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거듭남의 뜻(요 3:1~13)

by 【고동엽】 2024. 3. 17.
목차

거듭남의 뜻(3:113)

 

이 본문에는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또는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하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요한복음에서 대단히 중요한 본문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을 다른 말로 중생이라고 하는데 뜻은 같지만 우리말 성경에서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해서 번역한 것은 대단히 사려 깊은 번역이라고 여겨집니다.

중생이란 단어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곳을 찾아보면 명사로써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3:5)이라고 유일하게 한 곳에만 있습니다. 명사로써의 중생을 헬라 원어로는 '팔링게네시아'라고 합니다. 중생이 동사로 나타난 곳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벧전1:3)"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벧전1:23)라고 두 곳에 기록되어 있고, 헬라어로는 '아나겐나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사로 쓰여진 곳은, 오늘 본문인 "거듭나지 아니하면"(3:3)"거듭나야 하겠다 함을 기어이 여기지 말라"(3:7)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을 "중생하지 아니하면"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인데, 왜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번역했을까요? 이 구절을 원문대로 보면, '겐네데 아노덴'이라고 두 단어로 되어 있는데, 겐네데는 "출생"이란 뜻이고 아노덴은 "다시" 또는 "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그대로 영어로 직역하면 'born from above'로서 '위로부터 출생한다'라는 말이 됩니다.

, 생명의 근원은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나는 것이다라는 의미로써 "거듭난다"라고 번역했으며, 좀더 원문의 뜻에 가까이 가기 위한 의도라고 생각됩니다. 중생을 영어로 옮길 때는 born again 또는 renew라고 하고, 보다 학술적인 표현으로는 regeneration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극히 부분적이지만 어느 교파에서는 중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문제입니다. 이 교리를 아주 중요하게 여겨서 중생하고 또 중생 하게 해달라고 오로지 중생기도로만 매달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중요한 교리이자만 이 용어 자체가 기독교 교리 전체를 포괄할 만큼 중요한 신학 용어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조사한 대로 우선 성경상에 나타나 있는 중생이란 용어의 회수를 보더라도 동사나 부사, 명사로 쓰인 모두를 합쳐도 몇 구절밖에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에서 요한복음 3장에만 중생에 대한 말이 있을 뿐, 마태마가누가복음서에 이 용어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단 한번 기록되어 있어는 중요한 교리일 수는 있습니다만 어느 교파처럼 계속적인 중생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밤에 예수께 찾아와서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살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3:3)라고 반드시 거듭나야만 하는 것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절대조건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이란 구원의 절대조건으로 이처럼 귀한 교리인데 공관복음에는 왜 없는가 하고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한 마디로 대답하면 용어의 문제입니다. 같은 진리를 설명하지만 듣는 대상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유치원 아이와 대학생에게 같은 내용이라고 해서 같은 용어를 쓰지 않는 것처럼 각자 수준에 알맞은 용어를 선택하여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유대의 랍비로서 상당히 유식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주님으로부터 망신을 당했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용어이기에 공관복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격에서 중생이란 말 대신에 다른 말로 표현된 중생의 의미를 가진 표현이 없을까 하고 묻는다면 충분히 찾을 수가 있습니다. 상징적인 사건을 들어서,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라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절대조건으로 어린아이와 같아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하늘나라에 대한 진리와 영원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적인 지식은 많든 적든, 직위가 높든 낮든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오로지 어린아이와 같은 깨끗하고 천진한 마음이어야만 신령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절대로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교회에 나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중생이라는 말로 비유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사도 바울은 중생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디도서에서 말한 것을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3:5)라고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묘한 것은 이것을 선민적 교리와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갈라디아서 4:28-29에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한 아들은 본처인 사라가 낳은 이삭이며, 또 하나는 소실인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입니다. 일반적으로 누가 낳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만 성경에서는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사도 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고 이스마엘은 약속을 받지 못한 자식으로서의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차이는 사도 바울이 이것을 상징적 비유로 전제하여 이삭은 성령으로 난 자요, 이스마엘은 육신으로 난 자라고 엄청나게 비약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출생한 자는 신령한 의미에서 선민이라고 말하며, 이 선민적 교리는 이스라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택함을 박았다고 하는 교리의 근본, 즉 뿌리도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에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선민사상은 육적인 것이 아니고 신령한 차원에서 언약적인 차원에서 아브람에게 두고, 아브라함의 자식 인 약속의 자식 이삭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뿌리가 대단히 깊고 바울의 의도가 오묘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교리적 측면에서 중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중생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의 역사가 한 개인의 심령에 나타나서 시작하는 출발점을 중생(regeneration)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식물로 말하면 마치 종자가 밭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씨앗 하나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이 씨앗은 곧 생명을 뿌린 것이니까요. 아무리 좋은 화분이 있고 싱싱한 흙에 거름을 주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해도 씨앗이 들어가지 않으면 백 년을 두어도 그 속에서는 풀 한 초기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은 한 알이라도 생명의 씨앗이 들어가야만 싹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아무리 건강한 여자라도 혼자서는 임신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아무리 의롭고, 선해도 나의 노력과 선행을 통해서는 구원의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위로부터 생명이 임하는 작용이 있어야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신비로운 역사가 있고서야 중생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생은 일생에 한 번 이루어지는 단회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 하게 해 주십사고 계속 해서 기도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물론 중생의 체험을 다시 확인하고, 다시 한번 스스로가 깨닫게 해 주십사고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의 중생이 모자라니 오늘 또 한 번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교리상으로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중생은 생명의 시작이요 한 번 뿐입니다.

