당한 그곳의 불쌍한 여인들을 모아 수용소를 경영하면서,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어요. 아버지는 일선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 아들은 뒤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 생명을 바쳐서 수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믿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은 이에 대해서 두 가지의 중요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가 소제(素際)입니다. 이에 관한 말씀은 민수기 1517절로 21절에 나옵니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에 대한 얘기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일, 이것이 소제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께 첫곡식을 바쳐요. 자식도 첫자식을 바치고요. 첫번 곡식, 밀을 거두었으면 그 밀가루를 하나님 앞에 거제(擧際), 손을 들어 바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바치는 예식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첫번 것을 바치고 나면 그것을 바침과 함께 뒤의 것도 다 바친 것이 됩니다. 가장 소중한 첫것을 바치면 다 바친 것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17)"-처음 곡식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면 이제 그 뒤에 따라오는 떡덩이도 그러한 것이 아니냐, 첫것을 바쳤으니까 뒤의 것도 다 바친 것이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모세-이스라엘은 이런 귀한 조상들을 다 하나님께 바쳤다, 그런고로 그 후손도 하나님께 다 바쳐진 것이다 함입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아브라함, 이삭, 모세,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다 이스라엘의 뿌리입니다. 그런고로 뿌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했다면 그 가지들, 그 후손들도 당연히 거룩한 것이 아니겠느냐, 어찌 하나님께서 저들을 버리시겠냐 함입니다.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 믿음의 유산은 이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뿌리가 있는 믿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들 마음속에 뿌리가 있어요.

저는 625때에 이런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미군들을 보면 그 생활이 그렇게 경건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러나 일선에 나갈 때에는 꼭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성경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나갑니다. 간혹 부상을 당하든가 하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그에 비해서 우리네 한국 청년들 가운데서 예수 믿는 사람을 보면, 평소에는 잘 믿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죽을 때에는 정말로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겠어요. 그럴 때에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 우리는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구나.' 그렇습니다. 뿌리가 깊지 못해서 그래요. 어떤 때에 보면 저들은 신앙생활을 하는지 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 신앙은 어렸을 때부터 받은 뿌리깊은 신앙입니다. 무릇 뿌리가 없는 것은 조금만 흔들려도 그만 무너집니다. 그런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어요. 지금 사도 바울은 뿌리깊은 이스라엘사람들의 전통 있는 신앙을 생각하면서 그 후손들이 어찌 하나님께로부터 온전히 떠날 것이냐, 또 하나님께서 어찌 보내실 것이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감람나무를 예로 듭니다.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에요. , 여기에 참감람나무가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접목())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야생뿌리가 있는 야생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별로 좋은 나무가 아니예요. 그래, 좋은 나무로 만들기 위해서 이와 종()이 비슷한 좋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이 나쁜 나무, 말하자면 질이 좋지 않은 나무에 접목을 시켜요. 그러면 이 좋은 나무 가지의 진액이 그쪽으로 흘러가면서 이 좋지 않은 나무가 좋은 종류의 나무가 돼요. 이것이 일반적인 접목법입니다. 우리 고향에서 보니 '고욤'이라고 해서 감이 손톱만하게 달리는 나무가 있어요. 여기에다 좋은 감나무의 가지를 꺾어서 붙여놓습니다. 그러면 다음 해에 그 나무에 큰 감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접목법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예요. 오늘은 또다른 얘기입니다. 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여기에 지금 똑같은 나무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는 질이 좋고 하나는 질이 나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질이 좋은 나무의 한쪽 가지가 영 열매를 맺지 않아요. 그럴 때에는 이 가지를 잘라버려요. 그리고 여기에 질이 떨어지는 나무의 가지를 꺾어다가 붙여놓아요. 그러면 이 가지가 진액을 받아 올리면서 좋은 나무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한 나무에서 여러 가지의 꽃을 피우는 방법이 있잖아요? 한 나무에다 여러 종류의 나뭇가지를 붙여서 그 진액을 받게 해 가지고 여러 가지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재주가 많아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으로 접목을 해서 그런 좋은 결과를 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의 뜻은 결국 이런 것입니다. 여기에 참감람나무가 있어요. 이것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 감람나무 가지가 열매를 시원치 않게 맺어요. 그래서 과감히 잘라버렸다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돌감람나무, 시원치 않은 잡종 나무의 가지를 잘라다가 붙였어요. 그렇듯 좋은 감람나무의 진액을 받도록 했더니 돌감람나무 가지에서 참감람나무 열매가 맺혔다-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돌감람나무는 자기 자신의 진액에 의해서 열매를 맺은 게 아니에요. 좋은 감람나무인 참감람나무의 그 전통성 있는 좋은 진액을 받아서, 한마디로 말하면 공짜로 쉽게 좋은 열매를 맺게 됐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뜻은 이렇습니다. 보세요. 전통적 신앙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이루어집니까? 이스라엘로 말하면 이것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거예요.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해서 에녹,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죽 내려온 것이 아닙니까?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전통에 의해서 그렇듯 귀중한 신앙적 정통성이 이루어졌어요. 이는 아주 귀한 보화와 같은 거예요. 그런데 오늘에 와서 그 열매를 잘못 맺고 있어요. 그러나 이방사람들이 이제 예수를 믿게 됐어요. 이방사람들은 전통이 없어요. 뿌리가 깊지 못해요.

