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고난

고난설교 : 고난에 대한 대비 (벧전 4:12-19)

by 【고동엽】 2022. 8. 5.
전체 목록가기 고난 목록 돌아가기
   

 고난에 대한 대비   (벧전 4:12-19)


우리는 지난 시간 베드로전서 4장 1-11절 말씀을 통해서 고난이 올 때 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3장에서 우리는,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정도의 차이는 다소 있을 것이지만 모두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는 언제나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가 스스로 택하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색깔이나 형태는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성도에게 핍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일을 행할 때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의 핍박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양상이 불신자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내 생활 속에 아무런 핍박이 없다면 우리는 한 번쯤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핍박이 없는 것이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버릴 때 세상은 우리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는 핍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고 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해 불신자들의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지금까지 말한, 일반적인 시험으로 말미암은 고난이 아니라 “불시험에 의한 고난”을 대비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말했습니다. 이 불의 시험, 이 고난을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불시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조만간 이 시험이 우리의 삶의 문턱에 들이닥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미리 이 사실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그때야말로 핍박이 몰려오고 있는 아주 중대한 시험의 시기였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진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주후 64년경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대대적인 박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서운 불시험이 다가오기 직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긴장된 밤에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감동시켜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이 고난을 대비하는 메시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후 70년경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입니다. 로마의 디도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말 그대로,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중대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앞에 두고 성령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감동시켜서 그들이 당해야 할 고난을 대비하도록 소망의 편지를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당할 것을 대비하세요. 여러분을 시련하려고 찾아오는 불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이 곧 찾아옵니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1장에서도 보았습니다만, 1장의 요절인 7절에도 “불시험”을 암시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불이 어떤 도구로 쓰여졌습니까? 연단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금이 어디서 연단됩니까? 용광로의 불 속에서 연단됩니다.

불 속에서 모든 금이 아닌 부분, 그러니까 찌꺼기는 녹아서 없어지고 순금이 구별되면서 얼마나 제련된 모습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시련의 시간, 불시험의 어두운 시간은 순금과 찌꺼기,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시간입니다. 핍박이 올 때, 박해가 올 때, 고난이 닥쳐올 때 이 고난 앞에서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을 순화시킵니다. 고난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점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 고난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은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욥이 고난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가는 길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우리의 삶과 믿음과 인격이 제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세요. 요한복음 15장을 흔히 ‘포도나무의 장’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열매를 맺는 삶을 독려하는 동시에, 17절 이하를 보게 되면 이 고난에 대한 대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7-19절 말씀을 보십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우리가 세상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할 것이지만,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도리어 세상에서 예수님의 택함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20, 2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고난을 예고하시면서 이 고난에 대한 준비를 당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고난을 준비하라.” 우리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주님의 사랑받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시험을 주십니다. 때로 그 시험은 격렬한 불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불시험 속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난을 감수하며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히 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현실의 길입니다. 이 길은 단련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영광으로 통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 고난에 대한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이 올 때 그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 베드로전서 전체를 통해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낱말 셋이 있습니다. ‘고난’이란 말과 ‘즐거워하라, 기뻐하라’는 말, 그리고 ‘소망’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고난과 기쁨, 그리고 소망이란 이 세 가지 낱말이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고난 중에도 즐거워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으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 할 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고난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 그 자체가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기 때문에, 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뻐할 수 있다고 사도 베드로가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주님 스스로 어떤 잘못이 있어서 그 대가로 받은 고난이 있습니까? 이미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자기 잘못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고난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2장 19-20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고난에 대한 종류를 이야기하면서,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애매하게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없는 고난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목적인데요? 2장 24절을 보세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때 이것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애매한 고난을 받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주님은 고난받은 사람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스펄젼 목사는 자기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의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그가 병중에 있을 때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하고 격려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물론 아프지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제 고통보다도 주님이 제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고통받는 사람에게 주님은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격려를 고통받는 사람에게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생을 같이한 사람들끼리는 얼마나 친분이 두텁습니까? 기쁨을 함께 나눈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어도 고생을 함께 나눈 사람들은 쉽게 잊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의 교제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합니까? 영광의 날에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영광은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광은 바라면서 고난은 피하려고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장차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그 영광 속에 같이 참여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을 보세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난 속에서도 생동하는 발걸음으로 전진해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 대신에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난을 통과해야 영광이 옵니다

왜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합니까?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누구를 제일 가까이 하십니까? 고난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광스럽게 임재하십니다.

