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창 39:21-23)
1,912년 4월에 1,517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대서양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바다에 속수무책으로 빠져서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아는 타이타닉호의 최후입니다. 2,000명이 탔는데 1,517명이 죽었으니까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새로운 꿈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가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계 무역의 첨단을 걷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부와 권력과 명성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타이타닉 호가 빙산을 발견하고 갑판 뒤 전망대의 선원들이 항해사를 향해서 빙산이 옵니다! 위기가 왔습니다! 죽게 생겼습니다!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기 전에 타이타닉 호는 이미 경고의 메시지를 여러 번 받은 후였습니다. 31척의 배가 지나가면서 앞에 빙산이 있으니 조심해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전 속력으로 달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음에도 그들은 그것을 외면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속도의 게임이 아니라 방향의 게임입니다. 그가 얼마나 빨리 달려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바른 방향을 잡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타이타닉은 이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빙산의 위험에도 안전할 것이라는 자만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심지어는 경고의 전보를 확인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어떤 위기가 올 때는 반드시 경고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여러분, 파선된 타이타닉호처럼 인생의 배에 구멍이 나고 깨져 나가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나서야 방향키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우리 나라도, 기업도, 경제도, 가정도 모두가 방향키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조직들이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타이타닉호처럼 침몰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 나라는 항공안전 위험국으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판정이 1년 동안 지속된다면 경제적으로 2,340억원의 손실을 입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 신인도의 추락과 승객 불편 등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시정 잡배들도 하지 않는 말들을 거침없이 뱉어내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바른 말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 걱정입니다. 우리는 지금 심각한 혼돈과 갈등과 이념 논쟁으로 방황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바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 나라는 위기입니다. 문제는 위기를 느끼기는 하지만 그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향키가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21세기의 문맹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앨빈 토플러는 ‘21세기의 전망’에서 21세기 문맹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문맹자는 더 이상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21세기에는 변화를 배우지 못하는 자들이 문맹자가 됩니다. 변화를 배우지 않으려고 하는 고집쟁이들이 문맹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 변화의 흐름에 뒤쳐지는 사람이 21세기의 문맹자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화가 철철 넘쳐흐르기를 축복합니다. 변화에 대한 지혜와 행동에 대한 열정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땅에는 영원한 안전지대란 없습니다. 다만 변화에 대한 끝없는 기회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 변화를 누가 주도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예전에는 왕들이 주도했습니다. 군대가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변화의 물결을 누가 움직일 것인가? 분명한 것은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면 자멸하고 맙니다. 이 변화의 속도를 어떻게 하면 탈것인가? 빌게이츠가 말하는 빛의 속도도 결국은 변화의 속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순간 순간마다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옥토의 법칙으로 일하십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25%의 사람만이 변화의 물결을 따라갑니다. 또 그 중에 10%의 사람만이 변화의 물결을 확실히 주도합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것과 신앙을 갖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 10%의 물결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손길에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 10%의 변화를 주도하는 정확한 사람만 있으면 세상까지도 뒤엎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경지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변화를 주도하는 10%의 물결 속에 들어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사람들은 이 변화를 저항할까? 왜 이렇게 변화가 힘든 것일까? 변화를 저항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먼저 그들은 통제를 받기 싫어합니다.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변화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상상력의 부족, 자기 안일에 안주해서 인간은 누구나 현상유지 본능에서 잠자려고 합니다. 귀찮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변화를 거부하고 지금의 상태에 눌러 앉으려는 이유는 변화에는 언제나 그에 따르는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버드 바겟은 “장애물이란 당신이 목표에서 눈을 뗄 때 당신 눈에 보이는 무서운 것들이다”라고 했습니다. 목표가 아닌 것은 대개 장애물입니다. 목표라는 것은 수많은 장애물 속에 우뚝 솟아 있는 푯대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과 부족함을 보기 전에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감사의 조건이었습니다. 땅을 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취할 것이냐의 문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놓여진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놓여진 문제 속에서 무엇을 먼저 보느냐가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입니다.
