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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넘치는 가정 -마가복음 10장 13-16절

by 【고동엽】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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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 13-16절

< 심은 대로 거둡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정과 자녀를 주셨습니다. 가정은 일이나 성공이나 친구보다 중요합니다. 특히 자녀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날 가장 큰 위기는 정치나 경제의 위기가 아니라 가정의 위기이고, 자녀교육의 위기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매를 맞으며 자라며 예의와 효도를 알았지만 지금은 자녀들이 우상처럼 되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면 결국 그 우상이 내 인생과 영혼과 행복을 망칩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가끔 자녀들 때문에 속상하면 말합니다. “어디서 저런 자식이 나왔나?”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에게서 그런 자식이 나온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닮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잘 키우려면 내 안에 말씀과 예수님의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부모는 자녀 앞에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녀가 칭찬을 먹고 자라면 자신감을 얻지만 욕을 먹고 자라면 자신감을 잃습니다. 자녀들에게 “병신 같은 놈! 빌어먹을 놈!”라고 하면 병신 같이 행동해서 결국 빌어먹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아이가 됩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말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누에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로 고치를 짓는 것처럼 사람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로 자기 인격과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좋은 말을 하면 자기도 좋아지고, 듣는 사람도 좋아집니다. 날 때부터 문제아나 깡패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대개 자랄 때 파괴적인 언어가 자녀를 문제아로 만듭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부모의 말은 음파를 타고 자녀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힙니다.

부모가 화가 나서 “나가죽어라! 너 죽고 나 죽자!”고 하면 그 말은 자녀들에게 독약이 됩니다. 또한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너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면 아이들이 부정적으로 변하고 살아갈 용기를 잃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들 앞에서는 힘든 얘기를 가급적 피하고 그런 얘기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전에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어느 날, 술만 먹으면 아내를 때리는 남편이 그날도 또 아내를 때리자 초등학생 아들이 야구 방망이로 아버지를 때려눕혔고 두 딸이 식칼로 아버지를 찔러 죽였습니다. 형사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행동했니?” 아이들이 대답했습니다. “모르겠어요.” “그토록 죽이고 싶었니?” “모르겠어요.”

그 아이들이 선천적인 마귀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먹을 때마다 욕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니까 아이들도 그렇게 변한 것입니다. 폭력을 행사하면 언젠가 자기도 폭력의 희생자가 됩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어떤 분은 생각합니다. “나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니까 우리 가정은 괜찮아!” 그러나 가정에서는 언어도 폭력이 될 수 있고, 침묵도 폭력이 될 수 있고, 불편한 표정도 폭력이 될 수 있고, 무책임과 외도와 불순종도 배우자와 자녀와 부모에게 큰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로부터 그런 폭력이 나가지 않도록 극히 주의하고, 우리 가정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가정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 은혜가 넘치는 가정 >

어떤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가정일까요? 본문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어떤 가정인지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1. 예수님이 중심이 된 가정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은혜가 넘치는 가정이 되려면 예수님이 만져주심을 바라고 우리 가정을 예수님께 드려야 합니다. 자녀 문제로 고민되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 자녀를 만져주세요.” 부모님 문제로 고민되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부모님을 만져주세요.” 성격문제로 고민되면 역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의 부족한 성격도 만져주세요.”

살면서 문제와 실패와 약점이 있어도 스스로 자기 비하에 빠지지 말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과 축복을 확신하십시오. 빛을 바라보면 빛이 확대되지만 어둠을 바라보면 어둠이 확대됩니다.

한 가정에서 며칠간 남편이 늦게 들어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 옷에서 술집 명함이 나왔습니다. 의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전화가 와서 전화를 받았는데 갑자기 전화가 끊겼습니다. 의심이 더욱 커집니다. 생각할수록 남편이 밉습니다. 그런 미운 생각과 감정이 있으니까 정말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믿고, 여자의 직감은 못 속인다고 하면서 자기의 직감을 영감인 줄 믿고, 피해망상을 진짜로 여깁니다.

