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요21:20-25
(2014/4/27)
[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이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베드로가 이 제자를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감사한 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잔인한 4월이 벌써 저물어갑니다. 초록빛을 더해가는 나무는 아름답지만 우리 마음은 아직도 잿빛입니다. 너무나 큰 슬픔이 온 땅을 뒤덮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를 잃고 떠도는 백성들의 슬픔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렘31:15) 그러나 예레미야는 떠도는 그 백성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희망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희망의 노래조차 부를 수 없습니다.
이 땅의 라헬들에게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자비하심 앞에 엎드릴 따름입니다. 요즘 들어 박노해 시인의 <감사한 죄>라는 시가 자꾸 떠오릅니다. 시는 "새벽녘 팔순의 어머니가 흐느끼신다"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젊어서 홀몸이 되어 온갖 노동을 하며/다섯 자녀를 키워낸 장하신 어머니/눈도 귀도 어두워져 홀로 사는 어머니가/새벽기도 중에 나직이 흐느끼신다." 어머니는 한 평생 고생만 죽도록 하셨습니다. 낯선 서울 땅에 올라와 노점상을 하며 이리저리 쫓겨다니고, 여자 몸으로 공사판을 뛰어다니며 살았는데도, 자식들이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바르게 자라준 것이 늘 고마웠습니다. 큰아들과 막내는 성직자로 하나님께 바쳤고, 시인 내외는 민주 운동가로 나라에 바치고, 어머니는 감사기도를 바치며 살아왔습니다.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당신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준 단속반원들, 몸 약한 당신을 많이 배려해준 공사판 십장들, 또 끊이지 않고 이어진 파출부 일자리를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흐느끼십니다. 나이 팔십이 되고 보니 당신의 숨은 죄가 보인다고 고백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
민주화 운동 하던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은
정권 교체가 돼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도
사형을 받고도 몸 성히 살아서 돌아온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아왔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왔구나
'감사한 죄', 아, 이 말 앞에서 저는 할 말을 잊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일 겁니다. 나와 내 가족에게 별일 없기에 감사한다는 것, 그것은 경건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을 생각하면 어찌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죄송스러워할 뿐이지요. 저도 요즘 죄인 된 심정으로 삽니다.
• 절망의 현장
오늘 이 땅에서 울고 있는 이들의 마음은 스승의 십자가 처형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제자들의 마음과 비슷할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제자들의 마음에 깃들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산산조각내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는 기존 체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맞이하게 될 운명에 대한 섬뜩한 암시였습니다. 그 거센 일격에 제자들은 나가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인들을 통해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미 식어버린 그들의 가슴은 다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수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옛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은 디베랴 바다에 그물을 던졌지만, 그들이 건져 올린 것은 공허와 혼돈뿐이었습니다. 새벽녘, 한 낯선 사람이 그들에게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일렀고, 제자들은 그 말대로 했습니다. 많은 고기가 걸렸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그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바닷가에 숯불을 피워놓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 생선과 빵을 굽고 계셨습니다. 단 한마디의 책망도 없었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들에게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이르고는 그들을 식탁에 초대하셨습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저는 이 대목이야말로 요한복음의 성찬식이라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처음으로 부름 받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다시 소명을 주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거듭되는 질문은 베드로를 한 부끄러움의 장소로 데려갔습니다. 가야바의 관저 말입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피워놓은 숯불 곁에 서서 불을 쬐고 있는 자기 모습, 그리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기의 모습을 부끄럽게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책망을 하셨더라면 오히려 속이 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깊은 번뇌 속에서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저는 베드로의 이 대답에서 숨죽인 통곡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장담했던 자기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자기의 부조화로 인해 베드로의 영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내가 아직도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 내포된 것이 아닙니까? 베드로는 그 큰 사랑을 알기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이르십니다. 주님께 등을 돌렸던 제자를 전폭적으로 신뢰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신뢰는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
• 상한 갈대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인간의 신념이 얼마나 무력하게 꺾일 수 있는지를 아셨기에,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눅22:31-32)
주님을 부인함으로써 베드로는 '상한 갈대'가 되었습니다. '부러진 갈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하나님께 맡기십니다. 그가 절망과 공포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주님은 그가 제자리로 돌아올 것임을 굳게 믿으셨습니다. 상한 갈대 같은 사람이라 해도 주님이 숨결을 불어넣으시면 하늘의 곡조를 노래할 수 있는 법입니다. 타고르의 <기탄잘리>에 나오는 시 '당신은 나를 영원하게 하셨으니'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이 가냘픈 갈대 피리를
당신은 언덕과 골짜기 너머 지니고 다니셨고
이 피리로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십니다."
넘어짐의 쓰라림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베드로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불화로 인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기에 그는 가슴이 무너지고 있는 이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 떼'를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 출신의 한 사나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지만, 주님의 사랑과 신뢰 덕분에 새로운 삶에 눈을 뜬 사람들은 누구나 '베드로'입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 속에 하늘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 이들은 누구나 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설 수 없는 사람들,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 연약하고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 주류사회에서 떠밀려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기꺼이 선택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명예나 이익이 아닙니다. 어둠의 세상은 그런 이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줍니다. 주님은 그것조차 숨기려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요21:18)
18절의 말씀은 일종의 사후 예언입니다. 요한은 이 구절이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소명의 다양성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을 마무리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다른 에피소드 하나를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20절은 '베드로가 돌아다보니'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나를 따라라!" 하는 명령과 "돌아다보니"라는 단어가 묘하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따르기 위해서는 부르신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뒤를 돌아봅니다. 어쩌면 이게 연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고는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따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그저 부르신 분이 이끄시는 대로 가면 됩니다. 다른 이들의 소명과 자기 소명을 비교할 이유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히12:1b-2a)
자기와 다른 이를 비교하는 순간 원망과 시샘이 나옵니다. 주님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베드로를 책망하시고는 재차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요한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는 신실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고, 그 복음의 기록자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면서 몸에 있는 다양한 지체가 하는 일이 다 다르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사도로, 어떤 이는 예언자로, 어떤 이는 복음 전도자로, 어떤 이는 목사와 교사로 부름 받습니다(엡4:11). 역할에 경중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소중한 일들입니다. 각자가 자기 일을 성실하게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몸은 든든히 세워집니다. 요한은 복음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하면서 의미심장한 말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25)
의례적인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통일부총리를 지내신 한완상 박사님을 만났습니다. 사회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책을 많이 읽으시는 까닭을 여쭸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 사회학 책보다 신학책에 제 마음이 더 반응을 해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당신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까닭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10이라고 한다면 주님의 실천은 100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어떤 종교의 창시자가 예수님처럼 사셨겠어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등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어쩌면 나는 실천은 10이고 말이 100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거듭해서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싸구려 은총을 좋아합니다. 독일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그런 값싼 은혜를 맹렬히 비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값싼 은혜란 참회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적인 참회가 없는 사죄입니다. 값싼 은혜란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요, 인간이 되시고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입니다." 이게 지금 우리의 자화상 아닌가요? 그러면 값비싼 은총이란 무엇입니까?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인간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기 때문이요,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디트리히 본회퍼 묵상 52>, 이신건 편, 신앙과지성사, p.102-3)
값싼 은혜에 중독된 이들은 따라야 할 분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길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우리 시대의 갈릴리로 우리보다 앞서서 가고 계십니다.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는 곳, 그곳에 갈 때 우리 신앙의 이야기가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임을 알게 됩니다. 남이 어떻게 하는가 눈치 볼 것 없습니다. 각자 자기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실천을 통해 우리 믿음이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4년 04월 27일 11시 59분 2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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