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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녹취 13

by 【고동엽】 2022. 7. 9.
오늘은 우리가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서신 첫 시간에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약의 27권이 4권의 복음서, 1권의 역사서, 21권의 서신서, 1권의 묵시록, 총 27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쓰여진 순서가 아닙니다. 쓰여진 순서대로 하자면 바울의 서신이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 서신은 50년부터 60년 그 사이에 대부분 다 기록되었다고 보는데 그 바울 서신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이 무엇인가 라고 할 때 많은 학자들이 데살로니가전서라고 말합니다. 48~50년 사이에 데살로니가전서가 쓰여지지 않았을까 보통 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개척했던 교회들 안에서도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교회가 많았다고 했는데 그러나 두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했습니다. 이 두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는 바울이 1장 1절에서 자신을 굳이 사도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사역의 최고 면류관이다 라고 표현을 많이 하는데 바울의 사도됨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을 너무나 기쁘게 했던 그리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기쁘게 했던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 였습니다.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냐면 잘못된 재림 신앙으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러 가지 혼란, 그리고 잘못된 주장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무엇이 진리인가, 우리가 정말 붙잡아야 될 재림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서신을 통하여 신앙인이 붙잡아야 될 참된 재림 신앙이 무엇인가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1992년 10월 28일 다미 선교회 기억하시나요? 아마 나이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 같은데 이장림이라는 사람이 92년 10월 28일 자정에 주님 재림하신다고 하면서 시한부 종말론을 얘기했고 그 이장림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면서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직장도 그만두고 가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고 그리고 주님 재림하신다고 하면서 사람들 전도하고 심지어 10월 28일은 이른 아침부터 교회당에 모여서 흰옷 입고 하루 종일 찬양하고 하루 종일 기도하면서 주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을 방송국이 생중계까지 했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이런 시한부 종말론이 세계 각지에서 등장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에게 계시로 알려주셨다, 몇월 몇일 어디에서 주님이 구름 타고 이 땅에 재림하신다 라고 하면서 주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모여서 기도해야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도에 열과 성을 다해야 된다,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것이 시한부 종말론인데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통해서 정말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온전히 붙잡아야 될 참된 재림 신앙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을 보시면 사도행전 17장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은 길게 만나지 못했습니다. 3번 정도 만났습니다. 3번 정도 만난 다음에 데살로니가에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베뢰아라는 곳으로 도망을 갔고 그리고 이 사람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옴으로 인해 아덴으로 또 피신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과 짧은 기간 만나서 어떻게 보면 기독교 신앙의 일부만 배운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람들이 바울이 없는 사이에 신앙을 떠난 것은 아닌가 걱정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뭐냐면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에 대해서 여전히 존중해주고 있고 바울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바울이 가르쳤던 복음의 메시지에 굳건히 서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울이 너무나 기뻐합니다. 문제는 뭐냐면 바울과 만났던 기간이 너무 짧았고 바울에게 배웠던 신앙적인 내용이 너무 제한적이다 보니까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잘못된 신앙 이해를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곧 주님이 재림하실터인데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거냐, 주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 주의 재림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구원 받는거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재림이 지연되는 가운데에서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났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어떤 혼란이 생기는 겁니까? 이 사람은 주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제외되는 것인가 이런 식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런 혼란을 명쾌하게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썼던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우리가 성경을 보겠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전서 1장 7절을 보시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합니다. 1장 7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 마게도니아는 어디입니까? 그리스 북부 지방을 마게도니아라고 하고 그리스 남부 지방을 아가야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 땅의 모든 믿는 자의 본, 모델이 된 교회가 어디냐면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4장 9절에 보시면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라고 말합니다. 형제 사랑에 대해서 더 이상 바울이 가르칠 것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무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2장 19~20절에 보면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있죠? 데살로니가 교인들만 생각하면 너무 행복한 겁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큰 칭찬을 받았던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도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요? 