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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별 설교 3,276편 】◑/가정 설교 109편

가정에서 별세하라 -에베소서 5:31-33

by 【고동엽】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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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31-33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그 신비한 삶의 현장은 가정입니다. 어린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던 초가집, 그 속에서 온 가족들이 아웅다웅하며 살던 모습을 추억해보면 감사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젖어옵니다. 또 결혼 적령기가 되어 배우자를 만나 결혼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하고 오묘한지 말로 다할 수 없고, 때가 되면 자녀를 선물로 주어서 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오묘한지 감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이와같이 사람은 이 세상에서 태어날 때 가정에서 태어나고, 가정에서 자라며 가정을 이루어 살고, 마지막 죽을 때에도 가정에서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은 우리 삶의 안식처요, 인생의 요람이며, 모든 삶의 보람을 얻는 지상천국입니다. 가정은 사업보다 중요한 것이요, 성공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며, 이 땅에서 업적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땅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어 살았다면 그 사람은 최상의 성공을 이룬 사람입니다.
현대인의 최고의 비극은 가정이 파괴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2002년 통계에 의하면 1년에 결혼하는 사람이 30만 6천쌍이요, 이혼하는 사람이 14만 5천쌍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게 되면 몇 년 후에는 미국을 추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불행 중 불행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정을 가장 안전하게 유지했던 이 나라가 무슨 연고인지 최근 10년간에 걸쳐서 사정없이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이혼의 주된 사유 가운데 1위 성격차이 44.7%, 2위 가족간의 불화 14.4%, 3위 경제적인 문제 13.6%, 4위 배우자 부정 8.6%, 5위 정신적, 육체적 학대 4.8%, 기타13.3%로 나타났습니다.
옛날에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살겠다고 서약을 했는데 이제는 '성격 차이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또는 '식어진 사랑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로 변경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 매일 390여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사회의 모든 분야 중에서 가장 위협적이고 파괴적인 위기는 가정의 위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우리 삶의 근거요, 터전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면 전 세계가 무너집니다.
어떻게 파괴된 가정에서 상처받고 자란 아이들이 온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겠습니까 파괴된 가정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결국 상처받은 아이들은 이 사회를 상처내고 병들게 만듭니다. 동양의 명언대로 흔들리는 둥지에 성한 달걀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한국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느냐? 지난 날 우리의 선조들이 가정의 가치관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부모는 되었지만 삶의 가치관을 유산으로 주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이 바로 가정을 파괴하는 유산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고 살리기 위해서 성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31절)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부모를 떠나는 것은 별세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의 세계를 떠나야 새로운 세계 가정이 태어납니다. 조상 적부터, 더 위로 올라가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악성, 사악성을 떠나야 합니다.
얼마전에 제가 설교상에서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야 한다고 설교를 했더니 한 자매가 시어머니 모시고 살기가 힘들던 차에 잘 되었다 싶어 신랑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한국의 저명한 목사님께서 부모를 떠나라고 했으니까 우리 분가합시다."  "늙은 어머니를 혼자 두고 어떻게 떠나"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인데 성경에서 부모를 떠나라 했으니까 떠나야지"  "어머니는 어떻게 하고"  "양로원이나 어디로 보내면 되지" 아내가 날마다 떠나자고 조르니까 남편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중표 목사입니까?"  "예, 이중표 목사입니다."  "목사님, 우리 식구 성화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부모를 떠나라 했다고 떠나자고 야단인데 집이 한 채밖에 없는데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고민입니다. 목사님께서 좀 해결해 주시지요."  "부인이 제 설교에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반절밖에 못받았습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부모를 버리고 떠나라는 말이 아니고 부모에 대한 경제적, 환경적 의존으로부터 독립하라는 것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잘 알겠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창세기에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했는데 남자만 떠나서는 안됩니다. 여자도 떠나야 합니다. 떠나라는 말은 과거를 청산하라는 말입니다.