그런 피해망상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내 실패와 약점과 고통과 고민에 집착하면 결국 그것에 묶입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주의는 반드시 불행을 초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과 교회를 남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며 사는 기본 훈련소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에서 최대한 양보를 훈련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양보하지 않으면 이익 같지만 손해이고 양보하면 손해 같지만 이익입니다. 눈앞의 작은 것에 집착하면 더 큰 것을 잃게 됩니다. 양보가 없으면 결국 불행하게 되지만 한 발 양보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평화와 행복도 주시고 열 발 전진하게 하실 것입니다.

2. 사랑과 격려가 넘치는 가정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제자들은 “애들은 가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본문 14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제자들의 권위적이고 계산적인 모습을 보고 분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주님은 우리 자녀들을 따뜻한 사랑과 격려로 품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가정을 비판과 판단보다는 사랑과 격려로 아름답게 세워가야 합니다.

어떤 아내는 수시로 남편을 헐뜯고 남편을 쪼다로 봅니다. 그러면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쪼다 부인이 됩니다. 반면에 사랑과 격려로 남편을 왕처럼 대접해주면 자기는 왕비가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점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단점을 잘 찾는 것을 정의나 교양, 혹은 신앙이나 영성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남을 높여주면 자신도 높아지지만 남을 무너뜨리면 자신도 무너집니다.

만약 가족 중에 누가 나를 헐뜯는다는 것을 알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가족까지 나를 저렇게 헐뜯으니까 내가 좀더 잘하자!”라는 생각이 듭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대개 분노가 생기면서 더 반대로 나가고 갈등과 문제가 더 커지게 됩니다. 또한 그런 모습을 보면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도 심히 분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족과 교인들이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날,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 낙심해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내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여보! 무슨 일이 생겼소!” 아내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셔서 그래요.” 루터가 말했습니다. “여보! 그게 무슨 말이요?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아내가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만약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왜 그렇게 당신이 낙심하나요?”

바로 그때 루터는 정신을 번쩍 차렸습니다. 진정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낙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용기를 가지고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노래가 생겼습니다. 그때 지은 찬송이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입니다.

가족의 위로와 격려는 삶에 큰 힘을 줍니다. 남들은 다 나를 쪼다처럼 봐도 가족의 격려와 칭찬이 있으면 그런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과 교우들을 힘써 칭찬해주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닐 암스트롱은 달에 도착하면서 말했습니다. “내게는 한 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게는 큰 도약입니다.” 칭찬과 격려의 말도 내게는 한 마디 말이지만 나의 영혼과 가정과 교회에는 큰 도약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가끔 보면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무섭게 비난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비판에 일부 교인들도 무조건 동조하는 것입니다. 사례에 따라 건전한 비판을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교회의 정체성을 흔들고 교회의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무조건적인 비판은 절대 멀리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와 교인에 대한 비판을 정의와 의로움으로 오해하는 사람 중에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진실한 성도는 거의 없습니다.

진짜 성도는 교회와 교인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족해도 교회와 교인의 가치 자체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회와 교인도 많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건설적 비판이 아니고, 교회와 교인의 정체성을 흔들어 교인임을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하려는 사단의 전략입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 때문에 기죽지 말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의 부족함을 다 아십니다. 그래도 여전히 교회와 교인에게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그 기대를 이룰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화 상대가 정말 중요합니다. 격려하는 좋은 친구를 만나면 인생도 좋아지고, 헐뜯는 나쁜 친구를 만나면 인생도 나빠집니다. 우리는 내 삶에 믿음과 용서와 사랑을 도전할 수 있는 친구를 가까이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남을 깎아내리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까이 하기 싫습니다. 말할수록 영혼과 마음이 피곤해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말할 때마다 비전을 주고, 희망을 말하고, 사랑과 따뜻함을 전합니다. 그런 사람은 가까이하고 싶습니다. 이제 가정과 교회에서 서로 희망을 도전하고, 사랑을 전하고,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십시오. 그것이 나와 내 가정과 교회가 복 받는 길입니다.

