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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6sMQWmqMdhY
◈두려워 말고 믿는 믿음 막5:3~43 출처
‘가이드 포스트’라는 잡지에 이달 호에 나온 기사……. 사실 기사를 소개 하려고 합니다.
“빅토리 오브 어 피어(Victory of a fear)” 라고 하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승리'라고 하는 제목입니다.
이 주인공은 알렉산더 풀루무어 라고 하는 분인데요.
그는 65세가 되도록 한번도 아파 본 일이 없는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정기적으로 일년에 한번씩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그리고 결과를 기다렸는데
의사로부터 의외에 소식을 듣습니다. 당신은 지금 전립선암에 걸렸습니다.
빨리 와서 다시 체크를 해봐야겠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고 아주 그대로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은 그의 아버지가 바로 자기 나이에 전립선암으로 선고받고 두 달 만에 죽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삼촌도 두 사람이 그 병으로 죽었고요. 사촌도 몇 사람이 그 병으로 죽었어요.
이 집안이 전부 이 병으로 많은 사람이 갔습니다.
‘아! 이제는 내 차례에 왔구나!’ 하는 순간, 손이 딱 풀어지고 아무 의욕도 없었습니다.
점점 두려움이 그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암이라고 하는 불치병이 아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 했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끝이 아니겠습니까! 암이라고 하는 병이 무서운 게 아니에요
그 병으로 인해서 죽어 간다는 것이죠. 곧 죽어야 한다는 문제에 그는 직면 하게 됩니다.
그는 두려웠습니다.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즐겨하던 운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업도 정리해버렸습니다.
주일마다 교회 나가야 되는 것도 사람들 만나는 게 반갑지 않아요.
그래서 그는 몸과 마음이 깨끗지 않아서 교회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동생 되는 분이 형님을 위로하며 물었습니다.
“형님은 나보다 믿음이 훨씬 좋은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야 이 어려운 때 교회 나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형은 대답합니다. “그건 암 걸리기 전에 얘기지!” 그리고 교회에 나가질 않았습니다.
잘 먹지도 않았습니다. 축 늘어져서 그야말로 두려움과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깊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의사는 말합니다.
“만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말이라고 그 위로를 받아 드리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좀 더 명랑하게 살아야 될 것이라고… 뭐 어차피 인간은 한번 갈게 아니냐고…
그 위로나 충고를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는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 합니다.
‘하나님, 사람이 한번 가는 것은 언젠가는 갈 겁니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은 두렵습니다.
이 두려움을 없이 해주세요. 나의 이 무서운 두려움 자체를 하나님이 가져가세요.
이 두려움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한순간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두려움을 제해주시옵소서’
간절하게 오직 하나의 제목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 마음속에 두려움이 딱 사라지면서 앞에 있는 죽음이
죽은 다음에 주님과 만날 날을 생각하면서 환하게 열리면서
두려움 그림자가 싹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죽음이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그런 순간이 올 때 ‘하, 거이상하다.’ 하면서 여전히 이제는, 식사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랬어요.
어느 사이에 10키로나 잃어버렸던 체중을 회복하게 됩니다.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했더니 의사 하는 말이
“이건 기적이다. 다 나았으니 다시 병원에 오지 말라”고……
그래서 그는 자기가 얻은 이 경험을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 합니다.
문제는 두려움 이라고, 두려움 때문에 오는 우울증이라고,
이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고…… 그는 증거 하고 있습니다.
“Victory of a fear” 두려움으로부터의 승리! 그것이 근본 문제라고
그는 모이는 곳마다 가서 간증을 하면서 산다 하는 얘기입니다.
▲심리학자 ‘메리 조 메도 리챠드 디 케오’ 라고 하는 분이 쓴
"사이컬러지 오브 릴리전 Psychology of religion" 이라는 종교 심리학 책에서
불안을 그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 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불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환경이나 객관적인 위험 때문에 오는 것이죠. 있을 수 있는 불안입니다.
전쟁이라던가, 질병이라던가, 우리 눈앞에 어려운 일로 인해서
불안은 정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예요.
그러나 두 번째 불안이 문젭니다. 이건 신경증적 불안이라고 말합니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데 꼭 있는 방향으로 생각해요.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는데 꼭 나빠지는 방향으로만 생각해요.
어떨 때는 백만분의 일이 될까 말까 하는 것도 꼭 나쁜 방향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아침에 나올 때 ‘차사고 나면 어떻하나?’
남편이 조금 저녁에 늦어지면 ‘오다가 강도를 만났나?’
아주 나쁜 방향으로만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혹은 왜곡된 인식, 잘못된 지식 이것으로 인해서 불안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지요.
때로는 습관적으로 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도 말했죠. “걱정도 팔자다.” 라고… 거 팔자예요. 거 못 고치는 병이에요.
