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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의 모델 -갈 5:13, 빌 2:3-8

by 【고동엽】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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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13, 빌 2:3-8


오늘 날 가정이 겪는 위기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전통적인 가정윤리의 붕괴에 있습니다. 특히 오래 동안 유교적인 가정윤리를 따르던 한국사회가 급격히 밀려오는 서구의 산업문명과 새로운 가치관 때문에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 온 이후로, 유교를 비롯한 전통종교의 악습을 폐지하고, 잘못된 윤리적 병폐를 바로 잡아 새로운 윤리관을 세운 것도 사실입니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이 기독교적 가치관보다 여전히 더 큰 영향을 미쳐 온 것이 사실입니다(권위주의적 교직체제, 남성위주의 교회운영, 여성안수 반대, 폐쇄주의 등)

전통적 가치관, 윤리관의 공백을 메꾸어 주는 강력한 새로운 가치관, 윤리관이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 사회와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는 일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은 교회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다들 평가하지만, 그만큼 한국사회를 변화시켰는지는 다들 의문스럽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늘어나는 만큼, 향락산업과 유흥산업도 줄어들어야 마땅하건만, 오히려 교회 수에 비례해서 아니 더 많이 늘어났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지키는 파숫군의 임무(소금과 빛의 역할)에 소홀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교회가 과연 성서적이고 영향력 있는 가정윤리를 제대로 세워 주었는지도 심히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불신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물음이 아니라 바로 신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물음입니다. 정말 교회는 가정을 올바르고 행복하게 이끌어 가는 데 얼마나 기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자들의 가정은 얼마나 복음의 정신에 따라 설계되고 세워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여러분의 가정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2. 행복한 가정의 성서적 원리들


1. 삼위일체는 행복한 가정의 모델입니다.


가정은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구성되는 공동체입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부모의 범주에 들어가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모의 범주에 들기도 하고 자녀의 범주에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손자와 손녀는 자녀의 범주에 들어 갑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에 가정은 부모와 자녀로 구성되는 기본적인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가정의 행복과 불행은 대개 이 삼자 간의 인간관계에서 결정됩니다. 비록 외부적 환경이 가족의 행복과 불행을 크게 좌우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수용하고 해결하는가 하는 것도 가정의 구성원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행복과 불행은 결국엔 인간의 수용적 자세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가정의 인간관계를 어떤 원리 위에 세우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난 시절에 우리는 가정의 인간관계를 유교적 원리 위에 세웠지만, 이 원리는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으며, 또 과거의 윤리로 쉽게 복귀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워야 할 행복한 가정의 인간관계의 원리는 바로 성서 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성서는 인간생활의 궁극적 출발점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행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교 혹은 세상의 다른 종교들의 신들과는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 가운데 일치를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를 일컬어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또 저의 스승 몰트만은 이를 '사회적 삼위일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 안에서 서로 사귐을 나누고 서로 섬기고 서로를 빛내주면서 끊임없이 일치를 이루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코아노니아(사귐)는 만물의 사귐과 공동체의 영원한 초석이요 그 원리이며, 그래서 행복한 삶의 원리입니다. 이 삼위 하나님 안에는 서열이나 지배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서열과 지배가 있다는 이론인 '종속론'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정통 기독교의 삼위 하나님은 일체의 일방적 지배나 종속을 거부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함께 계시고, 함께 활동하시고, 함께 동거동락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분의 삶을 본받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과 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생활도 하나님의 공동생활을 본받을 때에만,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2. 가정에서 남자가 지배하는 것은 온당합니까?


부권문화, 가부장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회에서는 남자가 대개 유일신론의 권위를 빌려 가정에서 유일 독재자, 지배자로 군림합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자주 소외당하고 착취,폭행 당하고, 자녀들은 억압당합니다. 어떤 어린이가 교회에 처음 왔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는 아주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더랍니다. "왜 하나님이 아버지냐?"고 묻더랍니다. 이 어린이는 아버지라는 말조차 싫어한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무능하고 술취해 자주 어머니와 자녀를 폭행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우스운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로만 부르는 익숙한 전통이 때때로 남자인 아버지의 권위를 합법화하는 데 기여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대개 아버지 상에 의해 대표되며, 남성적인 왕과 사제에 의해 중재됩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가족 내의 아버지의 권세, 지배자의 정치권력, 종교 내의 사제의 권위의 원천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가정과 교회 내에서 여성과 자녀를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데 자주 앞장 서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은 모습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모습도 갖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의 모성적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권능 있는 창조자요 심판자로서 남성적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지창조 때에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은 수면 위에 운행하면서 만물을 껴안고 품으십니다. 성령은 생명을 낳고 품는 모성적인 힘이십니다. 또 성령은 해골 골짜기의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고,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힘이십니다(요 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이처럼 하나님은 자비롭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과 자비의 원천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주로 '아바'(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친숙하고 신뢰감을 주는 상냥한 어린이의 말로 불렀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복음에서 새롭고 독특한 것입니다. '아빠'는 아람어로 어린이가 중얼거리는 유아언어입니다. 어린이의 신뢰의 바탕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빠'라는 말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더 해당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을 때, 그분은 남성적인 아버지 하나님이나 주님의 권위를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빠는 어머니처럼 버림받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점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부권적,가부장적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삼위일체적으로만 아버지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삼위일체는 가부장적 지배가 없는 이러한 자녀관계를 표현하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으로부터 '아빠 하나님'을 제거하면, 하나님 개념에 지배의 역할만이 남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런 하나님 생각은 이 땅의 남자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됩니다. 성서의 아버지 하나님은 가정에서 남자가 아내와 자녀를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호령하고 군림하는 자세를 결코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신약성서에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되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씀(엡 5:22 이하/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니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골 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이 있다고 해서, 마치 남편이 마치 그리스도와 같은 권위를 갖고서 아내를 지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남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께서 몸된 교회를 위하여 생명까지 주신, 섬기시는 종으로 오신 사실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골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3. 그렇다고 어머니가 가정을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습니까?

