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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P1 롬1:17

by 【고동엽】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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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NvAD3cNVWRQ

◈믿음이란 무엇인가 P1                          롬1:17                       여러 설교 정리

 

◑3가지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세 가지 측면의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또 내 믿음은 어떤 단계와 있는지 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의 세 가지 면phase 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지적인 믿음이 있고

-두 번째는 감정적인 (측면의) 믿음이 있고

-세 번째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신앙적 (측면의)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지적인 믿음

 

2 + 2 = 4

‘해는 동쪽에서 뜬다’ 라는 어떤 사실을 믿는 (지식적) 믿음,

그것도 믿음이지만, 그래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것을 나는 믿는다’

그것은 그 사실, 팩트에 관한 믿음입니다.

 

보통 우리가 사회에서 ‘믿음’이라고 말할 적에는

빌리브 believe 어떤 사실을 믿는다 할 적에, 어떤 사실을 (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 사실을 믿는 믿음, 지적인 믿음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세 가지 면을 다 포함하는 거예요.

 

▲2. 감정적인 믿음, 또는 신뢰적 차원의 믿음

 

예를 들어, ‘내가 우리 아버지를 믿는다, 내가 우리 어머니를 믿는다’ 라고 할 적에

‘우리 육신의 아버지, 또는 우리 육신의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신다’ 라는

그러한 감정적인 신뢰적 차원,

영어로 말하면 트라스트 trust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에 관한 어떠한 이성적 논리적 질문,

어머니에 관한 어떠한 이성적 논리적인 질문이 필요가 다 없어요.

‘남들이 뭐라 그래도 나는 내 아버지를 믿고, 내 어머니를 신뢰한다’ 라고 하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말할 적에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 사실 fact을 믿는 믿음의 측면도 있지만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변함없이 인정해 주시고, 나를 도와주시고, 나와 동행해 주시는 그 사랑의 하나님!

그 어떠한 인격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감정적 믿음, 또는 신뢰적 차원의 믿음입니다.

 

그 다음 좀 더 발전된 단계의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3. 행동, 순종의 믿음

 

이것은 그 분을 믿기 때문에 행동으로 까지 나타나는 그런 믿음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 계셨을 적에

어떤 여인이 나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자기 머리털로 그 예수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보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그랬어요. 눅7:50

우리 생각에는 ‘네 행위가 너를 구원하였도다!’ 이렇게 말해야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눅7:50

 

그 여인이 예수님께 옥합을 들고 나아왔을 때, 무슨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인은 예수님을 믿었고, 또한 신뢰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옥합을 깨뜨려 붓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 믿음을 행위로, 삶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지요.

 

히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 믿음의 조상들도 그 성경의 설명을 읽어보면

모두가 믿음의 삶으로,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 반열에 들어간 것이지,

마음으로 믿었다거나 혈통으로 그 믿음의 조상들 반열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어떤 지적인 믿음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포함하지만

-어떤 신뢰적 차원의 믿음을 포함하지만

-또 야고보서의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 순종으로 까지 연결되어지는

그 믿음

그 모든 3가지 측면을 포함해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다’고 그럴 적에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주로 지적 동의에 머무를 때가 많습니다.

 

지적 동의, 그것이 믿음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불완전한 믿음이요, 믿음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지적 동의,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해서 모진 고초를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지적으로 지식적으로 믿는 사람은

감정적 신뢰가 일어나게 됩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진실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에는 <행동>까지 이어지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그렇게 했을 적에 그 지적동의, 지식적 믿음이

온전한, 순전한, 진정성 있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적>인 믿음이

예수님은 <신뢰하는> 트러스트 하는 차원에 나아가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차원에 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가 가졌던 지적동의, 지식적 믿음은 불안전한 믿음이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라고 했을 적에 바로 그러한..

귀신들도 지적동의는 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 믿느냐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2:19

 

그래서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는 믿음의 세 가지 면을 다 가진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동사로 하면 믿는다, believe

명사로 하면 faith 인데, (*헬라어 피스튜오에서 온 듯)

 

어떤 미국사람은 faith는 뭐냐? 그것은 faithful (신실한, 충성된) 이다.

faithful 이란 말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신실한 것,

아내가 남편에게 신실하다.. 이런 말을 많이 씁니다.

 

즉 외도를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아내만, 자기 남편만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 신하가 왕에게 faithful 하다, 충성, 신실했다는 표현을 쓰는데

다른 왕을 섬기지 않고, 배신치 않고, 오직 자기 왕에게만 충성을 다 하는 것이 faithful한 것입니다.

