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도 건강하셨습니까. 오늘은 빌립보서와 골로새서를 함께 보겠습니다. 지난 강의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서도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교회가 많이 있었다,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했던 교회가 두 교회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빌립보 교회이고 또 하나가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원래 아시아 선교만 생각했던 바울이 드로아라는 곳에서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보게 되고 유럽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유럽 선교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갔던 성이 바로 빌립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럽 선교의 서막을 열었던 가장 중요한 도시이고 바울 사역의 면류관이라 칭해질 만큼 바울 사역의 최고 열매가 바로 빌립보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 기억하셔야 될 것이 빌립보 시민들에게는 굉장한 자부심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자부심이 있었냐면 빌립보라는 도시는 로마 시민이 누렸던 모든 특권을 그대로 동등하게 부여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로마의 직접 통치, 빌립보 시민 전체가 다 로마 시민으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빌립보 시민들은 어떤 자부심이 있는 겁니까? 우리는 로마 시민이다, 빌립보는 로마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 특별 도시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서 어디 출신이십니까, 어디에 사십니까 라고 얘기하면 나는 빌립보 출신이고 빌립보에 살고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볼 때 이 사람 뭔가 재력이 있구나, 이 사람 뭔가 학식이 있겠구나 라고 인정할 만큼 빌립보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던 도시가 바로 빌립보입니다. 이런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빌립보 시민으로서의 자부심보다 당신들이 정말 가져야 될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하늘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강조합니다. 3장 20절을 보시면,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 시민권이라고 하는 것도 엄청난 특권인데 그것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한 정체성이 뭐냐,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시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더 중요하게 붙잡아야 된다 이것을 이제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서 이 모든 것들을 옥중서신이라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기술한 편지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그런데 참 특이하게도 감옥 안에 있는 바울이 감옥 바깥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할 것을 계속 요청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이 기쁨의 서신입니다. 3장 1절을 보시면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4장 4절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계속해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어떤 전제가 항상 있습니까? 주안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그 은총, 그 기쁨 안에 머물라는 겁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냈던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당시 빌립보 교회가 서로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모든 편지는 상황 서신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분열된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하나 될 것과 상호 섬김을 촉구하는 편지가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1장 27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 한 마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협력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거죠. 이런 것들을 바울이 강조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잔디밭 출입금지라는 푯말을 왜 붙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자꾸 잔디밭에 들어가니까 붙이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 한마음이 깨져 있는 겁니다. 상호 협력이 깨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 안에 한 마음으로 하나 될 것과 상호 협력할 것을 바울이 촉구하고 있습니다. 2장 2절을 보시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마음을 같이 할 것을 촉구하고 한 마음을 품을 것을 촉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냐,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 갈등이 있던 겁니다. 분열이 있던 겁니다. 그래서 이 분열과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하나 될 것을 촉구하고 그러면서 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친히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2장 7절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2장 5절 보시면 예수님은 원래 어떤 분이십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 있는 갈등, 빌립보 교회 안에 있는 분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모범 답안으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따르라는 겁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빌립보 교회 안의 성도들이 상호 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한 마음을 품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의 이 편지를 보면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을 비교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데 첫 사람 아담이 어떻게 실패하게 되었죠?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지음 받았지만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었다가 추락하게 되죠. 어떻게 보면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를 거부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추락을 경험한 겁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동등됨을 취할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도리어 자기를 한없이 낮추셨습니다. 어디까지 낮추셨습니까?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실 만큼 자기를 낮추고 또 낮추셨습니다. 그렇게 한없이 낮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지극히 높이셨다고 말합니다. 2장 9절에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했던 아담은 추락을 경험하게 되고 자기를 한없이 낮추고 또 낮추셨던 예수를 하나님은 지극히 높이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10~11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일부 신학자들은 뭘 주장하냐면 10~11절을 근거로 해서 지옥 잠정설과 만인 구원론을 주장합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사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크게 3가지 입장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첫 번째 입장은 뭡니까?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많은 신앙인들이 고백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죽고 나면 영생과 영벌로 나뉘어 진다, 그래서 영생을 얻는 자들은 천국을 가고 영벌을 받는 자들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가장 전통적이고 많은 사람들이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한국의 대다수의 교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천국과 지옥의 주장에서 이제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와야 되는데 예를 들자면 사람이 100년을 산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 100년의 세월 동안 예수를 믿었냐, 믿지 않았냐를 가지고 영생과 영벌이 나뉘어진다고 했을 때 100년의 기간 동안 우리가 범했던 죄에 대해서 영원무궁토록 벌을 받는다는 것이 과연 공의로운가에 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나오는 것이 뭐냐면 이런 주장이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심이 충만하신 분인데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범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영원무궁토록 벌을 주는 하나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과 맞지 않다고 하면서 천국은 있지만 지옥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크게 3가지 입장이 있는데 첫째는 영생과 영벌 즉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가장 전통적인 주장이 하나 있고 두 번째는 천국은 있지만 영원무궁토록 벌을 받는 지옥은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 죄인들조차도 다 품으신다 이것이 두 번째 주장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면 두 번째 주장대로 하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가 깨지는 것 아닙니까? 모택동이라든가, 히틀러라든가 이런 역사의 엄청난 악인들 그들도 하나님이 다 구원하신다고 한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신실한 삶을 살아야 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오는 것이 뭐냐면 천국과 지옥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지옥이라는 곳이 영원무궁하지는 않다, 이것이 첫 번째 주장과의 차이입니다. 첫 번째 주장은 뭐냐면 이 땅에서 예수를 안 믿었다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가서 영원무궁토록 벌을 받는다, 이것이 가장 전통적인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 전통적인 입장에 대해서 세 번째 주장은 어떤 문제제기를 하는 거냐면 100년의 기간 동안 범했던 죄에 대한 결과로 영원무궁한 벌을 받는다는 것은 공의의 맥락에서 너무 지나친 형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정말 영원무궁토록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 그 고통과 고난에 처해 있는 것을 두고 보실까, 그렇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범했던 죄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르고 나서 궁극적으로는 그들 모두가 다 하나님이 정말 만군의 주이시구나, 만왕의 왕이시구나 라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가 진정 구원자라는 것을 고백하게 만들어서 여기 2장 10~11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에 있는 자들,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 여기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바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결국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만드는 세 번째 주장은 뭐냐면 천국과 지옥은 있다, 이것이 두 번째와 다른 겁니다. 천국과 지옥은 있지만 지옥에서 그들이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른 다음에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그들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고 시인하게 함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그들 모두가 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하나님 나라로 오게 하는 것 이것이 세 번째 주장입니다. 따라서 사후 세계에 대해서 영원한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1번, 천국만 있다 라고 하는 2번, 그다음에 천국과 지옥은 있지만 지옥이 천국만큼 영원하지 않다, 그들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른 다음에 그들 모두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시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임을 고백함을 통하여서 언젠가는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온다 이것이 지옥 잠정설입니다. 세 가지 주장이 있는데 특히 지옥 잠정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빌립보서 2장 10~11절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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