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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별 편◑/이정익 목사 명설교

흔들리는 터전

by 【고동엽】 2022. 10. 23.

흔들리는 터전

 

 

 

 

 

 

 

 

                                     22:28-29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내 증조부님이 그 시대 장로였습니다. 내 조부님은 그 시대 목사로서 순교하셨습니다. 내 부친께서는 아주 경건했던 장로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인 제가 목사입니다. 또 내 아들도 목사입니다. 내 손자도 이 다음에 목사가 될 것입니다. 제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제 희망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그런 신앙의 전통과 역사와 배경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바람을 가져봅니다. 저는 이런 유산이 부와 명예와 그 어떤 유산들 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이런 유산의 값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에 집착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지난번 소아시아지역을 다녀오면서 저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생각하는 동안 제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한편 마음으로는 감격과 숙연함이 있었는데 또 한편 마음으로는 아쉬움과 허탈감도 있었습니다. 이 두 마음이 계속 교차하는 바람에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마음으로는 “초기 신앙인들의 그 숭고한 신앙모습에 숙연함”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고 그 복음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마치 보화처럼, 그 보화를 뺏기지 않고 간직하려고 목숨을 내 놓고 인생을 내 놓고 일신상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광야 외딴곳 절벽 속에 둥지를 틀고 처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자니 그들의 삶이 얼마나 모진 고난의 삶을 살았겠습니까. 보지 않아도 그 고난의 삶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400년을 살았습니다.

 

 

 

참 눈물겨운 삶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냥 앉아서 그들을 내려다보시지 않고 아마 안절부절못하며 보셨을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캅이 주를 버리면 살려주겠다고 했을 때 그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의연한 모습으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숫한 이방인들과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불타죽었습니다. 그때 그 상황을 서머나 교회에 가 보면 벽화로 그려 놓았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폴리캅이 불타 죽어갈 때 천상의 주님이 일어서서 내려다보시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연히 서서 내려다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편안하게 앉아서 그 모습을 내려다 보셨겠습니까. 스데반이 죽어갈 때 천상의 주님이 일어나서 내려다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생각하고 그렸을 것입니다. 참 숭고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 다음에 예수 때문에 순교 당한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 큰상을 받는다면 마음껏 박수를 쳐 줄 것입니다. 아주 아낌없이 박수를 쳐 줄 것입니다. 얼마나 숭고한 모습입니까. 신앙은 참 위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복음을 전해 듣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토록 몸부림을 쳤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저 자신에게 여러 번 질문했습니다. “내는 그 시대 그 자리에 서 있었더라면 나는 어떤 모습을 취했을까, 나는 순순히 그 부름에 응답하고 순종하였을까”하고 여러 번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소아시아 지역을 돌아보고 오면서 이런 뭉클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게 됩니다. 성지를 돌아보고 오면서 저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 이 신앙의 유산이 최고의 유산입니다. 이것이 소중한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 생각되는 것은 “그러면 그 소중한 유산을 후대 사람들은 왜 지키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오늘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유산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은 그 유산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에게도 그런 믿음의 유산이 주어졌고 믿음의 전통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후손들도 있었을 것인데 아무도 그 유산들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몸부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터키 땅에 살고 있는 터키인들도 그 땅에서 일어난 이 같은 몸부림이 있었던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불행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지를 가보면 그 신앙 때문에 그토록 몸부림치던 그 현장들이 모두 회교도들에게 뺏겨서 지금은 모두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무너진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이교도들에게 둘러싸인 채 회교성전만 웅장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습니다.