잘못된 종말 신앙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곧 재림하실텐데 라고 하면서 일상의 삶을 나태하게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난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이 4장 16~17절입니다. 4장 16~17절을 보시면 요즘은 덜한데 한국 교회가 3~40년 전만 하더라도 휴거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휴거 신앙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대표적인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말씀입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아까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어떤 논쟁이 있었다고 했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 주의 재림을 영접하는 사람이 구원받는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주님이 강림하실 때 16절 끝부분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살아있었냐 아니면 육신으로 죽었냐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뭡니까?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죽음을 경험한 자라고 하더라도 예수를 믿었던 자라면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그들은 다시 부활합니다. 주의 재림을 영접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서 주의 재림을 영접해야 구원을 받는다,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하셔야 될 단어가 16절에 ‘강림한다’라는 말입니다. 그다음 17절에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강림한다, 영접한다 라고 하는 말의 헬라어가 중요합니다. 강림한다는 말이 ‘파루시아’라는 말입니다. 이 파루시아라는 말은 강림한다 또는 주의 재림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말은 ‘아판테시스’라는 단어입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면 파루시아와 아판테시스라는 단어가 AD 1세기 로마 제국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던 정치 용어라는 겁니다. 그 용어를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보십시오. 뭐가 파루시아냐면 로마라는 나라가 얼마나 광활한 제국입니까? 너무나 광대합니다. 로마를 다스리는 황제는 한 명인데 로마 제국은 너무나 광대하고 광활합니다. 황제가 이 모든 지역에 매일 등장해서 그 지역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어떻게 합니까? 지역마다 왕들을 세우거나 총독을 세우면서 그 지역을 자신을 대신하여 통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총독이나 왕들은 황제에게 충성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는 한 곳에 있지만 자신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왕과 총독을 세워서 백성을 통치합니다. 그런데 몇 년에 한 번씩 로마 황제가 자신의 통치 지역을 방문하는 겁니다. 이 방문하는 것을 헬라어로 뭐라고 하냐면 파루시아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언젠가 이 땅에 재림하신다 라고 할 때 여기 파루시아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은 전제가 있는 겁니다. 무슨 전제가 있는 겁니까? 이 땅이 주님의 것이라는 전제가 있는 겁니다. 파루시아는 뭐라고요? 자신의 통치 지역을 방문하는 겁니다. 이 땅이 우리 주님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왜요? 주님이 친히 창조하신 거잖아요. 주님의 것을 주님이 방문하시는 것을 파루시아라 말합니다. 자, 어느 도시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황제가 이 도시에 파루시아를 합니다. 황제가 우리 도시를 찾아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도시 안에 있는 왕이나 귀족들이 그 성 안에서 황제의 방문을 맞이하나요? 아닙니다. 황제가 우리 도시를 방문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성 안에 있는 왕이나 귀족들은 우리 도시를 방문하고 있는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겁니다. 황제는 이 성을 찾아서 오고 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황제를 영접하기 위해서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중간 어딘가에서 만나겠죠. 이것을 영접한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헬라어 ‘아판테시스’라는 단어입니다. 황제는 이 도시를 찾아 방문하고 있고 도시에 있던 왕과 귀족들은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서 나아갑니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황제의 방문을 영접합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까요? 당연히 그 다음 행선지는 황제가 방문하기로 예정된 이 도시인 겁니다. 이런 수평적인 것을 수직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4장 16~17절입니다. 주님은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통치 지역인 이 땅을 파루시아 하시는 겁니다. 방문하시는 겁니다. 주님이 당신의 통치 지역인 이 땅을 방문하실 때 이 땅에 있는 주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가만히 있으면서 주님의 방문을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방문하시고 이 땅의 주의 백성들은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님을 영접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휴거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공중에서 주님과 주의 백성이 만난 다음에 그다음 행선지를 어디라고 주장합니까?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하나님 나라로 날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 파루시아와 아판테시스 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파루시아 하십니다, 이 땅에 있는 주의 백성은 파루시아 하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영접하러 올라갑니다. 그래서 주님과 주의 백성이 중간 지점인 공중에서 만남을 갖습니다. 그다음 행선지는 어딥니까? 당연히 주님이 방문하시기로 한 이 땅입니다. 그래서 휴거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파루시아나 아판테시스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겁니다. 참고로 휴거라는 말은 17절에 말하는 ‘끌어 올려’라는 말에서 휴거라는 것이 나온 겁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면 왜 공중으로 올라가냐,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그리고 그다음 행선지는 어디냐 라고 했을 때 1세기의 파루시아와 아판테시스라는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단어를 바울이 지금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다음에 5장 8절을 보시면 아까 데살로니가전서가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이라 했습니다. 5장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로 되어 있습니다. 5장 8절을 읽으시다 보면 어떤 말씀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맞습니다.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입니다. 