그러나 이스라엘사람들의 그 전통에 접목돼가지고 쉽게 전통을 얻었어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여……'라고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이 우리 조상이에요? 사실은 이스라엘사람들의 조상이에요.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그 분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에요.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바로 우리의 역사예요.

특별히 우리는 민족적으로 많은 수난을 겪었기 때문에 이상하게도 구역성경을 좋아해요. 세계적으로 우리처럼 구약성경을 좋아하는 나라가 없어요. 민족사가 비슷해서입니다. 815해방 전에 목사님들은 설교 가운데 적어도 3/4은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했습니다. 하나는 민족 수난사가 이스라엘과 비슷하기 때문이고, 또하나는 율법적 관계가 유교 맥락과 비슷한 데가 많기 때문이지요. 효도하라, 아니면 쳐죽이라, 하는 말씀을 보고 '맞아! 효도해야지'합니다. 그 말씀이 마음에 든단말이에요. 이런 전통, 이런 높고 긴 신앙전통을 우리는 지금 거저 얻은 거예요. 그실 우리의 것이 아니예요.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 것을 우리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적 신앙의 유산을 우리가 그대로 우리의 뿌리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이것이 바로 '접목'된 것 아닙니까? 그런고로 오늘의 성경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 함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된 거에요. 십자가의 구속은 유대사람들의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성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유대사람들의 제사성, 여기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리고 유대사람들의 선민사상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가 선민적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분들은 한국사람은 말세에 택함 받은 백성이라고까지 말해요. 특별히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이 재림에 대한 대망사상은 유대사람들의 메시야 대망사상이 그리스도적으로 다시한번 재해석된 것이에요.

그러고보면 우리 신앙의 깊은 정통성이 이스라엘사람들의 역사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저들에게 접목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접목된 우리는 어떠해야 됩니까? 전에 가졌던 돌감람나무의 속성을 버리고, 깨끗하게 새롭게 접목된 참감람나무의 속성을 그대로 받아서 참감람나무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참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이스라엘, 진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어느 날, 강가에 거북이 한 마리가 앉아있는데 전갈 하나가 오더니 이런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거북아, 내가 저쪽으로 건너가야겠는데 나를 네 등에 태워서 저 건너까지 좀 데려다줄래?" 거북이는 멀찍이에서 대답했습니다. "너는 원래 쏘는 기질이 있는 놈 아니냐? 물 한가운데서 혹 네가 나를 쏜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을 텐데 내가 왜 너를 업고 가겠느냐?" 그랬더니 전갈은 "이놈아, 그것은 논리적으로 안 맞는 말이다. 네가 한가운데 갔을 때에 너를 쏘면 너만 죽겠느냐? 당연히 나도 죽지. 그러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거북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 말이 옳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오냐, 하고 전갈을 업고 물로 들어갔는데 웬걸, 한가운데에 이르자 전갈이 갑자기 쏘는 것이었어요. 거북이는 물에 빠져 죽어가면서 전갈에게 물었습니다. "이놈아, 이렇게 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데 왜 이랬느냐?" 그러니까 전갈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쏘는 것은 내 속성이란다." 아주 철학적인 얘기예요. 나는 쏘는 것이 속성이니까 쏠 수밖에 없다, 죽든 살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논리적인 게 아니라는 거예요. 속성이라는 것은 초논리적인 거예요.

그런고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지난날 우리가 가졌던 그 전통성,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그 못된 속성, 그 본질을 확 바꿔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중생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성경적 맥락, 성경적 신앙, 그 신앙의 전통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실 아주 본질적 변화, 본성적 변화, 속성적 변화를 말하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성서적 신앙의 전승을 따라 우리가 참이스라엘로 꽃피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의 아주 심오한 말씀인 것입니다.

, 이제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바로 이 입장에서 본다면 절대로 자랑할 것이 못돼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아야 돼요. 양자가 되었다면 양자된 것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할 뿐, 본래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요. 그런고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감람나무 가지도 열매가 없으면 가차없이 끊어버리는데, 돌감람나무 가지를 붙였다가 거기에 열매가 없으면 그까짓것 끊어버리는 것은 쉬우니까요. 그런고로 이방인 너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두려워하라, 조심하라, 그리고 뿌리에 꼭 붙어 있어서 정말로 귀한 참감람나무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그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믿음의 전승을 지켜야 하고, 성서적 정통 신앙을 지켜야 하고, 성서적 맥락에서 믿음의 참뿌리를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돌감람나무 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서 참감람나무가 되게 하는 기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멀리 내다봅시다. 하나님께서 저 잘라버린 참감람나무 가지를 아주 버리시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결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에요. 이방사람도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 같은 큰 기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거든 하물며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영원히 버리시겠느냐, 그럴 리가 없다, 반드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이렇게 바울은 멀리 내다보면서 새로운 역사의 세계를 환히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요 사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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