 

 

 

제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은 안디옥 지역입니다. 그 땅에 가면서 마음 한편이 설레었습니다. 안디옥은 이방 땅으로서 최초로 교회가 세어진 곳입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로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시작되었습니다. 또 최초로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 땅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지명이 안디옥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도시는 완전히 회교도들의 도시가 되어버렸고 안디옥 교회는 산 비탈길 한쪽에 흔적만 초라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 회교도들은 기독교를 왜소하게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흔적들을 관광과 돈벌이에 이용하려 없애지는 못하고 그냥 방치해 놓고 있습니다. 그렇게 방치해 놓은 것을 보고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을 그냥 방치해 놓느냐고 말을 할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은 그것들이 돈벌이 이외에는 꼴 보기 싫은 것들입니다. 그들은 이 예수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예수를 멸시하려 듭니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 옆에 있는 박물관에 가 보면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박물관에 세례요한의 손가락과 두 개골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세례요한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세례요한의 것이라고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을 전시해서 많은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예수가 세례요한의 수준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참 수모당하는 일입니다.

 

 

 

그 좋은 신앙전통을 그 후의 사람들이 유지하지 못한 결과 이 신앙이 이렇게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좋은 신앙의 전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소중한 것을 주어도 소중함을 모르면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뺏기게 되어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 권을 너무나 쉽게 잃어버렸습니다.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에서가 후에 얼마나 후회의 피눈물을 흘립니까. 그래서 무지가 가장 큰 죄입니다. 무지하면 소중한 것을 다 잃게 됩니다.

 

 

 

오늘도 그 좋은 가정의 전통을, 신앙의 전통을, 나라의 전통을 사람들이 너무 생각 없이 버리고 있습니다. 현대화라는 미명아래 그 소중하던 정신적 가치들을 마구 버렸습니다. 값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사회가 이렇게 혼돈에 빠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물질이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지금 하나 둘 밝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면 그 좋은 신앙전통을 왜 그렇게 쉽게 버렸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왜 그렇게 소중한 신앙전통이 버려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유함과 부함과 편안함” 때문입니다. 이 자유함과 부와 평안은 영적으로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사람이 자유함과 부와 평안함을 누리려면 누구보다도 더 긴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보십시오. 전에 가난했을 때 신앙이 얼마나 신선했고 뜨거웠고 간절했습니까. 그때는 감격이 있었고 눈물과 감사와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좋던 신앙은 사람들이 좀 부해지고 평안해지니까 그만 느슨해지고 말았습니다.

 

 

 

아프고 고달팠을 때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며 사모하며 신앙이 뜨거워집니까. 그때는 약속이 나옵니다. 서원도 나옵니다. 다짐도 발생합니다. 그런데 건강이 회복되고 고난이 지나가 버리면 그 좋던 신앙들이 순간 느슨해집니다. 박해가 있고 긴장이 있을 때 좋던 신앙도 자유함이 주어지면 긴장이 풀리며 느슨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로부터 무서운 박해가 있을 때 그렇게 긴장하던 신앙인 들이 마침내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자유하게 하니까 모두 신앙이 느슨해 졌습니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가 그토록 무섭게 타락하게 되고 낙후되게 된 것입니다.

 

 

 

  또 평안함도 문제입니다. 이 평안함도 사람들이 목마르게 추구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뜨겁게 신앙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도 마침내 자유함이 주어지고 넉넉함이 주어지고 긴장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 신앙이 무장해제가 됩니다. 그리고 아주 느슨해 졌습니다. 그때 마침내 밀려오는 적으로부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은 그 땅이 폐허만 남은 것입니다. 그 가장 좋은 본보기가 라오디기아 교회입니다.

 

 

 