14절을 보세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받는 사람들의 위에는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코리 텐 붐이 쓴「나의 피난처」라는 책에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리가 어렸을 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잡혀가고 죽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 어린 소녀는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리는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난 어떻게 하죠? 난 죽는 게 두려워요.”

그때 코리의 어머니는 자상하게 코리에게 타일렀습니다. “코리야, 우리가 기차를 타려면 먼저 뭐가 필요하지?” “정거장에서 기차표를 사야지요.” “언제 표를 사지?” “기차 타기 직전에 사야지요.” “그래, 그런 것처럼 우리가 죽음 앞에 설 때 주님이 우리가 죽음을 통과할 수 있도록 표를 주실 거야.”

여러분, 우리가 순교의 자리에 선다고 해도 주님의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주신 말씀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맞이할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우리를 어떻게 그대로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기로 약속하신 그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고난받는 우리 위에 함께 계시면서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울어 주시고, 힘을 주셔서, 이 고난을 이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있다”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낯익은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산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다,” 또는 “장막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다”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히브리어로 ‘쉐키나’라고 하는데 이것은 구약 시대에 성막 위에 임재했던 불기둥을 보고 한 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 빛의 아름다움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실감 나고 생생하게 들렸겠습니까!

고난은 아픈 것이지만 고난 속의 위로는 정말 큰 것입니다. 성령님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을 생각해 보세요. 스데반이 죽을 때 무엇을 보았습니까? 돌팔매질을 당하여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는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스데반을 능히 순교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천사의 아름다운 광경이 스데반의 얼굴을 통해서 빛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시선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주님을 향했습니다. 그 주님이 자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팔을 벌리고 서 계신 그 광경을 보았을 때 자기를 향해서 돌을 던지는 그들을 용서하며, 거룩한 순교에 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할 이유는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의 때는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을 보세요.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오면 주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16절 말씀에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나오는데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세 번만 나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을 보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주어졌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불신자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이기만 하면 주님 이야기를 합니다. 또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또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선한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몸에 밴 사람들이구나”해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만들어 부른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의 질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6장 28절을 보면 바울이 전도하는 장면에서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이 선교할 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복음 증거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낼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받을 때, 고난받는 주님의 자리에 설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우리가 그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그 고난에 참여하게 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5-18절까지의 말씀은 고난이 올 때를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삼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 말씀에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말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남의 일을 간섭함으로 고난을 받지 말라”는 말은 홍미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기 할 일만 하라는 권면입니다. 자기의 일도 잘 감당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을 간섭하다가 어려움 당하는 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고난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16절을 보세요.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의 이유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 중에서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합니까 아니면 영화롭게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부끄러워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베드로 자신이 부끄러워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실패를 많이 했습니까? 그래서 그는 뼈아픈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고난을 전도의 기회로 삼습니까? 17절에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으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전도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는 고난을 전도의 기회로 삼고 있습니까?


또한 고난의 때, 우리는 자신을 주께 드려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나에게 억울한 고난이 다가올 때, 그때에도 선을 행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해야 합니다. 왜요? 그들이 우리를 혹시 죽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순교를 당하며 박해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선을 행하면서 혹시 육체가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네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에 대한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했습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처럼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하고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우리도 죽을 때 “하나님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라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마음놓고 부탁해도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헌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십시다. 고난 속에서도 더욱 철저히 주님 앞에 드리십시다. 이 최후의 헌신은, 최후의 고난을 최후의 승리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고난이 닥쳐올 때 이길 수 있는 힘과 비전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조준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