에베소서는 옥중 서신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 서신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의 말씀이 이후에 에베소서 6장,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했을 때는 훨씬 더 상세하게 다양한 폭넓은 기술로 발전되었구나 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다음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말씀이 5장 16~18절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 모르는 신앙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다보면 뭔가 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 너무 모르시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어,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 이런 식의 약간 하소연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뭐냐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내가 기뻐하는 이유, 내가 감사하는 조건, 이런 것들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무엇에 기뻐합니까? 무엇 때문에 감사합니까? 내가 원하는 일이 술술 잘 풀리면 기뻐하죠. 내가 바라는대로 하나님이 잘 채워주시면 하나님께 감사하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기뻐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담하고 이런 현실에서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왜 항상 기뻐할 수 있었습니까? 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까? 지난 번에 빌립보서 3장에서 본 것처럼 바울은 예수를 믿은 다음에 가치의 우선 순위를 바꿨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잖아요.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가치의 우선순위가 역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항상 기뻐하지 못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우리의 인식과 관점과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 겁니다. 기쁨의 조건과 감사의 이유가 변화되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오늘도 내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한다는 이유만으로, 오늘도 내가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면,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있건 고난과 핍박을 받건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고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기뻐할 수 있다면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이 기쁨을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죠.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 자식이 잘 되야 기뻐합니다. 남편의 사업이 잘 되야 기뻐합니다. 우리 집의 가족들이 다 건강해야 기쁜 겁니다. 그런데 자녀가 속 썩이고 사업이 잘 안 되고 우리 가족 가운데 누군가 병에 걸리고 그러면 금방 낙담이 되는 겁니다. 여전히 기쁨의 조건과 이유가 나에게 달려있는 겁니다. 상황에 달려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들을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중심적으로 우리의 기쁨과 감사의 조건과 이유가 달라져야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의 아름다운 세계관의 전환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와 계속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결국 올바른 재림 신앙이 무엇인가, 올바른 재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언제 재림하시나 생각하면서 늘 하늘 쳐다보는 것이 올바른 재림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올라가신 그대로 구름 타고 내려오신다고 하셔서, 구름이 많이 있을 때 이제 곧 주님이 구름 타고 내려오시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올바른 재림 신앙이 아닙니다. 올바른 재림 신앙은 뭡니까? 주님이 오늘 오시건 내일 오시건 간에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일상을 신실하게 살아내는 것이 최고의 재림 신앙인 겁니다. 나의 일상의 신실한 노동을 통하여 이웃을 기쁘게 만들고 교회 공동체에 덕을 끼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온전한 재림 신앙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데살로니가후서이고 특별히 중요한 것이 3장 10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보면 바울이 아주 엄중하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곧 재림하신다 라는 것 때문에 일상을 성실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로부터 도움만 받으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재정을 공동으로 사용했구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동 식사를 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 교인들이 개별적으로 자기 가정에서 식사를 했다면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이것은 가능하지 않죠. 어떻게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식사하나 안 하나 이것을 감시하고 밥 못 먹게 하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말씀이 가능했던 이유가 뭐냐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도들이 냈던 헌금을 가지고 교인들이 공동 식사를 했구나, 예를 들자면 하루에 3끼를 다 하지 않았겠지만 아마 저녁 식사를 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봐야 됩니다. 일상의 노동을 마무리하고 저녁에는 함께 모여서 이들이 공동 식사를 했는데 일상을 빈둥빈둥 성실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들이 교회로부터 혜택만 받으려고 하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일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교회에서 식사 교제에 그들을 참여시키지 않는, 먹지도 못하게 하라는 아주 엄중한 메시지를 바울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시한부 종말론, 잊을만하면 또 나올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뭐냐면 주님이 언제 재림하시건 간에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일상을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의 자세를 가지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실한 노동, 신실한 삶을 통해서 지체와 이웃들을 기쁘게 하고 교회 공동체에 덕을 끼치는 것이야 말로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가장 올바른 자세이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공부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은 바울 서신 마지막 시간으로 조금 분량이 많습니다. 디모데전서부터 빌레몬서까지 4개의 본문을 우리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간도 하나님과 더불어서 신실한 삶 사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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