소아시아의 7교회 중 가장 철저하게 무너진 교회는 라오디기아 교회입니다. 라오디기아교회는 다른 교회들 보다 풍부하고 넉넉했던 교회입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아주 풍성했던 지역입니다. 다른 교회들은 환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할 때도 라오디기아 교회는 비교적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이 형식화되어 갔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성령께서는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고 무섭게 책망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무감각했습니다. 편안함과 부함에 취해 살았습니다. 잠자는 신앙에서 깨어나질 못했습니다.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라오디기아 교회는 여전히 편안함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라오디기아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대로 무서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 라오디기아 교회에 가 보면 나머지 7교회 중에 가장 철저하게 폐허가 되어버려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는 교회 근처가 모두 도시를 이루고 있는데도 유독 라오디기아 교회는 그 근처도 모두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경고하신 대로 아주 철저하게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고 오늘 우리를 향하신 경고입니다. 여러분, 예수 모르는 편안함은 저주입니다. 예수를 어렴풋이 알고 부하고 평안한 것도 저주입니다. 라오디기아 교회가 그 본보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알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큰 복입니다. 신앙을 지키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어느 사회나 신앙, 믿음, 근본, 중심이 무너지면 세상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우리국민들에게 지금 가장 시급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의 성숙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일어나는 세상일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가 이루어야 할 일은 경제성장도 아니고 민주화도 아니고 개혁도 아니고 수출이 먼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잃어버린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정신의 건축이 시급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신적으로 몹시 방황 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저기서 정신의 빈곤으로 방황 대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 정신의 혼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아닙니까.

 

 

 

오늘 현대인들이 느끼는 병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박탈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사는데 나만 못산다고 생각하는 이 병, 이것이 박탈감입니다. 오늘 이 박탈감이 참 무섭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 박탈감에 정신적으로 공허함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병입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마음속에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공허해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속이 허하면 불안하듯이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공허하니까 매사가 자신이 없고 불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조금 아프면 겁부터 납니다. 몸에 좋다는 약이 있으면 사족을 못 씁니다. 미칩니다. TV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에 울고 웃습니다. 우스운 일입니다. 자신이 없고 정신적으로 공허해서 그렇습니다. 빈 배가 더 흔들리듯 더 요란하게 흔들리고 떨리게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절망감과 패배감입니다.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고 병들면 먼저 패배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패배감은 자포자기로 연결되어 홧김에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대구 지하철 방화자도 그런 경우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니힐리즘(Nihilism)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죽으려고 합니다. 죽는데 혼자 죽기는 억울하고 함께 죽자 그래서 불 질러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일어나는 사건을 보면 집에 불을 질러 함께 죽고 총으로 가족을 쏴서 죽이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광란의 시대입니다.

 

 

 

왜 이런 현상 일어나는가 하면 정신의 취약점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경제성장을 지상의 목표로 삼아 왔습니다. 그 결과 경제성장은 어느 정도 해결했는데 이 정신성장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아주 취약합니다. 그러니까 조그만 일에 부딪치게 되면 정신이나 마음이 사뭇 떨립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절망감이 몰려옵니다. 그러니까 몸에 좋다고 하면 모두 우르르 몰려갑니다. 고기가 좋지 않다고 하면 하루아침에 고기를 뚝 끊고 채소만 먹습니다. 운동해야 장수한다고 하면 새벽마다 우르르 몰려나가 뛰고 야단입니다. 또 새벽에 뛰는 것은 나쁜 공기가 밤새 내려앉아 좋지 않다고 하니까 하루아침에 뚝 끊깁니다. 복권 나오면 복권 사느라고 온 나라가 야단입니다. 사람이 정신이 취약하니까 말 한 마디에 이렇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려울 때는 붙잡을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붙잡을 대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붙잡을 대상도 없고 기초도 없으니까 자기를 수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약한 나무가 더 흔들리듯이 정신적으로 자신을 지탱해줄 수 있는 기초가 없으니까 더 많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두 마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옛 조상이 세워 놓은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 일에 근실한 사람은 천한 자 앞에 서지 않고 왕 앞에 설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지계석은 조상이 만들어 놓은 철학이고 중심이고 전통이고 믿음이고 근거이고 정신입니다. 이것들을 함부로 버리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천한 자 앞에서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뼈있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소중하게 주어진 정신들이 마구 버려지고 자기 일에 근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거짓이고 수단이고 속임이고 편법 불법뿐입니다. 이 땅에 무슨 진실이 있습니까. 모두 소중한 정신들을 경하게 여기고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이 믿음의 삶을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너무 중시한 결과 이 세상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예수, 이 예수만이 길입니다. 진리입니다.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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