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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마태복음 10장 26절)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 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오늘 주신 예수님의 잠언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세상에 비밀이란 없다, 다 드러나게 된다고 하심입니다.
'두려움'은 사람이 지닌 기본적인 감정의 하나입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 하는데, 감정적 동물된 기본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예지능력(豫知能力)에서 오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람은 그의 앞에 될 일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앞의 일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바로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걱정할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주어진 예지능력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앞에 놓인 일을 미리 생각하여 기뻐할 줄 아는 것도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일 년 뒤에 있을 일, 내일 있을 일, 이를테면 약혼한 사람은 결혼한 다음에 있을 일을, 젊은이들은 장래에 하고 싶어하는 일을 꿈꾸면서 기뻐하게 되는 것 -이것도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능력이 좋은 방향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 걱정, 근심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좋지 않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성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예지능력은 행복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행복 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이것이 두려운 마음으로 바꾸어지게 되니 문제인 것입니다. 우선 자기평가가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내가 나의 나약함을 알고 있습니다. 앞에 놓인 것은 큰 사건인데 나는 조그마한 인간입니다. 감당할 수 없고 대응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능력의 한계를 알고 무능함을 자각할 때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도덕성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곧 '양심(良心)'입니다. 보시는 대로 양심이란 문자 그대로 '좋은(良) 마음(心)'입니다. 이 양심이 기쁨의 방향으로 작동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이라도 우리네 청소년들에게 '양심'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거짓말하고 나서 두근두근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대답이 많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아이들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기뻐하는 마음, 의를 행하면서 기뻐하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기뻐하는 마음 -이런 본바탕을 가지고도 못된 짓만 했으니 '두려워하는 마음'이 곧 양심이라고 말하게끔 형편이 돌아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류의 원초적(原初的)인 두려움은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종교심리학자들이 얻은 결론입니다. 밤이 되면 춥고 무섭습니다. 많은 맹수들도 있습니다. 어려운 일들이 주로 밤에 생깁니다. 그래서 밤을 무서워합니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빛을 찾아다닙니다. 해가 지는 서쪽이요 해가 뜨는 동쪽이므로 사람들은 되도록 이면 동쪽을 바라 이동하기를 버릇합니다. 어두움은 그토록 싫은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이 지닌 두려움의 첫째가 어두움인 것입니다. 어두움은 죽음과 통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미리 아는 능력이 사람에게는 있어왔습니다. 사람은 너나할것없이 죽음이라는 공포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걱정을 많이 합니다. 걱정하는 것이 잡다하게 많지만 그 심층으로 들어가 보면 결국은 두 가지 걱정으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죄책에서 오는 두려움이요, 하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밖의 걱정들은 다 하나마나한 걱정이요 시시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마음 깊은 곳에 이 두 가지의 어두운 그늘이 있는 줄 압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불행에 관한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행 자체는 두려워하면서 불행의 원인을 두려워할 줄 모릅니다. 불행은 죄로 말미암아 옵니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두려워할 일입니다. 죄를 지으면 당연히 불행이 따라오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죄를 짓는 데까지는 쉽게 하고 그에 따르는 결과에 대해서만 두려워합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죄 자체를 두려워하여 삼갈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바른 신앙인의 자세라면 당연히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알고 보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것을 보면 됩니다. 죄를 지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이냐 죄를 지어놓고 그 결과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냐 -이것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죄 자체를 두려워할 줄 모르고 죄로 빚어진 결과를 두려워합니다. 불행을 겁내면서 불행의 원인을 겁낼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이 '바보'지 바보가 따로 있습니까?
신앙인은 결과에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신앙인이 중시하는 것은 죄 자체입니다. 죄 자체를 두려워하고 삼갑니다. 불행을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의 원인 그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격(格)이 분리, 구별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으로 본다면 '두려움'이란 반드시 불필요하다거나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거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꼭 필요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경건(敬虔)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입니다. '경건'을 두고 옛날에는 영어로 God-fearing이라 하여 신앙심이 깊은 나머지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데서 '경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마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우러르는 것입니다.
필리핀이나 일본 같은 데는 지금도 불길이나 연기를 내뿜는 활화산이 있습니다. 이태쯤 전에 일본 후쿠오카에 갔다가 거기서 일부러 차를 몰고 두 시간이나 달려가서 제 눈으로 활화산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시커먼 연기가 간헐적으로 꿀럭꿀럭 올라오는데, 참 놀라웠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다 속에서 화산이 터지는 것으로, 이 때는 엄청난 해일(海溢)이 일어납니다. 이런 큰일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역사에 외경(畏敬)을 품지 않을 사람이 없을 줄 압니다. 이 두려움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작은 인간의 반응이므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두려움인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이 없다면, 그 없음으로써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는 데에 경건이 있고 바른 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마다 하나님의 감찰하심과 현존하심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도 계시고 저기도 계십니다.
