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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바울서신 녹취 15

by 【고동엽】 2022. 7. 9.

4장 10절 이하를 보시면 바울과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바울을 많이 떠났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재밌는 것은 뭐냐면 데마라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라고 할 때 여기 이 세상을 ‘사랑한다’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가 아가페입니다. 여러분 오랜 세월 동안 한국 교회에서 이런 식의 주장들이 많았습니다. 헬라어에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가 몇 개가 있다, 예를 들어 아가페도 있고 에로스도 있고 필리아도 있고 이렇게 설명하면서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 에로스는 남녀간의 육체적인 사랑, 필리아는 친구의 사랑 이런 식의 구분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꼭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랑을 뜻하는 단어들은 사랑을 나타내는 모든 곳에서 다 쓰일 수 있는 겁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아가페라는 단어가 좀 더 많이 쓰인 것이지, 아가페라는 단어는 신의 사랑을 나타낼 때만 쓰이는 것이다 라는 주장은 맞지 않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뭐냐면 디모데후서 4장 10절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에서 이 사랑은 얼마나 부정적인 의미입니까? 그런데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라고 할 때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가 바로 아가페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가 이런 경우에는 이 단어, 이런 경우에는 이 단어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뜻하는 모든 문맥 속에서 사랑을 뜻하는 단어는 다 사용될 수 있는데 많은 경우 신의 사랑을 나타낼 때는 아가페, 남녀간의 육체적인 사랑을 나타낼 때는 에로스가 쓰여진 것이지 꼭 명확하게 구분하여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이 정도로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다음에 디도서를 보시면 이것도 디모데전후서와 같은 목회 서신이다 보니까 결국은 자격을 갖춘 지도자를 세우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특별히 1장 16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한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무신론자의 모습입니다. 머리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합니다. 그런데 일상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사는 겁니다. 이런 무신론자를 뭐라고 합니까? 가증한 자이고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이고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고백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겁니다. 내가 세례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았을 때 그 다짐과 결단을 지켜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겁니다.

 

2장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나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선한 일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 바로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뭡니까?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목적이 있습니다. 구원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 삼아주실 때는 목적이 있는 겁니다. 창세기 18장 19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선택하신 목적이 나옵니다. 창세기 18장 19절입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여기 의와 공도라는 것이 뭡니까? 미쉬파트와 체다카입니다. 사법적인 정의를 구현하고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대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겁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왜 당신의 백성 삼아주신 겁니까?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것으로만 만족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우리를 당신의 백성 삼아주셨는데 그 구원의 목적에 걸맞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는지 이것을 매 순간마다 성찰하고 돌아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빌레몬서를 보시면 빌레몬서는 1장짜리 짧은 서신인데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형제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서신이 빌레몬서입니다. 기독교 신앙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 형제를 사랑하는 것 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 형제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서신이 빌레몬서입니다. 여러분, 19세기 중후반에 미국에서 노예제를 찬성하는 사람과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이 전쟁까지 일으켰잖아요. 그런데 재밌는 것이 노예제를 찬성한 사람이나 노예제를 반대한 사람 모두가 인용했던 성경 본문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노예제를 찬성했던 사람들은 빌레몬서를 인용하면서 뭐라고 주장했냐면 ”봐라 빌레몬서를 아무리 읽어봐라 사도 바울이 노예 제도를 폐지하라고 했냐 안 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노예 제도는 존속해야 된다, 이것이 노예 제도를 찬성했던 사람들의 주장이었고 또 노예 제도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뭘 주장한 거냐면 ”바울이 노예 제도를 폐지하자 이렇게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노예를 노예로 대하지 말고 노예를 형제로 대할 것을 촉구하지 않았냐“ 그러면서 노예제를 반대했던 사람들도 빌레몬서를 근거로 해서 노예 제도는 끝내야 된다 더 이상 노예를 노예로 대하면 안 되고 형제로 대해야 된다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빌레몬서를 보시면 바울이 대놓고 노예 제도를 없애자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실제적인 관계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계 역사를 공부해보면 그리스 로마 시대가 결국은 노예 제도를 통해서 유지된 사회 아닙니까? 그래서 노예들을 끊임없이 부려먹기 위해서 그리스 로마 사회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만들었습니까? 노예는 일만 하는 기계인 겁니다. 인간의 말만 하는 짐승인 겁니다. 노예를 이렇게 규정해야 노예를 마음껏 부려 먹어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노예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다 라고 규정하게 되면 노예를 마음껏 부려먹을 때 얼마나 미안합니까? 그런데 노예를 일을 하는 기계야, 인간의 말만 하는 짐승이야 이렇게 규정해야 노예가 말을 듣지 않을 때 폭력을 행사하고 매를 때리고 1년 365일 내내 휴식을 주지 않고 부려 먹어도 미안하지 않죠. 이것이 바로 그리스 로마 사회가 만들어 낸 하나의 이데올로기 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레몬서를 통해서 뭐를 주장하고 있는 겁니까? 세상이 만들어 놓은 주인과 노예라고 하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담을 허물 것을 요청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노예를 더 이상 노예로 대하지 말고 일만 하는 기계, 인간의 말을 하는 짐승으로 대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대해 주라는 겁니다. 만약 바울이 권하는 것처럼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면 실제 노예와 주인의 관계는 형제적인 우애 관계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주인들이 자기 집에 있는 노예들을 형제로 대하게 되면 실제적으로 노예 제도는 철폐된 것과 같은 효력을 발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1세기 초대 교회가 기독교 복음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그리고 주인과 종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었는데 기독교 신앙이 말한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서신이 빌레몬서입니다.

