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롤드 브라운의 정통과이단 요약 및 정리
이 책의 저자인 해롤드 브라운(Harold Brown)은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샤롯(Charlotte)에 있는 리폼드(Reformed)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고, 이단 연구에 관해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입니다. 이 책은 이단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을 가장 학문적으로, 포괄적으로, 복음적으로 살핀 명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제1장 조명된 이단
영어 “heresy”라는 용어는 “음흉한 당파”라는 의미를 가진다. 한동안 하이레시스(hairesis)는 “당파” 또는 “분파”(라틴 동사 “자르다”)라는 뜻이었지만 어떤 경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이단은 기독교인이 관계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였다. 중세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이단은 신론과 기독론과 관련을 가졌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 이단은 단순히 교리적 불일치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기독교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근저를 도려내는 존재였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갖가지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브라운은 말한다.
그러나 이단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 “긍정적”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이단의 좋은 점이 아니라 이단이 정통의 존재를 기능케 했기 때문이다. 이단이 먼저고 그 다음이 정통이라는 뜻이 아니다. 정통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3절) 일 뿐만 아니라 이단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교회에서 “정통”이란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이단은 초기 역사 기록에 등장했다. 정통은 “기원체”이며, 이단은 “반영체”가 되는 것이다. 이단이 먼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 지만 사실은 정통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Reflection: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 교회역사에서 이단이 등장하면서 사도들로부터 받은 ‘복음’을 지키려는 정통이 일어났다. 그러나 브라운의 통찰처럼, 교회사에서 “정통”이란 말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바른 복음”이 있었다. 이 바른 복음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다. 이단에 대한 싸움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교회역사에서 처음부터 바른 복음, 곧 이후에 “정통”이라고 지칭되는 것이 있었다면, 이 사실이 오늘날 사상의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 바른 복음에 대한 인식을 심도있게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신앙을 갓 출발한 사람들이나 기독교 신앙을 더 깊이 알기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알려고 하는 “그 복음”에 집중해야 한다. 위조지폐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진짜 지폐를 많이 만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잘못된 것을 알기 위해서는 바른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가 우리에게 주어졌으므로, 이 기원체에 대한 관심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바른 복음을 배우고 경험해 간다면, 여기저기에서 우후죽순처럼 올라와 활동하는 이단의 악함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이단은 왜 일어나는가?
초대교회의 복음선포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아주 간단한 어구로 요약된다. 단순한 슬로건이었지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만큼 중요했다. 기독교 교리는 이와 같은 복음의 중요한 개념을 명쾌하게 설명하려 했다. 기독교 교리 문서 중 가장 정통한 진술은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은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단지 정의할 뿐이다. “니케아 신조”(325)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와 동일하신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칼케돈 신조”(451)의 정의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성의 측면에서 우리와 같은 분이시며 우리와 통일한 본질로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시다.” 이 칼케돈의 신조와 일치하지 않고 그 범위를 넘어가면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기독론의 이단이 없었을 것이다. 칼케돈 신조의 필요성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후기 기독교인들이 칼케돈에 관심을 가지거나 그것을 설명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하지 않았다면, 칼케돈 이후 어떠한 기독론 이단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칼케돈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의 단일성을 1,OO0년 동안 유지하게끔 만들기 시작했다. 부분적으로 성공적이라 볼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일치를 나타낸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 이슬람교로 전락하고 말거나 카톨릭교회의 영역에서 교리를 강요했던 로마 황제들로부터 격리되고 없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도 기독교 보다 바른 교리를 유지할 필요성과 믿음을 강조하지 않았다. 어떤 종교도 기독교 보다 교리적 논쟁과 이단적 견해를 산출하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기독교인의 구원은 정통에 의존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통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의 지속성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의 지속성에 의존하지만, 교회사를 잠깐이라도 살펴보면 지속성보다 혼란과 논쟁이 많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혼란이 있었지만 기독교 정통이 항상 강조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중요성”이다. 기독교라는 이름은 이를 시작하셨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유래된다. 불교나 이슬람교는 모두 석가와 모하멧의 “가르침”에 우선적으로 기반을 두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우선적인 기반을 둔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가르침을 믿는다. 그런데 기독교 자유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믿기 보다는 “예수께서 믿으셨던 것처럼 믿기를” 원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적 속성을 변화시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관심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다. 성경적으로 두 종교에 있는 윤리적 오리엔테이션은 일반적으로 창조론에 근거하며, 모든 우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이성적 존재로서 사람들이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일치하려 한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당위성은 그의 계명이 공정하다는 일반적이고 철학적인 통찰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역사 속에 행하셨던 그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임무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을 출애굽시키신 일에서부터 기인되었고, 바로의 손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은 십계명의 시작이고, 하나님의 율법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출 20:2).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당위성은 출애굽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건에 근거한다. 부활 사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한다.
많은 종교들을 점검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은 올바른 행동이나 규율이다. 기독교는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고 특별한 교리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중요하게 보이지만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모든 교리를 대동소이하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교리는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명시되었지만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 안에 내재해 있었다고 본다. 기독교 이단의 가치 중 하나는 가끔 정통보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정통 교리가 비록 형식화되지 않았을지라도 초기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믿음은 기독교인을 만들지만 교리는 교회를 만든다. 명백한 교리적 바탕이 없어도 교회는 오랫동안 견딜 수 있고 초기 교리적 바탕에 반응할 수 있어도 명백하고 중요한 교리가 없이 교회는 어떤 변에서도 일어나지 못한다. 교리적 복수주의로 유명한 근대 영국 국교회주의는 복수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초기 감독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사수했던 명백한 교리적 확신으로부터 일어났다 근대의 많은 교단들 은 매우 중요한 교리들을 타협한 결과로 제정하였다 미국 PCUSA(미국 연합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U.S.A.])는 논쟁점을 무시하고 교리적 타협을 일삼았던 좋은 예이다. 광범위한 기독교 협회 내에서도 교리가 본질적이고 믿어져야만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소간 차이점이 있다. 기독교와 모순되지 않는 차이점이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더 이상 믿음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없는 공동체도 있다. 교의적 논쟁이 너무 중요하여 공동체를 분해시키는 경우에 이르게 될 때 그것을 이단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은 정통이며,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이단자가 된다.
Reflection: 초대교회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사실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상한 교리에 맞서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는데, 칼케돈을 열매로 맺는다. 비록 켈케돈이 기독교의 세계를 좁힌 부분은 있지만 기독교의 단일성을 유지시켜 준 것처럼 기독교회는 이러한 공교회의 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역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건에 그 신앙을 두고 있다. 믿음은 기독교인을 만들지만 교리는 교회를 만든다 라는 말처럼,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은 늘 “믿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며, 동시에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교리”에서 신앙고백이 벗어나지 않도록 점검해야 할 것이다.
제3장 공통된 근거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그 신앙에서 자라난 신학의 출발점은 성경이다. 가장 작은 책 중에 하나인 신약성경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에 대하여 말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수용했고 최초의 기독교인들에게 한꺼번에 전해진 교리의 총체로서 믿음을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신중하게 그리고 변함없이 전했는데, 이런 사람들은 정통파가 되었다.
수세기 동안 교회는 정착된 교리라 불리는 것을 소유해 왔다. 니케아(325), 콘스탄티노플(381), 칼케돈(451)에서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와 같은 것을 얻어낸 종교회의들은 기독교인들이 항상 믿고 있던 것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러한 견해는 루터의 제자와 동역자였던 필립 멜랑흐톤 그리고 존 칼빈과 같은 프로테스탄트들의 설명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오직성경만으로”로 알려진 교리를 주장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권위적 공언으로서 범교회적 신조를 받아들였다. 일반적으로 주류 기독교 교단들은 범교회 신조뿐만 아니라 고백들도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서 수용했으며 그것이 참기독교인의 믿음이었다고 추정했다. 즉, 공통된 근거는 신조가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 의식과 그 가르침의 공식화에 발전이 있었다면 가장 중요한 심리적 변모는 교회의 초기, 즉 1세기 전반부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최초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자신들과 같은 한 인간으로 보았다. 점차적으로 그들은 그분이 초월적 속성을 지니신 분이고 그 분이 성부 하나님과 한 분이심을 주장하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서서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게 된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의심 많은 도마의 고백처럼 그분을 주님과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되었다(요 20:28). 예수님의 인성은 자명했으며, 그의 신성은 그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예수님의 부활 전에 그를 알았던 신자들의 첫 세대가 지난 후기 신자들은 늘 그분의 신성에 직면하게 되었고, 구세주께서 자신들과 같은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주님과 하나님이심을 공언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점은 그들에게 충격이었을 뿐 아니라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2세대부터 기독교인들은 점점 강하게 주장해 왔듯이 더 이상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신앙 신뢰 그리고 이해와 같은 것을 바탕으로 하여 개인적 관계를 세우려는 위엄과 신비로움을 가지고 그분을 직면하게 되었다. 최초의 이단자들은 보다 세련되고 지성 있는 기독교인들이었다. 곧 그들은 신앙을 “이해”하는 법을 찾았다.
