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 요12:12-19 (2014/4/13, 종려주일)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를 두고 기록한 것이며, 또 사람들도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다.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 외치는 사람들 종려주일 아침,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네 복음서가 다 다루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그것이 주님의 생애의 막바지에 배치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의 사역 한 가운데서 벌어진 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절정은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일(11장)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11:45). 주님은 유월절 명절이 되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셨습니다. 나사로의 소생 기적을 본 많은 이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소문을 들은 많은 이들이 성 밖으로 예수를 맞으러 나갔습니다. 예수를 따라간 이들의 행렬과 예수를 맞으러 나간 이들의 행렬이 만나면서 흥분이 고조되었습니다. 마치 두 개의 파도가 맞부딪쳐 더 큰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들은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설렘에 들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먼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주님을 향해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치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찬미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이 외친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이 지긋지긋한 옛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고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그런 열정으로 맞이했던 이들은 세상살이에 지쳐 멀미를 하는 이들이었을 겁니다. 길고 긴 식민생활에 지친 사람들, 천대받고 억압받고 착취당하여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 그들은 이 더러운 세상이 뒤집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시야는 반드시 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의 소망을 투사했습니다. '호산나'라는 외침 속에는 그런 민초들의 절실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위험사회'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발전 강박'에 사로잡혀 질주하다 보니 우리 삶을 든든하게 혹은 따뜻하게 지탱해주던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각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살벌한 세상이 도래한 것입니다. '발전'은 언제나 위험을 내포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은 그 위험을 사회적 약자들에게 떠넘겨버립니다. 예컨대 도시인들의 밤을 밝히는 데 필요한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발생하는 위험은 고리, 밀양 같은 변두리 지역민들의 몫이 됩니다. 문화인류학자 엄기호는 세상이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몰아가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라고 지적합니다(<단속사회>, P.161-163)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지 않았을 뿐 우리는 세상 도처에서 '호산나'를 외치는 이들을 봅니다. 삶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말입니다. • 종려나무와 어린 나귀 예수를 맞이하는 군중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역사의 대전환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입니다. 광야 지형에서도 잘 자라는 종려나무는 폭력과 부패가 만연한 세상에서도 올곧게 살아가는 이들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치솟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의 올곧으심을 나타낼 것이다"(시92:14-15a). 종려나무는 그래서 희망입니다. 여자 예언자인 사사 드보라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서 백성들을 재판했다고 합니다(삿4:5). 그리스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은 주전 2세기 중엽 마카베오 가문의 지도하게 독립전쟁을 벌였습니다. 외경인 마카베오서에 보면 시몬 마카베오가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백성들이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찬미를 드리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1마카베오13:51)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 언급된 야자나무는 물론 종려나무입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이민족들이 더럽혀놓은 성전을 정화하자 백성들은 "나뭇잎으로 장식한 지팡이와 아름다운 나뭇가지와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당신의 거처를 정화하도록 잘 이끌어 주신 그분께 찬미가를 올렸다"(2마카베오10:7)고 합니다. 이쯤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예수님을 맞이한 군중들의 상징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방의 압제자들을 내몰고, 그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씻어주고, 자기들의 억울함이 신원되는 새로운 세상이 예수를 통해 열리기를 그들은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14절입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귀를 준비하도록 지시하신 것으로 나오지만, 요한복음은 주님이 군중들의 열광적인 외침을 듣고는 어린 나귀를 타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그런 행위가 성경 말씀에 따른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15, 슥9:9절의 인용)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 역시 상징행동이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분은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그 왕의 통치는 여느 군왕들처럼 군사력 혹은 폭력에 의한 지배가 아닙니다. 스가랴는 오시는 왕의 통치 비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슥9:10) 주님은 군중들의 기대와 당신의 지향이 어긋나고 있음을 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억울함과 분노를 일시에 풀어줄 수 있는 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힘으로 누군가를 제압하고, 처벌하고, 척결하는 속 시원한 해결은 해결이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평화의 길은 멀고도 먼 우회로입니다. 병거, 군마, 활로 얻을 수 있는 평화는 없습니다. 상호 신뢰를 구축함으로써 인내와 존중으로 서로를 대하도록 해야 합니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무인 비행체' 때문에 남북 관계가 다시 한 번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슬기롭게 이 상황을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독일 총리인 메르켈은 독일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통일에 대해 진지한 조언을 했습니다. 그는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일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쉽진 않지만 그것이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 뒤늦은 깨달음 요한복음은 제자들도 스가랴를 인용하여 드러내신 스승의 진의를 깨닫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그 말의 참뜻을 알아차렸다고 말합니다. 참 사람의 불행은 늘 당대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사상가들이나, 위대한 예술가들, 위대한 예언자들의 운명이 대체로 그러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에게서 다른 것을 기대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온몸으로 가리키신 평화의 길은 한사코 외면하고, 주님이 우리 기준에 맞추어 행동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예수의 길은 여전히 좁은 길입니다. 그 길 위에서 주님은 외로우십니다. 당신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은 많으나 그 길을 걷는 이들은 적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있던 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습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19) 뭐가 다 틀렸다는 것일까요? 아마도 잠들어 있던 군중들,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것을 운명이려니 여기며 살던 군중들을 깨워 일으키는 예수를 없애려던 자기들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던 것 같습니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다'는 말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을 통해 어느 정도 입증됩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 사람 몇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요한은 이방 민족들에게도 평화가 선포된다는 스가랴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넌지시 말하고 있습니다. 군중들의 환호성 속에서도 나귀를 타신 주님은 고독하십니다. 그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이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평화를 향한 긴 여정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먼저 우리 속에 있는 날카로운 것들을 뽑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의 벗이 되기 위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아니고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주님의 수난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주님의 희생이 우리의 죄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절감하는 나날이 되기를 빕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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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04월 13일 11시 53분 13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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