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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물 비유(마태복음 13:47-5O)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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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 비유(마태복음 13:47-5O)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오늘 본문에서는 그물 비유를 통하여 천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 하심으로 하늘의 이치를 땅의 이치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를 보는 세계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세계를 일상 생활에서 말하고 생각하며 경험하는 것으로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예수님의 교육 방법을 배우기도 하며 예수님의 통찰력을 배우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바닷가에서 그물을 보든, 진주를 보든, 그 무엇을 보든지 간에 "천국은 이와 같으니"하는 진리를 순간순간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적인 감각, 영적인 지식, 영적인 안목을 가질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언제나 하늘나라이며 동시에 실패함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주신 예수님의 비유는 아마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치며, 끌어올리는 모습들을 직접보시면서 하신 말씀이라 생각이 됩니다. 이는 예수님 비유의 소재는 언제나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이며 시각적이고 현재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 그물 비유는 갈릴리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콘크리트 만보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엘리베이터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세대들에게는 실감나지 않는 말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자연의 세계,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모른다는 것은 하등의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비유들은 하나같이 자연의 질서, 이치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듣고 깨달을 수 있고, 봄으로써 깨닫게 되는 소재였습니다. 교통이 단절된 시대에 있어서 깊은 산 속에서의 바닷가 그물 이야기는 통하지 않는 망상의 지껄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닷가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그렇게도 실감나고 쉽게 전달되는 복음 전파의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을 한다고 유식한 것은 아닙니다.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나 설명은 하나마나한 것이며 결국은 시간과 정력만 낭비한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본래 유식한 사람은 다 통했기 때문에 쉽게 말한다고 합니다. 기회가 있어 들어보면 세계적인 석학들의 강의는 대체로 쉽습니다. 아주 쉬운 표현들을 통하여 깊은 내용과 오묘한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이야기 속에 진리가 있고 생의 이치와 깊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생각할 그물 비유는 이미 앞서 거론한 가라지 비유와 유사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쓸모 없는 가라지였지만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마지막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비해 오늘의 그물 비유는 한 그물 속의 물고기를 물가로 끌어내어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로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비유는 모두가 다 종말론적 비유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 이렇게 구별되어진다는 점에서 이 두 비유는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추수 때까지, 그 때까지, 마지막 때까지 기다리다가 구별한다는 점, 곧 마지막에 가서 심판하겠다는 내용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알아야할 것은 가라지 비유는 "가만 두어라 때가 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이야기입니다. 손쓰지 않고도 기다리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가라지는 제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그물 비유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가라지 비유가 소극적임에 비하여 그물 비유는 적극적입니다. 그래서는 하나님 편에서 친히 그물을 치시고 잡아 끌어당기시어 또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심판이 좀더 강권적이고 급하게 이루어지는 장면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그물 던지는 장면은 갈릴리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인근 지방에서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지금도 여기에서 잡은 물고기인 베드로 고기(Peter fish)라는 생선은 관광객을 위한 특별한 메뉴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에는 낚시질로 하는 것과 그물로 잡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만, 그물로 잡는 데에도 대체로 두 가지의 방법을 씁니다.

그 하나가 투망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원추형으로 된 그물의 하부에 추를 단 것으로 어깨 위로부터 홱 하고 던지면 동그랗게 물 속으로 펴지며 내려가게 되는데, 그물이 바닥에 닿은 후 천천히 위에 있는 벼리를 당겨서 그물을 죄어 속에 든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방법으로서 대단히 재미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좀 더 규모가 큰 것으로 소위 말하는 후리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물을 넓게 죽 둘러치고는 양끝에서 여러 사람이나 배가 끌어당기면 활의 등처럼 휘어진 모습이 되어 뭍에까지 끌어오게 됩니다. 마지막에 보면 그물과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똘똘말려 함께 엉켜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잡은 물고기를 큰 것은 이 쪽으로, 작은 것은 저쪽으로, 그리고 쓸모 없는 것은 내어버리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장면을 보시면서 천국은 마치 저와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다 속에서는 여러 가지의 물고기가 마음대로, 자유롭게 헤엄치고 다닙니다. 그러나 일단 그물을 치고 나면 그 그물 속에 든 물고기는 이제 세계가 좁아집니다. 잡아당기면 당길수록 좁아지다가 결국은 자기의 세계인 물의 세계는 없어지고 뭍의 세계에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 날이 가까워 올수록 더 극악해지는 선한 자나 악한 자가 다같이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얼굴 그대로를 나타내놓고 심판을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관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는 점점 더 악해지고 선한 자는 점점 더 선해지며, 구원 얻은 자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되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점점 더 교만해지고 극악해져서 사람의 눈으로도 마귀의 자식임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각자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은 분명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오늘 본문을 통하여 생각하여야 할 중요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던져진 그물, 그로 인하여 갇혀진 세계가 된 그 그물의 세계는 그물을 던진 사람의 손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그 그물 속에 들어갔으면 이제는 별 수 없이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분간은 그물친 안에서도 물고기는 마음대로 헤엄칠 수가 있습니다.

