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발랏 류(類) 느6:8-14 (2014/3/30) [나는 그에게 화답을 보냈다. "당신이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오. 당신이 마음대로 생각하여 꾸며낸 것일 뿐이오." 그들은 우리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겁을 먹고 공사를 중단하여, 끝내 완성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하루는 스마야를 만나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들라야의 아들이며, 므헤다벨의 손자인데,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갑시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성소 출입문들을 닫읍시다. 자객들이 그대를 죽이러 올 것입니다. 그들이 밤에 와서 반드시 그대를 죽일 것입니다." 나는 대답하였다. "나 같은 사람더러 도망이나 다니란 말입니까? 나 같은 사람이 성소에 들어갔다가는 절대로 살아나올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나는 그 때에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매수되어서, 나를 해치는 예언을 하였다. 그들이 스마야를 매수한 것은, 나에게 겁을 주어 성소를 범하는 죄를 짓게 하여서, 나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나를 헐뜯으려는 속셈이었다. "나의 하나님, 도비야와 산발랏이 한 일을 잊지 마십시오. 예언자 노아댜와 그 밖에 나에게 겁을 주려고 한 예언자들이 나에게 한 일을 잊지 마십시오."] • 동족들에 대한 마음 아픔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나날입니다. 봄은 사람들의 옷차림뿐만 아니라 표정에도 이미 당도한 듯합니다.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이 계절은 조금 한눈을 팔며 살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생명의 기운을 맘껏 뽐내는 식물 세계는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들, 해야 할 일들에만 너무 골똘하지 말고 '나 좀 바라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길을 걷다 보면 쪼그리고 앉아 풀꽃 사진을 찍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참 좋은 계절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감고 있어서 그렇지 이런 봄에도 여전히 모진 겨울을 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해소되거나 해결되지 않는 지속적인 어려움 속에 있는 이들 말입니다. 그것이 개인의 게으름이나 잘못 때문에 초래된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인한 어려움이라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눅10:36)라는 주님의 질문 앞에서 살아갑니다. 지금 누군가가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는 우리와 무관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고통에 반응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유난히 아프게 하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고 계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로마서 8장에서 세상의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자기를 떼어놓을 수 없다고 말했던 바울과 만납니다. 하지만 9장으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조금 당황합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속에 큰 슬픔이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롬9:2-3) 바울의 슬픔은 자기 동족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자부심의 근원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지와 몰이해 속에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먼저 눈 뜬 그는 지금 다급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해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절박한 안타까움이 우리에게는 참 낯설게 여겨집니다. 페르시아의 수산 궁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던 느헤미야도 그런 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는 고국에 다녀온 사람들을 통해 예루살렘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들었습니다. 이방 땅에 잡혀오지 않고 그 땅에 남아 있던 동포들이 얼마나 고생스럽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지, 그리고 불에 탄 성문과 허물어진 성벽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는 슬픔에 잠긴 채 금식을 했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참회와 중보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이 얼마나 불순종하는 백성이었는지,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어떻게 어겼는지를 낱낱이 고백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를 아껴주던 아닥사스다 임금에게 자기 슬픔을 다 아뢴 후 조상이 묻힌 그 성읍을 재건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왕은 그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 총독으로 임명받은 그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관리들을 설득하여 성읍 재건에 나섰습니다. 그가 일으켜 세우려는 것은 성벽이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무기력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백성들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었을 겁니다. 느헤미야의 비전에 공감한 이들이 그 아름다운 사역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게 마련입니다. • 조롱과 방해 느헤미야의 통솔 하에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고 있다는 소식이 사마리아의 통치자인 산발랏에게 들어갔을 때 그는 자기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산발랏Sanballat이라는 이름은 고대 아카드어로는 '신 우발릿Sin-uballit'입니다. '신'은 달 신의 이름입니다. 산발랏이라는 이름의 뜻은 '달 신이 생명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야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달 신 숭배지역 출신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의 관심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복이나 복지가 아니라 자기 영향력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그는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을 끌어들여 불의의 연대를 이루어 느헤미야를 압박합니다. 그들은 먼저 성벽을 재건하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고를 폄하합니다. 그것은 거창한 일인데 가난하고 무력한 그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만에 끝날 일도 아니고, 자재를 마련할 수도 없는 데 무슨 수로 그 일을 완수하겠느냐는 것이지요. 도비야도 그런 조롱에 동참했습니다. 그들이 돌로 쌓는 성벽이라는 게 여우 한 마리만 올라가도 무너지고 말 것(4:3)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조롱에는 아랑곳없이 성벽을 쌓는 일이 어느 정도 진척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초조해졌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을 보내 그들의 의도를 좌절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위협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가문 별로 젊은이들을 무장시켜 곳곳에 배치하여 기습에 대비하는 한편, 성벽을 쌓는 일을 병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북돋는 일 또한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위대하고 두려운 주님을 기억하고, 형제자매와 자식과 아내와 가정을 지켜야 하니, 싸워라."