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모름 사이
요7:25-31
(2014/3/23, 사순절 제3주)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닙니까? 보십시오.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합니다.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리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그들이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해도, 이분이 하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행하시겠는가?"]
• '그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춘분이 지난 정원에 제법 볼 것이 많아졌습니다. 상사초는 볼 때마다 애잔한 마음을 자아냅니다. 어쩌다가 잎이 다 스러진 후에야 꽃이 돋아나는 운명을 맞게 된 것일까요? 그 엇갈림의 시차가 안쓰럽습니다. 여하튼 봄은 우리 옆구리를 자꾸 찔러 바깥에 나가자고 졸라댑니다. 볼 것이 많아 봄이라지요?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하다지만 그래도 자연 세계는 자기 때를 잘 지키는 것 같습니다. 때를 못 지키는 것은 어쩌면 사람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며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 했던 뱀의 속삭임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오직 사람만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며 살아갑니다. 지구라는 녹색별은 수없이 많은 생물종의 고향이지만 인간이라는 한 종에 의해 멸절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람다움이란 자기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선과 악, 미와 추, 좋음과 싫음, 네 편과 내편을 가르며 살아갑니다. 삶을 그렇게 구획 짓는 빗금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복잡해집니다. 저는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을 그런 빗금이 스러져가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두루뭉수리로 살자는 말이 아니라, 품어 안고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도 집착하는 남과 구별되려는 욕망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참 부질없는 열정일 뿐일 겁니다.
사순절기 한 복판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수근거림으로 시작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가 등장하자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닙니까?"(25) 이 대목에서 제 눈길을 끄는 것은 '그들'이라는 단어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의 길과 '그들'의 길이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26절은 ‘그들’이 백성의 '지도자들'임을 암시합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지도指導'란 '가리키어 이끎' 혹은 '단체 등의 조직, 방침 등을 결정하고 본래의 목적을 향해 성원을 통솔 인도하는 일'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래의 목적을 향해'라는 말입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어려운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그런데 할배들을 이끄는 책임을 맡은 이는 일정을 체크하고 가는 길을 확인하느라 쉴 틈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저 애교로 보아줄 수 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자리에 선 이들은 정말 큰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문제는 지도자연하면서 사람들을 본래의 목적을 향해 이끌지 않고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눈먼 지도자'라 지칭하셨습니다. 스스로 길을 잃은 목자가 많은 세상입니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피터 브루겔(P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은 마태복음 15장 14절에 의지하여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다>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은 거의 그의 유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는 6명의 앞 못 보는 이가 등장합니다. 앞사람과 뒷사람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지팡이입니다. 고개를 갸우뚱 들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다른 감각을 활용하기 위한 안간힘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좁은 개울과 교회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선 사람은 벌써 뭔가에 걸려 넘어졌고, 뒤이어 다른 이들도 막 넘어지려는 찰라입니다. 브루겔이 그 그림을 그린 때는 1568년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1517년에 시작되었으니까 그로부터 약 50년 후에 나온 그림입니다. 브루겔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종교가 사람들을 본래의 목적을 향해 이끌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풍자하려던 것이 아닐까요? 제게는 맨 앞에서 나동그라진 사람과 가까운 배경으로 등장하는 교회가 겹쳐 보입니다. 그렇기에 이 그림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예언자적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오늘 지도자라는 이들은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이끌고 있는가는 의문입니다. 정치 지도자든, 종교 지도자든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이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려는 일을 제쳐두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아니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요한은 바로 그런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 사람'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이 사람'이라는 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낯선 타자입니다. 문제적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선뜻 가까이 하기도 꺼려지는 사람이기에 그들은 '이 사람'이라는 단어를 골랐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용했다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 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일 음모를 꾸미는 것은 분명한데 왠지 쭈뼛거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지도자들이 그를 진짜 그리스도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의아해 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이 절대화될 때 몰상식이 되는 법입니다. 그들의 상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인데, 자기들은 그가 어디 출신인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는 게 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앎을 근거로 하여 세상을 판단하기 일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것은 그가 자기의 무지함을 알기(無知의 知) 때문입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더 깊은 앎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중심을 향해 그는 늘 학생의 마음으로 다가갔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셨던 것일까요? 어느 날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주님은 사람들이 한 말을 인용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다."(28a)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고, 직업이 목수였고, 제자들과 유랑하며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주님은 그것을 긍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겉모습만 알뿐 그 깊은 속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예수의 핵심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좀 딱한 생각이 듭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기 초월의 길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주님은 자기에게서 벗어나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선물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꿈꾸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무기력하게 사는 것은 '자아'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집착은 우리가 이웃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물입니다. 뭔가를 붙들고 있는 손으로 다른 것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집착하는 사람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 '보내신 분'
예수님은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무지한 이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현대인들이 명함에 찍어가지고 다니는 직함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없기에 서술어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8b-29)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철저히 '보냄을 받은 분'으로 그려집니다. 예수님은 참 되신 분, 참이신 분, 곧 하나님이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오시기도 하시지만, 누군가를 불러 사명을 맡기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어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당신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백성들의 삶을 꾸짖기도 하시고, 그들의 죄로 인해 미구에 닥쳐올 재난을 예고하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절망의 늪에 빠진 이들에게는 위로와 평강의 메시지를 주시기도 했습니다. 삶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더듬으면서 나아가듯 우리는 조심스럽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시간에 멀미를 하며 살아갑니다. 권태에 사로잡힌 이도 있고, 공포심에 마비된 채 살아가는 이도 있고,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의 길을 무반성적으로 따라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보냄을 받은 자로 여기는 순간 삶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믿음 좋은 사람들은 ‘보냄을 받았다’는 이 말을 배타적으로 예수님에게만 귀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나의 '있음'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연이 아니라면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메시지로 가족들 앞에 혹은 동료들 앞에 서 있습니까?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특권으로 받아들일 때 영적 타락이 시작됩니다. 교회의 직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하라고 준 직책을 계급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가 마땅히 가야 할 곳에 가지 않는 것 또한 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시어 아픔의 자리에 가시려 합니다.
• '때'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 말하자 사람들은 흥분했습니다. 대단히 불경한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수군거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분에게 손을 대지는 못했습니다. 신적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느꼈던 것일까요? 그런데 요한은 그들이 멈칫했던 까닭을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맙니다.
예수님이 걷는 그 길의 끝에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때가 무르익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유예의 시간인 셈입니다. 그 시간은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요한은 "무리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31)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가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러시아의 짜르 암살모의(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처형 직전에 사면을 받아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유형지에서 신약성경을 읽었고 예수님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1854년에 자기에게 성경을 준 어느 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실제로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If someone proved to me that Christ is outside the truth, and that in reality the truth were outside of Christ, then I should prefer to remain with Christ rather than with the truth.)
선교는 매력의 감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그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이웃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누구도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저 또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표징을 행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 씀이,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표정과 말씨가 사람들 속에서 선한 것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 순례 여정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4년 03월 23일 12시 05분 0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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