세계는 한정되고 운명은 정해졌지만 그물이 잡아당겨지고 끌어올려질 때까지는 성분대로의 활동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악한 자는 악한대로 선한 자는 선한 대로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대로, 마귀의 자식은 마귀의 자식대로 그대로 섞여 돌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물은 하나이지만 그 그물 속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한꺼번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엄격하게 구분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며, 구분하지 않는 가운데 혼합성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성결하고 거룩한 곳이 되기를 바라며 소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의 판단대로 순결이나 거룩, 아니면 부정을 그렇게 쉽게 식별할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도 가롯 유다가 있었듯이 말입니다. 목사님 중에도 목회하는 과정에 속을 썩이는 좋지 않은 분들이 있으면 마음이 상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이런 저런 말로 위로를 하다가 마지막에는 "예수님보다 목회를 더 잘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시오"라는 말을 하게됩니다. 어차피 12분의 1은 마귀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열둘 가운데 하나가 마귀인 것을 아시면서도 그대로 함께 두고, 제자로 삼으시며 3년 동안 계속 목회를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몇백 명이 모인 교회이든, 몇천 명 혹은 몇십 명이 모인 교회이든 그 전체가 다 깨끗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해야할 곳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거룩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요한복음 13:10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물론 가롯 유다를 의식하신 말씀입니다. 교인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이 점을 마음에 두고 생각지 않으면 우리는 피차에 상처를 입으며 실망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에 그 무리 중에서 사실은 똑똑한 애굽 사람도 많이 끼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다름아닌 고라의 무리입니다. 이들은 조금만 어렵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그 본색을 드러내어 소위 반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며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그 은혜를 역이용하여 그 은혜를 가로채려는 악의 무리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사랑할 때 사랑의 위선자가 생기고, 귀한 것일수록 모조품의 기술이 뛰어납니다. 이러나 저러나 우리의 판단으로 그 진부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의 영역이요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옮겨 지나치게 구별 의식을 가지지는 않도록 해야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하려면 지나치게 자유스러워서도 안되고 너무 보수적이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계적으로 증명된 진리입니다. 세월은 바뀌는데 이것도 안되며 저것도 안되고, 옷이 어떻고 헤어스타일이 어떻다 하여 교회의 문을 좁히고 문턱을 높이기 시작하면 교회의 성장은 물론 복음을 들을 기회마저 빼앗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름 한더위에 예배를 마치고 밖에서 인사를 나눌 때 보면 와이셔츠 주머니에 썬이니, 신탄진이니 담배 넣은 것이 환히 다 보입니다. 저는 그런 분에게는 악수를 좀더 잘 해드립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실 훌륭한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면서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쁜 줄도 알고 싫어하는 줄도 아는데 그 담배를 피우면서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담배를 아직 못 끊었을 뿐인데, 만약에 이것이 말썽이 되어 교회 문 밖에서 주머니 검사라도 하게되는 처지를 상상해본다면 그 지경의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저 나오니 반갑고 감사한 것입니다. 당분간 그렇게 나오다가 차차 믿음이 생김과 동시에 하나씩 고쳐지기를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높은 문턱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넘어오라고 한다면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처음부터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거추장스러운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따지고 가릴 것 없이 아무나 오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신학자 오리겐(Origen)은 교회는 영혼의 병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교회는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영혼의 불치병 환자들이 모인 곳이니 병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 나 할 것 없이 치유되어야 할 사람이며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의 모임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런 저런 사람이 있을 것이며, 그것은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어떤 사람이나 사건으로 인해서 마음 상한 일이 있다고 하여 쉽게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란 본래 그런곳이니까요, 그런가하면 너무 자유로워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초대 교회는 참으로 잘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 담배 금한 것도 잘한 것이지만, 더 잘한 것은 우상 숭배는 절대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아예 처음 교회에 나올 때부터 우상 숭배는 완전히 끊어버리고 나오게 했는데, 좀 지나친 것 같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한국교회를 성장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만약에 우상 숭배를 허락하였다면 오전 11시에는 교회에 왔다가 오후 2시에는 절간에 가도 좋다는 식이 되어 태국교회 풍토가 되고 마는데, 이렇게 되면 교회의 부흥은 남의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가 오염되고 이질화되어 본래의 질,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룩함과 속됨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더구나 편중되지 않는 중용의 길을 택한다는 것은 진리를 저울에 달겠다는 어려움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교회의 문은 너무 넓어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높고 좁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 전부가 거룩함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부족하지만 그러나 그대로 나와야하는 것은 나오는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옴으로써 거룩을 배우게 되고, 나옴으로써 거룩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구별 말고 다 모아서 모든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왕의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왕은 종들에게 명하기를 사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이면 그 누구든지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가 술주정뱅이거나 불구자이거나 악한 사람이거나 선한 사람이거나 가리지 말고 다 데리고 와서 이 잔치 자리를 채우라는 것입니다. 