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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가정

가 정 -창2:18-25

by 【고동엽】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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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8-25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행복은 선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사람을 만드시고 저들을 에덴에 살게 하셨습니다. 처음 사람을 에덴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을 알 수 있으니 하나님이 처음 사람에게 선물로 주신 에덴은 행복 기쁨 풍요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기뻐하며 풍요안에서 살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최고의 선물을 주셨으니 가정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정의 축복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누구나 누려야 하는 가장 기본적 축복입니다. 함께 할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십니까? 아무리 한 사람에게 좋은 일이 많아도 좋은 일이 좋은 일 될 수 있는 것은 가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퇴근을 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 아주 맛있는 곳을 알았는데 함께 갈 가족이 없다면? 이처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아십니까?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걷고 함께 할 수 있음은 축복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가정은 모든 시간들속에서 모든 사건들 속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져야 하고 지켜져야 하는 절대 요소입니다. 절대로 가정을 가족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은 남의 가정을 깨뜨리는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의 기본은 부부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처음 가정을 시작할 때 부모로 시작되게 한 것이 아니고 아이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부부로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함께라는 단어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도 부부입니다. 부부에 대하여 성경은 24,25절에 보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느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합니다. 이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부부는 가장 가까운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무촌이라 합니다. 어느정도입니까?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서로 이 아름다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깨끗해야 합니다.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부부는 하나이기에 서로에게 투명해야 합니다. 행복을 위한 부부의 투명원리가 있습니다. 결혼에는 무언의 약속이 있습니다. 첫번째가 관계의 투명성입니다. 결혼 전에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으나 결혼한 후에는 주변의 모든 사람과의 만남이 부끄럽지 않은 만남이어야 하고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 몰래 남편 몰래 맺는 관계는 늘 문제를 야기 시키곤 합니다. 두번째로는 시간의 투명성입니다. 서로 사생활이라 하여 서로가 모르는 시간이 활용되는 것은 위험합니다. 시간에 대한 비밀이 많을수록 문제 또한 많아집니다. 세번째로는 물질의 투명성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모르는 물질적 비밀 또한 매우 위험합니다. 아내들이 살림을 성실하게 살아주는 것은 가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책에 의하면 행복은 20대 후반에는 예쁜 아기로 인해 30대에는 좋은 집 좋은 차로 40대에는 부부의 건강 때문에 50대에는 서로가 훌륭해 보일 때 60대에는 지나온 날의 좋은 추억으로 인해 행복하고 70대에는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하십니까?

앞으로 가정을 꾸리게 될 젊은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했으면 좋겠습니까?