 

그럼 faithful 한 말의 용례만 놓고 보더라도

faith(믿음)이라는 것은, 그저 지적인 믿음만 뜻하지 않는 말인 것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롬1:17 ‘오직 의인은 <믿음 faith>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이 구절,

또는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believe> 자는’

 

이런 구절에서 우리는 믿음을, 지적인 믿음, 지식적 동의로 여기기 쉽습니다.

왜냐면 세상에서 말하는 ‘믿는다’는 말의 개념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믿는다는 식으로 어떤 지식적 믿음을 가리키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faith 또는 believe 라는 말은

단순한 <지적인> 사실을 믿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포함해서 <인격적> 신뢰,

그것을 포함해서 믿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에, 말씀에 순종해서 따르는

‘행동하는 믿음’까지 다 포함한 종합적인 것이다.. 라는 사실을

우리는 꼭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적인 믿음만 갖고는

어쩌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데.. 합2:4  설교 스크랩, 정리    

 

 

롬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믿음’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의미인가요?

 

그것을 정확히 알려면, 롬1:17절이 그대로 인용한

합2:4절로 가서, 그 의미를 파악해 보면

개신교의 첫 번째 절대 교리인 <이신칭의> 의 보다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보통 '믿음'이라고 할 때, 3측면으로 설명하는데

 

1) 사실을 믿는 믿음, 팩트를 믿는 믿음, 지적 동의 faith (지)

2) 그래서 그 대상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 trust (정)

3)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는 것, 신실함 faithfulness, endurance (의)

 

성경이 전반적으로 의미하는 '믿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을 때, 그 말씀이 뜻하는 '믿음'은

위 3개 측면을 모두 포함하지만,

 

합2:4절에 나온 '믿음'은

특별히 3) 참고 견디는 것, 신실함 faithfulness, endurance 을 뜻하며,

당시 하박국의 시대적 상황이 바벨론의 침공 가운데 풍전등화의 암울한 상황이요,

 

하나님이 바벨론이란 악을 들어서, 하나님의 선민을 심판하시는

견디기 어려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박국이 받은 응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즉, "참고 견디라, 의인은 참고 견딤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신자들은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구원 받을 줄 아는데

거기서 말하는 믿음을 '지적 동의'로만 생각합니다.

 

그건 롬1:17절의 '믿음'이 아닙니다. 극히 불충분하고, 부분적인 믿음입니다.

롬1:17절이 인용한 합2:4절의 믿음을 살펴볼 때,

롬1:17절, 이신칭의 신학이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참고 견딤,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끝까지 믿음>이란 뜻입니다.

 

 

▲합2:4절의 ‘믿음’ - 그 사전적 의미

‘의인은 그 믿음(에무나)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 ‘에무나’는 - 버티다, 견디다 란 뜻입니다.

믿으니까 버티고 견디는 것입니다. 영어로 faithfulness(충직함) 입니다.

 

에무나는 '아멘'과도 같은 어근이다.

그 기본개념은 '버티다, 견고하다 firm' 라는 의미입니다.

 

에무나는 구약에 49번 나오는데 대부분은 faithful, faithfulness로 번역했습니다.

'지식적 믿음'으로 번역한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믿음'을 '지식적 믿음'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귓속말 잇기' 놀이처럼

히브리어의 '에무나, 아만' - 헬라어의 '피스토스, 피스튜오' - 라틴어의 피뎀, 크레도 - 영어의 'faith, believe'

- 한글의 '믿음, 믿는다'로 자꾸 번역되는 과정에서,

그 뜻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달라져서.. 끝으로 갈수록 가서 완전히 엉뚱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믿는다'는 것은 '지식적 믿음'을 뜻하니까,

자연적으로 성경에 나온 믿음을 '지식적 믿음'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요3:16절이 말하는 믿음은.. 애당초 그런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식적 믿음을 포함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그 믿음 갖고는 천국에 가기 어렵습니다.

 

즉 하박국 2:4절의 믿음(에무나)은

구약 성경 전반을 볼 때, ‘어떤 사실을 믿는 것 faith’이라기보다는

(그런 뜻도 포함하겠지만)

‘그의 삶, 인격, 태도가 충직함, 견고함, 참고 견딤’을 뜻합니다.

 

 

▲의인은 오직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므로 하박국2:4절이나, 롬1:17절을 번역할 때는

(루터가 ‘의인은 그의 믿음faith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번역했을 것이지만)

사실은 ‘의인은 그의 충직함 faithfulness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왜냐면 '믿음' 이라 할 때, 어떤 지식적 뉘앙스가 강하지만

원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지적 동의가 아니고, 삶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나온 <천주교 200주년 기념성경>에 보면

'오직 의인은 그의 성실함 faithfulness 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번역했습니다.