 

여기 1장 10절이 중요한데 바울은 자신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지난 번에 공부했지만 빌레몬서와 연결되는 바울 서신이 뭐라고 했습니까? 골로세서라 했습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전통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오네시모라는 사림이 원래 빌레몬의 종이였다, 그런데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쳤다가 나중에 잡혔다, 감옥에 들어갔다, 그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다, 바울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바울과의 교제를 통해서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빌레몬의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빌레몬은 바울의 동역자였다, 그래서 바울이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제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대해 줄 것을 촉구한 것이 바로 빌레몬서이다, 이것이 보통 전통적인 신앙인들이 갖고 있는 이해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것처럼 바울은 골로새서 4장 9절에서 이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사람을 보낸다 라고 말합니다. 만약 바울과 오네시모가 함께 감옥에 수감된 사람이라면 여러분 바울이 재판관이 아닌 이상 어떻게 바울이 오네시모를 보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8장 16절, 23절, 30절에 보시면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우리가 보통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었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실제 사도행전 28장 16, 23, 30절을 보면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머물 집을 직접 구하고 대신 바울은 이 집 밖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바울을 찾아올 수는 있는 그래서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이 그런 감옥 생활, 가택 연금 생활을 할 때 바울의 삶을 돕기 위해서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있던 종 오네시모를 바울을 섬기도록 보낸 것이 아닐까, 그래서 보냈을 때는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바울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이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바울이 이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돌려 보낸다 라고 말하는 것이 골로새서 4장 9절이 아닐까, 그래서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주장을 하는 겁니다. 여기 나와 있는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노예일 수도 있고 또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섬기도록 빌레몬이 보내었던 종일 수도 있는 겁니다. 골로새서 4장 9절의 ”너희에게서 온 오네시모를 내가 돌려 보낸다“라는 말에 근거해보면 아마 바울을 섬기라고 보낸 종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이렇게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8주간 바울 서신 공부를 마무리했고 다음에는 공동 서신을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8주간 강의를 경청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다음에 공동 서신에서 만날 때까지 강건하시고 하나님과 날마다 신실하게 동행하는 신앙의 걸음 힘차게 걸어가시길 바라면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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