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와 다짐의 시간
빌 3: 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오늘 이 시간은 참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묵은해와 새해가 만나는 틈새의 시간, 아주 절묘한 시간입니다. 말 그대로 송구영신의 시간입니다. 1월을 영어로 January 라고 부릅니다. 재뉴워리라는 말은 그리스신화 야누스 신에서 기인된 말입니다. 야누스 신은 “시작의 신”입니다. 이 야누스 신은 얼굴이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뒤의 얼굴은 과거를 보고 앞의 얼굴은 미래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1월을 그 신의 이름을 따서 재뉴워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의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시간이 바로 그 중간지점에 서 있는 시간입니다. 지금 이 시간이 작년과 내년 즉 과거와 새해의 중간지점입니다. 그 말을 한자로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말입니다. 이 시간은 시간적으로 그렇게 음미해보면 참 의미가 깊은 시간입니다. 한해의 끝 시간, 새해의 첫 시간, 그 중간의 시간이 이 송구영신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쯤 되면 사람들의 마음에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잡하게 서로 교차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지금 느끼게 되는 마음은 아쉬움과 후회스러운 마음일 것입니다. 시간을 허송하고 헤프게 사용했다는 아쉬움에서 회한과 후회스러운 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해놓은 일이 없는데 또 한해가 지나가 버렸다는 아쉬움, 이렇게 살려고 한 것이 아닌데 그동안 부질없는 일들로 정신없이 살아왔다는 후회스러움 들이 한꺼번에 일어날 것입니다. 거기다 한 해 동안 어이없게 실수한 일, 얼굴을 붉힌 일, 조그만 이익 때문에 다투고 마음 상했던 일,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고민했던 일, 일이 잘 되었는데도 쓸데없이 걱정했던 일 등 수많은 부끄러운 일들이 생각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쯤 되면 마음들이 모두 허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후회하는 것입니다. 거기다 신앙적으로 되돌아보면 참 부끄러운 일들뿐입니다. 죄송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맘 때쯤 되면 모두 망년회를 가지는 것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자는 마음에서 일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래서 사도바울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바울도 전도자의 삶을 살면서 자꾸만 예전의 미련들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전도자의 길을 해치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줄기차게 전도자의 길을 걸어갈 때 자신을 다짐시키는 대목에서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자”하고 자신을 추슬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버버리라”고. 지나간 시간은 후회스러움이 많습니다. 특히 새 시대를 맞이하는 시간에 서 있을 때는 더욱 지난 시간은 잊고 새 시대를 향한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출발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몇 가지 마음으로 다짐하며 새해를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기대를 갖자”
이 시간은 후회스러움도 있지만 지난 시간을 허송했으니 새해에는 새롭게 살자 하는 다짐과 기대도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긴 시간들을 쪼개놓으신 것입니다. 하루 24시간, 한달 30일, 한해 365일로 쪼개서 그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라고 토막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고 다짐하고 기대를 거는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새로워지기를 위해서 힘쓰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고 했습니다. 종교의 역사관을 보면 유독 기독교만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기독교만 창조와 종말이 있고 처음과 나중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희망도 가져야 합니다. 지난 시간의 허물과 오점과 실패와 실망들은 다 떨쳐버리고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입니다. 그러면 새 시간에는 새로운 생각과 마음과 다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가지라 하고 비전을 가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Norman V. Peal(노만 필) 박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목표달성을 하려면 세 가지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그림을 그리라 는 것입니다. 그 말은 목표를 설정하고 마음으로 그 그림을 생각하고 일하라 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불행을 생각하고 살면 그 삶이 불행해집니다. 왜 불행해지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그 이유를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계획을 갖고 희망과 뜻을 품고 살면 그런 일들이 잘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마음에 그림을 그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계획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한한 힘을 끌어오는 오직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뜻을 세웠고 마음에 꿈과 계획을 품었으면 주저하지 말고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뜻이 이루도록 하나님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지나간 시간이 아무리 좋았어도 앞에 있는 시간만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언제나 미래를 중시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에 새해에 몇 가지 꼭 기대하고 다짐하고 서원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꼭 지켰으면 합니다. 그러면 새해는 하나님의 은혜도 주어지고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살자”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앞에 있는 것”은 목표입니다. 기도제목입니다. 미래입니다. 천국입니다. 주님입니다. 사람은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뛰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달려간다”는 말은 열심히 힘쓰고 노력하고 수고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나 주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실 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사용하셨습니다.