변화에 민감하며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문제를 장애물로 보지 않고 징검다리로 봅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문제란 모두가 장애물입니다. 그 장애물은 언제나 크고 복잡합니다.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문제는 자신을 낙담시키기 위한 걸림돌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과거에 기초하여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과거가 좋았다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과거에 누리던 것들을 그리워합니다. 과거에 하던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미래에 기초하여 현실을 초월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미래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것들을 소망합니다. 그것이 지금보다 훨씬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가슴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영신제단의 성도 모두가 미래에 이루어질 것들을 소망하면서 그것을 이야기하는 꿈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과거는 불신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과거란 본질상 진노의 자녀된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의 사람들입니다. 현실을 살고 있지만, 현실을 초월하는 미래의 사람들입니다. 현실 앞에 닥친 장애물 너머에 있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장애물 앞에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쓰신 일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의 환경이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미래가 없는 사람은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계획이 없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습니다. 변화가 없기 때문에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장애물 너머에 있는 미래의 푯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변화에 마지못해서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배움을 멈춘 사람은 성장을 멈춘 것입니다. 성장을 멈춘 사람은 이미 늙기 시작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젊다는 것입니다. 늙은 사람은 배우지 않습니다. 배울 수 없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장을 멈춘 마음은 이미 죽은 마음입니다. 성장은 바로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변화를 위한 진실한 작업입니다. 변화는 논리적으로는 이해되지만 현실은 잘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가 변한다, 내 기업이 변한다, 교인이 변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낳은 내 아이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태도 하나를 바꾼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는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힘들고 어렵기에 변화가 되면 기적이 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면 살 길이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도 기적과 살 길이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화의 목적이 분명치 않을 때는 사람들이 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싫어합니다. 변화에 대한 보상이 분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라가 왜 이렇습니까? 변화를 주도하는 지도자 집단이 신뢰와 존경을 잃어버리면 국민들은 절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안 하면서 왜 우리보고 하라고 하느냐? 지금 우리 나라는 여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기득권의 포기라든가 헌신과 협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는 그들에게서 헌신과 협조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개혁되지 않는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헌신과 신뢰와 미래에 대한 아름다움이 없으면 백성들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참여하지 않으면 기적도 보상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의 제일 큰 약점은 어떤 일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전부 구경만 하고 비판과 판단 속에 안주해 있습니다. 변화를 주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변화를 저항합니다. 전통은 변화와 개혁을 거부합니다. 변화를 위한 수고의 두려움에 사람들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수고를 두려워하면 변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화에는 칭찬과 격려와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변화에 대한 과정이 이해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변화를 따르지 않습니다. 변화의 흐름에 뒤떨어지면 폐기물이 되고 맙니다.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의 결과물입니다. 변화하지 못하면 마른 가지처럼 용도폐기가 되고 맙니다. 변화만이 살길입니다. 변화만이 나라가 살 길입니다. 민족이 살 길입니다. 사회가 사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교회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변화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면 교회도 죽은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은 변화의 속도에 대해서 저항하는 어둠 속에 살고 있지는 않는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 속에 살고 있지만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변화를 거부하면 얻을 것도 기대할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묘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왔든지 하나님은 그 모습 그대로 다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대로 두기를 원하지 안는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놀이터에 옷도 예쁘게 입고, 모자도 예쁘게 쓴 4살 된 아이가 있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이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잠깐 두고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가게에 갔습니다. 엄마가 없는 사이에 이 아이는 흙을 입에 묻히고, 강아지가 눈 똥을 손에 묻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엄마를 보자 이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울고 불며 난리를 칩니다.
이때 이 아이의 엄마가 오물이 묻고 흙이 묻은 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그냥 주겠습니까? 아이의 고집 앞에 지겠습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고집 앞에 그렇게 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집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 내릴망정 절대로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주지 않습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고집을 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적 원리는 대단히 깊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샘으로 데려가서 씻기시고 새로운 옷을 입하시기 원하십니다.