일반적으로 보면, 정통은 우선순위를 역사에 두지만 이단은 이해에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통은 신학자들 가운데 보다 신학적이지 못하고 보다 역사적인 마음을 가지게 하지만, 이단은 보다 신학적이고 철학적이며 추상적이다. 정통자들 가운데는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있었지만 이단자들 가운데는 탁상공론가들만 있을 뿐이고, 이단자들은 보다 추상적인 반면에 정통자들은 보다 꾸준하게 연구한다. 정통과 많은 이단 간에 차이점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보면, 정통은 그리스도의 사역,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 특별히 부활에서 시작하여 성육신의 교리로 거슬러 가지만, 이단은 그리스도의 속성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그의 사역을 해석하려고 한다. 많은 이단들은 역사 속에서 그의 인간적 삶과 사역이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의 위엄을 정당화하는 일을 위해 그를 따르는 자들이 고안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영생에 대한 초대 기독교의 개념과 영의 불멸에 대한 헬라주의적 가정 사이의 차이점을 내는 것은 중요하다. 고전 이교도처럼 성경은 영, 육을 가진 인간을 말하는 듯하지만, 플라톤주의와 많은 헬라주의적 영성의 주장처럼 인간을 육신 속에 갇혀 있는 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인간을 영육의 단일체로 본다. 그래서 신조에서는 “육체의” 부활(사도신경) 또는 영의 불멸이 아닌 “죽은 자의” 부활(니케아 신조)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영육의 단일체로 인간을 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의미를 이해하려 할 때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만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도 소유하셨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인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영육의 단일체로 인간을 보지 못하고, 단순히 육신 안에 잠깐 구현된 영혼으로 보는 헬라주의적 세계는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흥미 없는 것으로 여겼고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을 축소시키거나 아예 부정하기도 했다.
기독교 선포의 최초의 내용은 두 가지 본질적 요소를 가지는데, 기독교 신학 발전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 1) 한 분이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고백,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주님 그리고 구세주라는 시인과 고백이다. 이러한 본질적 두 가지 요소와 함께 언급해 야 할 것이 있는데, 3) 신자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의 실재성, 현재성 그리고 계속성에 대한 고백, 또한 4) 영광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인격적 도래가 임박했다는 강한 확신이다.
Reflection: 사람들은 “교리”를 강조하면 싫어하는 인상을 보인다. 교리는 교회를 분리시키는 잣대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조주의로 나가면 기독교 공동체는 깨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고 “공통된 근거”로 연합하기 보다 깨지기 쉽다. 그러나 본 장에서 강조하는 바는 니케아(325), 콘스탄티노플(381), 칼케돈(451) 회의에서 만들어진 신앙고백은 “기독교인들이 항상 믿고 있던 것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들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심을 갖는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구원받은 교회가 교리를 논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통이 그리스도의 사역,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 특별히 부활에서 시작하여 성육신의 교리로 거슬러 가지만, 이단은 그리스도의 속성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그의 사역을 해석하려고 한다. 인간이 아무리 고민해도 초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려고 담대히 덤빌 때 분량 이상의 상상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기에 오늘날 이단의 도전 앞에 서 있는 정통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나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성경에 비추어서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제4장 구조와 변화
기독교 복음이 너무 단순했기 때문에 궤변을 즐기는 사람들은 복음을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 “종교”는 정말 복잡하다. 수많은 교리들, 예식들 그리고 제도들이 논쟁 가운데서 또 어 떤 때는 서로 직접적인 반대에 부닥치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서도 단일성이란 것이 가능할까? 합법적인 변화와 혼돈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가? 다소간 손상되지 않은 모습으로 기독교 신앙이 단번에 성도들에게 전해졌다고 주장하는 공통된 기독교의 추정에 비하여, 바우어는 교리가 변증법적 발전의 과정 속에 있으며, 그 과정 속에 있었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은 교리적 긴장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한다. 예를 들면, 로마서는 행위에 반대되는 의에 대하여 길게 논의하고 있으며, 갈라디아서는 초기 모임에서 율법주의의 영향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골로새서와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자와 가현설주의자에 대한 항거가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형태(한편으로는 율법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에 분명히 있었으며 가끔 교회사를 통해 간헐적으로 재현될 것이다. 비록 율법주의는 신학적 함축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신학적 문제보다는 실천적인 문제였다. 이에 비하여, 영지주의 운동은 신학적 문제로부터 다른 신학적 문제를 산출했다. 영지주의는 신비한 존재를 이해하려는 광범위한 욕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영지주의는 인류를 여러 계급으로 나누어서 최고의 영적 계급 인 종교적 엘리트에 속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비밀적 지혜를 보관했다. 그리하여 단순한 복음으로 만족하는 평범한 기독교인들의 무리와 함께 섞여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영지주의와 영지주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영혼과 물질, 영과 육, 선과 악과 같은 근본적인 두 가지 원리 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으로 실체를 본다. 영지주의는 성경적 창조론을 부인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라 불리는 영적 능력이 물질적 세계와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가진 사상 때문에 가끔 이원론적이라는 말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원론적이라 할 때는 영육 간의 대립을 의미하지 않고 실체에 대한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속성으로 대립한다는 면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이원론은 선과 악의 대립의 입장으로 설명함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내에 지속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만일 초기 기독교 신학이 영지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으로 신학의 헬라화를 시도했다면, 영지주의가 기독교를 정복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 자체로 순수한 의미의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마지못해서 자신들의 믿음과 확신을 포괄적인 형태로 만들었다. 그들이 주저하게 되자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적 사실들을 우주적 형틀 속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을 최초로 가장 위험한 시도로 감행한 자들은 바로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기독교 신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 동기는 그리스도 의 재림 지연에 대한 중요성 때문이었다고 본다.
영지주의 운동은 모든 세대의 수많은 정신 속에 영향을 끼친 두 가지 현 저한 특색이 있다. 예를 들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설명하는 비밀 지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비밀들을 엘리트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엘리트는 그것들에 대한 깊은 흥미를 가진다. 그 결과, 영지주의 사상들은 가끔 현대에서도 기독교 토양 속에서 다시 재현될 것이다. 메리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의 “크리스찬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는 현대판 영지주의이다. 정치 철학자인 에릭 보에젤린(Eric Voegelin)조차도 맑시즘(Marxism)을 영지주의 운동의 하나로 부른다. 기독교 지성인들 가운데 어느 종류의 영지주의나 또 다른 종류의 영지주의파로 변화하려는 경향 속에서, 그들은 지성적 학식들이 우수한 기독교인을 만들 것이고 영구적 유혹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영지주의 운동에서 기독교적 측면이라 부르는 영지주의를 묘사하고 구분하기란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먼저 그것은 고대 로마세계를 휩쓸었던 대규모의 종교적, 철학적으로 복잡한 운동의 한 부분이었다. 둘째로, 적어도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지식을 “영지”라는 말로 대용하거나 성숙한 기독교인을 “영지주의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의 철학적, 종교적 사색 그리고 하르낙의 대중적이고 세련된 지성과 영지주의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는 정상적인 철학이 지식을 줄 수 없었던, 즉 학파들과 철학자들의 지식보다 더 우수한 그 어떤 것을 필요로 했다. 이런 종교적 차원에서 요구된 것은 계시였으며, 영지주의는 그것을 얻기 위해 기독교를 통해 유대교로부터 빌려오거나 훔쳐왔던 것이다. 폴 틸리히는 고안한 종교적 철학을 위해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성경적 기독교의 역사적 사실들이나 특별한 교리들을 거의 언급하지도 않고 있다.
영지주의는 성경적 기독교와 여러 변에서 충돌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두 가지, 즉 창조론과 기독론을 들 수 있다. 영지주의는 전적으로 창조론을 부인한다. 영지주의가 이해하기에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최상의 신성은 너무나 존귀해서 기초가 되는 물질과 관계를 가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창조를 거부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수용했다. 하지만 영지주의의 그리스도는 실제적 인간 나사렛 예수님이 아니었고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죽으신 분도 아니었기 때문에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대체로 영지주의 운동과 교회와 관련된 영지주의는 신약성경과 너무 이질적이기 때문에 이단으로 분류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실제로 또 다른 종교로 여겨진다. 그러나 “가현설”(docetism)을 산출한 영지주의는 기독교 내에 거할 수 있는 최초의 이단으로 등장했다. 영지주의는 순수한 영적 존재이신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으로서 고통당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외형적으로만 인간이셨음이 틀림없다고 본다. 이와 동일한 사상은 기독교계 내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왜 “헬라인들”(어떤 이방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 이방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교리를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했는지 알만 하다. 시몬 마구스는 예수님은 고통을 받으셨 다고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당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가상적인 십자가 사건 후에도 여전히 지상에 사셨다는 사실을 설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정상적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성이 그들에게 매우 중요했지만, 영지주의자들에게 흥미로운 것은 이미지였을 뿐이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자발적 양보, 순종과 신뢰의 결과인가? 아니면, 영지주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보다 높은 영적 속성을 소유함으로써 말미암는 논리적 결과인가?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차이점은 하버드 뜰에 있는 문을 장식할 때 예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느냐 아니면 온전히 인용하느냐라는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마르키온: 교회 교부들은 마르키온과 당대의 발렌티누스를 한 쌍으로 보아 가장 악 한 두 명의 영지주의자로 여겼다. 발렌티누스와 다른 영지주의 교사들처럼 마르키온도 엄격한 이원론자였다. 마르키온의 주요한 특징은 이질적 하나님이란 사상을 타락한 세 계의 개념(원죄)으로 대치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참 하나님에 비해 이질적이며 영적인 사람에게도 이질적이다. 그분은 구약성경의 야웨로서 화를 잘 내는 난폭한 신이며, 실수가 잦으며, 후회하는 자를 용서하는 은혜에 대하여 전혀알지 못하는 분일뿐만 아니라 공의만을 추구한 분이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의 불행에 전적인 책임이 있으며, 메시아를 포함한 모든 특징들과 함께 구약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마르키온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의해서, 유대인 자신들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 이 약속하신 메시아에 의해서 지배된 세속적 존재의 진행되는 과정으로부터 영적인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도구다. 다비와 그를 따르는 세대주의자들은 세계 역사의 부분이 아닌 괄호와 같은 교회로 생각한다. 마르키온 전에는 어느 누구도 복음과 유대 율법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 이가 없었다. 그는 토라는 전적으로 복음으로 대치되었다고 결론내린다. 정통 기독교는 언제나 율법과 복음 간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마르키온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특한 기독론을 고안해 낸다. 영지주의자 마르키온은 두 신이 있는 데 하나는 구약의 신으로 불완전하고 분노로 가득 찬 전쟁의 신이며, 다른 신은 자신을 예수님에게 나타내신 영적 성부로서 “알려져 있지 않은 하나 님”이라고 했다. 물질적 세계와 육체를 조물주의 솜씨로 보았던 그의 이원론 때문에 마르키온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이처럼 가현적 경향이 초기 기독교에서 성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성경의 주장들과 제자들에게 주셨던 감동이 너무나 강력해서 그를 인간으로만 여기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인 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시며 참된 인간이시라는 사실보다는 하나님으로만 인식하기가 훨씬 쉬웠던 것이다. 마르키온, 영지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궁극적으로 정통파는 신조에서 그의 인성을 강력하게 확언했지만, 정통파 가운데서도 그를 신으로만 보고 인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재발되면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마르키온의 후계자들은 그리스도를 성부로만 인식했기 때문에 그가 성부의 존재의 한 형태로 나타나셨다고 하는 입장은 다음 세기에 등장하는 사벨리우스파들, 즉 양태론자들에 의해서 수용된다.