 

'성실함'이 .. 학생이 학교에서 성실하다, 그런 뜻이지만

원래 의미는 '견고하다, 흔들리지 않는다, 충직하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믿음’=‘지적 동의’,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 설명하는 구절들이 꽤 있습니다.

 

히11:6,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이런 구절들은, '믿음'이 단순한 '지적 동의'를 설명하는 듯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믿음의 전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그렇게 '지적 동의'로 출발하더라도, 결국에 ‘에무나’로 나아가야 합니다.

 

즉, 믿음이란

지적동의(지)와 아울러,

하나님을 신뢰하고(정)

그러므로 그 분의 말씀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신실한, 버티고 견디는’(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믿음’ (에무나)의 구약에서 여러 용례

 

합2:4절에 나오는 에무나(믿음)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에무나’가 나오는 성경의 다른 구절을 살펴봅니다.

 

 

▲1. 출17:12절의 에무나는 ‘버팀’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때,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군대 장관으로 싸우고, 산위에서 모세가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에무나) 지라 출17:12

 

so his hand were steady (에무나) until the sun set.

 

여기서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는

‘버텼더다’가 원래 의미이죠.

 

그래서 '믿음'은 기본적으로 <버티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을 못 믿을 때가 많습니다.

작은 시련만 닥쳐도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헌신과 충성을 버티지 못하고 포기합니다.

그건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합2:4, 롬1:17절로 돌아가서

'의인은 믿음(에무나)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했을 때,

그것은 그저 ‘마음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박국 시대의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 환경을 버티며 이겨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진 사람,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후에

그 약속이 더디 성취된다고 해도, 비록 지체된다 해도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끝까지 버티면서 삽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버티지 못하고, 그 약속을 중도에서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끝까지 버팁니다.

즉 그저 지적동의 수준의 믿음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버티는 믿음’이란 뜻이며,

 

‘비록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열매가 없어도...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합3:17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의인’입니다.

 

 

 

▲2. 믿음 에무나는 <성실히 감당해야할 직분>

 

그리고 ‘믿음/에무나’는, 구약에서 몇 번 ‘직분을 (성실히) 맡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역대상9:22, 택함을 입어 문지기 된 자가 모두 212명이니, 이는 그 향리에서 그 계보대로 계수된 자요

다윗과 선견자 사무엘이 전에 세워서 이 직분을 맡긴 (에무나) 자라

 

역대상 9:31, 고라 자손 살룸의 장자 맛디댜라 하는 레위 사람은 남비에 지지는 것을 맡았으며 (에무나)

 

문을 지키고, 남비를 지지는 것(전병 굽는 일)은 ‘에무나’로,

즉 신실하게 버티며 감당할 일이었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기 삶으로, 어떤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수행할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는 신자는.. 자기 직분을 성실히 감당합니다.

 

그런데 자기 직분이나 사명을 성실히 감당치 못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왜냐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 얻기도 힘든 것입니다.

'이신칭의'의 믿음은, 그런 '머리로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구약 속의 하나님 나라는

‘남비 지지는 것’과 ‘문지기 직분’을 신실하게 견디며 감당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서 섬길 때면,

그것이 요리하고, 경비 서는 ... 하찮게 보이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믿음으로=에무나로=버티며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믿음’은 있다면서, ‘버팀’이 없는 사람은

사실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영화 벤허 중 그 영화의 하이라이트였던 마차 경주 장면을 찍을 때

주인공 찰턴 헤스턴은 감독 윌리엄 와일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마차는 탈 수 있겠는데, 경주에서 이길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감독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단지 경주에 남아있기만 해요, 그러면 이기게 해 줄 테니까”

 

각본대로 영화가 만들어 지듯,

우리인생의 드라마의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에무나 믿음으로) 버티기만 해라, 그럼 네가 승리하도록 해 줄 테니!”

 

하박국은 선포했습니다.

“오직 의인은 그의 성실함으로, 버팀으로 살리라!”

 

처음에, 하나님께 항의하던 하박국은,

합2:4절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약속이 성취되는 그 순간까지 참고 견디고 에무나로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화 <벤허>에 나온 찰턴 헤스턴은 마차몰이를 할 줄 몰랐고,

그것을 배우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벤허가 마차경주에서 승리한 것은,

그의 실력 때문이 아니요, 마차가 최신형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요,

오직 감독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믿음으로, 에무나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인내하며 버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을, 언약을 성취해 주실 것입니다!

 

<09.01.18. 인터넷 설교 스크랩, 정리, 편집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597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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