다음으로 씨앗이 점점 자라듯이 생명이 성장을 하고 점차적으로 커지면, 온 인격, 지식, 감정, 의지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점점 거룩해진다는 뜻으로 성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거룩해진 생활은 영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단계적으로 말하면 중생, 성화, 영화, 이렇게 3단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중생은 단회적인 것으로 구원의 역사가 내게 임하는, 즉 생명의 씨앗이 들어오는 것같이,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결정적인 것이고 신비적인 것입니다.

이제는 본문 속에서 말하는 중생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습니다. 니고데모는 남보다 특별히 구별되게 잘 믿는다는 종교단체인 바리새인이며, 동시에 고관으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지식도 명예도 가진 지체 높은 사람인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자기 체면, 위신을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세리나 창녀, 병자 등 흔히 꺼려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시는 것을 보고 자기가 예수님을 찾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볼 것을 염려했기에 모두가 잠들었을 때 조용히 찾아온 것입니다. 찾아와서는 길고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나이다"(3:2)고 인사를 좀 거창하게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사가 길면 진실성이 다소 결여되기 쉽습니다.

만약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뵙자마자 바로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간단하고 솔직하게 시작했더라면 "그래, 나를 믿으라" 하고 주님의 대답도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랍비여, 당신이 하는 표적은 특별한 것이고,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분이고…… 이렇게 나오므로,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쉽게 말하면, 가면을 벗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구원의 문제를 놓고 있는데 긴 설명의 인사나 체면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보다 깨끗하고 단순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체면이나 위신을 많이 생각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예수님은 간음하다 붙들려 온 여자에게도 "중생 해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세리에게도 이런 조건을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니고데모에게만 중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미하는 중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째, 이 말은 니고데모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우선 자세를 낮추어서 자리에 앉으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신기원적(新紀元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중생이란 공부를 많이 했다고 알게 되거나, 도를 닦고 거룩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으로서 신기원적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도덕 생활과 중생은 전혀 무관 하는 뜻입니다. 중생은 완전히 신기원, 뉴제너레이션으로 새로운 출발임을 바로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3:8)는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람이란 헬라어로 '프뉴마'로서 ""이라는 말인데, 헬라말이나 히브리말에서는 바람과 영이라는 말의 단어가 같습니다. 우리는 성령이라고 할 때에 흔히 귀신을 생각하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영이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으로 풀이합니다.

, 하나님이 저기 계시는데 그 분의 역사가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와서 닿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바람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바람 자체는 보지 못하지만 바람이 움직일 때, 나무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고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힘을 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를 바꾸어서, "영이 임의로 임하며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라고 표현해도 좋겠습니다.

또한 이 말씀을 학술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의식 이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중생의 역사란 의식보다 먼저 있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사람에게는 지. . (. . )가 있는데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과 아는 것 중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흔히, 젊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먼저 알고서 사랑한다고 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다음에 생각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 느낌(felling)이 생각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의 역사는 의식보다 먼저입니다. 또한 의식은 생명보다도 훨씬 뒤입니다. 좋은 예로,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일지라도 4살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젖을 먹었다고 하지만 4살 이전에 젖 먹은 기억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식은 생명보다 훨씬 뒤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의식을 갖게 되어 "내가 나다"하는 시기는, 즉 나를 깨닫기 시작하는 때는 더더욱 뒤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생일은 한참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일은 신비로운 것으로 의식 이전의 일이요, 의식으로서의 생일은 훨씬 뒤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부터 믿었느냐, 즉 언제부터 내 속에서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느냐고 묻는다면 이것은 모르는 일입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몇 월 몇 일 몇 시에 내가 중생 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사람들은 극적인 일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과거에 아주 방탕했다가 어떤 결정적인 시기에 깨닫고 돌아오는 극적인 사건의 주인공들이란 말입니다. 이런 특수한 사정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는 대개가 자신이 중생한 날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 누구에게 듣고 은혜를 받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바람이 임의로 불매 성령이 나에게 들어왔으므로, 나는 언제 사로잡혔는지 모르게 사로잡혀 있단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모르지만 지금 나는 교회에 나가게끔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로운 것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신비롭게 나를 붙잡은 것이 중생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의식보다 훨씬 전에 (몇 시간 저이든, 몇 년 전이든)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말씀의 씨앗이 박혀서 어느 순간에 예수 믿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비로운 것입니다.

다음, "바람이 임의로 불매"라는 것은 내 편에서 내가 성령을 끌어들였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자기 뜻으로 불어 나에게 임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연장하면 예정론까지 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시어 찾아온 것입니다. 나는 교회까지 걸어 나왔을 뿐, 아니 더 실제적인 것은 교회로 걸어 나오고 싶은 마음까지도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마음을 열게 하셔서 나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결론은, 내가 나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붙드시고 믿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람이, 즉 성령이 임의로 내게 오셔서 사로잡았다고 신비롭게 간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의 영에 붙들림을 받을 때 비로소 천국을 보기도 하고, 진리를 알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성령이 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감동으로 주신 말씀이므로 지식이 많다고 알게 되지 않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읽어야 성령이 내 마음을 감동해서 구절구절이 내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니고데모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시니 그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갑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참으로 어색한 질문입니다. 니고데모의 말대로 라면 젊은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찌해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도 꾸중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네가 이스라엘의 랍비로서 그것도 모르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중생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성령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성령을 알겠습니까? 신비로운 역사인 동시에 인격적인 역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안에서 죽어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래서, 위로 난다고 번역하지 않고 다시 난다고 번역하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만한 영적인 인격이었었는데 다 잠들어 버렸고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중에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천국을 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나이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네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너로 알게 한 것이다라고 영의 역사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시간 성령에 의해서 신앙을 고백하고, 성령에 의해서 죄를 이기고, 성령에 의해서 점점 진리에 깊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