(4:14) 진부한 말이기는 하지만 위기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어려움이 많을수록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의 끈은 든든해졌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곳에서 큰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위기였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성벽 재건에 동참했던 이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이 먼저 지친 것입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판이었는데, 귀족들과 관리들은 백성들의 가난을 자기들의 부를 증대시키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높은 이자를 받고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이자'는 독사의 독과 같아서 거기에 물리면 살아남기 어려운 법입니다. 율법이 이자를 받고 동족에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관리들을 불러 돈놀이를 하지 말 것을 엄중하게 이르고 그들의 서약까지 받아냈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백성들에게 큰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검약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총독의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 음모 이런 일련의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유형적인 돌 성벽보다 무형적인 연대의 성벽이 그들을 더욱 든든하게 지켜주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사심 없는 지도자 느헤미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게셈은 새로운 음모를 꾸몄습니다. 조롱하거나 겁을 주어서 성벽 건설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주던 끈 역할을 하는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평화 회담을 하자며 오노 들판의 한 마을로 오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오노는 예루살렘 북서쪽 30km지점에 있는 소읍입니다. 그곳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섞여 사는 곳이었는데, 귀환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높았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느헤미야를 암살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회담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섯 번째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봉인되지 않은 채였습니다. 편지가 봉인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편지 내용이 바깥으로 새나가기를 바랐다는 뜻일 겁니다. 그 편지에 담긴 내용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 대한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 한다는 말도 적혀 있었습니다. 가스무의 증언도 이미 확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스무'는 '게셈'과 동일인입니다. 국정원의 문서 조작 사건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의 응답은 단호하고 명징합니다. "당신이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오. 당신이 마음대로 생각하여 꾸며낸 것일 뿐이오."(6:8) 느헤미야는 그러나 이 모든 음모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하나님,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6:9b)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산발랏도 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느헤미야를 돕고 있던 한 사람을 매수함으로써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매수당한 이는 스마야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느헤미야는 그를 찾아갔습니다. 스마야는 다짜고짜 느헤미야에게 성전으로 가자고 말합니다. 그가 성전의 은밀한 곳에 느헤미야를 안내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제사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산발랏이 느헤미야를 살해하기 위해 자객을 보낼 터인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은 성소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정말 영적 분별력이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는 스마야가 거짓 예언자임을 즉각 알아보았습니다. 스마야가 의도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백성들에게 느헤미야가 위험을 피해 달아나는 비겁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동시에, 그가 율법을 자의적으로 어기는 불경한 사람이라는 인상도 심어주려 했던 것입니다. 도처에 적이었고, 도처에 함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도비야와 산발랏이 한 일을 잊지 마십시오. 예언자 노아댜와 그 밖에 나에게 겁을 주려고 한 예언자들이 나에게 한 일을 잊지 마십시오."(6:14) • 두 종류의 삶 세상에는 느헤미야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산발랏 같은 부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동족들의 고통에 질끈 눈을 감기만 하면 한 평생 편히 살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편안함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산발랏은 자기의 영향력과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의로운 사람을 모함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세상에는 느헤미야 류의 사람들보다 산발랏 류의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그들은 불의의 연대를 서슴지 않습니다. 이익 혹은 계산이 앞서는 곳에는 정의도 공의도 없습니다. 얼마 전 고려대학교 교수님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 분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 땅에서 진짜 교회라고 할 만한 교회가 단 하나라도 있나요?" 그 질문에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그가 얼마나 오늘의 개신교회 현실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디에 계시냐?"는 질문에 "와서 보라" 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 교회에 와 보라고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매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정말 존경스러운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대중들에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만한 생각은 또 없을 겁니다. '나 혼자 뿐'이라고 탄식하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선지자 칠 천 명이 남아 있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눈에 띄진 않아도 그런 분들이 도처에 계십니다." 역사의 진보란 산발랏 류의 사람들이 줄어들고 느헤미야 류의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일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만 발밭지 않고,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자기 욕망을 제한하고, 공적인 문제에 눈을 감지 않을 때 세상은 조금씩 나아질 것입니다. 루쉰을 스승으로 모시는 학자 첸리췬은 <내 정신의 자서전>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좌우명을 이렇게 밝힙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노력한다. 우리는 서로 서로 부축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기독교인인 우리가 한 가지를 더 보탠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긴다'가 될 것입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계속하면서 우리 모두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이웃들의 세계로 우리 관심을 확장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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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03월 30일 12시 00분 32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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