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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은혜

은혜의 이슬 (호 14:1-9)

by 【고동엽】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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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이슬  (호 14:1-9)

톨스토이의 우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고기들이 한번은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는데 물고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물고기들은 그토록 중요하다는 물이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해 하면서 늙은 물고기를 찾아가 물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늙은 물고기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물은 결국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온 몸이 언제나 그 물에 적셔 있으며 날마다 그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 못하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톨스토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이 글을 썼습니다. 인간이 날마다 호흡을 하면서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생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모를 때가 많음을 깨우치는 우화입니다.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는 영적인 부요함을 얻음이 더 큰 축복임을 깨닫는 것은 은혜를 아는 자의 기쁨입니다. 성한 몸을 가지고도 영적으로 빈곤함보다 성치 못한 몸을 가지고도 영적으로 부요함을 누리는 사람이 삶의 가치를 아는 자이고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가를 아는 자입니다. 세상에서 얻게 되어지는 명예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의 이름이 귀한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자입니다. 부귀영화보다는 믿음으로 내 영혼의 구원받게 됨이 천하를 얻음보다 귀한 것임을 깨달을 때 인간이 인간됨을 알고 사람의 삶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때문에 땅의 것을 얻는 것보다는 하늘의 것을 얻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축복된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5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는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14:5)

참으로 좋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이슬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이슬이 되심을 믿으시면 아멘으로 화답하시기를 원합니다.

신명기 32:2의 말씀입니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신32:2)

잠언 19:12의 말씀입니다.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리니”(잠언19:12)

신명기 33:13에서도 야곱이 요셉을 축복할 때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라고 했습니다.
초목이 자라는 데는 비가 필요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메마른 광야에서의 이슬은 더욱 필요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이슬은 식물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생명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연중 2회 정도 비가 내리는데 이른 비는 10월경에, 늦은 비는 4월경에 내립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방의 땅은 건조하고 메마릅니다. 그럼 어떻게 식물과 초목이 자랄 수 있습니까? 이슬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식물과 초목에 있어서 이슬은 정말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슬이라고 하셨습니다. 현대인의 삶의 자리가 메마른 광야 같고 심령이 가뭄의 상태같이 소망 없이 절망하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는 살리는 생명이 됩니다.
  
이슬은 언제 내립니까? 밤에 내립니다.

욥기 29:19말씀입니다.
“내 뿌리는 물로 뻗어 나가고 내 가지는 밤이 맞도록 이슬에 젖으며”

그렇습니다. 이슬은 낮에 내리지 않고 밤에 내립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섭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도 밤 같은 어두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역경과 환난의 때입니다. 고난과 아픔의 상황입니다. 슬픔과 실패의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와 같은 때에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과 역경의 때는 그 자체만으로 볼 때 불행이며 절망 같지만 결코 그렇지만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시냇물 소리가 아름답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물 아래 수많은 크고 작은 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 없는 시냇물은 소리가 없습니다. 안개 짙은 섬은 에메랄드가 생성되기에 가장 좋은 것입니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해서 태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구름이 걷히면 다시 태양은 온 대지에 빛을 뿌립니다.
제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제비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겨울이 지나면 제비는 봄과 함께 다시 날아옵니다. 추운 겨울이라 해서 모든 나무들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봄이 오면 새순이 나고 새 생명이 약동합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의 강함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의 지혜로움을 깨닫고 그 지혜를 배웁니다. 주님을 의지함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슬픈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은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을 때 주님은 우리를 안위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외쳤습니다.
이사야 55:6-7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시편 50:15 말씀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소망 없을 때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고 지칠 때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좌절과 절망으로 지쳐 갈 때 하나님은 나의 곁에 계십니다.

세상살이가 날마다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곤고한 날, 실패의 날, 외로움의 날, 아픔의 날, 고통의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날은 우리 인생의 밤입니다. 이 밤 같은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내리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캄캄한 밤이어야 찬란한 빛이 보이듯 우리 인생의 캄캄한 밤 같은 때에 하나님의 광명한 진리의 빛이 보입니다. 내 영혼이 어두울 때 은혜의 빛이 보입니다. 내 삶이 지쳐 어두운 밤 같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7:14에서 이렇게 깨우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한국 농학의 권위자이신 안동 대한 조의규 박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면서 반신불수가 되셨습니다. 조 박사님은 물론 아내 정영순 집사님과 가족들에게 있어서 이 일은 어두운 밤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살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대학 강단에도 설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어두움의 때에 조 박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받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의 불꽃이 타기 시작했습니다. 육신의 삶은 무너지는 고통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죽어 있던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움직일 수 없던 상황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걸을 수 있었고,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강단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회복되면서 잃었던 영적 생명을 다시 찾았고 따라서 잠깐의 어두움은 새 빛으로 물러갔습니다. 조 박사에게는 밤의 때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맞을 수 있었고 그 은혜의 이슬로 말미암아 새로운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인생에서 밤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밤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서의 밤의 때는 절망의 때가 아닙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필요악이란 말이 있습니다. 파괴는 건설의 어머니란 말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연 환경의 악조건은 보다 나은 두뇌 자원을 만들어 냈습니다. 파스칼의 병약함은 모든 사람의 심혼을 정화시키는「팡세」를 세상에 내놓게 했습니다. 십여 년을 결핵성 골수염으로 투병한 미우라 아야꼬의 고통은 인간의 본질을 깊이 파헤친 「빙점」이란 명작을 쓰게 했을 뿐 아니라 병상에서 영생할 수 있는 신앙을 얻었던 것입니다. 제 자신도 육신이 지치고 눈물을 음료로 대신하던 고난의 때에, 살 소망마저 끊어졌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맞으면서 보다 나은 삶으로의 전환을 경험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에 나는 감사를 배웠고, 사랑을 배웠고, 소망을 배웠고, 기도를 배웠고, 겸손을 배웠습니다.