첫째, 외적인 떠남
결혼 전에는 부모를 의존하고 살았습니다.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살았고, 부모의 간섭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부모의 간섭에 휘둘리지 말고 자주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를 떠나 따로 사는 며느리를 불러다가 자꾸 일 시키면 안됩니다. 이제 그도 독립된 가정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 가정을 돌봐야 됩니다. 그리고 집에 방문했을 때도 일 시키면 안됩니다. 손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저는 며느리가 우리 집에 와서 일하려고 하면 절대로 못하게 합니다. "우리 집이니까 너는 편안히 앉아 있어라" 그럽니다. 나도 한 아이의 아버지이지만 그도 한 아이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둘째, 내적인 떠남
부모로부터 받은 불행한 요소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성장하면서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인간성, 습성, 사악성, 혈기, 굴절된 자아상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 받은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살면 가정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아버지가 어머니 구박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들이 결혼해서 자기 아내를 구박할 가능성은 70%입니다. 아버지에게 매 맞고 자란 아들이 결혼해서 자기 자식을 때릴 가능성은 78%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가정생활 잘하는 것은 공부한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박사학위 받았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인물이 잘났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철저하게 부모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셋째, 영적인 떠남
옛날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토속적인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런 사악한 부모님의 습성을 물려받아서 우상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불신의 세계를 떠나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부모를 떠나는 결단을 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아비집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이 비밀'이 뭡니까? 새로운 세계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결혼한 자녀를 떠나보내는 것은 위대한 결단입니다.
권사님 한 분이 어느날 제 설교를 듣고는 아들에게 그러더랍니다. "나 떠날란다."  "어머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뭐 잘못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경에서 떠나라고 하니까 떠나야 한다. 너희가 오랫동안 나 모시고 사느라고 힘들었지 이제 편안하게 살아라." 그리고는 얼마 있다가 정말로 전세를 얻어서 나갔습니다. 지금은 따로 살지만 자녀들은 함께 살 때보다 더 효도하고 손주들도 할머니를 더 귀중하게 압니다.
어떤 분들은 자식이 결혼하면 함께 살면서 정들어야 한다고 3년동안 데리고 삽니다. 정이나 안떨어지면 다행입니다. 신혼도 한 때인데 그 짧은 기간동안 시부모님과 함께 살면 시아버지 기침소리, 시어머니 잔소리 들으면서 얼마나 간이 녹아내리겠습니까 얼른 내보내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안에서 네 부모를 순종하라" 결혼 전까지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는 공경해야 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공경을 어떻게 합니까? 가정을 이루어 살면서 자녀를 낳아 길러보니까 부모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자기도 어렸을 때 그렇게 철부지였을거라 그래서 부모님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공경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에덴은 '기쁨, 행복,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을 기쁘고 즐겁게 살라고 에덴으로 이끌어 가셨는데 행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사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한 여자를 만드셔서 아담에게 이끌어오셨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산천이 아름다웠습니다. 옛날에 먹던 과일 맛이 아니었습니다.
혼자 공부할 수 있습니다. 혼자 사업할 수 있습니다. 혼자 일할 수 있습니다. 혼자 밥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혼자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아담은 사랑할 임을 만나고서야 에덴이 되었습니다. 에덴은 사랑할 사람을 만나는 곳입니다. 천국은 사랑할 사람을 만나는 곳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사람을 오다가다 만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할 사람을 만들어 짝지워 주셨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만나므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새로운 세계는 특별은총을 통해 받는 세계입니다. 일반은총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천지만물을 통해서 받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특별은총은 자기가 죽고 부활하므로 새로운 세계를 사는 은총입니다. 아담은 죽고 살아나므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를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자기 아내를 통해서 받는 은혜였습니다.