저는 어느 곳이고 가기만 하면 시간을 내어서 잘 지은 예배당을 한 번씩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한번은 유럽의 어느 교회를, 예배당을 새로 지었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이상하게도 그 예배당에는 우리 같았으면 십자가가 있을 자리에 십자가 대신 커다란 눈(眼)을 그려놓았어요.
무섭다 싶은 그 눈을 두고 그곳 안내인이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니 참 재미있습니다. "저 눈을 무섭게 보는 사람도 있지요." '눈'이라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똑같은 눈인데도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스러워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다워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독기(毒氣)가 서려 있어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공연히 무서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찰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계시다, 나는 그 시선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내 뼛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신다, 나는 온전히 그 앞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니 저 눈앞에서 사람들이 어찌 경건해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예배당에서 십자가 자리에 눈을 그려놓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 것입니다.
성도들 간에도 마땅히 지닐 '두려움'이 있는 법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말을 잘못하면 어쩌나, 내 행위가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아닐까, 내 언동이 상대방의 신앙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는 안 되는데 --이런 두려움이 없이 살수는 없습니다. 함부로 말하고 무책임하게 행동하고 해서 그 후속결과로 엄청난 사건이 생겼는데도 책임을 안지는 것은 경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나의 모든 언행이 교회의 이웃들에게 얼마만큼의 덕을 끼칠 수 있겠는지, 그 점에 마음을 씁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이웃을 대함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두려움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바로 쓰고 있는 것입니까? 건강을 바로 쓰고 있습니까?
우리는 결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일하라고 재주를 주셨습니다. 그 재주를 어디다 쓰고 있습니까? 일하라고 젊음을 주셨습니다. 그 젊음을 어디다 쓰고 있는 것입니까? 또한 죄가 되는 줄 모르기에 자칫 범하기 쉬운 무서운 죄가 있는데, 바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 젊음과 재능과 건강, 물질, 시간…… 그 어느 것이라도 '땅에다 파묻어 둔'채 무위(無爲)로 지내는 것은 혹 아닙니까? 생각을 해보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사명자의 마음속에 늘 두려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일을 저러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죄의식'이라고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 그에 대한 가책(呵責)과 형벌의식으로 두려워합니다. 나쁜 짓을 해놓고 폭로될까봐 두려워합니다. 심 은대로 거둔다고 하는데 내가 심은 것이 좋지를 않아서 그 결식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율법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죄 자체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고,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됨됨이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해놓고 그 결과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려움'을 뜻하는 용어로서 세 가지의 헬라말이 쓰입니다. 비겁해서 두려워한다는 뜻의 '데일리아'가 있고, 나쁜 의미로도 쓰이고 좋은 의미로도 쓰이는 '포보스'가 있으며, 그리고 중요한 낱말로 '외경'에 가까운 두려움을 나타내는 '율라베이아'가 있는데, 이 말에는 '공경' '존경'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들 세 낱말 가운데 '포보스'가 제일 많이 쓰이는 바, 본문말씀에도 이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본문인 26절에뿐만 아니라 28절과 31절에도 이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본문말씀의 맥락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핍박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귀신 내쫓으시는 것을 보고 바알세불을 힘입어서라고,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귀신들린 사람으로 몰아붙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분해서 펄펄 뛰었을 것입니다. 가만있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정신병자를 고쳐주었는데 고맙다고는 못할지언정 도리어 바알세불이 씌었다고 몰아붙이다니 억울하고 분한 노릇입니다. "이런 고얀 놈들이 있나!" 성미 급한 제자들은 분을 참지 못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씨근거렸을 것입니다. 이렇듯, 좋은 일 하고 미치광이 취급받았습니다. 핍박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무릇 선교하는 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심입니다.
어디까지나 진리는 선포되어야 한다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니 두려워할 것이 무어냐, 사람들이 몰라주면 어떻다는 말이냐, 오해를 받으면 그게 대수냐, 저들이 술수 치고 모함하면 어떠냐, 미치광이라 하면 어떻고 무능하다고 비아냥거린들 어떠냐 하심입니다.
우리는 억울하고 분한 일이 있을 때면 열을 내어 기어이 한마디하고 싶어지는 것이 상정(常情)입니다. 그냥 묻어두고 넘어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발명, 변명을 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만 같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큰소리로 떠들어 밝히고 싶고, 신문에도 발표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다릅니다.