몬타누스: 마르키온처럼 몬타누스는 비오(Antoninus Pius, 138-61) 아래 활약한 자로서 교회가 유대교로 귀속하고 있다고 느꼈다. 몬타누스는 요한의 저서들을 강조한다. 몬타누스는 성령으로부터 나온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카리스마적’인 사람이었다. 세상의 마지막이 다가왔다는 확신을 가진 몬타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 혼인을 금하고 약혼을 폐기하여 하늘의 도시가 강림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적절한 장소에 함께 모일 것을 명했다. 마지막 날에 대한 개념에 대하여 몬타누스는 추종자들에게 엄격한 규율에 따라 살아야 하며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의미로 폭넓게 해석 했다. 마르키온주의와 몬타누스주의를 비교해 보면 매우 인상적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나타내는 다양한 탈선적 행위가 여러 세기 동안 교회 내에서 재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마르키온처럼 성경을 삭감하지 않고, 몬타누스처럼 첨가하지 않고, 모든 성경을 존경했다.
Reflection: 교리는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단번에 주신 도를 교회가 고백한 것이다. 기독교가 그 사회에서 공인받은 종교로 인식될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이 있지만, 그 중에서 “영지주의적” 움직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지식과 신령한 깨달음을 무기로 해서 성도들을 미혹한다. 교인들은 신학적 지식을 증가시키거나 신령한 경험을 더 많이 받음으로써, 엘리트 그룹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긴장을 없애려고 시도한 이단들처럼 신앙의 긴장성을 어떤 “가설”로 풀어버린다. 본인들의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마르키온처럼 성경을 삭감하지 않고, 몬타누스처럼 첨가해버린다. 이런 움직임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기독교의 이름”, “부흥”의 이름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런 시절일수록 기독교인은 가장 기본적인 지식,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제5장 신약성경의 정경화
종교개혁 시기에 로마 카톨릭 전통주의자들은 권위적이고 신적인 계시의 두 가지 근원-성경과 전통-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성경론에 대항하려고 노력했다. 16세기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전통들 역시 계시이며 성경의 동반자라고 주장했지만 이 둘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들은 오직 성경만이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근대 기독교인들, 즉 프로테스탄트들이나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대체로 성경이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권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견을 가지지 않는다. 성경에 대한 옛 기독교인들의 자세, 즉 완전한 본문이 가능했을 때부터 모든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자세는 마치 성경이 단번에 쓰여져서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셨을 때 상정한 형태로 교회에 주어진 것처럼 성경을 단 한 권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비평주의에 대한 학문이 형성된 본문의 과정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을 때, 또 적어도 몇 권의 신약성경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기 위해서 무엇인가 필요했음을 강조할 때 성경에 대한 오해의 분위기는 확산 되어 나갔다. 신약성경은 잡다한 문서들과 증거들의 모음집으로 서 로 일치하지 않고 상반되는 문서로 보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이 상대적으로 그 기원이 늦고 기독교인들 가운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하거나 그 자체가 이따금 서로 상반된다고 가정하면, 그 안에 서 “단번에 준 믿음의 도”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현재 우리가 소유한 신약성경에 대해서는 두 가지 도전장이 주어졌다. 첫 번째는 마르키온의 도전장으로서, 유대적인 요소를 성경에서 배제하고 누가(“복음”)의 부분과 바울의 부분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몬타누스의 도전장으로서, 모든 신약성경을 수용하지만 동일한 권위로서 몬타누스의 예언들과 다른 사람들의 예언들을 신적 계시의 단체에 첨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마르키온류인 루돌프 불트만의 추종자들과 신약성경 해석에 대한 그의 학파와 같은 이들은 신약성경 중 작은 부분만이 예수님의 실재적 말씀과 행위에 대한 신빙성을 기록하고 있다고 여긴다. 몬타누스처럼 새로운 계시를 성경에 첨가하려는 “극대주의자들”의 실례들 을 제공하고 있다. “말일 예수 그리스도교”(몰몬교), “크리스찬 사이언스”,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자들은 극대주의를 천명하면서 자신들의 신선한 계시들이 성경 자체의 가르침을 확대시킨다는 점에서 몬타누스를 넘어 서고 있다. 신약성경의 몇 권이 아직 4세기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었지만, 신약 성경의 정경은 A.D. 200년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경에 대한 결론이 그 때부터 계속하여 신학적 논쟁의 주제로서 교리의 근원인 성경 본문 자체에 대해 더 이상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결론은 매우 중요하다. 약 220년, 신약성경 정경의 실제적 결론이 내려진 후부터 기독교가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교리에 대해 일치점에 이르기까지는 앞으로 2세기 반이라는 세기가 더 요구될 것이다.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한 인격과 두 본성에 대한 내용이 그것이다.
Reflection: 교회는 성경 내용의 일부를 제외시키려는 마르키온의 도전과 첨가하려는 몬타누수의 도전 앞에 서 있다. 이단들의 공통점은 양 입장을 혼용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선이해를 갖고 성경을 대하는 것 같다. 정통의 신앙에 서 있는 사람은 정경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 결국은 전제의 충돌이다. 정통 교회는 어떤 선이해를 가져야 할 것인가? 정경을 확신한 공회의 신조에 대한 신뢰, 그 신조를 낳게 한 성경에 대한 신뢰, 성경을 권위있게 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성경 자체의 자증력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제6장 변증가들
초기 변증가들 중 가장 위대한 두 명의 변증가는 영지주의자들의 대적대자인 리용의 이레니우스와 라틴어를 쓰는 웅변가이며 변호사였던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이다. 최초의 변증가들은 세상을 향해 기독교 신앙을 해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선배들도 그것을 전파했고 개종자들을 얻기 위해 그것을 설명했었다. 변증의 목적은 이해를 시키기 위함이었다. 저자들은 기독교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자들을 향했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소아시아 출신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 이레니우스는 2세기 하반기에 남부 고올의 리용에서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서머나의 폴리캅(Polycarp)과 함께 지냈던 자였고 교회의 초창기에 개인적 친분을 가진 자였다. 평신도인 터툴리안은 북아프리카의 카르 고(ca. 160 -ca. 230)에 살았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이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수세기 동안 그가 쓴 「이단에 대하여」는 영지주의 신학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논쟁적 의도가 내재해 있지만 비교적 믿을 수 있는 내용이다. 마르키온에 대한 반격을 가한 글을 쓴 터툴리안은 몬타누스 이단의 진영에서 자신의 경력을 마무리하였다. 이레니우스가 교회의 초기 신학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라면 터툴리안은 정확성을 가지고 기여를 한 인물이다. 하나님의 한분이심을 분명히 강조하지 않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신성을 고백한다는 것은 다신론(polytheism)일 수 있다. 이레니우스는 창조 전에 있었던 것에 관해 사색하거나 성자께서 태어나신 방법에 대해 사색하는 행위를 경고한다. 본질적으로 영지주의는 종교 철학이다. 이레니우는 계약신학과 구속역사 개념의 선구자로 불린다. 이레니우스의 신학 중 가장 두드러진 특정은 기독론이다. 그는 영지주의에 대한 공격에 있어 종교와 철학에 호기심을 가지는 혼합적인 것에 치명타를 날린 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레니우스는 자신의 유일한 권위를 성경에 둔다. 이레니우스는 성경은 전통에 따라 해석되어야만 한다고 했지만, 그 이유는 전통이 성경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보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사도적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썼던 사도들, 즉 그들의 증거가 모든 비진리로부터 자유했던 자들의 가르침을 말한다.