이렇게 아주 불안 체질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도 못살고 남도 죽여 놔요.
그냥 온 집안 아주 그냥…… 바로 이런 사람이 중증이에요.
그런가 하면 도덕적 불안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람마다 이것은 스스로 모르고 있고 변명하고 있고 숨기고 있다는 것이죠.
마음 깊은 곳에 있습니다. 누가 물으면 아니라고 합니다. 스스로 변명을 합니다.
합리화하고 역설을 하지만은 소용없습니다. 내가 죄인 인 것은 내가 압니다.
그래서 죄의식과 가책 의식에 매어 있고, 허무와 의미 상실에 빠집니다.
“아니라! 아니라!” 하면서도 “아니요 니 잘못이다 니가 주인이다.” 이것을 피할 길이 없어요.
여기서 불안이 되면 우울증 환자가 되는 것이에요. 견딜 수 없는 자기 불안에 빠집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가끔 그런 경우를 봐요.
병원에 방문을 해서 보면 좀 뭐 그렇게 큰 병도 아닌 거 같아요.
병원에 입원할 것 까지 없을 거 같은데…… 누워있는 환자를 찾아가서 “그래 어떻습니까?” 하면
아주 엉뚱한 대답하는 분이 있어요. “죄가 많아서요.”
그래 내가 그럽니다. “아니 죽을병이나 들어가지고 회개를 하지 뭐 이정도 가지고 죄 타령 하시오.”
그러니깐, “아니지요. 항상 이거 때문에 늘 불안하거든요.”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의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 불안은 바로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두 가지 걱정 밖에 없어요. 하나는 죽을까 걱정이고,
하나는 저주받을까 걱정이에요. 죄책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는 온전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천당 지옥을 믿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아마 믿는다 안 믿는다 하겠지만,
믿거나 말거나 간에 중요한 것은 죽음 다음에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야 됩니다.
내가 알거나 모르거나 시인을 하든지 말든지 내 영혼은 속에서 이것을 미리 느끼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내 영혼이 알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부터 미리 불안해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다 되어있는 사람, 심판대 앞에 서기에 만족한 준비가 있는 사람.
이대로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뭐 실패하고 성공하고 병들고 건강하고…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겁니까? 무슨 대수입니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어요.
모든 불안의 근본은 하나님의 심판대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까…
그것을 고민하고 있고 그 때문에 우리는 불안에 떠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장과 그의 딸이 지금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리고 그 아버지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와서 어떤 자세로 나왔는가… 성경은 자세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막5:22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려서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옵소서.’
좀 말이 길어요.
유식한 사람이 원래 말이 많아요. 뭐 그저 ‘살려주세요!’ 하면 되지 뭘 이렇게 복잡해…
말을 많이… 오셔서 손을 얹고… 손을 얹던지 말든지 그건 예수님 알아서 하실 일이지
이제는 너 좀 말이 길어! 지성인들이 다 이 모양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요.
자 이제 보세요. 아버지가 딸의 죽음을 보아야 됩니다. 죽어가는 딸을 앞에 놓고 속수무책입니다.
어떠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생각 속에 이제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월리암 제임스의 “다양한 종교 경험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이라는 책에서
아주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사람은 한번 태어난 영혼이 있고, 두 번 태어난 영혼이 있다.’ 라고 구분해서 말합니다.
자 이제 한번 태어난 영혼은 어떠냐 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시고, 악한 자를 벌하시고,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죄를 지면 벌 받는다.
선한 자에게는 형통함이 있고 악한자의 길은 망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 그 사람은 한번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면 한 번 더!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어떠냐… 이 사람은 생각이 좀 더 깊습니다.
세상을 자세히 보니깐 세상은 그런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부정한 자가 잘 되고요.
의로운 사람이 망해요. 아니 착하고 잘 믿는 사람이 병들어 죽고,
오히려 죄악 중에 사는 사람이 건강 하더라고요. 의로운 사람이 오히려 사업에 실패하고요.
부유한 사람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못된 사람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이거 때문에 잠시 그는 상실감에 빠지기도 하고, 무력한 생활도 합니다.
무력감에 빠집니다마는 이것을 다 극복하면서 두 번 태어난 사람은 그런 영혼은 보다 깊은 데를 봅니다.
그래서 이 모든 혼란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알고
이 모든 부조리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봅니다.
내가 병들고 고통당하고 실패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아니 이것은 저주가 아니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사랑이요. 하나님의 내게 주시는 사랑의 표현이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특별히 사랑하고 나를 통해서 깨닫게 하고
무엇인가 이루시는 큰 역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시련 속에서도 주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 사람은 두 번 태어난 사람이다 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지금 한번 태어났어요.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또 한번 태어나는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보세요. 이 사람이 보통으로는 예수님 앞에 와서 무릎을 꿇을 사람이 아닙니다.
