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는 준비되었는데
마22:1-14
(2014/4/6)
[예수께서 다시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자기 종들을 보내서, 초대받은 사람들을 잔치에 불러오게 하였는데,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로 가서, 음식을 다 차리고,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잔치에 오시라고 하여라.'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떠나갔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종들을 붙잡아서, 모욕하고 죽였다. 임금은 노해서, 자기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네 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종들은 큰길로 나가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래서 혼인 잔치 자리는 손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임금이 손님들을 만나러 들어갔다가, 거기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묻기를, '이 사람아, 그대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하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 때에 임금이 종들에게 분부하였다.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
• 잔치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4월의 첫 주일인데 성급한 꽃들은 벌써 지고 있습니다. 꽃의 시간이 그토록 짧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잘랄루딘 루미의 아름다운 시 <봄의 정원으로 오라>가 떠오릅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인은 흥성한 생명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봄의 정원으로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풍경의 아름다움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는 이런 반전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신'의 존재가 '봄의 정원'보다 더 크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해가 뜨면 촛불을 꺼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당신'이 있습니까? 지금 사랑에 빠진 이들은 속으로 빙그레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 임금이 있습니다. 그는 종들을 통해 초대장을 들렸습니다. 초대장을 받은 이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약한 날이 이르자 임금은 다시 종들을 보내 마침내 그 날이 왔다고 알렸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임금은 재차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로 가서, 음식을 다 차리고,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all things are ready), 어서 잔치에 오시라고 하여라."(4)
'음식을 다 차렸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임금의 메시지는 왠지 불길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는 자주 '잔치'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이사야는 만군의 주님께서 세상 모든 민족을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제일 좋은 살코기와 잘 익은 포도주를 대접하는 풍성한 잔치가 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주님께서 이 산에서 모든 백성이 걸친 수의를 찢어서 벗기시고, 모든 민족이 입은 수의를 벗겨서 없애실 것이다.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사25:7-8)
하나님의 잔칫날은 모든 사람이 걸친 '수의'가 벗겨지는 날이고, 눈물이 닦여지는 날이고, 수치의 기억에서 해방되는 날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도 역사의 완성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그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첫번째 이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베푸신 잔치 그 자체셨습니다. 그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의 생명이 회복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고, 불화하던 이들이 형제자매의 우의를 다시 나누게 되었습니다. 루미의 말대로 꽃과 촛불과 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당신'만 오면 됩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이들은 한결같이 오려 하지 않습니다.
• 초대의 거절
거절당한 임금의 비애가 얼마나 컸을까요?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말이 더 큰 쓸쓸함을 자아냅니다. 사실 이 혼인잔치의 비유는 21장에 나오는 다른 두 가지 비유, 즉 '두 아들의 비유'와 '악한 소작인의 비유'와 더불어 3부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그는 싫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꿔서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자 그는 '예, 가겠습니다' 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세례자 요한을 통해 전해진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셨습니다. 악한 소작인의 비유도 잘 아실 겁니다. 정성들여 포도원을 가꾸던 집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열매를 거둘 철이 되자 주인은 그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서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습니다. 이 비유 3부작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거절' 혹은 '거역'입니다.
다시 혼인잔치의 비유에 집중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왜 임금의 초대를 거절했을까요? 임금의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을 텐데요. 청와대에 초대받아서 대통령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자랑스레 걸어놓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특히 더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임금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사실 이 비유는 조금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누가복음 14장에도 나옵니다. 누가는 그 잔치를 베푼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만 말합니다. 그도 기약한 날이 되어 종을 보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청하지만 초대받은 이들은 모두 갖가지 핑계를 대며 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밭을 샀기 때문에 가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기에 시험하러 가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장가를 들었기에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궁색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핑계를 대며 그들은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전7:2)는 전도서 기자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은 자기 일상에 갇혀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리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왠지 익숙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런저런 초대를 '성가신 의무'로 여겨 갖은 핑계로 응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타자와의 만남이 초래할 불편함, 어색함이 싫어서, 어울려 사는 배움의 자리를 거절하는 것, 그래서 타자의 요구에 응답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 우리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타자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이들은 주님의 요구에도 응하지 못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잔치, 평화를 짓는 잔치, 무너졌던 공동체를 회복하는 잔치는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각자의 일에 바빠 그 자리를 외면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혼인잔치 이야기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임금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은 마치 작당이라도 한 것 같습니다. 3절은 그들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고 다소 평이하게 말하지만, 5절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무시하는 겁니다. 그들은 왕을 왕으로 모실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적 왕권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무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임금의 종들을 붙잡아서,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마태는 이 비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 받을 몫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에 의해 철저히 배척당하셨습니다. "임금은 노해서, 자기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는 7절의 말씀은,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파괴를 경험했던 초대교회가 덧붙인 말일 겁니다. 결국 예루살렘 파괴는 예수의 메시야적 왕권을 거부한 이들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을 우리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 새로운 초대
모욕당한 임금은 탄식합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8) 먼저 초대받았던 이들에 대한 '무자격 선언'입니다. 물론 마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선택을 특권으로 인식했던 이스라엘일 겁니다. 혼인 잔치에 들어갈 자격은 초대한 분에 대한 신뢰와 존경입니다. 임금은 종들에게 "네 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이릅니다. 종들은 큰길로 나가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다 데려왔고, 마침내 잔치 자리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악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메시야적 잔치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조차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은 그의 문제일 뿐입니다. 스스로 임금의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그 뜻밖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고, 잔치 자리는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잔치가 시작될 판입니다.
그런데 11절과 12절은 이런 흥겨운 잔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손님을 만나러 연회 자리에 나온 왕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임금은 그에게 "이 사람아, 그대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다 앉혀놓고는 혼인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야단치다니요? 어떤 학자들은 이 곤경을 피하기 위해서 왕이 이미 연회장 밖에 손님들이 입을 예복을 준비해놓았을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치 통곡의 벽 앞에 비유대인들을 위해 머리에 얹는 키파(kippah,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으로 하늘에 머리를 보이지 않기 위해 쓰는 모자)가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입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가 입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하다 보면 임금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의전에 충실하면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혼인 예복은 마태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의로운 행동' 혹은 '삶'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산상수훈에서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5: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가릴 것 없이 기회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다만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이들은 거기에 걸맞은 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이 이것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자 신부는 단장을 끝냈습니다. 요한은 하늘에서 우렁우렁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게 하셨다. 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오늘 한국교회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오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가 기뻐하는 일을 위해 자기를 바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선이거나 거짓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입니다. 행함이 믿음을 증거합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이들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긴다는 말을 심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받았다는 사실에만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초대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한 분에 대한 예의입니다. 이 비유의 결구는 단순하지만 강력합니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14). 오늘 우리 삶을 돌아봅니다. 여전히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울 사도는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 되라고 말합니다(갈3:27, 롬13:14, 엡4:24).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입어야 할 새로운 옷입니다. 잔치는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와야 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사순절 여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이의 기쁨을 한껏 누리시리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4년 04월 06일 11시 59분 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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