로마서 8:28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슬은 어떻게 내립니까? 은밀히 내립니다.

민수기 11:9 말씀입니다.
“밤에 이슬이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광야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떡은 소리 없이 내렸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은밀하고 조용히 이루어집니다. 이 광대 무변한 우주를 주관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소리가 없습니다. 이 어두운 땅에 빛을 내리실 때도 소리 없이 빛을 내리십니다. 초목의 성장과 꽃피움과 열매맺음도 소리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시끄러워 질서가 없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인간의 소리가 높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를 않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일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불평 없이 그리고 자기를 내세우는 것 없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사랑한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쉽게 배신을 합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항상 일을 그르칩니다. 없는 듯 하면서 모든 일을 잘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앞에 나서는 듯 하면서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시끄럽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조용한 가운데 임하심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이슬입니다.

은혜의 이슬을 받은 자는 다음과 같이 축복된 삶을 살아갑니다.

첫째, 백합화같이 피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했습니다(5절).

백합은 다른 구근 식물이 다 그렇듯 성장은 매우 빠릅니다. 백합 뿌리는 겨우내 땅 속에서 죽은 것같이 보이지만 봄 이슬로 다시 기운을 얻으면 순식간에 쑥쑥 자랍니다. 은혜를 받은 자의 생활이 이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뿌리가 깊어 잘 뽑히지 않습니다. 그 나무는 30여 미터 하늘을 향하여 치솟아 자라는데 굽지 않고 곧게 자라 성전의 재목으로 사용됩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의 삶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가지는 퍼지며 아름다움은 감람나무 같고 향기가 레바논 백향목 같다 했습니다(6절).

가지가 퍼진 나무의 아름다움처럼 은혜의 이슬을 받은 자의 생활도 범사가 형통하게 됨을 뜻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무성한 샘 곁의 나뭇가지로 비유되었습니다(창49:22).
아름다움이 감람나무 같다 했는데 감람나무는 항상 푸릅니다. 범사의 생활이 감람나무처럼 싱싱하고 푸르며 아름다움으로 충만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향기는 레바논의 백향목 같다 했는데 모든 사람에게는 물론 하나님 앞에서도 향기 있는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눈살 찌푸리게 하는 생활을 하는 것은 은혜 없는 삶입니다. 모든 이들이 볼 때 즐거워할 수 있는 향기 있는 생활은 은혜 입은 자의 축복된 생활입니다.

셋째, 곡식이 소성하고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라 했습니다.(7절).

뜨거운 햇빛에 시들었던 곡식들이 이슬을 맞음으로 소성하듯 일상 생활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시들었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소성하게 되는 축복입니다.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라 했는데 "꽃이 필 것이며”라는 말은 ‘이푸레쿠’라는 말인데 이 말은 열매가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꽃은 피어도 열매맺기 전에 떨어지는 꽃이 있는데 본문의 축복은 열매를 맺는 것을 전제한 꽃이 만발하게 되는 은총입니다. 고난의 날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맞는 성도의 삶이 이처럼 복되고 아름다운 것을 우리는 날마다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고난의 날들!
그것은 어두운 밤과 같지만 인생에 있어서 그 밤은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어두운 밤에도 이슬은 내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그 이슬은 구름이 낀 날은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슬은 맑은 밤에 내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의 구름이 끼어 있으면 은혜의 이슬은 내리지 않습니다.

9절 말씀을 다시 봅시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이 축복된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를 축복합니다.

훼니 제인 크로스비(F. J. Crosby)여사는 일평생 동안 9천여 편의 찬송 시를 썼고 우리 찬송가에도 22편의 가사가 그녀의 찬송 시입니다.
생후 6주 만에 의사의 오진으로 실명을 하게 된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불행할 수밖에 없는 어두운 밤같은 상황에서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맞으면서 95세의 장수를 한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불운을 불평하지 않고 행운을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이 아름다운 신앙의 마음으로 살면서 쓴 수많은 찬송 시 가운데 446장은 그녀가 점자 성경으로 시편57편을 읽다가 감동을 받고 지은 찬송입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 밑 샘솟는 그곳으로 내 영혼을 숨기시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부서진 질그릇 같은 훼니 제인 크로스비, 남의 실수로 억울하게 눈이 멀어 평생 맹인이 된 그 가냘픈 여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맞으면서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어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피곤치 않다고 노래할 수 있는 삶!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상처 투성일지라도, 우리가 죄인 중의 괴수일지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메마른 땅일지라도, 우리의 육신이 깨어진 옹기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날마다 축복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에서보다는 비록 조그마하고 소박한 집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따스한 보살핌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맞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만족된 인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비록 비통한 상황에서도, 핍박을 당하면서도, 긴밤 고독을 안고 잠못이루는 아픔의 날 가운데서도, 일어설 수 없는 절망감에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절박한 어둠의 날 가운데서도 죄의 구름이 없는 맑은 하늘 같은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은 날마다 은혜의 이슬을 내려 주셔서 우리의 삶을 생명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고통은 평안으로, 미움은 사랑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불행은 행복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맞으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출처/박청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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