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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 거하십시오/사도행전 14장 19-23절

by 【고동엽】 2022. 10. 23.

  믿음 안에 거하십시오

2002-07-15 16:10:00 read : 1967

 

사도행전 1419-23/ 20020714

 

< 죽음을 각오한 신앙 >

 

지난 주 수요일 대단의 황수 선교사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갑상선 암에 걸려 양쪽 갑상선을 모두 떼어내는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수술 전에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6시간 이상 수술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교사님은 그 얘기를 듣고 자신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의사 및 간호사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취실 안으로 들어가면 1-2초 안에 마취가 되어 정신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전도할 틈이 없는데 어떻게 전도할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손목의 링겔 꽂는 곳 바로 위에 한자로 4글자를 피가 나도록 새겨놓았습니다.

야소애이(耶蘇愛 )!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을 가진 4글자였는데

링겔 꽂을 때 솜으로 그 주변을 몇 번 문지르는 과정에서 그 글자가 지워지지 않게

가는 볼펜으로 문신을 새기듯이 손목에 피가 나도록 그 글자를 깊이 새겨놓았습니다.

 

결국 6시간 후에 깨어났는데 간호사들이 손목에서 그 4글자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글자를 보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믿지 않는 그들도 감동 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믿음은 없어도 "이 사람은 꼭 살려야 할 사람!"이라는 사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때 의료진들이 최선을 다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선교사님은 간증합니다.

"힘써 복음을 전파하려는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주셨다"고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한 영혼을 구하려고 생명을 내걸고 참 애쓰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병으로 죽어가면서도 자기 가족을 기어코 믿게 하고 구원한 후에 죽습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일생 동안 믿는다고 하면서 전도 한번 안 해본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분이십니까? 천국 가는 동반자를 많이 얻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자기의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나옵니다.

어느 날,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복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인근에 사는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와서 무리를 선동해 그를 돌로 쳤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쓰러지자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끌어 내쳤습니다(20).

 

그러나 얼마 후에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일어나 피하지 않고 다시 성으로 들어갑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울을 돌로 쳤던 사람들조차 더 이상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저런 사람 건드리면 내 영혼은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이런 고난을 당하면 대개 사람들은 절망하든지 아니면 잠시라도 쉬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튿날 바로 더베로 가서 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온 몸에 돌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발을 절면서 전도하러 더베로 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반면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너무 쉽게 좌절하지는 않습니까?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신앙을 금방 포기해버리면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겠습니까?

 

< 복음 전하는 사명을 감사히 여기십시오 >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키가 작고, 다리는 휘어서 약간 절고, 시력은 나빠서 눈 초점이 흐리고,

일설에 의하면 간질병이 있어서 과로하면 툭 쓰러져 추한 모습도 많이 드러냈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를 쓰셨습니다.

 

이번에 축구대표팀이 국민들의 성원을 많이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4강에 올라간 것도 훌륭했지만 뛰는 선수들이 생명을 건 사람처럼 뛰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국가대표로 뽑히긴 했지만 주전으로 뛰지 못한 선수들은 얼마나 아쉽습니까?

물론 그들도 같이 칭찬 받고 포상금도 같이 받지만 그래도 뛸 수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믿음생활에서도 우리는 벤치에 앉은 자가 되기보다 전도의 사명을 받고 뛰어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같이 환영을 받기는 하겠지만 복음 전하려고 애쓴 사람들만 하겠습니까?

 

복음 전파의 사명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대개 많은 희생과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사명이 어렵다고 멀리하면 하나님은 촛대를 옮겨 다른 성도를 쓰실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에서 그는 다시 벤치에 앉아 지켜보기만 하는 후보가 될 것입니다.

후보가 되면 몸은 조금 편하겠지만 어느 누가 주전보다 후보가 더 좋다고 하겠습니까?

 

야구 선수들은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되기 위해서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립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가볍게 여기면 메이저리그에서 마이너리그로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한번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면 다시 메이저리그로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사명을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그것은 앞으로 받을 많은 축복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에서 메이저리그 선수처럼 훌륭한 성도가 되십시오.

교회에서 사명을 받은 것을 메이저리그 출전 명령을 받은 것처럼 기쁘게 여기십시오.

출전하면 힘들지만 출전 명령을 받지 못한 선수보다는 훨씬 복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복음 전파 사명은 힘들지만 가만히 있는 성도보다는 훨씬 복된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발을 절면서 더베로 갔지만 그것은 고생이 아니고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

 

더베에서 복음을 전한 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본문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갈 곳이 많은데 사도 바울은 다시 루스드라와 안디옥과 이고니온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은 바로 얼마 전에 그를 돌로 쳐서 원수가 많고, 마음속에 한이 맺힌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다시 사랑의 복음을 들고 들어갑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닮고 싶지 않습니까? 닮고 싶으면 3가지를 잘하십시오.

 

1) 첫째, 오래 충성하십시오.

어느 누구나 잠깐은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충성해야 진짜 충성입니다.