서울 인근에 한 여자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불신자를 전도해 좋은 성도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교회들이 연합집회를 하면 그곳에 가서 “한국 교회는 썩었다! 진리의 말씀을 들으러 오라!”는 제목의 전단지를 돌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아오면 매주 “기존 교회는 죽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설교합니다.

처음에 그 설교를 들으면 자기들만 살아 있는 영혼 같습니다. 그런데 계속 교회비판을 들으니까 성도들의 마음속에 불신과 교만, 그리고 남을 우습게 보는 마음만 가득 찹니다. 사람의 영혼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먹고살도록 창조되었는데 맨 날 비판만 들으니까 영혼이 곤고해져서 얼마 후에 그 교회를 떠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난 분들은 다른 교회에서도 잘 적응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비판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약과 같습니다. 깨뜨리려는 목적의 악한 비판은 독약이고, 세우려는 목적의 건전한 비판은 양약입니다. 그러나 건전한 비판조차 너무 자주 하면 안 됩니다. 매일 약만 먹으며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영혼은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란 꿈과 희망이 넘치는 삶입니다. 교회는 꿈을 격려하는 곳이고, 교인은 꿈을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칭찬과 격려로 가정과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3. 겸손과 순수가 넘치는 가정

본문 15절 말씀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순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겸손하라고 해서 자랑하면 절대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랑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적절한 자랑은 때로 듣는 사람에 선한 도전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자랑만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신앙과 영성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좀 더 잘 믿고 경건한 것처럼 보여 사람의 칭송을 구하는 자랑은 자기 영혼을 사단에게 파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매국노 같은 세리도 사랑했고 몸을 파는 창녀도 사랑했지만 바리새인은 무섭게 질책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처럼 신앙과 영성을 자랑하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신앙을 자랑하는 것은 가장 신앙이 없는 태도이고, 영성을 자랑하는 것은 가장 영성이 없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무엇보다 자랑해야 할 것은 죽어야 사는 십자가의 삶입니다. 왜 많은 성도들에게 만족과 행복과 능력이 없습니까? 남을 위해 죽으려고 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을 살려주지 않으면 나도 살 수 없고, 남을 행복하게 하지 않으면 나도 행복할 수 없고, 남을 높여주지 않으면 나도 높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똑똑한 사람이 불행합니까? 행복의 길을 따라가지는 않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것저것 해주세요.”라고 행복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내가 죽어야 주어집니다.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서 자기 요구와 자존심을 내세우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 고집과 감정, 내 야망과 물질, 그리고 내 자존심과 자랑까지 다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십자가만 붙들고 겸손히 나갈 때 비로소 행복은 찾아옵니다.

겸손이 없으면 평안도 없습니다.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려는 욕망이 작을수록 평안은 커지지만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려는 욕망이 클수록 평안은 없어집니다. 또한 욕망이 커지면 성공한 사람을 미워하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심령을 예비해서 어떤 경우에도 마음에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불평이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스위스에서 열리는 다보스 포럼이라고 있습니다. 한 주간 열리는 그 포럼에 참석하려면 등록비만 몇 천만 원을 내야 하는데 항상 등록이 초만원입니다. 세계 각 분야의 정상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한 대학교수도 그곳에 참석했다가 별로 얻은 것도 없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학생들에게 간혹 다보스 포럼에서 만난 사람들 얘기를 해주자 의외로 학생들이 그 얘기를 듣고 큰 도전을 받고 비전을 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질투하고 외면하기보다 그분의 장점을 인정해주고 필요하다면 그 장점을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도 그런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또한 그런 겸손한 사람이 있는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께서 더욱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 가정은 행복의 근원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이루게 하실 때 그 가정을 통해 이루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기대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기대대로 가정을 만들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자녀 양육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 자녀는 내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의 사명과 목적을 가진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사명감을 가지고 자녀를 신앙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광대한 땅도 없고, 자원도 없고, 인구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이란 유산 때문입니다. 그처럼 자녀가 잘되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면 무엇보다 신앙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부모가 주일성수 하는 모습, 성경 읽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등을 자녀에게 남겨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TV 앞에서 불륜 드라마를 보거나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하는 모습 등은 보여주지 말아야 합니다. 컴퓨터 게임을 꼭 하고 싶으면 차라리 자녀들 보지 않는 곳에 가서 혼자 하십시오. 부모가 헛된 일에 빠져있는 모습은 내색은 안 해도 자녀들의 영혼에 큰 상처가 되고, 결국 자녀에게 살아갈 목적과 용기를 잃게 만듭니다.