"감주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두려워도 말고, 걱정도 말고, 밝힐 생각도 하지 말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시고도 "바알세불이 씌었나보다" "귀신의 왕자가 씌었나보다"라고 비난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 알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대로 드러날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습니다. 선교(宣敎)하는 입장에서 보면 겸손을 공부하는 시간이요 온유함을 공부하는 시간이요 참신앙이 무엇인지를 나타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꾹 참아둘 것입니다.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걱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오해를 벗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입에 거품 물고 나섰다가 '본전'찾는 사람 못 봤습니다. 모든 오해를 받는다 해도 말을 하지 마십시오. 헛것입니다. 신앙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알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걸리는 그 시간은 우리에게 유익한 시간인 것입니다. 긴 것도 아니요 잠깐입니다. 1년 후에도 밝혀지고, 2년 후에도 오해가 풀립니다. 제 개인의 경험으로는 꼭 4개월이 걸린 적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백일하에 드러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내 입으로 침을 튀길 것 없습니다. 그 동안만 참으면 됩니다. 왜 말이 많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하시는 예수님의 귀한 잠언을 따라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변명을 하지 말 것입니다. 시시비비로 내 옳음을 드러내겠다고 안간힘을 쓸 것 없습니다. 부자 간, 모녀간에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가만히 있어보십시오. 길어야 4개월만 참아보십시오. 좋은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음은 담대함입니다.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다 밝혀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내가 다 정확하게 사실대로 알게 해줄 것이니 안달하지 말라,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니라. 너희는 오직 선교만 하라, 전도만 하라 -위로의 말씀이요 약속의 말씀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낙심하거나 우려하거나 할 것 없습니다. 비가 올까 안 올까, 가을이 올까 안 올까, 추수를 할까 못할까 --이런 걱정을 하지 말 것입니다. 열심히 뿌리기만 하면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고에 대하여 결코 생색을 내려 하지 마십시다. 어떤 사람들 보면 조그마한 수고 좀 해놓고 이걸 좀 드러내고 싶어서, 칭찬 받고 싶어서 가지회견을 청한다 방송국에를 간다 하고 기를 씁니다.
나 장한 일 했습네 하고 생색내고 싶어서 몸살이 납니다. 일 년에 한 번쯤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하여 라면 상자 깨나 전달하게 되면 그런답시고 꼭꼭 사진기자들에게 알립니다. 좋은 일을 했으면 숨겨두어야 재미가 나는 법입니다. 숨기고 있어야 진정 보람을 뿌듯하게 느낍니다. 그러하거늘 왜들 그리도 치졸하게 구는지, 보는 사람 낯이 간지럽고 뜨거울 지경입니다. 숨겨두면 주님께서 다 피아르 해주십니다. 비밀리에 한 일, 은밀하게 행한 수고가 다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는 물론이요 사람 앞에도 다 드러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죄인의 못된 짓도 다 드러납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시면서 예화로 드신 이야기 하나를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시골에는 늘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이 있었습니다. 눈이 하얗게 오던 날, 사랑방에 젊은이들이 모여 앉아 밤늦도록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행인 하나가 지친 몰골로 그곳을 지나다가 이 사랑방의 불빛을 보고 다가왔지만 추위 속을 오래도록 걸어서 굶주리고 지쳤는지 딱하게도 그 방의 문 앞까지 간신히 와 가지고는 그만 쓰러져 끝내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도박을 하던 젊은이 하나가 소변을 보려고 밖으로 나왔다가 그 얼어죽은 행인을 발견했습니다. 앉은 채 꼿꼿이 얼어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방안의 사람들에게 알렸고 모두들 나와서 그 시체를 들어다 방 안 아랫목에 뉘었습니다. 파출소에 알리는 일이 남았습니다. 젊은이들이 파출소까지 사람을 보냈습니다. 거기서 파출소까지는 몇 십리 눈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내놓고 나서 젊은이들이 다시 머리를 맞대고 앉아 도박을 하고 있는데, 웬걸 죽었던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부시시 일어나 앉아 눈을 닦고 보니 젊은이들이 도박에 열중하고 있어요. '음, 내가 살아난 것 알면 이 사람들이 필시 날보고 한턱 내라고 할거야. 내 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몇푼 되지도 않는데 잘못하다가는 이마저 몽땅 털릴는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한 나머지 그 행인은 젊은이들 몰래 살금살금 기어나가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윽고 시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젊은이들이 난감해졌습니다.