      별세의 믿음

아담이 하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내 갈비뼈로 만든 여자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여자를 이끌어 오셔서 "이 여자는 네 갈비뼈로 만든 여자다"라고 말할 때 아담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생활은 신앙생활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은 교회생활이요, 세상에 가서 사는 것은 사회생활이요, 가정에서 남녀가 사는 것은 부부생활입니다. 그러나 일생동안 부부생활로 끝나면 안됩니다.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랑(新郞)과 신부(新婦)로 만날 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깊이 잠들 때 하와도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와를 빼내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때 아담도 살고 하와도 살았습니다. 같이 죽고 같이 살았습니다.
아내를 보면서 '내 갈비뼈로 만들었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들어가야 됩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남편은 자기 갈비뼈에서 나온 소중한 아내를 향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옛날 아내에게 함부로 하던 권위주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옛날에는 남편들이 아내에게 함부로 해도 꾹 참고 살았지만 지금은 이혼 당합니다. 지금은 이혼신청을 여자가 더 많이 합니다. 저도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 갈 데가 없어서 마주보고 살아야 하니까 다행입니다.
가정은 별세하는 곳입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건넛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우리 식구가 "여보 여보" 하고 불러요. 그래서 "왜 그래" 하고 갔더니 화장을 하면서 "요람에서 아무개 권사님 전화번호 좀 찾아줘요." 하는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당신이 찾아서 보면 되잖아" 그랬을텐데 전화번호를 찾아서 "여기 있으니까 돋보기로 보시지" 하고 돋보기까지 찾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내 방으로 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세월이 많이 갔구나! 내가 이렇게 변화되다니 놀라운 일이야'
또 어제는 집에서 설교 준비를 한참 하다가 배가 고파서 냉장고에 앞에 앉아서 귤을 까먹고 있었더니 아내가 불러요. 그래서 갔더니 "혼자 먹지 말고 같이 먹어요." 그래요. 그래서 귤을 다 까서 아내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변화를 어디에서 봅니까? 옛날에 따르던 방식과 습관이 바뀌는 것에서 봅니다.

      별세의 사랑

자기를 죽여서 사랑하는 것이 별세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실천한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에로스는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입니다. 필리아는 가족, 친구간의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부부의 사랑에는 이 세가지 차원이 모두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에로스로 시작하였을지라도 나중에는 필리아로 깊어지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별세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부부의 관계를 점검해 보십시오.
이런 말이 있습니다. "20대는 포개어 자고, 30대는 마주보고 자고, 40대는 나란히 누워서 자고, 50대는 등 돌리고 자고, 60대는 어디에서 자는지 모르고 자고, 70대는 각각 죽으러 간다."
부부는 가능한대로 함께 자야 합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 코고는 소리 때문에 천지가 진동하는데 어떻게 함께 잡니까" 함께 골면 됩니다. 이것까지도 닮아야 됩니다.
한 몸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내가 아플 때 남편도 그 아픔을 몸소 체휼해야 됩니다. 아내는 아픈데 남편이 나 몰라라 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제 아내는 저를 위해서 일생을 희생하면서 살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부흥회를 다녀왔더니 우리 식구가 과일을 가지고 오는데 과일이 썩었어요. "무슨 과일이 이렇게 썩었어"  "교회 집사님이 외국에 다녀오면서 열대 과일을 사왔는데 안먹고 냉장고에 두었더니 썩었네요."  "썩기 전에 먹지 왜 놓아두었어."  "당신이랑 같이 먹어야지 어떻게 나 혼자만 먹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별세의 사랑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3절)
자기 갈비뼈에서 나왔기 때문에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을 경외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은 신앙생활을 성취하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절)
부부생활은 하나님께서 만든 신랑(神郞)과 하나님께서 만든 신부(神婦)가 만나 사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하나님께서 재창조한 사람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절). 남편을 보면서 주님을 본 듯 살다가 영원하신 주님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라" 영적인 의미에서 아내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아내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신랑은 주님의 모형이요, 아내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남편이 자기 자신을 별세시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고, 아내는 신랑되신 예수님이 만들어놓은 신부의 인격을 담아 살 때 그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 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31-32절)
가정은 천국이 이루어지는 곳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곳입니다.
한 자매가 까다로운 남편 만나 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만났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악한 습성이 그대로 있어서 아내를 괴롭힙니다. 자매는 성전에 가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기도 중에 만나라 해서 만나 결혼했는데 남편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주여, 이 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때 성령께서 이렇게 감동하셨습니다. "내가 언제 네 남편 믿고 살라더냐, 내가 언제 네 남편 보고 행복하라더냐 나를 믿으라 나를 바라보라." 그 순간 '내가 그리스도의 신부지'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주여, 이제 나는 영원한 신랑되신 주님을 믿고 살겠으며 주님을 바라보면서 행복을 얻겠나이다." 그때부터 이 자매의 얼굴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늘 바가지 긁던 아내의 얼굴이 변하니까 남편이 물었습니다. "여보, 무슨 일이 생겼소?"  "여보, 나 좋은 사람 만났어."  "누구를 만났는데"  "궁금하면 따라오세요. 제가 소개해 드릴께요." 남편도 교회에 와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가정은 별세하는 곳이요, 별세를 삶으로 이루는 곳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삶의 현장을 이루어갈 때 그 자리가 천국이 됩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중표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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