남자가 가정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다고 해서, 이젠 아내가 가정을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남자의 일방적 가정지배도 문제지만, 또 한편으로는 남자의 왜소화나 남편의 무능화, 아버지 없는 가정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성의 권리와 발언권이 점점 더 세어지는 가운데서 바람직하지 않는 현상도 드러납니다.

1. 비록 남편의 권위주의적인 지배가 바람직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에는 그 나름대로 부부관계, 가정의 질서는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점점 더 강하게 자기를 내세울수록 부부관계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부부관계의 갈등은 자녀심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부부관계가 안정된 집에서는 형제자매 사이의 갈등이 적고, 부부관계에 갈등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의 관계도 불안정해져서, 형제자매 간에 심하게 싸우거나 미워하는 양상이 나타납니다. 문제가정에서 문제아가 발생합니다.

2. 아내의 권리향상과 더불어 아내의 직장진출, 가출이 잦아졌습니다. 이로써 자녀들의 방황과 탈선이 잦아졌습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권위못지 않게 어머니의 모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모성애의 결핍은 자녀의 성격장애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제도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어머니의 위치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3. 아내가 강해지면서 이젠 도리어 남편이 허약해지는 바람직하지 않는 현상도 생겨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에 두 문이 있는데, 한 문 위에는 "아내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모든 남자들은 이 곳에 서라"는 큰 글씨가 쓰여 있었고, 많은 남자들이 일렬로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또 다른 문 위에는 "아내에게 전혀 지배를 받지 않고 살았던 남자들은 이 곳에 서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 곳에는 한 사람만이 서서 당황한 눈초리로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걸어와서 그 사람을 보고 "너는 왜 여기에 서 있느냐?"하고 물었더니, 그는 "모르겠습니다. 내 아내가 나에게 이 곳에 서 있으라고 말했거든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없는 가정도 큰 문제이지만, 아버지가 없는 가정도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와 직장이 아버지를 하숙생으로 만들면서, 가정에서 남편과 아버지를 빼앗아 갑니다. 더욱이 거세어지는 아내가 무기력한 남편, 아버지 없는 가정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하여 가족들에 대해 점점 더 무책임해지는 남자들, 자기 놀이방식에만 몰두하는 유아처럼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유아적 방식으로 퇴행하는 남자들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탈부권화의 슬픈 부수현상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여기서 복종한다는 것은 물론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사랑으로 종노릇한다는 것이지, 노예나 하인처럼 열등해서, 줏대없이, 타의로, 비굴하게 굽실거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며, 주님 안에서는 상전이나 종도 없고, 자유인이나 노예도 없고, 모두가 다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처럼 종노릇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부모와 자녀 간에도 서로 종노릇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부 간에 서열과 지배가 없듯이 부모와 자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부부관계에는 서열과 지배가 없지만,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는 서열과 지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았고 기르기 때문에 부모가 더 힘있고 유식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무조건 복종시켜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결코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듯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적으로 하나입니다(요 17장).

성자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아들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자 안에서 인간인 우리와 친구관계를 맺어주셨습니다. 하물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마땅히 친구가 될 순 없겠습니까?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권위적인 지배와 종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순종하고 사랑하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니라"(골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부모는 자기의 뜻대로 자녀를 부리고 억압하지 말고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이방인처럼 지배하지 말고 섬기라"고 훈계하셨고(마 20:25-28),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당신의 몸을 대속물로 내어 주심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모의 위압적,권위적 자세는 자녀들을 위축시키고 성나게 만듭니다. 아버지를 살상한 김성복 교수는 얼마 전에 아버지의 모욕적인 언사와 무시 때문에 순간적으로 그런 패륜을 범했다고 자백한 적이 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부모는 자식들 간에도 불화와 알력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반대로 자녀들은 방종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고 했습니다. 자녀들도 무조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동등한 분이셨으나 아버지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셨습니다. 이로써 친히 만인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3. 마치는 말


삼위 하나님의 관계가 동등하면서도 서로 일치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관계이듯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그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지배와 복종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이며, 그래서 대화가 가장 소중합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고독한 성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부부 간에 그리고 부모와 자녀 간에 대화가 단절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문제도 대화의 부족으로 인하여 큰 문제로 비화됩니다. 수평적인 관계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대화요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을 설계하고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화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가슴을 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화하는 가정에 문제가 발생할 수 없습니다. 서로 간에 억압하지 마십시오. 오직 섬김의 정신만이 사랑과 순종의 마음가짐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서로 주인노릇할 때, 모두가 욕심의 노예가 되어 끊임없이 싸우게 되지만, 서로 사랑의 종노릇할 때, 모두가 자유인이 될 수 있고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만 비로소 가정은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작은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본받아 항상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가정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출처/이신건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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