발렌티누스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세밀하고 믿을 수 있는 영지라는 점에서부터 진행해 나갔다. 이러한 영지는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신성의 가장 내부에 있었던 생명, 플레로마 그리고 이온들이라고 설명했다. 또 메시아로서 남녀 가운데 사셨던 인간에 대한 기독론적이면서 결함이 많은 가현설적 견해를 산출했다. 신적 실체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영지주의는 그의 실체를 다루는 데, 즉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이나 가현적 허깨비가 아니라 그가 한 인간으로서 실제로 태어나셨고 고통당하셨고, 죽으셨고 그리고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을 다루는 데 실패했다. 이레니우스는 신격의 내적 본질을 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레니우스는 그가 실제로 한 인간이시고 동시에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이레니우스의 모든 기독론은 이신론이나 다신론과는 전혀 다른 삼위일체론을 필요로 했다.
이레니우스의 기독론은 인간론에 근거하는데,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류의 단일성에 대한 실질적 견해를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인류의 실질적 결합을 바라본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시고 참 신이시다”(Jesus Christus vere homo, vere deus)는 사상을 강조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고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시지만, 한 예수와 한 그리스도자 아니시며, 한 이온과 한 인간 간의 단순한 일시적 결합도 아니지만 동일한 분으로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태어나셨고, 고통당하셨고, 승천하셨다.”고 주장했다.
오리겐: 오리겐은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지만 많은 문제를 낳기도 했다. 오리겐의 순교적 죽음으로 마무리된 3세기가 지난 5차 범교회 종교회의(553)는 그의 사후에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삼위일체를 3위로 이해하지 않고 한 분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행하고 그러한 이해가 없이는 정통의 존재가 없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정통이 궁극적으로 그를 정죄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리겐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속성이라는 의미로 말씀, 지혜, 정의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로 불렀다. 동시에, 오리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창조되었고 그가 창조하신 분이심을 주장한다. 오리겐의 통찰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로고스가 한 위라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오리겐은 예수님이 로고스의 신성 안에서, 물론 그분 의 정체가 아니지만, 자신의 인간성을 잃어버리셨다고 보았다. 이리하여 오리겐은 네스토리우스파의 반대자들이었던 후기 단성론자들을 닮았다고 여겨지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오리겐을 언급하기를 좋아했다
Reflection: 지금 한국교회는 영지주의적 신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신학 지식에 대한 지나친 의존, 영육 이원론에 기초한 신앙생활이 예가 된다. 이러한 영지주의에 대해서 이레니우스는 창조 전에 있었던 것에 관해 사색하거나 성자께서 태어나신 방법에 대해 사색하는 행위를 경고했다. 영지주의는 종교 철학이므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역설적인 진리를 순종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시고 참 신이시다”(Jesus Christus vere homo, vere deus)는 사실을 어떻게 이성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믿음이 신학의 전제가 되며, 믿음으로 신학하고 이해하려는 겸손이, 지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감성을 지식 위에 세우려는 시대에 필요하다.
제7장 단일신론
교회가 용서할 수 없는 이단으로 규정할 어떤 업장을 취하면서 기독교인으로 불려질 수밖에 없었던 운동은 단일신론(monarchianism)이었다. 단일신론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정말 슬픈 일이다. “모나키아니안(monarchian)”이란 말은 어떤 단체를 명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우주의 유일한 주권자시라는 기독교 진리와 근본적 성경적 진리를 강조하는 단체였다. 단일신론의 보다 오래된 특성은 “역동적 단일신론”으로부터 유래된다. “양자론”이라고도 부른다.
양자론은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가 되었다 라는 입장이다. 양자론자들이 보기에는 그리스도는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시고 단지 양자가 된 인간에 불과하다.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성부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해 보라고 하면 틀림없이 양자론적 방법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양자론은 약 A.D. 190년에 로마에서 그 자태를 드러냈다. 당시 로마에는 그리스도를 비물질적 이온으로 보았던 영지주의적 사색에 대한 반응이 있었다. 4세기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의 책 「파나리온」을 보면 이단들의 목록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양자론이 가죽을 무두질하는 사람인 데오도투스로 알려진 사람에 의해 로마에서 발생했다고 전한다. 데오도투스는 처음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비잔티움에 살면서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그리고 로마로 이주하여 예수님은 세례시에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은 “단순한 인간”이라고 선포하며 다녔다. 데오도투스가 비록 신앙의 로마 규율(현재 사도신경으로 알려진 것)을 가졌다고 고백했지만, 로마의 감독(또는 교황) 빅토르(Victor, 189-98)는 그를 출교시켰다. 하르낙에 의하면, 데오도투스는 신앙의 규율을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이단자로 규정된 최초의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실례를 볼 때, 사도신경의 형식이 양자론과 같이 심각한 이단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명백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이 신조는 세례 준비자들을 위한 신앙고백으로 사용되었으며, 신학 교수들을 위한 기준이 되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안디옥 감독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ta, ca. 200-75)은 예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으며 그의 세례 시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셨다 라고 가르쳤다. 그는 예수님이 단순히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초기 양자론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불렀는데, 예수님의 도덕과 세례 시 그에게 주어진 이적적 능력으로 계속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바울은 이러한 견해로 인하여 비난을 받았고, 마침내 268년 안디옥의 지역 노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는다.
“양식론(modalism)”이란 말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서 스스로를 정통이라 자천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었던 가장 일반적인 신학적 오류다. 양식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지만 그리스도를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으로 보지 않는다. 이들은 하나님은 자신을 다른 시대에 성부로서 율법을 주시고, 성자로 나타나시고, 그리스도의 승천 후 성령으로서 계시하신다고 주장한다. 양식론은 구속사의 사건들을 마치 제스처 게임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 구별된 인격이 아닌 성자는 우리를 성부에게 나타내 보일 수 없다. 양식론은 본질적으로 가현적인데, 그리스도께서 외형상으로만 인간이셨다고 가르친다. 양식론적 가정으로 볼 때, 또 다른 면은 하나님 스스로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이 불합리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결과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단지 인간으로 보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최초로 알려진 양식론자는 프락세아스(Praxeas)였다. 로마에서 프락세아스를 이은 자들은 노에투스(No6tus), 에피고누스 (Epigonus) 그리고 클레오메네스(Cleomenes)였다. 양식론은 3세기 초 감독 제피리누스(Zephninus, 198-217)와 칼리스투스에서 활동한 무명의 리브얀 출신인 사벨리우스의 가르침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많은 이단자들의 사벨리우스는 신격의 엄중한 단일성을 가르쳤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과 같은 다른 이름들은 단지 계시의 다른 형식을 묘사할 뿐이다. 성자는 광선이 태양을 나타내는 것처럼 성부를 계시하셨다. 이제 성자는 하늘로 되돌아가셨고, 하나님은 자신을 성령으로 계시하신다. 이것이 양식론을 주장한 사벨리우스의 입장이다.
Reflection: 교회는 지금까지도 단일신론의 도전과 싸우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가 되었다 라는 양자론이나, 그리스도께서 외형상으로만 인간이셨고 하나님 스스로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가르치는 양식론이 지금도 통하고 있다. “참 하나님, 참 인간”이라는 역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다. 하나님은 오직 성부뿐이라는 단편적 이해해서 나온 강조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 앞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때 어려움이 생긴다. 이때, 우리의 철학적이거나 민족적인 선이해를 벗어나, 성경에 제시된 내용과 구속사적 경륜 속에 나타난 계시에 기초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8장 대변화: 아리우스주의
아리우스주의는 반신적 개념을 가지는데, 성자께서 성부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태어나지 않았으며, 시간적 기원을 가질 뿐만 아니라 물질 세계의 창조 전에 시작이 있었던 분으로 보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신학은 그러한 사색적인 것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아리우스주의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을 단순히 부인한다. 현대신학은 양
아리우스는 그의 개인 역사와 특징을 매우 강하게 심겨준 초기 대 이단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두 가지 대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신학 무대에 등장했다: 그 하나는 이집트에서 은둔자 기독교인들 가운데 시작되었던 수도원 운동의 발생이었고, 다른 하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7)의 관용정책의 시작이었다. 기독교는 점점 성장하여 “세상 속 에서” 기독교인들의 삶이 너무나 안일해지고 편안해져서 헌신된 많은 신자들에게 불편함을 안겨다 주었다. 그래서 수천 명의 이집트로 갔다. 디오클레티안 치정에서 핍박이 다시 시작되자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했다. 그래서 어려움이 그치자 그들은 기독교의 연대 속에 다시 들어오기 위해 회개를 해야만 했고 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기독교의 연대로 변절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던 강경파들 중에 로마의 장로 노바티안(Novatian)이라고 알려진 사람은 교회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251년에 분열을 조장했다. 그의 견해는 시련의 시기 후에 다시 들어올 것을 주 장한 카르타고의 키프리안(Cyprian, 200-58)에 의해 제압되었다. 루키안은 예수님의 인간의지와 인간성을 강조했던 사모사타의 바울의 전통을 따라 예수께서 성령으로 충만한 초자연적 인간에 불과하시다는 양자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로고스를 신/인간의 중간 단계인 어떤 영적 존재로 보았다. 본질적으로 루키안은 아리우스에게 이 사상을 전수했으며, 그의 외침은 결국 로고스, 즉 성자께서 한 피조물-다른 누구보다 높으시지만 본질상 성부와 다른 분-이심을 주장하게 되었다. 삼위일체론의 결정적 중요성은 아리우스파 논쟁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독론적 논쟁이라 불리는 후기 논쟁들은 삼위 일체 내에 있는 성부와 성자 간의 관계를 다루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간의 관계를 다룬다.