"곧 순경이 올 건데 시체는 온데간데없으니, 이거 어떡한담? 순경이 오면 우리가 거짓말한 줄 알 것이 아닌가?"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궁리했는데, 마침내 기껏 생각해낸다는 것이 뒷동산에 전날 장사지낸 바 있는 무덤을 파고 거기 묻힌 시체를 대신 갖다놓자는 것이었습니다. "시체인데야 이것이면 어떻고 저것이면 어때?" 이렇게 해서 그들은 남의 집 무덤을 파헤치고 남의 집 조상의 시체를 꺼내다가 아랫목에 갖다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참이 지나자 이윽고 순경이 당도했습니다. "사람이 얼어죽었다며?"하고 방안에 들어선 순경이 아랫목에 있는 시체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보니, 아무래도 그건 얼어죽은 시체가 아니거든요. "이런 고얀 것들! 너희들 또 사람 하나 죽여놓고서 얼어죽었다고 거짓말했구나." 순경은 저들을 앉혀놓고 족쳐댑니다. 당할 수가 있나요? 젊은이들은 하는 수 없이 자초지종을 이실직고(以實直告)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시체는 누구 시체냐?"
순경은 젊은이들을 앞세우고 그 시체가 묻혔던 무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가보니, 바로 그저께 장사지냈다던 그 동네 사람의 무덤이 아니겠습니까? 순경은 아무래도 뭔가 좀 찜찜하다 싶었던지 그 시체를 도로 묻지 않고 이래저래 조처해서 해부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해부를 해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시체의 귓속에 대못이 하나 박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수사를 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것은 살해당한 시체임을 알아냈습니다. 죽은 이의 아내가 제 정부(情夫)와 짜고서 잠든 남편의 귀에다 대못을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장례까지 치렀으니 이제 정부와 함께 마음놓고 잘살 수 있게 되었다며 희희낙락하고 있던 그 독부(毒婦) 시체가 무덤 밖으로 그렇게 나올 줄이야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무덤에 들어간 것조차 그렇게 저렇게 우스꽝스럽게 얽힌 곡절 끝에라도 나오게 되는 법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 모든 것이 드러나고야 만다고 할 때에 사람에 따라 그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할 사람이 있고 기뻐할 사람이 있습니다. 정죄(定罪)가 겁이 나 바늘방석에 앉은 듯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됐다'하고 마음에 위로를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벵겔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실로 그렇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종교개혁자 존 낙스(John Knox)의 무덤 묘비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결코 여하한 사람의 얼굴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가 드러누워 있다.' 낙스의 위대한 신앙을 한마디로 드러낸 비명(碑銘)입니다.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오히려 유혹자를 두려워하라. 유혹자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 없습니다. 박해자는 내가 천당 가는 것을 도와줍니다. 박해자는 나를 진실하게 하고 나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나를 유혹하는 자는 나를 지옥에 보내는 자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무서운 것은 가난이 아니라 부귀영화입니다. 비난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칭찬이 무서운 것입니다.
모름지기 유혹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추장을 보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합니다. 그 추장,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를 기특하게도 잘 듣더랍니다. 선교자는 한참 이야기를 해준 다음에 "사람들은 다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셨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추장이 자못 어두운 낯빛이 되어 묻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다 부활합니까?" "그럼요. 심판 날에 모두가 다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추장은 적이 근심 어린 낯빛이 되어 힘없이 중얼거립니다. "왜요? 왜 안 된다는 것입니까?" 선교사가 묻습니다. "내가 억울하게 죽인 사람이 많거든요. 그 사람들이 다 부활한다면 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거 큰일났는걸! 그 사람들이 다 들고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덤벼들면 난 어떻게 합니까? 내 죄랑 잘못이랑 다 들추어낼 텐데……"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은 감추인 것이 다 드러난다고 하시는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생을 살 따름이여, 변명도 필요 없고 걱정도 두려움도 필요 없는 생을 영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배경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증인이 되십니다. 그런데 무엇을 두려워할 것입니까? 잘못을 범해놓고 그것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는 생이라면 신앙인의 생이랄 수 없습니다. 한시바삐 회개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내 모습을 거짓없이 드러내고 돌이켜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회개요, 남이 나를 심판하는 것은 비판이요,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면 그것이 곧 '심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먼저 나를 심판해버립니다. 다 드러내버립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허물을 덮어주십니다. 내가 나를 감추고 숨기면 하나님께서 드러내십니다. 은밀한 것까지 샅샅이 드러내 보이십니다.
여러분, 특별히 우리가 복음 사역을 위하여 수고를 할 때, 숨은 봉사자로 일할 때, 복음 위해 수고하다가 음모에 걸리거나 억울함을 당하거나 변명을 하고 싶을 때, 이렇듯 핍박을 받을 때에 아무쪼록 참으십시오. 참고 예수님께서 주신 오늘의 잠언을 다시 한번 외어보십시오. "그런 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나의 믿음, 나의 선교, 나의 진실, 나의 봉사……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음을 때마다 확인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세는 종말론적 의미에서도 중요하고, 현실적 의미에서도 중요하며, 특별히 선교사역을 위해서 지중한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역사가 우리에게 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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