이삭은 모리아산에서 말씀에 순종해서 자기를 제물로 바치려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고 자랐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이삭은 자신이 부모가 되면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우리도 자녀들에게 그런 영상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키울 때 자녀들이 거룩한 큰손이 되도록 잘 키우고, 우리 가정을 세상 만민에게 복을 전해주는 초석과도 같은 가정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힘든 세상입니다. 그래서 위로가 필요합니다. 어디에서 참된 위로를 받습니까? 바로 가정입니다. 지금은 치열한 경쟁사회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목표를 향해 나가다 보면 외롭고 고독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무한한 생명력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역시 가정입니다.

저는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소속 목사로 있습니다. 저희 교단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건전한 복음주의 선교교단이고, 순복음교회와 성결교회의 산파 역할을 했지만 한국 성도들은 잘 모릅니다. 얼마 전에 방문한 미국의 한인총회 감독인 문형준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기독교 선교연맹(C&MA)을 잘 모르는 것은 21세기 한국 교회의 기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한국에서 교단을 개척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가끔 이 길을 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장로교나 감리교 목사님들이 가끔 저보고 자신의 교단으로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현재는 편해질 수 있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는 간판을 걸면 교회부흥의 기회도 훨씬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좋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제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가다 보니까 힘들긴 했지만 가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기도후원자를 만나게 해주셨고, 심지어는 매월 선교비와 십일조까지 보내주는 후원자들도 주셨습니다. 앞으로 C&MA 선교사 훈련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센터와 사람과 재정도 하나님께서 신비하게 주실 줄 믿습니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면 힘들기는 해도 그 길을 가면서 주어지는 보람과 은혜와 축복은 상상 이상으로 큽니다.

요새 열왕기상 설교정리를 합니다. 열왕기상은 상당히 많은 본문이 다른 설교자들이 설교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열왕기상 3장 전반부에 나오는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얻은 이야기, 열왕기상 17-19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이야기는 목사님들이 설교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성경본문으로는 거의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설교 자료도 거의 없습니다.

그처럼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하니까 설교준비도 더 힘듭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힘들게 열왕기상 강해 정리를 끝내고 그 설교파일을 다른 목사님에게 제공하면 그 목사님은 그 파일을 참고해서 비교적 쉽게 설교를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쉬워집니다.

며칠 전에 기독교 C3 TV에서 ‘한국의 명 설교 시리즈’를 새로 기획하면서 저에게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제가 집필한 예레미야 강해 111편을 연재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왜 하필 예레미야 강해를 원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희소성이었습니다. 즉 성경에서 가장 긴 책 중의 하나인 예레미야를 빠짐없이 연속으로 강해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남이 가보지 않은 곳에는 신비한 들꽃과 산삼이 있듯이 처음 가는 길은 힘든 길이지만 그 길에는 보람과 축복도 있습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개척의 길을 피하려고 하지만 그 길을 항상 피해갈 수만은 없습니다. 원래 인생이란 남이 가는 길만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미지의 미래를 향해 개척하는 심정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삶에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한 순간이 복병처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고독한 순간을 만났을 때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주님 중심적으로 사는 가정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으로 하나 된 가정은 행복의 근원입니다. 이제 가정과 가족을 더욱 소중히 여기십시오.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가정으로 만들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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