아리우스 개인의 삶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상태이다. 311년 직후 아리우스에게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유명한 교회사가 가이사라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와 같은 영향력 있는 친 구들이 있었다. 이런 시기에 콘스탄티누스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평화를 찾은 제국의 동방의 반이나 되는 지역을 교란시키는 엄청난 논쟁으로 교회가 시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콘스탄티누스가 취한 첫 번째 노력은 감독 알렉산더와 아리우스에게 보낸 공개 편지였다. 아리우스와 알렉산더 간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로고스의 공유 영원설이었다. 알렉산더는 성부는 결코 성자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했고, 아리우스는 “그 [로고스]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신학적으로 볼 때, 그는 성부의 주권을 보존하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았을 뿐 아니라 정통 교리가 성자를 둘째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정말 합법적인 관심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아리우스의 개념은 성부 그리고 성자와 성령, 즉 다른 위격들 간의 구별을 강조한다. 성령 안에서 성부는 성자를 “낳으신” 분으로 묘사하는데, 아리우스는 이것을 “창조하신”과 유사한 말로 부른다. 이런 면에서 아리우스는 사모사타의 바울이 가르친 것처럼 양자론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니케아 종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주로 동방에서 온 318명의 감독들이 새롭게 수도로 세워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니케아에서 정부의 후원 아래 모였다고 한다. 아리우스의 추종자들이 거의 없는 서방에서 온 감독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에 콘 스탄티누스는 회의가 재빨리 어떤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 기대한 것처럼 보인다. 기대에 어긋나게 되자 그는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세력과 특권을 남용하여 회의의 감독들이 어 떤 결정에 이르도록 강요했고, 그 결정의 성격은 그들이 심사숙고한 결과와 정치적 책략의 결과로 나타났다. 아리우스 자신의 자기 확신(자만)을 지지하는 아리우스파는 승리를 주장하면서 그 회의에 참석했다. 승리를 확신한 아리우스파는 시작부터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으삭 만든 간단한 문서, 즉 자신들의 신앙 성명서를 제출하는 큰 실수를 자행했다. 그것은 솔직하고 단호하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었는데, 중립적 위치에 있었던 대부분의 감독들에게는 아연실색할 만한 것이었다. 드디어 적극적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큰 실수를 감지한 아리우스파는 가이사라의 유세비우스에게 가서 도움을 청했다. 유명한 「교회사」를 쓴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파는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마치 이론적 사벨리우스주의로 보이는 알렉산더의 신앙 형식보다는 아리우스의 것을 쉽게 인정했던 자였다.
유세비우스는 성경에 기초한 신조를 만들었다. 이것이 결국 채택된 니케아 신조의 청사진이 되었다. 이런 초안의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뚜렷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호시우스(Hosius)의 제안에 따라 황제는 그것에 호감을 가졌고, 호모오우시오스”(“동일본질”)라는 말을 첨가하기를 제안했다. 이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한 알렉산더파는 특별한 아리우스파의 입장을 정죄하는 파문을 내리도록 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에 직면한 두 명의 아리우스파 감독들은 호모오우시오스 신조를 인준하기를 거절했다. 그들은 면직되고 출교당했다. 감독이 아니고 장로에 불과했던 아리우스도 면직되고 자신의 후원자들이 잔존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아리우스와 같은 루키 안의 제자들로 구성 된 안디옥파는 아리 우스를 포기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의 저서를 불태우라고 명했고, 곧 그의 후원자들에 대해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리우스파에게 압박을 명한 장본인은 정통 감독들이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황제였으며, 단지 정통 감독들은 그의 입장을 인정했을 뿐이다. 국가의 세력을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에 의한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이제 시작되었다.
“배교자 율리안” Uulian the Apostate)으로 알려진 율리안은 왕위에 오르자 니케아 신조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추방시켰다. 공적으로 온건파, 즉 기능적 종속설과 본질의 동일성을 함께 조합시키고자 했던 오리겐으로부터 나온 한 노선인 “호모이우시안”들은 세력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율리안은 전통적 이교 종교를 제정하고자 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동생의 둘째 아들이었다 부친을 살해한 후, 율리안은 먼저는 온건한 아리우스파니 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 의해 후에는 이탈리아나 그리스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교육을 받으면서 형식적으로만 따랐던 기독교보다 이교적 유산을 선호하게 되었다. 황제가 된 율리안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Iills)가 가졌던 철학자의 역할을 채택하고 20개월의 치정 동안 기독교를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율리안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적대적이고 철학적이고 헬라적인파 즉 아리우스파로 기울었지만, 정통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는 행위를 감행했다. 종교적 관용을 선포할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교리적 말다툼과 같은 경쟁에 무관심했던 율리안은 종교적 이유로 추방당한 자들에게 내려진 형벌을 면제시켰다. 이러한 결과로 아타나시우스와 다른 니케아 정통을 따르는 지도자들이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교도 율리안이 보다 공평했다는 사실, 즉 다투는 기독교의 파들에게 적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정통을 돕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학적으로 정통은 양식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호모오우시아”의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이러한 일은 콘스탄티누스의 죽음과 콘스탄티노플의 2차 범교회 회의 사이, 361-81년에 일어났다. 이 기간은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결정적인 시기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의 교리인 고전 기독론과 구속론을 위한 터전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확신을 이해하기 위해 기독교는 삼위일체론을 공식화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그 교리를 이해하거나 납득이 가는 방법으로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삼위일체론은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본질이기에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초월해 있으며 신적 신비로서 경배 받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삼위일체론이 신비로운 것이며 신비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설명되지 않는다면 자기 모순에 빠지고 부조리하게 보인다고 여겼다. 381년은 기독교 역사에서 신기원의 시작이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화다. 그래서 기독교와 정통은 공식적으로 380-81년에 동시에 이룩되었다. 데오도시우스 이후 교회는 니케아 정통만을 인정했고, 다른 모든 것들은 이단이고 분파였다.
니케아의 강조점은 본질의 하나됨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의 강조점은 본질의 동질성이었다. 니케아에서처럼 콘스탄티노플 에서도 기독교는 한 신적 본체이지 둘이나 셋이 아니었다. 강조점에는 다소 차이점이 있지만, 의미상에서는 별 차이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성부와 성자 간의 본질상의 차이점을 주장하려고 시도했던 아리우스파는 적어도 위격들의 구별을 양식론적으로 퇴화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4세기 논쟁의 여파로 동방 교회들은 계속해서 나중에 니케아 신조에 덧붙여진 필리오케를 거부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안에 서 성부와 성자와 비교하여 성령의 역할이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대신 이위일체와 같은 신앙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동방에 비하여 서방은 성령을 페르소나로 이해했다. 페르조나는 “역할”이란 의미이지 “히포스타시스”라는 강한 용어가 아니다고 생각했다. 니케아 신조에서 가져온 콘스탄티노플의 주요 한 변화들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법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신학적인 것이 다. 325년의 신조에서 결론지었던 아리우스파의 입장을 파문시킨다는 것을 그만두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변화인데 성령을 정의하는 문장을 더했다는 것이다. 381년의 신조는 성자에 대해서보다도 성령에 대해 적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81년의 회의는 기독교 교리 발전에서 이정표가 된다. 381년부터 성령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것은 성자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이단자로 낙인찍혔다.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국가 종교를 시작했을 뿐 아니라 미래의 정통처럼 분명하고 완전하게 삼위일체 신학을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Reflection: 현대의 대표적인 아리우스주의는 “여호와의 증인”에서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불트만의 주장도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아리우스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선한 공로로 신으로 승격된 분이 아니다. 성경의 증거하는 내용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주님의 성육신은 은총이 되는 것이다. 현대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신화”(神化)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은총”이나 인간의 부패가 뒤로 밀리게 된다. 기독교를 더 이상 은총의 종교 되지 못하게 하는 위험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아리우스주의가 공교회의 회의에서 부정되고 “동일본질”이 정립된 과정은 정통을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로 이해된다.
제9장 삼위일체론
기독교 신앙이 본질적으로 명시된 삼위일체의 신앙이라고 교회가 선언하기까지는 2세기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단일신론자들은 하나님의 한 분이심을 확언했지만 성자와 성령이 실재 위격이시며 성부와 구별된다는 것을 부인했다. 아리우스파는 성부와 대면하신 성자(와 성령)의 구별성은 인정했지만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이심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성자와 성령이 비록 성부의 본체는 아니지만 그들을 경배하려는 아리우스파의 의지는 아리우스주의로 하여금 다신론과 이교도라는 비난을 받게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바탕을 제시한 첫 주자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신학자인 터툴리안이었다. 터툴리안은 교회에 여러 본질적 용어와 개념들을 제공했다. 그는 최초로 성자와 성령을 하나님의 “섭리” 또는 계획에 그들의 역할이라는 의미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섭리적 삼위일체론”(economic trinitarianism)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오직 한 신적 본체, 한 신적 능력으로만 계신다. 분리나, 나됨이나, 분산이나, 상이한 것이 없으시다. 동시에 터툴리안은 기능들의 분배, 위격들의 구별, 임무들의 배열 또는 다른 점을 강조했다. 신성은 한 본체일 뿐이지 수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터툴리안은 요한복음 10:30에서, 그리스도의 단어들을 말하면서 “하나”(unum, 중성)를 말했지 “하나”(unus, 남성, 예를 들면 인격)를 말하지 않는다 라고 강조했다.