본래 잔치 집에는 손님이 많아서 앉을 자리가 없고 음식이 모자랄 정도가 되어야 잔치하는 맛이 나고 자랑스러운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빈자리가 많아 음식이 남아 돌아가면 이는 정말 부끄러운 잔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잔치를 베푼 주인인 왕은 예복을 입으라는 단 하나의 조건만을 제시하고는 아무나 와도 좋으니 자기 집의 잔치 자리만 채워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복은 예수의 이름으로 예복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다음 두 번째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제 심판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활동이 자유롭다고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그 범위를 좁혀가다가 마지막에는 끌어내어 면양과 산양의 비유에서처럼 종말적 심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종말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되어 있으며, 거기에서 어느 편으로든 분명하게 가려질 것입니다. 양과 염소, 진실과 거짓,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이렇게 분명히 구분되어지는 종말적 심판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이르기 전에 또 하나 현재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환난을 당하게 될 때이면 악한 자는 반드시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사의 권위자인 백낙준 박사의 말에 의하면 한국 교회가 처음 시작을 할 때에는 개화교인과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하에서 105인 사건으로 핍박을 받게되자 개화교인들은 모두 다 세상으로 돌아가고 기독교인들만 남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핍박과 환난, 고통이 생기는 날에는 가짜는 다 도망가고 맙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든지 핍박이 있는 환난의 때에는 질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편안할 때에는 양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양적으로 급성장할 때에는 반드시 질적인 결함이 따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하는 것은 종교 자체가 바꾸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양이 염소가 될 수 없듯이 염소 또한 양이 될 수 없다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물고기는 어디까지나 좋은 물고기요, 나쁜 물고기는 끝까지 나쁜 물고기인 것입니다. 다만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인데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내고야 말 것입니다.

프렌시스 베이컨이 한 말 가운데 "악한 사람을 교육한다는 것은 약삭빠른 악마를 생산하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워낙 종자가 잘못된 것은 가르쳐보아야 별 도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약삭빠른 악마를 만드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 뿌리, 그 종자는 변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나 그 종류대로, 그 뿌리대로, 그 원천대로 받게될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 의하여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나쁜 고기 중에서 좋은 고기를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고기 중에서 나쁜 고기를 골라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악인이 의인의 기업에 함께 참여하지 못하게 의인 속에서 악한 사람을 강제로 끌어내어 지옥에 던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한 자의 위선을 벗기겠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선한 자처럼, 불의한 자가 의인인 것처럼, 이리가 양의 가죽을 입고 아무리 숨겨 보아도 그 결정적인 심판의 때에 가서는 제 모습 그대로 다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강권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기업에 악인이 함께 참여하지 못하도록 옮겨놓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옮겨지는 장소, 버려지는 곳은 풀무 불, 곧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지옥의 별명이 풀무 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옥은 마치 쇠붙이를 불 속에 넣어 태우는 것처럼 뜨거운 불로 묘사하는 기본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장면은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옥은 우는 곳입니다. 슬픈 일도 많고 후회함도 많습니다. 답답한 일, 원통한 일이 쌓이고 쌓였으니 울지 않을 수 없는 눈물의 곳입니다. 이것이 지옥입니다. 게다가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알고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이를 간다는 것은 원망한다는 것인데 밀톤의 실낙원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지옥에 간 영혼들이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지내는데 거기에는 마귀와 사탄도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슬피 울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예수 믿을걸"하고 자꾸 울었습니다. 그러니까 듣고있던 마귀의 괴수인 사탄이 무엇이라고 호령을 하느냐 하면 "이놈아, 울지 말아라. 이를 갈아라. 네가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이 기뻐한다"라면서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상상력입니까? 지옥이란 후회의 눈물도 참회의 눈물도 없는 곳입니다. 그 곳은 이를 갈며 원망하는 곳입니다. 한과 원망과 증오로 마음을 부글부글 끓이면서 이를 가는 그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영국이 2차대전 말기에 폭격을 당하게 되었을 때 불타버린 한 장소에서 어느 교인이 목사님께 "이것 정말 지옥과 같습니다"했더니 그 목사님은 껄껄 웃으면서 "고생은 되지만 이 곳은 지옥이 아니요. 왜냐하면 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지 않소? 지옥에는 예수 믿는 사람은 없거든요"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그리스도인이 있고, 믿음이 있으며, 복음이 있는 곳이라면 그 곳은 지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지옥 같다느니 아니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옥은 우는 곳이요, 이를 가는 곳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과 같은 천국, 그 천국은 심판적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또한 심판적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받아들이는 자가 있는가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아멘으로 믿고 감사하게 받아 감격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의심하고 비방하며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으로 돌리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반응을 일으키든지 그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환난과 핍박이 오게 되면 그 본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고, 마지막 주님이 심판하실 때에 가서는 알곡과 쭉정이,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숨김없이 다 드러내 밝히게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기의 실체를 그대로 나타낼 수밖에 없는, 그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가 남아있을 때에 그 정하신 시간이 다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세워져서 어느 때에 주님께서 그물을 잡아당기시더라도 좋은 것을 원하시는 주님 앞에 좋은 물고기, 좋은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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