 

2) 둘째, 조용히 충성하십시오.

많은 사람이 봐주면 헌금과 봉사도 쉽습니다. 이름 없이 충성해야 진짜 충성입니다.

 

3) 셋째, 어려워도 충성하십시오. '

잘 나갈 때 충성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 발휘되는 충성이 진짜 충성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갔을까요?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바로 제자들을 권면하는 일입니다.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했다가

바로 이어서 사람들이 선동을 하니까 그들을 손에 돌을 들고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어제까지 "호산나!" 하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유대 군중의 모습과 같습니다.

어제는 제물을 갖다 바치다가 오늘은 그 섬기는 사람을 제물로 만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런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은 마음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결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흔들릴 때 굳게 결심하고 믿음 안에 굳게 서야 결국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중국 고대의 현자들은 인재를 고를 때 다음과 같은 4가지를 보았다고 합니다.

 

1) 첫째, 남이 즐거운 일이 있을 때 같이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인가를 보았습니다.

남들은 다 즐거워하는데 옆에서 이상한 말로 초치는 것은 기본이 잘못된 것입니다.

 

2) 둘째, 내가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즐거움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인가를 보았습니다.

내게 좋은 일이 있어도 힘들게 사는 이웃을 생각해 기쁨을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3) 셋째, 두려울 때 얼마나 내색을 하지 않고 용기 있게 사는가를 보았습니다.

두려운 일이 생겨도 호들갑떨지 않고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4) 넷째,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얼마나 혼자 슬픔을 삭일 줄 아는가를 보았습니다.

나 한 사람이 감정을 삭이면 주변이 편안해짐을 알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몸집이 큰 사람은 거인이라고 말하지만, 마음이 큰 사람은 거물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마음을 가진 거물이 될 때 그 삶에 열매가 맺힙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설교 듣고 "좋았다!" 하고 끝나면 그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설교에서 들은 한 마디라도 목숨 걸고 지키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진짜 좋은 것입니다.

신앙심이 깊지 않아도 좋습니다. 성경에 관해서 많이 알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한 말씀이라도 목숨 걸고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가장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 환난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

 

그리고 22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이런 권면을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 하고..."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하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믿어도 환난은 있습니다.

빌립보서 129절 말씀을 보면 믿으면서 환난도 있는 것이 오히려 은혜라고 합니다.

 

탈북자들의 말에 의하면 북한에서 탈출하는 것보다 한국으로 오는 것이 더 어렵고,

한국으로 오는 것보다 한국에서 잘 정착하며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보다 구원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처럼 믿어도 환난을 겪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겪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환난을 겪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환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환난은 반드시 우리를 축복하는 도구가 됩니다.

 

지금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계시고 방송에도 자주 나오는 박동규 교수님의 아버지는

박두진, 조지훈 시인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목월 시인입니다.

 

박목월 시인은 중학교 2학년 때 하숙비를 내지 못해서 하숙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여기 저기서 밥을 얻어먹다가 마지막으로 학교 교실에서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운 교실에서 자는 것을 담임 선생님이 알고 학교 온실에서 자도록 허락했습니다.

온실은 교실보다 따뜻했습니다. 온실에 가마니를 깔고 누우니까 밤하늘이 보였습니다.

달과 별이 자신의 가슴에 안기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삶이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끊임없이 시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달과 별을 노래하며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그때 쓴 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명시로 우리도 잘 아는 시 "얼룩 송아지'도 있습니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두 귀가 얼룩 귀/ 귀가 닮았네

 

저는 아직도 이 시가 시인들의 말처럼 그처럼 아름다운 시인 줄은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박동규 교수님 글을 읽고 금요일 새벽에 기도하면서 한참 묵상했습니다.

"왜 시인들은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를 그토록 아름다운 시라고 말하는 것일까?"

새벽에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데 이 '얼룩송아지' 때문에 기도가 안되었습니다.

성경은 오래 묵상하면 답이 나오는데 이 시는 너무 심오해서 도저히 답이 안 나옵니다.

 

아무튼 사람들이 아름다운 시라고 하는데, 그 아름다운 시가 고난 중에 빚어졌습니다.

나중에 박목월 시인은 박동규 교수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동규야! 내가 온실의 차가운 바닥에서도 희망을 노래했기에 시인이 될 수 있었단다."

문제와 어려운 환경만 바라보면 탄식이 나오지만 하늘을 바라보면 위대한 시가 나옵니다.

우리는 환난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의 환난은 반드시 축복의 재료가 됩니다.

 

< 주님께 기도하고 맡기십시오 >

 

이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한 사도 바울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떠날 결심을 합니다.

그가 떠나면 그 지역 선교가 끝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사도 바울은 그 지역에서 장로들을 택하고 기도하면서 그들을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바울은 없어도 주님이 계신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면서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기도하고 다 맡기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뜻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부탁하고 맡겨야 합니다.