삼위일체 논쟁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이단적 입장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정통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구원을 보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한편, 삼위일체를 어느 정도로 이해한다는 것은 신앙주의(권위적인 말씀만 의지하는 사상)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기독교들을 위해 꼭 필요하다. 지성의 희생은 사람의 영에 너무나 불행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위험하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형편없는 방법이다. 기독교 신앙은 복잡하다 그것을 굳게 붙잡기 위해 논쟁적이고 역설적인 면을 인식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의심이나 문제를 무조건 억제하거나 기본적 교리들을 표현하기 위해 확실한 방법을 찾는 것은 꼭 필요하다. 주요한 모든 교리들은 서로 충분 보완적이다. 죄인임을 인식시키는 인간론은 인간의 구원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구원론은 구세주, 즉 정당한 기독론을 설명하고 있다. 건전한 기독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만족 개념, 즉 건전하고 특별한 신학-삼위일체론-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삼위일체론은 역설이다. 역설은 기독교인들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 간의 관계를 이해할 때도 일어날 것이다. 그 관계성을 분석하고 설명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거짓된 방법과 그릇된 방법-양자론적이나 가현설적인 의미-으로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할 것이다. 다른 편에서 보면, 만일 심각하고 열심 있는 노력으로 매진한 다면, 나타나는 교리적 설명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경험으로부터 사라질 것이다. 삼위일체 신학과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칼빈이 예정론 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확신에 무관심한 사람이 갑자기 이 장소로 들어오면,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할 수 없을 것이고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어 갈 것이다.” 그리고 조리에 맞는 삼위일체론을 가지지 못하면,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안에 있는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신약성경의 증거는 사람들로 하여금 양식론이나 삼신론과 같은 곳에 빠지게 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삼위일체론으로 시작한다면 교리가 신약성경의 증거보다 우선되고 살아 있으며 개인적인 믿음이 신학적 형이상학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신학적 이해 없이 열정적 믿음에만 치우치면 잘못되어 심각한 이단에 빠질 우려가 있다. 반대로 살아 있고 자라는 믿음이 동반되지 않는 교리는 죽은 정통만을 수용할 뿐이다.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가 먼저이고 “하나님”은 두 번째라고 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 위격들은 모든 면에서 동등하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란 용어는 위격들 간에 있는 본체적, 질적 또는 양적인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간에 존재하는 다른 관계성의 변에서 서로 다르다. 성부는 낳으시고, 성자는 태어나시고, 성령은 나오신다. 어거스틴은 오리겐과 갑바도기안들을 넘어서 성부와 성자 간에 존재하는 “상보성”(complementarity)과 같은 것을 가르쳤다: 마치 성부가 성자를 낳으실 때 조건이 되신 것처럼, 성부는 자신이 낳으신 성자의 조건이 되신다. 즉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는 견해를 채 택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위격들간의 구별된 차이점에 대한 어거스틴의 개념은 “가장 정교하고 고상한 표현”이라 불려진다.
Reflection: 터툴리안의 “섭리적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붙잡아야 할 귀한 보물이다. 성경을 “순종하기 위하여” 읽고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탐독할 때,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신앙의 신비를 이해한다는 것은 모순일 수 있으나, 무엇이 잘못된 견해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경은 명료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단적 입장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정통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구원을 보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는 브라운 교수의 말처럼, 기독교인은 구원을 보존하기 위하여 삼위일체 교리에 접근해야 한다. 삼위일체론으로 신앙을 시작하여 신학적 형이상학으로 빠지거나, 신학적 이해 없이 열정적 믿음에만 치우쳐 이단에 빠질 위험성이 있기에, 살아 있고 자라는 믿음이 동반된 교리 이해가 요청된다.
제10장 기독론
고전적 의미에서 이단이란 말을 생각하면 매우 심각하다 영지주의 자들은 이단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자이심을 부인했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다른 근본적 진리들도 거부했다). 아리우스파가 이단자들이었던 이유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부인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이단”이란 말은 평범한 느낌을 주며, 오직 논쟁을 좋아하는 자들만이 다툰다는 인상을 준다. “이단 사냥” 이란 용어들과 보다 좋게 말해서 “이단 공판”과 같은 용어들은 종교재판을 위한 소송절차이기도 하다. 만일 영지주의나 아리우스주의가 승리를 거두었다면, 우리가 아는 한 그들 중 어느 하나가 기독교를 파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431년 회의는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했다. 칼케돈에 앞서 네스토리우스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불쾌한 감정을 유발시켰기 때문에, 그는 드러나게 변호되거나 명예를 회복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케돈의 입장은 네스토리우스가 지지한 것과 별다른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칼케돈 종교회의는 연합을 위한 것이었지만 오직 이론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만을 해결했을 뿐 실제적인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특별히, 이집트 기독교인들이 대주교나 황제가 거주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정통으로부터 이질화되어 가는 것을 해결하지 못했다. 회의의 목적은 동방의 주교권에 대한 다툼을 화해하는 것이었고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을 로마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네스토리아니즘과 단성론의 극단적인 기독론에 대한 칼케돈의 정죄는 제국 내에서만 그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단성론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이집트를 모슬렘에게 빼앗기고 마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네스토리아니즘은 아시아로 수없이 뻗어 나갔다. 이단적 아리우스파에 대한 울타리 역할을 했던 니케아 신조와는 달리, 칼케돈은 정통의 정의가 좁기 때문에 그것에 속한 많은 사람들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론적 사색이 너무나 많은 이단을 초래했기 때문에 칼케돈 신조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모든 해석의 시금석이 되고 있다.
한 위격에 연합된 구별되는 두 본성에 대한 네스토리우스의 근본적 사상은 수용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정죄에서 풀리지 않았다. 그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두 그리스도를 가르친다고 비난받았다.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나온 신조는 각 본성이 완전하다는 것을 확언했다. 예수님은 “이성적 영과 육체”, 완전한 인간 본성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와 같은 동일본질”일 뿐 아니라 “성부와 같은 동일본질”이다. 이러한 것들은 네스토리우좌 확언했던 것이었으며 신조로 만들어지는 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칼케돈 종교회의는 기본 원칙을 세워 그것들을 보호했으며,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금지함으로써 동일본질을 재확인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호했다. 이러한 안디옥의 견해가 널리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네스토리우스주의 안디옥파는 431년 에베소에서 그가 정죄를 받자마자 곧 네스토리우스를 배척함으로써 도덕적 자살을 자행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두 본성, 신/인을 가지셨다는 확신은 칼케돈 에서 재확인되었다. 정통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칼케돈 교리는 그에 대한 신약성경의 증거를 뒷받침한 당연한 결론이었다.
이 신조에서 우리는 헬라에 대한 라틴의 승리라든지,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의 정치에 대한 로마의 승리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단성론의 교리들은 전형적인 헬라의 관심을 나 타내는 것이며, 피조물과 창조주, 인간과 신의 연합으로 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두 본성에 대한 안디옥-로마의 견해는 결국 헬라의 관심, 즉 역사적 개인 그리고 인격과 인간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선포하고 있는 헬라 문명화의 범주들이나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신약성경의 삼위일체론과 성육신의 가르침을 다룰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 내의 비헬라화와 비셈족화를 지지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만일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리들을 위해 지불한 충분한 대가임을 알아야만 한다. 19세기의 케노틱(kenotic)이나 근간에 와서 세속적 기독론의 시도는 진전을 위한 것보다는 오히려 퇴보를 가져왔을 뿐이다.
Reflection: “이단 사냥” 등 이단에 대한 이미지가 고전의 의미와 달라졌다. 그리스도를 완전한 하나님으로 이해해도 이단으로 정죄받지 않는다. 오히려 합리적인 신학자요 열린 사고를 가진 교사로 인정받는다. 최근에는 케노시스 교리를 영성신학에 도입하여 적용하는 개신교 목회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 아리우스주의적이거나 영지주의적이다. 인간은 주님 앞에서 서서 겸손하게 될 수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신성을 비우시고 고난받으신 것은 아니다. 주님은 참 하나님, 참 사람으로 고난받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고백없이, 개인영성이나 교회 성장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용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없이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제11장 작은 문제들: 선택, 자유의지 그리고 배교
인간의 자연적 선과 인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도나투스의 전통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인간의 자연적 선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펠라기우스의 교리들은 교회사에서 가끔씩 등장한다. 각종 회의에서 정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펠라기우스의 정신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을 뿐 아니라, 대중적 로마 카톨릭교를 통해 반(半)펠라기아니즘으로 알려진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이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들 가운데 자유 의지에 대하여 보다 조심스러운 접근이 루터가 죽은 후 그의 조력자였던 멜랑흐톤(1497-156)에 의해서 나왔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온건한 화란 개혁파 학자였던 “알미니우스” 이후 “알미니안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프로테스탄트 계열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좋다. 비록 웨슬리안 전통을 따르지 않고 프로테스탄트주의를 이끄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알미니우스보다도 칼빈의 견해를 더 지지했지만, 칼빈주의자들, 즉 예정론자들의 교회들을 다수 포함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프로테스탄트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거스틴파보다는 펠라기우스파에 가깝고, 칼빈주의보다는 알미니안주의에 가깝다.