자기 아집과 고집으로부터 탈출하면 살 길이 있습니다. 탕자가 당한 모든 고통의 원인은 어리석음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늘의 깨달음을 찾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을 때 그 모든 고난은 한순간에 다 없어졌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내 잃어버린 아들이로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다” 이 회복의 역사, 생명의 역사는 오늘 이 자리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변화란 회개의 내용입니다. 변화란 헌신의 핵심입니다. 변화한 사람은 헌신할 수밖에 없고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란 충성과 헌신의 최종 목적입니다. 변화를 통해 성장하면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변화했노라고 말하면서 헌신이 없고 충성 봉사가 없다면 그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헌신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충성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앞에서 변화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변화 받고 크게 주 앞에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개척자입니다. 여러분은 탐험가입니다. 우리가 밀림 한가운데 놓여지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침반입니다. 똑같습니다. 아직 탐험되지 않은 미래의 영역을 향하여 믿음이라는 나침반을 들고, 하나님의 능력에 취하여 또 변하고 또 변하며 모험해 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아직 친숙치 않은 새로운 곳을 위하여 달려나가는 나에게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함께만 하시옵소서. 형통케 하시옵소서. 변화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옵소서. 변화라는 전투에 있어서 힘차게 전진해 나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실수가 죄가 아닙니다. 실패도 죄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며 변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여러분 속에 신령한 것을 채우십시오.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능력에 사로잡힘 바 되는 경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힘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하여 변화의 역사와 물결과 파도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변화가 철철 넘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십대의 나이에 역사의 격동 속에서 세상 한가운데로 내버려졌던 한 젊은이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17살에 꿈을 꾸었습니다. 역사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국가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미래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중동 팔레스타인 일대에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어마어마한 비전을 주었습니다.
21세기 우리의 앞날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자손이 어떻게 될까? 사랑하는 여러분,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꿈이 없으면 방자해 집니다. 꿈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꿈이 없으면 답답해집니다. 사람은 사명적 존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큰 것에 미치지 않으면 시시하고 작은 것들이 달려듭니다. 큰 것에 미치시기 바랍니다. 이 사명을 위하여 오늘도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사명 때문에 버림당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변화를 시도하는 꿈쟁이들을 버릴 때가 있습니다. 형제가 버릴 때도 있습니다. 가정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조직이 버릴 때도 있습니다. 깊고 깊은 깜깜한 수렁에 떨어졌습니다. 형제들이 버린 굴속에서 요셉은 무엇을 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이 가는 곳마다 사람이 돕고, 가는 곳마다 형통하는 역사가 일어났을까?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시므로 그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깜깜한 그 웅덩이 속에서 요셉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래도 변화는 일어난다”
여러분, 우리가 깜깜한 칡흙같은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이든,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이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래도 내 삶에는 반드시 위대한 변화는 일어난다!”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람이 배신한 것을 하나님이 배신한 것처럼 그렇게 길길이 뛰지 마십시오. 만일 요셉이 그랬다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역사는 일어난다” 이 말을 요셉은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서 요셉은 무엇을 했을까? “그래도 변화는 일어난다” 여러분, 아무런 기도가 되지 않을 때 이렇게 외치십시오. “그래도 변화는 일어난다”
우리 다같이 힘차게 외쳐 보겠습니다.
“그래도 변화는 일어난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도록 하신 수업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이 수업을 받지 못했다면 14년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렇게 형편없던 나라를 이끌어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변화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를 만들려고 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당하는 내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세계를 만들려는 기회라는 사실을 믿으시고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본질이 명확하게 되는 것은 변화를 행동으로 끌어내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 하나님을 믿기에 교회와 사회에서 변화의 파도를 일으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가니까 3천명, 5천명의 사람 가운데 변화의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니까 로마가 들썩들썩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저들이 변화의 능력인 성령을 힘입고 나가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묻습니다. “저들 가운데 나타나는 이 능력이 무엇이냐?” 온 도성을 소란케 하는 사람들이라고 별명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감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명상도 아닙니다. 신앙은 도덕 군자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윤리학자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점잖은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거룩한 바른 능력에 취하여 이 험난한 어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증거 자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세계는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살아남는 길은 시대의 변화를 읽고 변화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주도해 나가는 것입니다. 변화를 주도해 나가기 위해서는 앞서가는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모든 생물은 주위의 환경이 변화하는 속도만큼 변화하지 못하면 생존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그렇다면 변화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어려운 것은 변화에는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소중히 여기던 것을 버리고 비우고 떠나야 합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안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자신을 내어 던지는 행위입니다. 자신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말처럼 변화란 이전 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행위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 시대의 가정 위대한 발견은 태도를 바꾸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좋은 것도 나쁜 태도로 보면 나쁜 면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나쁜 것도 좋은 태도로 보면 그 속에서도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꿈의 사람 요셉이 가는 곳마다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 시간 주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서 미래를 향한 변화의 물결이 출렁거리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며 가는 여러분의 걸음걸음마다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내 가정이 변화가 되고, 내 자녀가 변화되고, 이 민족이 변화되는 한 알의 밀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한 심령 심령을 통해서 사랑하는 영신 제단에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 황무한 이 땅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극동방송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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