 

요새 가장 신경 쓰는 것이 자녀 문제입니다. 그러나 너무 간섭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자녀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 말고는 지나치게 간섭하면 역효과입니다.

정 공부하기 싫으면 그냥 놔두십시오. 사회생활 하다 뜨거운 맛을 보면 다 하게 됩니다.

 

건강도 너무 무관심해서는 안되겠지만 너무 지나치게 "건강, 건강" 하면 안됩니다.

70년대 '영어 삼위일체"로 유명한 안현필 선생이 "삼위일체 건강법'으로 다시 떴는데

그분은 자신이 연구한 건강법으로 오래 살 줄 알았지만 결국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사십시오. 하나님은 살만큼 살게 하시고, 죽을 때는 죽게 하십니다.

 

다윗은 가장 큰 장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맡길 줄 아는 신앙이 큰 장점입니다.

어느 날,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난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3일을 먹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래도 아이가 죽었습니다.

아이가 죽자 그 소식을 들으면 왕이 어떤 행동을 할지 신하들은 크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욕하고 식사한 후, 왕의 직무를 감당합니다.

신하들이 놀라 다윗에게 "폐하! 어찌된 일입니까?"하고 물으니까 다윗은 대답합니다.

"아이가 죽기 전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죽었는데 끝난 일이다."

그는 사람의 생사화복이 모두 하나님께 달린 줄 알고 깨끗이 과거를 털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삶을 맡기면 우리는 어떤 상황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억울하게 13년 동안 사울에게 쫓겨다녔지만 사울에게 원한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몇 번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손을 대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줄 아는 거물이었습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는 담대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축복 받지 못합니까? 대개 맡기지 못하고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도 도중에 포기하고, 전도도 도중에 포기하니까 항상 좋은 끝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담대한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되려면 담대해야 합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는 부모라고 말합니다.

보니 엔젤로가 쓴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이라는 책이 결론 내리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가 조사한 11명의 미국 대통령에게 가장 큰 자산은 '어머니의 칭찬'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자산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고, 사랑을 깨닫게 하고,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줍니다.

그 말씀을 가졌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협력하게 하셔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천에 계신 한 분이 사업이 점차 어려워졌습니다. 공장에는 재고가 쌓이기만 합니다.

고민하다가 40일 작정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죽은 제물처럼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예배, 모든 행사에 참석했고, 구역예배까지 참석하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40일 동안이지만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노력했고, 입술과 눈을 죄로부터 지켰습니다.

 

40일이 지났습니다. 사방에서 주문이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재고가 바닥이 났습니다.

더 놀라운 축복은 40일 동안 살았던 신앙인다운 삶이 40일 이후에도 계속된 것입니다.

결국 그분은 교회에서 칭찬 받는 성도가 되었고, 무엇이 진짜 축복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40일 작정기도가 가져다준 진짜 축복은 사업적인 축복보다는 신앙적인 축복이었습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

 

여러분! 기도제목이 있으면 일정 기간 작정하시고 기도해보십시오.

작정기도 기간은 기도만 하는 기간이 아닙니다. 그때 나의 제물 됨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때 내 입술과 내 눈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면 하나님도 우리를 충성스럽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한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집사는 '일을 맡은 분'을 말하고, 권사는 '바른 신앙을 권면하는 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은 바른 신앙을 권면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분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병원에 가도 병명이 안 나옵니다.

너무 괴로워서 다른 교회에 새벽기도를 나가 말씀 듣다가 자기의 문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권사의 직분을 받았으면서 직분을 감당하지 않고 전혀 다르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킨 것을 회개하고 그분은 전도를 작정했습니다.

열심히 전도해서 3개월만에 25명을 전도했습니다. 식욕이 돌아오고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과거와 달리 얼굴도 빛나니까 사람들이 "무슨 보약을 먹었는지 알려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요새 같은 세상에 25명을 전도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얼굴에 미소를 가지고, 어깨에 힘을 빼고, 따뜻한 눈과 말로 상대의 호감을 얻었을 것입니다.

3개월 동안 25명을 전도하려면 자기를 죽여도 10번은 죽였어야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게 전도하면서 신앙도 건강해지고, 마음과 생각도 건강해지고, 몸도 건강해졌을 것입니다.

 

가끔 교회에 잘 다니는 분들 중에서 교회를 심하게 비판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교회가 바르게 되라는 것인지, 교회가 나쁘다는 것인지 구분이 안됩니다.

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도 교회를 불신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그분들이 이것 한 가지만 하시면서 비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호별 방문 전도'입니다.

호별 방문 전도를 하면서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 내가 얼마나 낮아져야 하는지'를 알면,

또한 '남의 대문 앞에서 얼마나 처절히 낮아지고 내 자존심이 무너져야 하는지'를 경험하면

교회생활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무엇이 진짜 교회사랑인지를 보다 깊이 알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복음을 전파하는 삶'이 기초가 되어야 바르게 형성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고 힘써 근신하며 행동을 하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견고한 믿음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통해 복된 성도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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