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에 3장으로 넘어가보시면 7~8절이 중요합니다. 3장 7~8절을 보시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뭡니까? 그동안 바울에게 중요하게 다가왔던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다는 겁니다. 이유가 뭐죠? 8절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순간에 가치의 우선 순위가 변화된 겁니다. 그동안 내 인생에 가장 중요했던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순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고 하는 것에 근거했을 때 그렇게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 겁니다. 내가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변화된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성경이 말하는 회개인 겁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이 ‘메타노이아’라는 말인데 ‘메타’라고 하는 것은 ‘바꾼다’는 것이고 ‘노이아’라는 것은 ‘인식, 관점’이라는 말입니다. 뭐가 회개인거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왔을 때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순간 새롭게 재정립이 되는 겁니다. 이제 뭐가 중요해지는 겁니까?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 내가 오늘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 오늘도 신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세속적인 성공, 세속적인 승리, 가문의 자랑, 학벌 이런 것들은 신앙 안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 겁니다. 가치의 우선 순위가 바뀌는 겁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4장 13절을 보면 우리 한국 교인들이 참 좋아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한국 교인들은 여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말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해석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13절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1~12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13절을 보셔야 합니다. 11~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떤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리고 나오는 말씀이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여기 ‘안에서’라는 말은 뭐냐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와 함께라면 내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 라는 겁니다. 여기 모든 것에 뭐가 포함되는 겁니까? 12절에 나오는 것처럼 비천도 포함되고 배고픔도 포함되고 궁핍도 포함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신실한 동행을 통해서 자기는 신실한 믿음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말인 것이지 내게 능력주시는 자에게 내가 뭔가 구하기만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어낼 수 있다, 그런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상황에서건 어떤 환경에서건 신실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4장 13절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다음에 골로새서를 보시면 지난번에 로마서를 얘기할 때 로마 교회의 특징이 몇 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만남을 가져본 적이 없는 교회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골로새 교회도 독특한 교회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골로새 교회는 어떻게 개척되었냐면 사도에게 말씀을 배운 사람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교회를 세운 이 모델이 바로 골로새 교회입니다. 그래서 아마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에바브라 아니면 빌레몬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은 에바브라가 이 골로새 교회를 세운 교육자였을 것이고 빌레몬이라는 사람은 그 골로새 지방에 있는 신앙인이었는데 자기의 가정을 교회 예배처소로 제공한 사람이었을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에바브라 또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사도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배운 다음에 자기 고향으로 가서 교회를 세운 긍정적인 모델이 바로 골로새 교회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사에도 보시면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특징이 몇 가지가 있는데 선교사님이 입국하기 전에 세례를 받은 사람이 100여 명이 있었고, 선교사님이 입국하기 전에 조선 사람들이 자생적인 교회를 세우기도 했고 또 하나가 서상륜이라는 분이 만주에서 로스하고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신앙을 배웁니다. 그리고 서상륜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고향이었던 소래 지방으로 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래 교회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 조선 사람이 세운 자생적인 토착교회가 소래 교회입니다. 그래서 소래 교회는 누가 세웠냐, 선교사가 세웠냐 아닙니다. 선교사에게 기독교 신앙을 들었던 사람이 자기 고향에 와서 세운 교회가 바로 소래 교회인데 이런 소래 교회와 유사한 교회가 바로 골로새 교회입니다. 로마 교회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죠. 골로새 교회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에게 복음을 들었던 사람이 자기 고향에 와서 세웠던 교회가 바로 골로새 교회입니다.
골로새서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뭐냐면 지혜와 지식의 으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인 충분성을 강조하는 것이 골로새서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거냐면 당시 이방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면서 원래 이방 지역 사람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이 헬레니즘 아닙니까? 그래서 헬레니즘에 근거한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이 초대 교회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신플라톤주의인데, 이런 논리를 전개합니다. 여기 절대적인 신이 있습니다. 여기 우리 인간이 있습니다. 이 절대적인 신과 인간은 엄청난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직접 인간을 만나지 않고 인간이 직접 신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당신의 뜻을 알려주기 위해서 무수한 중간 매개자들, 이런 중간 매개자들을 아이온이라고 하는데 이 중간 매개자를 통해서 신이 당신의 뜻을 알려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골로새 교회 안에 어떤 식의 주장이 나온 거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기 위해서 무수하게 많은 중간 매개자를 두셨다, 그 중간 매개자 가운데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무수한 중간 매개자 가운데 예수에게만 예배를 드리느냐, 왜 예수만 믿고 있냐, 예수 외에도 신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무수한 중간 매개자를 우리는 믿고 섬겨야 된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던 겁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이것을 천사 숭배설이라 합니다. 예수만이 그 중보자가 아니라 무수하게 많은 중보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섬기는 것처럼 무수하게 많은 중보자에 대해서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된다, 그것들을 믿어야 된다 라고 하는 천사 숭배설이 나왔던 겁니다. 이런 골로새 교회가 천사 숭배설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를 드러내고 있을 때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예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만이 유일한 중보자라는 겁니다. 이것이 골로새서의 강조점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천사 숭배설을 배격하고 있는 겁니다. 무수하게 많은 중간 매개자들도 믿고 섬겨야 된다는 주장을 반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만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유일한 중보자이시고 그 예수만을 믿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골로새서의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2장에 보게 되면 이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이 나오는데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이후에 요한 서신을 공부하면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쉽게 헬레니즘의 이원론과 기독교 신앙이 짬뽕된 혼합주의 사상이다, 영만 거룩하고 육을 천시 여기고 물질을 천시 여기는 이원론적인 기독교 신앙이 바로 영지주의다 이 정도로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4장 9절을 보시면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어디에 나오는 사람이죠? 빌레몬서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빌레몬의 종이 바로 오네시모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4장 9절에서 바울이 7절을 보시면 두기고를 보낸다고 합니다. 이 두기고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낸다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한국 교회가 빌레몬서를 해석하면서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이다, 도망쳐서 잡힌 다음에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다 한 마디로 오네시모와 사도 바울을 감옥 동기로 봅니다. 그래서 바울을 감옥에서 만난 다음에 오네시모가 바울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전수받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바울의 동역자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친 노예라는 것을 알고 그래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제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형제로 대해달라 라고 했다, 이것이 우리가 보통 빌레몬서로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4장 9절에 보면 뭐라고 얘기합니까? 오네시모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는 겁니다.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골로새서의 편지를 받는 곳이 어딥니까? 골로새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너희에게서 왔다, 그 사람을 내가 너희에게 보낸다 라고 했을 때 오네시모의 주인이 원래 빌레몬이었죠? 그래서 골로새 교회와 빌레몬을 연관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에바브라가 골로새교회 교역자일 가능성이 많고 이 오네시모라는 사람 때문에 골로새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성도가 빌레몬이 아니었겠는가 이렇게 보는 겁니다. 골로새서 4장 9절의 말씀과 빌레몬서가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6절에 보시면 골로새서를 라오디게아 교회와 회람하라고 합니다. 이때는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어느 교회에 보낸 편지를 또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는 다른 교회와 서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많이 읽었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는 재림 신앙과 관련하여 올바른 재림신앙을 말해주고 있는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간도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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