혹시 지난 날의 상처들로 인하여 혼자가 나아 하고 오해하는 분 계십니까? 혹시 지난 날의 상처들로 인하여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거야 하는 분 있습니까? 창조자 하나님이 창조물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감격하셨는데 하나님이 최초로 좋지 않다 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18절에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입니다. 독처하는 것 홀로 있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안타까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하나님은 처음 사람을 홀로 두셨을까요? 모든 동식물은 처음부터 암수로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것에 암수로 창조하셨으면서도 왜 처음 사람은 홀로 시작하게 하셨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사람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안타까워 그에게 배우자 하와를 주심으로 가족관계를 형성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가정을 이루게 하시는데 어떠한 목적이 있었는가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입니다. 돕는 베필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사람에게 사람을 주시며 관계를 형성해 주실때 돕는 자가 되어라는 차원으로 돕는 베필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돕는 베필은 돕는 자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돕는 자의 원어 에셀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돕는 신하나 조수의 개념이 아니라 돕는 베필이라 하여 여자가 일방적으로 남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돕는자 [에셀]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우실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럼에도 부부가 하나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20대에는 포개고 자고 30대에는 마주보고 자고 40대에는 나란히 누워 자고 50대에는 등 돌리고 자고 60대에는 언제 어디서 자는 줄 모르고 70대에는 아무데서나 자빠져 잔다 합니다. 그것 아십니까? 남자들의 바람 문제 많지요 그러나 아내들이 합법적으로 저지르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과의 바람입니다. 남편의 자리에 아들을 담아두고 아들을 위해 삶을 방향을 조정해 갑니다. 아침을 챙겨도 남편보다는 아들을 위해 챙기는 아내, 남편 귀가 시간 늦는 것보다 아들이 늦으면 불안해 하고 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바로서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들이 가정안에서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들에게 된통 당해봐야 남편에게 마음을 다시 돌립니다. 부부는 젊을 때부터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늙어서도 서로 가까워짐에 있어 서먹하지 않습니다. 왜 돕는 자로 두셨는가? 그것은 서로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들이 않을 만큼 그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서로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시119편에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그는 너희의 에셀이시요 합니다. 그러므로 돕는다는 것은 계급의 개념이 아니라 역할입니다. 남성은 아내의 도움으로 완성되고 여성또한 남편의 도움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공동체속에서 철저하게 도움을 요구하는 자이기보다는 돕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서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나를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가족을 주신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나를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또한 사람이 돕는 자로 삶을 사는 것은 신의 성품,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늘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어느날 랍비 아케바에게 어떤 철학자가 물었습니다. 만일 그대의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사랑하신다면 어째서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가 합니다. 이때 랍비 아케바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을 행할 기회를 우리에게 베푸시기 위하여 가난한 자를 우리 곁에 있게 하셨다네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왜 많은 사람들을 선물로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왜 가족을 선물로 주셨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입니까? 지금은 여러분이 힘들어 할수도 있지만 사실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들속에서 만일 여러분이 돕는 자의 마음을 포기했다면 돕는 자 되기를 미룬다면 여러분은 어쩌면 평생에 도움 난 필요로 하다가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지도 못한 채 끝나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돕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빚을 갚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했습니다. 사실 나의 나된 것은 부모님의 희생 형제들의 희생 선생님들의 도움 주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나의 나 된 것은 나 혼자 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제일 무식한 사람중에 하나가 자기 잘 난 맛에 자신의 능력인 줄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돕는 자로 사는 사람은 마음에 고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부부와 부모와 자녀 모든 관계에서 고마움이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고마움을 잃어버린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잘 나가는 남편의 마음속에 아내를 보며 네 주제에 나 만나서 이 만큼 사는 줄 알라 하고 무시하면 물론 힘든 것은 무시당하는 아내가 힘든 것 같지만 오히려 불행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은 여러분때문에 행복합니다. 손가락으로 꼽아보십시오. 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여러분 마음에 들던지 아니들던지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줄 아십니까?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여러분들 주변에 하나님이 두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 가정을 이루실 때 한번에 주심보다는 먼저 필요를 느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사람에게 가정을 형성하게 하심에 한꺼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사람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라 하심으로 필요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18절에는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하셨으면 얼른 지으시면 되는데 19,20절에 각종 들짐승 각종 새를 아담에게 보내어 이름을 짓게 하신 것입니다. 이름을 하나 하나 지어주던 아담이 이상한 것입니다. 모두에게는 암수 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왜? 하며 나도 짝이 있으면 좋겠다. 나도 짝이 있었으면 좋겠다. 합니다. 이렇게 필요를 인식하게 하신 하나님은 21.22절에 여자를 만들어 보내주십니다. 이때 아담이 감격해 합니다. 기다렸기에 필요하다 여겼기에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에게는 일방적으로 암수를 지으셨던 하나님이 사람은 먼저 필요를 인식하게 하고 기다리게 하며 가정과 관계를 형성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지금의 자녀가 있기까지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쉽게 생기는 자녀도 있지만 그 자녀 하나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다림으로 몸부림을 쳐야 했는지 말입니다. 소중한 가족앞에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랑에 포기하지는 않았습니까? 교회도 한 사람을 구원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었는지 다시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동물들과 달리 필요를 인식하게 하신 후에 가정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다리셨습니까? 필요를 인식하기까지 인격적인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기다려주신 것입니다. 가정은 단순한 종족번식을 위함이 아닙니다. 여기에 나눔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어떻게 기다려 주셨습니까? 바로 성장하기까지 입니다. 관계를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입니다.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용서 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다림은 책임의식을 갖추기까지입니다. 책임 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 부부란 서로가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동물과 달리 사람은 서로를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정의식에서 책임의식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사랑은 감정에서 시작되어 책임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감정이 나를 끌고가다 나를 책임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허락하신 절대관계입니다.

그토록 자상하신 하나님이 하와를 데려올 때에도 아담과 전혀 의논 한마디 없이 일방적으로 데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에 따라 갈빗대를 취함도 일방적이었고 여자를 만든 것도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보내신 것도 일방적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했습니다. 나누일 수 없는 관계의 가족입니다. 이 관계를 언약관계라 합니다. 계약이 아닙니다. 부부로 만날 때에는 50:50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는 20:80이라든지 90:10이라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평등부부보다는 일치부부여야 합니다. 언약이기에 갈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언약이기에 갈라 놓을 수 없어 서로 노력하며 사는 것입니다. 배우자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내가 배우자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참된 결혼은 하나님의 결혼 계획을 수용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을 인정하는 것은 부부관계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원망도 하지 마세요 불평도 말기를 바랍니다. 그냥 선교 나갔다고 여기고 사랑하고 용서를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에덴인 가정은 어떠하십니까? 처음에덴에는 생명나무도 선악과도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행복을 선택할 수도 있고 불행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하였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니라 하였습니다. 서로에게 허물이라 약점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연약한 부분을 다 드러내고 전혀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대상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배우자뿐입니다.

하나님과 나 그리고 부부관계는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출처/유재명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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