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때 나타나는 최고의 표적
2001-12-27 12:42:21 read : 432
누가복음 2장 1-14절
< 예수님이 없었다면 >
지난 화요일 새벽 3시쯤이었습니다.
꿈을 꾸는데 한 성도가 너무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성도가 너무 불쌍하게 여겨져서 같이 기도하고 용기를 가지라고 호소했습니다.
저의 말에 그 성도는 미안한 듯 같이 울면서도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 그 성도의 일로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에서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탁자 밑으로 쥐가 한 마리 나타나 저를 빤히 쳐다보는데 밥맛이 없어서
신문지를 둘둘 말아 종이 막대기를 만들고 그 뻔뻔한 생쥐를 힘껏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쥐가 얻어맞아 벌러덩 옆으로 눕더니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한규 목사! 당신은 목사면서 하나님이 주신 나 같은 생명을 함부로 하면 돼!"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움찔했지만 본능적으로 종이 막대기로 다시 쥐를 때렸습니다.
곧 쥐가 완전히 뻗었지만 그 쥐가 한 말이 맘속에 맴돌면서 자책에 빠졌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을 너무 심하게 다룬 것이 아닌가? 이건 죄가 아닐까?"
갑자기 죄책감이 들면서 마음이 울적해지고 마치 저주받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느낌으로 혼자 괴로워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생생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와 동시에 고기를 입에 대지 않다가 고기를 먹게 된 때를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돼지 잡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고기를 거의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단지 먹으려고 약하고 힘없는 동물의 생명을 취하는 사람의 모습이 싫었고
고기를 먹는 것은 마치 착한 동물에게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학 4학년 때에 신앙심이 깊어지면서 하나님께서 이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물을 먹으라고 창조하셨으니까 고기를 먹어도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
그때부터 고기를 담대히 먹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때를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꿈속에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지금도 많은 죄책감 속에 짓눌려 살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꿈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신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가슴 벅차게 찬양을 하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내가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말씀대로 담대하게 살리라."
그리고 나니까 새벽에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이 참으로 가벼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예수님 때문에 생긴 놀라운 변화 >
이처럼 예수님이 오셔서 사람이 바뀌고, 환경을 극복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유럽의 이방지역으로 버림받았던 섬에 예수님이 들어가 대영제국으로 발전했습니다.
떠돌이 게르만 민족에게 예수님이 들어가 철학, 과학, 예술, 문명이 꽃피게 되었습니다.
아무 기반이 없던 미 대륙에 예수님이 들어가 지금은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지지리도 못살았던 우리 나라의 놀라운 발전도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고,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20년 전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대학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고, 여자도 비로소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없었을 때는 딸로 태어난 것이 비극이었고, 여자의 삶은 눈물뿐이었습니다.
태어날 때 울고, 시집살이로 울고, 애 낳을 때 울고, 죽는 날까지 우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운명의 여자들을 위해 선교사들은 이화, 정신, 숭의 등의 여학교를 세웠습니다.
그처럼 여자들이 점차 교육을 받으면서 지금은 오히려 남자가 울지 여자가 왜 웁니까?
그리고 관혼상제는 얼마나 우리 민족의 삶을 짓눌렀습니까?
냉동실이 없어서 시체가 다 썩는데도, 최소한 9일장하고, 21일장, 39일장까지 했습니다.
썩어 가는 시체를 모시고 계속 울다가 양식이 다 없어지고, 고추장 된장까지 끝나야
비로소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그리고도 몇 년간 계속 우니까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선교사들이 3일장을 권할 때 다 상놈이라고 욕했지만 지금은 잘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 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을 결사적으로 안 해야 양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노동이 중요한 것이고, 땀을 흘려야 진짜 양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미신 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꼭 잡고 있는 것은 귀신이었기에
사실 우리 나라를 다스린 사람은 왕이 아니라 귀신이었고 온통 귀신에 사로잡혔습니다.
일도 그냥 못하고, 못도 그냥 못 박고, 땅도 그냥 못 파고, 된장도 그냥 못 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했는데 귀신 때문에 그것도 못했습니다.
귀신을 섬기던 소나무가 말라죽어도 귀신이 무서워서 베어내지 못하고 구경만 했습니다.
한 장로님이 그 소나무를 베어내려고 하니까 무속인이 "너희 집안 망한다!"고 했지만
장로님은 태연히 그 나무 귀신을 베어다가 일년 동안 그것을 때서 잘 지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나라는 귀신과 관습에 얽매이며 두려움에 떨면서 꼭 억눌려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사망과 저주가 물러가고 생명과 축복이 왔습니다.
신앙이란 잘못된 것을 억지로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기보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평화의 왕인 예수님이 오셔야 비로소 우리 가운데 어둠의 세력은 물러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평화의 왕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 누울 자리가 없으셨던 아기 예수님 >
1절을 보십시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
이때는 로마 황제 가이사가 아구스도 옥타비아누스가 천하를 다스리고 있는 때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대제국을 이뤘는데 그 제국의 유지를 위해 많은 군인과 국방비가 필요했고,
또한 로마의 여러 시설을 위한 건축비를 마련하려고 매 14년마다 호적 정리를 했습니다.
