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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공동서신 녹취 2

by 【고동엽】 2022. 7. 9.
 

초대 교회 여러 문헌을 보시면 신약 성경의 목록이 나와 있는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27권이 하나님의 영감 받은 말씀, 신약의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AD 397년입니다. 재밌는 것이 뭐냐면 397년 이전에 초대 교회 많은 문헌을 보시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영감받은 말씀이다 라는 신약의 목록들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재밌는 것이 367년에 아다나시우스의 편지라는 문헌을 보시면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27권의 문헌이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록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뭐냐면 아다나시우스의 편지를 보시면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27권이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배치의 순서가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면 공동 서신이 바울 서신보다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397년에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신약 27권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는데 이때는 바울 서신이 공동 서신보다 앞부분에 배치된 겁니다. 그러니까 30년전에 아다나시우스의 편지에서는 공동 서신이 바울 서신보다 앞에 배치되었는데 397년에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는 바울 서신이 공동 서신보다 앞에 배치되었습니다. 여기서 뭘 알 수 있냐면 397년에 신약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되어질 때는 바울의 권위를 훨씬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겁니다. 바울의 권위를 공동 서신의 저자들의 권위보다 중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를 공동 서신의 저자들의 편지보다 앞부분에 배치한 겁니다. 367년경만 하더라도 공동 서신의 저자들, 바꿔 얘기하자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를 바울의 권위보다 훨씬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간에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까? AD 392년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게 된 겁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기 전에는 공동 서신의 저자들을 바울의 권위보다 훨씬 더 중시했던 경향이 많이 있었는데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부터는 바울의 권위를 공동 서신 저자들의 권위보다 훨씬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로마가 기독교를 약 300년간 박해했습니다. 한 10번 정도 중요한 박해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박해 사건이 있을 때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을 배교했습니다. 마치 한국 교회사에 있었던 신사 참배를 상상하시면 됩니다. 일본이 무력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신사 참배에 굴복했습니다. 신앙을 저버리고 신사 참배를 했습니다. 이 이후에 신사 참배한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사람들이 신앙을 저버렸다고 봐야 할 것인가, 다시 회개하면 신앙의 공동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논쟁이 있던 것처럼 초대 교회 안에서도 10번의 큰 박해 이후마다 다시 박해가 끝나고 났을 때 교회로 돌아오려고 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을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로 배쳑해야 할 것인가 이런 논쟁이 많이 있었는데 392년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다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몰려온 사람들 가운데 박해의 때에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정말 좋아했던 말씀이 뭐냐면 바울 서신이었습니다. 바울 서신을 보시면 이신칭의, 즉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것이 바로 바울 서신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주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바울이 말했던 믿음이라는 것은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인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헬레니즘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의 창조자이다,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했을 때 헬레니즘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뭐죠? 인지적인 동의입니다. 그 문장을 내가 수용하고 동의하면 그것을 헬레니즘에서는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 바울의 편지는 항상 앞부분에는 우리가 믿어야 될 신앙의 교리가 나오고 뒷부분에는 그런 교리를 믿는 자들이 살아내야 될 삶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헤브라이즘이 말하는 믿음은 뭐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만을 내 인생의 주인삼는 겁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을 의탁하는 겁니다. 그분이 명하시는대로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헤브라이즘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존재를 거는 겁니다. 존재를 다하는 겁니다. 그런데 헬레니즘이 말하는 믿음은 뭡니까? 인지적인 동의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편지를 오해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라는 이신칭의라는 것을 인지적인 동의로 착각한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말 좋아했던 것이 바울 서신입니다. 왜냐하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하니까,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말하니까 너무나 좋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공동 서신은 그 믿음에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후에 우리가 보겠지만 공동 서신에 나와있는 많은 말씀들이 배교했던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공동 서신보다 바울의 메시지를 훨씬 더 사랑한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2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 지속적으로 흐르는 중요한 물줄기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신실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동 서신과 바울 서신 가운데 어떤 서신을 더 사랑합니까? 바울 서신들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바울 서신과 공동 서신 가운데 당신이 더 사랑하시는 본문이 어디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바울 서신을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에베소서나 이런 바울 서신이 훨씬 좋지 야고보서는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베드로전후서도 부담스럽습니다. 유다서는 잘 보지도 않습니다. 왜 공동 서신이 바울 서신보다 밀려나게 되었는가 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을 오해했습니다. 헬레니즘의 믿음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데 이 공동 서신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행함으로 드러나야 된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행함을 통해서 완전케 된다, 믿음과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공동 서신이다 보니까 하나님의 백성답게 신실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부담스럽게 하는 말씀이 뭡니까? 공동 서신입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2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 바울 서신에 비해서 약간 서자 취급을 받고 밀려난, 별로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본문이 뭐냐면 바로 공동 서신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라도 공동서신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 정말 필요한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수백 만명이 있지만 정말 신앙인다운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 이 때에, 바울의 메시지를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공동 서신이 말하고 있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우리 한국 교회가 제대로 좀 배워야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공동 서신을 공부하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바울 서신과 공동 서신을 계속해서 비교하며 이야기를 많이 할 텐데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과 공동 서신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은 그러면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과 공동 서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하셔야 될 것이 뭐냐면 바울이 만났던 사람들, 바울이 목회했던 사람들과 공동 서신의 저자들이 만나고 공동 서신의 저자들이 목회했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단순하게 제가 설명드리면 바울이 만났던 사람들은 그동안 하나님과 무관하게 우상을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 변화된 겁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사람들을 목회한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바울이 목회했던 대상은 초신자들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야고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유다처럼 공동 서신의 저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은 누구를 목회했습니까? 하나님을 오랜 세월 동안 믿어온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으로 오랜 세월 살아온 사람들을 목회한 겁니다.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바울이 목회했던 사람들이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신자들이라면 공동 서신의 저자들이 목회했던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믿어왔던 신앙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강조점은 뭐죠? 바울은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가, 여기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가, 즉 칭의의 원인을 강조했다면 공동 서신의 저자들은 의롭게 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강조한 겁니다. 즉 칭의의 결과를 강조한 겁니다. 바울은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강조했다면 공동 서신의 저자들은 우리가 받은 구원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가 이것을 강조한 겁니다. 바울과 야고보, 바울과 베드로의 주장이 다르다고 했을 때 이거 모순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것이 모순이 되려면 동일한 사람들에게 바울은 A라고 말하고 야고보는 B라고 말했다면 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메시지와 야고보의 메시지가 사실은 다른 메시지가 아니다 라고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바울이 만나고 목회했던 사람들과 야고보가 만나고 목회했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인 겁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을 강조했다면 공동 서신의 저자들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강조했다면 공동 서신의 저자들은 구원받은 자답게 이 구원을 지켜내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가 이것을 강조한 겁니다. 단순하게 바울이 초심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다면 공동 서신의 저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믿어왔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 겁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꼭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시간부터 두 주에 걸쳐서는 히브리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간도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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