예정론과 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는 실천적 경건, 즉 완전한 기독교인의 삶을 인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도록 고무하는 열정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것에 대한 평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알기로 4세기는 로마제국의 기독교화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회의 세속화도 함께 일어났던 시기였다. 4세기 초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던 수도원 운동은 핍박이 끝나고 새로운 개종자들이 교회로 물밀듯이 들어오게 되면서 도덕적 기준의 하락을 염려하는 열심파 기독교인들 편에서 일어난 운동이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덕적 책임의 삶이 사람들에게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동시에 어거스틴이 잠깐 속했었고 그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마니교의 염세적이고 외형적인 이원론을 거부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모세와 등을 돌리시거나, 복음이 율법과 등진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복종할 수 있었던 계명을 우리들에게 주셨다. 모든 죄는 자발적이므로, 펠라기우스는 원죄의 개념을 아담이 자신의 자손들에게 주었던 나쁜 실례의 개념으로 대치했다. 그는 인간의 어떤 공로나 행위가 없어도 세례시에 믿음을 통해서만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세례만이 세례자들로 하여금 참교회에 속하도록 하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도덕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교제를 가져야만 한다고 보았다. 펠라기우스의 잘못은 인간의 타락에 대한 그의 이해였다. 원죄론을 부인하는 펠라기우스는 세례의 논쟁적 성례식의 의미를 바꾸어 버렸다. 펠라기우스의 견해 에서 볼 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는 선한 것을 알고 선택할 수 있지만 어거스틴의 견해에서 볼 때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선한 것 을 선택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본래는 하나님의 정하시고 합당한 목적들을 향해 나가도록 했지만, 인간의 타락한 의지는 이제 무절제하고, 과도하고, 죄짓는 방법으로 그 일을 이루어 간다.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욕망까지도 죄를 짓게 된다. 그래서 단성론자들과 단일의지론자들이 예수께서 인간의 의지를 소유하시고 있음을 왜 부인해야 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의지는 흠이 많고 죄를 짓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론에 대한 펠라기우스의 입장이 가진 위험한 면은 원죄와 자연적으로 타락한 의지가 없이도 사람은 선한 예로서 구세주까지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선한 예가 되기 위해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우리와 같으셔야만 한다. 왜냐하면 본성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권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에 의하면 최초의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기”(posse non peccare) 때문에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posse non mori)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고” (non posse peccari), “죽지 않을 수 있다”(non posse mori)고 결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창조되지 않고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었다. 신적 은혜 가 그를 옷처럼 덮어서 선을 가능토록 했다. 어게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인간 의지에 관한 견해에서 현저한 차이를 나타낸다. 의지가 속박과 무질서 속에 갇혀 있으며 자유롭게 선을 선택할 수도 없다는 어거스틴의 견해는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볼 때 매우 설득력을 가진다. 하지만 도덕적 그리고 감정적으로 볼 때는 매우 끔찍하게 느껴진다. 이런 이유로 해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의지의 속박을 가르칠 때 서방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는 자유에 대한 이해를 펠라기우스파가 아니면 알미니안과 같은 쪽으로 뒷걸음질을 한다. 이에 비하여 동방 기독교계는 의지의 탁월성 에 대한 어거스틴의 강조를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에 대하여 먼저 절대 주권적 의지라는 의미로 생각한다. 서방 기독교 전통, 특히 칼빈주의자들 가운데 어거스틴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의 행위나 예정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이 영원토록 저주받도록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신론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를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어거스틴은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과 영벌을 위한 유기는 인류의 타락 후에 일어났고 “잃어버린 자들의 무리”가 되었다 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알고 계셨으며 타락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결심하셨다고 보지만,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을 저주하기로 목적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창조하셨다 라는 선정타죄론적 견해를 분명하게 가르치지는 않았다.
어거스틴의 견해는 418년 카르타고에서 모인 회의에서 인준을 받게 되었다. 서방 교회에 의해 가끔 재확인 된다. 그는 토머스 아퀴나스 전에 있었던 가장 강력한 라틴계 신학자였으며 루터파나 칼빈주의 개혁신학에서 영적으로 어거스틴에게 많이 의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많은 기독교인들은 어거스틴주의를 다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세기 동안 펠라기우스와 세미펠라기우스파의 견해들은 계속해서 재현된다. 대부분의 서방 기독교계는 이론적으로는 어거스티니안-예정론을 지지하고 있지만, 실천적 인 면에서는 세미펠라기우스파, 자유의지를 지지했다. 동방 기독교계는 의지의 근본적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고 이런 논쟁을 항상 남겨 두었다.
Reflection: 브라운 교수의 우려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붙잡고 있는 교회가 펠라기우스적이고 알미니안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공로주의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은총만을 강조하면 과연 기독교인의 열매가 드러나지 않는가? 윤리가 결여되는가? 헌신이 줄어드는가? 참된 은총을 이해하고 경험한다면 윤리로 그 열매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개인과 교회는 다시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고 주님의 은총만 의지하여 신앙을 출발하고 교회를 섬겨야 할 것이다. 절대주권을 믿는 자는 더욱 겸손하고 더욱 그리스도께 의지하게 된다.
제12장 성상과 이단
구약성경의 종교에서 가장 특이한 표상 중 하나는 어떠한 우상이라도 거부하는 것이다. 모슬램들이 행했던 것처럼 유대인들도 모든 형태 의 화상을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성상숭배(image worship)와 같은 모든 것은 철저하게 반대했다. 이러한 면은 콘스탄티누스 시대 전에 있었던 초기 기독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교도들이 보기에 성상 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종교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가 무신론이라고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3세기 중반 즉 알렉산드리아의 대신학자 오리겐이 성상 숭배에 대해 문제화했을 때, 그리고 7세기, 즉 이슬람이 갑자기 역사 속에 뛰어들었을 때까지 성상은 기독교 생활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었다. 언제 어떻게 이것이 일어났으며 왜 그렇게 널리 퍼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기독교 생활의 규범 중 하나인 성인세례로부터 유아세례의 전환처럼 그것은 수십 년 동안 논쟁이 나 논의도 없이 일어났다.
오리겐은 이교도들이 사용하는 우상을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고 했고, 제2계명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따라 이교 철학자 셀수스의 주장을 거부했다. 유대인들과 초기 기독교인들도 어떠한 형태도 지니지 않으신 하나님의 모양을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를 금지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인간이기에 자연스럽게 그를 그릴 수 있다고 하겠지만, 수세기 동안 이런 일을 시도하는 이는 없었다. 더욱이 신약성경에서는 그의 외모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찾아 볼 수가 없으며, 그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묘사하여 신성을 포착해 내는 일을 꺼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낌이 점점 약해지면서 드디어 8세기초 동방에서는 성상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서방에서는 동방처럼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예배용보다는 교육용으로 가끔 사용하는 정도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혈육을 가진 신/인의 연합이시기에 거룩한 형상이나 거룩하신 분의 성상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그리스도를 묘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수많은 성상들은 이적이 담긴 이야기와 함께 널리 퍼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예술가가 잠을 자는 동안 천사가 내려와 그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 600년이라고 추정되는 에데사(Edessa)의 형상은 구세주 의 얼굴이 수건에 새겨졌다는 것이다. 이를 투린의 수의(Shroud of Turin) 라고 부르는데, 근간에 와서 이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항간에는 구세주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으며 그를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하는 위조문서도 나돌았다. 그러한 형상 또는 화상들은 그리스도를, 제자들이 보았던 지상의 모습보다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리하여 “손으로 만 들지 않은” 형상들은 이적을 낳은 능력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성상 파괴론은 843년 3월 11일에 “정통의 승리” 라는 축제와 함께 끝나고 만다. 이때 지금의 동방정교가 탄생되었는데 그 의미는 “일곱 종교회의만을 인준하는 교회”라는 의미다. 동방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787년의 니케아 회의가 7차인 동시에 마지막 범교회 회의로 인식된다. 로마는 계속해서 범교회 회의를 소집했는데, 동방 교회가 거부하는 회의를 지역 회의라 칭한다. 서방에서는 800년 로마의 황제로 샤를마뉴가 관을 쓰게 되고, 이어서 필리오케 논쟁이 일어난다. 867년 포티안(Photian) 분파가 일어났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부터 계속 있어 왔던 단 하나의 범교회 제국과 단 하나의 범교회 카톨릭의 이미지는 무너지고 말았다.
Reflection: 교회는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성상숭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카톨릭의 모순을 다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예배 행위에 있어서 카톨릭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참된 예배의 참된 감격은 그러한 성상들을 통해 온다기 보다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진리”에 기초하여 예배하는 데서 나온다. 예배에는 이러한 성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요구된다.