그처럼 인두세를 걷고 군인을 징집하기 위해 본적지에 가서 호적을 정리하라고 했을 때,
요셉도 본적지가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이었기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가 징계 받은 일을 알기에 인구조사를 싫어했고,
요셉도 호적 정리로 인한 인구조사가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베들레헴에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인구조사 명령은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위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므로 황제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구약 예언의 성취를 위해 그곳에 간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때로 굴욕감을 느끼는 일을 당하지만 그 일로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잘 몰라도 거기에는 분명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초조해하거나 답답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참된 평안은 성공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전폭적으로 신뢰할 때 주어집니다.
그 호적 명령으로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갔는데 마침 마리아의 산고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은 진통하는 아내를 데리고 방을 구하러 다녔지만 메마른 인심에 방을 못 구하고,
결국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고 구유에 아기를 뉘었습니다.
누울 자리가 없어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 얼마나 기막힌 이야기입니까?
인간이 예수님에게 처음 드린 선물이 구유였고, 마지막 드린 선물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이곳 분당에 오셨다면 방을 구하셨을까요?
이곳이 전국 최고의 주거지라는 소문을 났지만 아마 방을 제일 못 구하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부족하고 세상 것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성탄절에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이 드시도록 마음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 마음의 빈방을 준비하십시오 >
성탄절은 마음이 가난해져야 하는 날입니다. 이제 마음의 빈방을 준비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주님을 위한 방, 예배와 기도를 위한 방은 반드시 비워 놓아야 합니다.
어려워도 헌신의 방은 비워놓아야 하고, 피곤해도 말씀을 위한 방은 비워놓아야 합니다.
그런 방이 다른 것들로 차 있을 때 주님은 우리 가운데 찾아와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치장은 없고, 조금은 냄새가 난다고 해도 주님을 위한 빈방은 있어야 합니다.
왜 여관집 주인은 최대의 축복 기회를 놓쳤습니까? 빈방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호적 하는 때에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돈 버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여관집 주인처럼 "바쁘다 바빠!" 하면서 정작 중요한 일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신앙이 훼손된다면 바른 길이 아닙니다.
만약 내가 몸담은 직장이 예배조차 못 드릴 정도로 바쁜 직장이라면 바른 직장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물질, 하나님과 성공의 대결에서 하나님을 패배하게 만드는 삶입니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정작 주님이 은혜 주실 기회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혹시 지금 너무 바빠서 신앙의 문제나 인생의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한 분은 없습니까?
이제는 아무리 바빠도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의 뜻에 더욱 관심과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는 행복을 느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뭔가를 잘해야 행복해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안되면 행복이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자체로 행복하기 때문에 느긋합니다.
이분들은 즐길 줄 아는 능력이 있고, 여유가 있고, 남을 배려하고, 조용히 노력합니다.
바빠도 교회와 복지시설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몸이 불편해도 숨은 봉사자로 살아갑니다.
이런 분들은 비교적 건강하게 살고, 삶에 탄력이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처럼 시간의 횡포를 이겨내는 자기 삶의 연출자가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가끔 너무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할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다음에 하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이 길다면 "다음에.."라는 말도 할 수 있지만 짧은 인생인데 그러면 됩니까?
이제 하나님 앞에 머물고,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 곁에 머물기 위한 시간을 내십시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과 지내면서도 기도하는 시간은 반드시 확보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시간을 요구하실 때 "죄송합니다. 다음에 할게요"라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혜와 축복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힘든 중에도 시간을 바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바쁘게 살아도 살기가 힘든데 주일날 놀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하는데
사실 주일은 노는 날이 아니고, 예배로 영혼을 새롭게 하고 축복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돈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벌어야지 죽자살자 뛰기만 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거북이가 오래 사는 가장 큰 이유는 느리게 걷고, 여유 있게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동차도 천천히 몰면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하고 누리며 살 수 있지만
빨리 몰면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하면서 정말 빨리 그곳에 가게 됩니다.
이제 예배도 드리면서, 기도도 하고, 헌신하면서 생업에 최선을 다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 낮아지신 예수님처럼 낮아지십시오 >
그리고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모습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삶의 처음이 구유였고, 마지막이 십자가였는데 우리 삶은 너무 화려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마구간이나 구유보다는 너무 화려한 건물을 좋아하고, 힘을 좋아하고,
교인들은 십자가의 길보다는 명예와 권세와 부를 얻는 길만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산다면 어떻게 하늘에는 영광이 되고 땅에는 평화가 되는 삶을 살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구유 및 십자가와 더욱 가까워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고, 봉사 받기보다는 봉사하며
자기를 버리고 죽어야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고 성도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특히 가난한 분들, 굶는 분들, 병든 분들, 힘든 분들의 고통을 우리가 분담하려고 할 때
우리 교회는 아기 예수님을 오늘날 이 사회 속에 탄생시키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은 어렵고 힘들고 비천한 분들을 도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그렇게 도우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함으로 우리 마음에 큰 평화를 주십니다.