엘리사는 열심히 밭을 갈고 일할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열심히 고기를 잡으며 자기들에게 주어진 생업에 종사할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포도농사를 지어서 열심히 타작할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칠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세관에서 일할 때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놀고 있는 사람을 부르신 경우가 없습니다. 바쁜 사람이 더 바쁩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일하는 사람이 더 일하고 더 바쁩니다. 새해는 열심히 일합시다.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록펠러(John Rockefeller. Sr)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놀이와 일을 곁들여 배웠다, 나의 생애는 하나의 길고 즐거운 휴일이었다, 일로 가득 차 있고 놀이로 가득 차 있어도 근심일랑 아예 길가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날마다 나에게 정다우셨다“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자”
본문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열심히 뛰어가는 것도 좋습니다. 밤새워 연구하고 무엇인가에 몰두하는 삶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에 열심이고 전념하고 몰두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주일도 지키지 못하면서 열심히 일한다고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도 지키지 못하면서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더 복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 때가 되면 후회할 날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되 복을 받을 일을 위해서 몰두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복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복을 받고 은혜를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복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 풀고 맺고 이어주고 안내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복입니다. 그 삶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된 삶입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입고 인도를 받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믿음으로 살자”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때마다 상의하며 살아가는 삶, 그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거기서 향기가 나오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신앙인이 별로 신선하지 못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참 보기도 유쾌하지 못합니다. 믿되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 그 삶 자체가 복입니다. 그렇게 살면 그 마음이 얼마나 맑고 정신이 얼마나 건강하며 하는 일이 얼마나 감사할 것입니까. 그런 삶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은 합동해서 유익하게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 삶이 세상에 감동을 주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증거의 삶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춘천에서 목회할 때 잊을 수 없는 한사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CCC간사였는데 그 부부가 아주 믿음이 깊고 뜨겁고 순수했습니다. 이 부부가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임신한 채 넘어져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태중의 아이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도 염려했고 주위에서도 아이를 지우라고 했습니다. 저도 심방을 가서 이야기를 들으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앙인이 아니면 이런 때 고민이 없습니다. 그냥 미련 없이 지워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 때문에 때로 갈등이 많고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에게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참 생각하더니 그냥 이이를 낳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혹시 아이에게 이상이 생겨도 하나님이 주시는 십자가로 알고 키우겠다고 그럼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참 믿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들이구나, 믿음이 아주 순수한 사람들이구나, 이 부부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앙의 부부로구나“ 하고 염려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 것을 보지 못하고 저는 서울로 교회를 옮겨서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온 후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그 부부를 미국에서 만났습니다. 제가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20여년 만에 아주 반갑게 만났습니다. 그 부부가 미국에 와서 살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만났을 때 제가 제일 먼저 물어본 것이 그 아이 문제였습니다. “그때 그 아이 잘 낳았느냐, 아이는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그 아이가 지금 미국에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 아이가 계기가 되어서 지금 미국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그 아이가 공부를 제일 잘합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들이 이렇게 복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지금도 내 귀에 들려지고 있습니다. “혹시 아이에게 불행한 일이 주어진다 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십자가로 알고 받겠습니다”. 그러니 그 믿음이 얼마나 맑고 깨끗하고 청결합니까. 그러기에 믿음의 삶에는 언제나 향가가 있고 감동이 있고 그 모습에서 메시지가 흐르는 것입니다. 새해 여러분의 삶이 이런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살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이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금년에 우리교회에서 이런 일이 또 있었습니다. 베다니 찬양대원인 김장욱 이문숙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 부부가 임신을 했습니다. 어느 날 걱정을 하면서 찾아와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 태중에서 변이가 일어나 다운 증후군이라는 병으로 태아에게 영향이 미쳐서 정신지체아를 낳게 된 것입니다. 거기다 몸도 약해서 여러 번 수술까지 했습니다. 지금 자라고 있는데 온전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또 임신을 한 것입니다. 형이 그런 병에 걸렸으면 동생도 그렇게 될 확률이 아주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혹시 또 그럴 수 있으니 태아를 검사해 보자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이 시점에서 고민이 되어 찾아와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검사해서 아이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발견해도 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방법이 있다면 오직 포기하는 방법뿐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검사하지 않기로 작정했고 하나님께서 주시면 주시는 대로 순종해서 낳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갈등이 많았겠습니까. 이들이 불신앙인 들이었다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아이를 포기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갈등해야 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기로 작정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도록 얼마나 많은 갈등과 주저함과 고뇌의 기도가 있었겠습니까. 이 고민과 갈등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십자가이고 고뇌이고 아픔입니다. 그렇게 결단한 후 그 후로 몇 차례 더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그 부부의 믿음이 얼마나 예쁘고 아름답습니까. “믿고 기다려보자, 만일 하나님이 또 주시면 받아서 기르자”
그리고 그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해서 제가 가장 먼저 물어본 말이 아이에게 이상이 없느냐 하는 말이었습니다. 저 자신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아무런 이상이 없이 태어난 것입니다. 지난 성탄절 날 영아세례 받은 아이가 그 아이입니다. 그러니 그 부부의 믿음이 얼마나 튼튼하고 아름답습니까.
그후 제가 몇가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어설픈 과학지식들이 얼마나 많은 뱃속의 생명들을 마구 죽이는가, 그리고 오늘 어설픈 과학이라는 것들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고 걱정을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는 행태들을 보면서 성경 말씀대로 마지막 시대에는 믿음이 없어서 마구 흔들릴 것이라는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여러분들 모두 이런 믿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매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기초가 되고 바탕이 되어서 그 믿음의 힘을 가지고 한해를 힘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기도하며 살아갑시다. 매사 주님께 상의하며 기도하며 믿고 살아갑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섭리하시고 도우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외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목표가 있는 사람은 뛰어가고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달려갈 때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복을 받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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