교만합니다. 회당장입니다. 목수의 아들과는 얘기가 안 됩니다.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 가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데에 그게 참 부끄럽습니다. 회장당의 딸이 왜 죽죠? 회장당의 가정에 왜 우환이 있죠?
교인들 보기도 부끄러워요. 아마 어떤 교인은 이렇게 수근 댓을 런지도 몰라요.
무슨 문제가 있는가 보다. 아무래도 저 회장당이 하나님 앞에 무슨 벌을 받고 있는가 보다.
남이 얘기하는 게 아니라 회장당 자신도 그 같은 가책을 느끼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괴로워요.
이걸 극복하려고 애를 썼어요.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어서 소문에 듣자하니
예수님은 어떤 병이라도 고친 다더라 예수님 앞에 가야지.
체면이고 지위고 뭐 할 거 없고, 다 털어버리고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많이 간구하며 간절히 요청을 합니다.
'내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딸의 병이 아버지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겁니다.
결정적으로 이 딸이 죽게 되지 않았다면 은 절대로 올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로 훌륭한 의사로 고백하면서 당신은 내 딸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 고백과 함께 예수님 앞에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자!’ 그리고 저를 앞세우고 지금 자기 집으로 가는데, 가는 도중에 사람이 왔습니다.
딱 하는 말이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히지 마세요.'
이 말을 듣는 이 야이로가 지금 난처해졌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래도 모시고 가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의사로서는 끝난 겁니다. 죽어 갈 때는 의사가 필요하지만 이미 죽었거든요.
죽어가는 것을 보고 간 아버지의 마음은 무릎을 꿇었지마는
죽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모시고 갈 거냐 말 거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이 시점에서 그는 참으로 큰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기로에 섰습니다.
한 가닥 희망마저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한 가지 믿음마저 끊어지는 시간입니다.
당황하고 있습니다. 대책이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믿음의 비약이 필요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훌륭한 선생이요, 랍비요 그리고 의사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지마는
이제는 생명의 주인으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특별한 믿음으로 이제 비약을 해야 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한다. 죽은 자도 살리는 믿음 생명의 주인으로 예수를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야이로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믿기만 하라. 그러면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믿기만 하라!”
자 이제 여기서 믿습니다! 하면 믿음이 있는 겁니까? 믿어 질 것입니까?
문제는 야이로에게 필요했던 것은 순종입니다. 믿음으로 인한 순종입니다.
믿어지던 안 믿어지던 지금은 순종해야 됩니다. 오로지 순종, 단순한 순종의 믿음, 순종의 믿음…
사실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종래에 가졌던 지식이나 의지나 감성을 다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야 했습니다.
'믿기만 하라!'
예, 그리고 예수님을 모시고 딸이 죽었다고 하는 자기 집으로 가야합니다.
바로 그 순간입니다. 만일에 그가 ‘다 끝났습니다. 그만합시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야이로는 얼마나 믿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 순종하여 자기 집으로 갑니다. 어떻게 될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의심을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면 하나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일 때에 기도합니다.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이제는 기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못하니까…
그러나 엄청나게도 하나님께서는 인간 궁극에서 자기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인간의 능력이 끝났을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할 수 있다고 할 때에 역사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다고 할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오늘 가만히 보세요. 이 회당장인 야이로가 그는 믿었습니다마는 아니 믿기 보다는 믿고 싶었습니다.
믿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요. 믿기 보다는 오로지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낡은 사고를 버렸고, 관습적인 신앙을 버렸고, 추상적인 믿음을 버렸고,
자기 의를 다 포기해 버리고, 단순한 마음으로,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갑니다.
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한계를 넘어서는 시간입니다.
예수님 죽은 딸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일어나라.” 일으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가 놀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분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한 차원 높이 올라가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하면 이 집에 왜 이런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왜 딸이 죽어가며, 왜 딸이 죽었으며, 왜 이런 불안 이런… 이런 고통이 있었습니까?
이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높이기 위하여
그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이 사건은 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믿기만 하라.' 이 말에 깨끗하게 순종하게 될 때에
높은 믿음 큰 믿음, 위대한 믿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주를 믿는다고 하지마는 늘 믿음이 없고,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으로 살지를 못 할 때가 많습니다.
저희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시옵시고, 믿음 약한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본래도 선물로 믿음 받았사오나 이 믿음을 높이 높이 키워주셔서 초월적인 믿음,
믿기만 하는 믿음 아무 의심도 없는 깨끗한 믿음으로 순종해서
그 믿음을 따라오는 큰 능력도 함께 체험하며 오늘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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