우리는 항상 낮은 자리, 희생의 자리에 서서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메시지를 주시려고 비천한 목자들에게 구주 탄생의 첫 소식을 준 것 아닐까요?
어떤 노동자의 기도입니다. 자기도 힘들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제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힘든 추운 겨울이 왔습니다.
얼어죽는 사람 없게 하시고, 연탄 때는 사람들이 연탄가스로 중독 되지 않게 지켜주시고,
날씨가 추어져서 일거리가 많이 없어지는데, 일거리 없어 굶는 가정 없게 도와주옵소서."
어렵게 사는 노동자도 그렇게 기도하는데 요새 사람들은 추워지면 무슨 생각부터 합니까?
스키 타러 갈 생각부터 하고, 정동진에 해돋이 보러 갈 생각부터 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필요한 이웃을 향해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기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수도사가 추위에 떠는 거지를 보고 그의 외투를 벗어주며 그를 꼭 안아 주었더니
그날 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어젯밤 네 덕분이 따뜻하게 잘 잤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시려고 할 때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면 신비한 방법을 찾기보다 작은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 작은 사람을 찾아 나의 작은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 진짜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하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눅3:10-11)
회개의 열매는 바로 나눔입니다. 우리가 욕망을 낮추고 나눌 때 진정 평화가 꽃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평화를 원하시면 덜 가지되 더 많이 누리며 사는 삶을 연습하길 바랍니다.
<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과 사람들 중에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분쟁과 편견이 있는 곳에 항상 평화의 중재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에겐 두 종류의 사람, 즉 평화인(peace maker)과 갈등인(trouble maker)이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았기에 남을 용서하며 평화인의 길을 가야 합니다.
1991년에 신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당시 H 선교회의 한 목사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당시 그 목사님은 그곳에서 해외선교를 총괄하는 아주 유력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도 같은 교단에 있었고, 대학교 선배인지라 기대를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자격지심인지 제가 그때 그분으로부터 매우 박대를 당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 뒤 그때 상황이 항상 머리에 맴돌면서 그 목사님과 별로 교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하나님께서 그 불편한 관계를 꼭 해소하라는 감동을 계속 주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저에게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분이었는데
그 섭섭한 마음을 풀어야 제가 하나님 앞에 보다 떳떳하게 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그분이 운영하는 선교회를 도우면서 그 섭섭한 감정을 털어 버렸는데
그 선교회가 지금 우리가 도우려고 여러모로 애쓰고 있는 바로 그 A 선교회입니다.
우정을 쌓는 데 10년이 걸려도 한번 틀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되는 것이 우정이지만
10년 동안 틀어진 우정이라도 한번 마음을 잘 먹으면 금방 회복되는 것 역시 우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평화의 감동을 주실 때 그 날이 가기 전에 평화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이 문을 열어줄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우리가 용서를 알아야 우리의 삶과 교회생활이 소생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이기에 남을 용서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가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신앙행위를 해도 하나님이 영광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추구하고 기쁘게 살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 믿는 표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최고의 표적이 바로 평화 아닐까요?
우리는 앉은뱅이가 일어나거나 소경이 눈을 뜨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대단해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기적(miracle)이 아니라 평화의 표적(sign)입니다.
이 표적(sign)을 추구하고, 이 표적(sign)을 진실한 영성으로 보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 진정한 평화는 성육신의 정신에서 꽃핍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성육신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를 뜨겁게 사랑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어느 사이에 내가 없어지고 맙니다.
어떤 이유든지 배우자 앞에서 고집 부리는 것은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아가 강하고, 내 자존심만 내세우면 그것은 사랑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자존심이라는 것도 진짜 사랑하면 사랑하는 동안 눈 녹듯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유행가 가사에도 그대 앞에 서면 작아진다고 하는데, 더 사랑하면 완전히 없어집니다.
알아도 모르는 척 하고, 있어도 없는 척 하고, 유능해도 무능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 사랑하면 겸손하게 되고, 그 겸손한 삶을 통해서 평화가 주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 성육신의 사랑을 가르쳐 평화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마음을 항상 베들레헴의 구유로 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찌든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버리고, 낮아지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경배는 쉽지만 말구유의 아기 예수님 경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고, 겸손한 성육신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번 성탄절에 교회의 본질과 성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베들레헴 구유에는 기적도 없고, 화려한 빛도 없고, 이 땅의 영광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화려한 바벨탑을 떠나 정신차리고 베들레헴 구유로 내려가야 합니다.
베들레헴 구유의 아기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절망을 거두어 간 희망의 씨앗이었습니다.
그 구유에서 희망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초라한 아기 예수님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을 보는
믿음의 눈을 회복하여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최고의 표적인 평화를 얻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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