제13장 새로운 이단 새로운 문제
서방에서 보기에는 “와 성자로부터”(필리오케)라는 표현을 니케오-콘스탄티노플 범교회 신조에 덧붙인다는 것은 동일본질에 대한 니케아 교리를 좀 더 명확하게 하는 것이었다. 니케아는 “성부와 동일본질”이라는 용어를 써서 성자가 성부보다 열등한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파를 대항했다. 서방 교회에서 “와 성자로부터”라는 표현을 덧붙이게 된 논리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 14:26)과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보내사’(갈 4:6). 여기서 성부와 성자 간의 동일본질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조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동방 신학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정의가 성부와 성자 간의 구별을 해할 수도 있고 성령의 신성을 완전히 증명하지도 못한다고 두려워했다. 서방 교회의 주장에 의하면, 만일 성령께서 성부로부터만 나오신다면 성 자가 정말 동일본질이 될 수 있을까? 이는 성령을 보내시는 일이 신적 본질이나 본체에 해당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필리오케에 대한 질문은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다고 믿는 스페인에서 새로 개종한 아리우스파에게 바른 교리를 심어 주기 위해 다시 거론되었다. 그러할지라도 그것은 실패하고 만다. 이는 스페인이 옛 이단인 양자론을 다양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정에 관한 어거스티의 개념은 카톨릭주의와 프로테스탄트주의의 공적 가르침으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그것이 주장될 때마다 인간의 자유의 규범과 모순이 없도록 설명되었다. 529년 오랜지(Orange) 종교회의에서는 공적으로 어거스티니안의 견해를 인준했으며, 세미펠라기우스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 그 자체를 정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인간이 무엇인가 선행을 감당해야 한다는 인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 필요성을 느끼는 자들이 점점 늘어갔다. 공로가 될 수 있는 희생으로서 성체의 사상은 이제 사람이 하나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
하게 되었다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주의와 사도들의 교회 간의 합법적 지속성을 찾고자 노력하는 정통 프로테스탄트자들은 로마 카톨릭이 너무나 종교개혁 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필연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했다. 국제주의, 인문주의 그리고 고전 문화의 유산 등과 함께 하는 로마 카톨릭교를 대면한 프로테스탄티즘은 가끔 복음의 우주성을 무시하고 게르만적-스칸디나비안 운동, 즉 좁은 민족성을 가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만일 종교개혁 전에 게르만적 문화의 영향으로 바뀐 기독교의 방향을 찾아낼 수 만 있다면, 게르만 토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9-13세기 서방의 기독교는 기원적 방향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체적으로 독일의 종교개혁은 르네상스 교회의 이탈리안 인문주의에 대한 독일의 저항이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루터의 주요한 공격은 교리적이었지 예술적인 측면이 아니었다. 그가 저항했던 교리들은 르네상스 이탈리안 예술가들의 의식 뿐만 아니라 중세의 게르만 신학자들의 교리들이었다.
범교회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프로테스탄트 논쟁자들은 동방교회를 가리켜 화석이라고 비꼬아 비방하기를 즐겨했다.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성은 크나큰 장점을 가진다. 4세기의 갑바도기안 교부들은 8세기, 아니 14세기 콘스탄티노플의 현장에서 떠나 있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서방에서는 정부가 교회를 국가의 한 부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논쟁들은 정부의 관심이 되었지만, 동방에서 있었던 초기 논쟁들처럼 대중적 관심을 넓게 얻은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이전에는 전쟁은 정부의 관심사였고, 신학은 교회의 관심사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신학을 대중적 사업으로 만들었다. 7세기 후에 교황들은 전쟁을 교회의 사업으로 만들었다.
Reflection: 1) “필리오케”를 니케오-콘스탄티노플 범교회 신조에 덧붙인 것이 동서교회 분열의 동인이 되었기 때문에, 과연 공교회의 결정에 이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 교리적으로는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교회의 하나됨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2) 예정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따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은총을 깨닫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예정을 논의할 때 오해할 수 있다. 예정론은 은총의 교리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교회가 국가의 정치에 깊숙이 관계하면서 전쟁이 신학의 관심이 되었다. 교황들은 전쟁을 교회의 사업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오늘날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교회를 정치에 동원하지는 않는가? 정쟁이 교회의 사업이 되지는 않았는가? 이런 질문에 한국의 교회는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로부터 이런 질문이 나오면서, 비판이 가해진다.
제14장 새로운 교회와 옛이단: 스콜라 철학, 십자가 운동 그리고 이원론
십자군 운동은 교회의 세속화의 절정을 의미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계속 명목상의 기독교 통치자들의 군인들이 기독교 기장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천명했다. 지금도 유럽의 몇몇 나라, 즉 영국, 스칸디니비아 국가들, 서독일, 스위스 그리고 그리스 등이 국기에 십자가를 사용하고 있다. 교회는 가끔 군사적 세력을 후원했으며, 연합하여 일했다.
스콜라 철학은 옛 이단들의 부활이었다. 영지주의와 마르키온적 이원론, 그리고 새로운 탁발 수도원 운동을 통한 영적 열정이 도미닉(1216)과 프란시스칸(1221-23)을 통해 나타났다. 이 시기에 정통은 이제 더 이상 희생물이 되지 않고 박해자로 바뀌게 된다. 초기 신학에서 동방과 서방의 신학은 감독들이나 사제들에 의해 다루어 졌다. 이레니우스와 암브로스 어거스틴, 존 크리소스톰, 알렉산드리아의 시릴과 갑바도기안 교부들은 모두 감독들이었다. 터툴리안과 오리겐은 사제들이 아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모두 이단자로서 정죄를 받았다는 것이다.
동방의 관료주의와 달리, 서방에서는 전문적인 학문 계층에서 신학이 다루어졌다. 서방에서는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신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그룹이 그 자취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스콜라 철학이다. 스콜라 철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특별한 방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만일 고대 철학이 이성에 주로 의존했다면, 현대 과학은 경험론적 방법에 의존하고, 스콜라 철학은 고대 권위에 의존 했다. 스콜라 철학이 중세 기독교의 지적 생활이라면, 수도원 운동은 영적 생활과 같은 관계이다. 그 출발점고 스콜라 철학은 초기 신학처럼 성경적이고 교부적인 권위에 서 있었지만 더 이상 그 권위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스콜라 철학의 독특한 교리, 즉 “화체설”(consubstantiation)은 두 기둥 위에 세워진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그것이다. 결론에 결론, 이야기에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 감으로써, 결국에 가서는 열매 없는 교리적 나뭇잎들만 남게 되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반발하게 된다.
십자군 이야기는 이단의 역사에 속한다기보다 정치 역사의 범주에 속한다. 십자가 운동을 계기로, “기독교 세계”의 머리인 교황직의 세력을 적어도 처음으로 강화시키거나 명시했다. 기독교인들을 선동하여 모슬렘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이단자들, 심지어 분열된 동방 기독교인들에 대해 무력을 사용토록 했다. 끝으로, 최초의 운동이 성공한 후 두 번째 십자군 운동이 실패하고 계속적인 십자군 운동은 교회나 군주들에게 기독교인들의 신뢰를 추락시켰다.
여러 번의 “십자군 운동”과 “종교재판”은 “이원론”에 대해 행동을 보였다. 이 “이원론”은 영지주의와 마르키온과 흡사한 엘리트주의였으며 “보고밀”(Bogomils)도 포함된다. 슬라브 언어로 “Bogomil”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 는 뜻이다. “보고밀 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독교 정통에 도전을 주었다. 보고밀들은 대부분의 정통보다도 훨씬 성실하고 열심히 기독교의 다양성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평신도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좋았다. 기독교가 마귀의 기원과 같은 고리타분한 질문에 답하는 것에 비하여, 보고밀의 교리는 그 것을 설명했던 것이다. 정통 기독교인들은 보고밀들을 성공적으로 설득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했으며, 순교자의 교회가 이제는 핍박자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가난한 “이단”: “발데스” 또는 “발도”는 유복한 장사꾼으로 1176년 경제 위기에 직면하는 동안 이상적 가난으로 개종을 경험했던 자이다.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나누어 준 발도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남녀의 단체를 구성했다. 그가 바랐던 것은 1179년 3차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교회의 설교권을 얻는 데 있었지만 교황 알렉산더 3세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 발도는 이에 물러서지 않고 남프랑스와 북이탈리아 쪽으로 그들의 추종자들을 확산시켜 나갔다. 평범한 “신자들”에게는 방종 하며 살도록 허용한 것에 반해, 발도파들은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적 지침을 적용했다. 발도파들은 노동을 거부하고 기부금으로 살았다. 이원론자들과는 달리 발도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의 타락을 믿었으며, 참회와 성체를 행했지만 오직 신실한 목회자들에게서만 이런 것을 받았다. 그들은 제한된 사제직을 거부했고, 모든 청결한 사람이 사면을 선포하고 성체식을 거행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런 면에서 루터의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직 주장을 미리 볼 수 있다. 종교적 확신의 근거와 힘은 성경의 권위에 두었으며 모든 면에 적용하려고 했다. 비록 발도파들은 기존 교회에 대하여 증오심을 가지지 않고 카타르들만큼 위험하지도 않았지만 종교재판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종교개혁이 일어나 그들을 후원하기까지 피에몽(Piemont)과 사보이(Savoy)의 외딴 곳에서 생존을 이어갔다.
“새로운 수도원들”이 이 시기에 일어난다. 910년에 세워진 클루니 수도원은 교황 그레고리 7세(1073-85) 아래서 그 절정을 이루었던 개혁운동의 시작이었다. 클루니 개혁운동은 베네덕트 규율 의 엄격한 준수에 기초하고 있으며, 클루니가 기존 자매 수도원들 위에 군주 적인 힘을 과시했지만 어떤 새로운 수도원을 만들지는 못했다. 11세기 후반과 12세기 초에는 새로운 종교적 수도원들이 탄생하게 된다. 그들 가운데 시토 수도원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 의해 유명해졌지만, 어거스틴 교회법규집(Augustinian Canons) 과 프리몬스트라텐시오딸(Premonstratensians)은 새로운 수도원으로 각광받았다. 더욱이, 십자군 운동과 함께 12세기에 들어오면서 기사적 수도원들인 세인트 존의 기사들(the Knights of St. John), 칼을 든 기사들(the Knights of the Sword) 그리고 십자가-튜톤 수도원 기사들(the Knights of the Cross-Teutonic Order, 1237년에 세워짐) 등이 있다. 하지만 수도원 생활에 가장 극적인 변형을 주었던 것은 13세기에 와서 나타난 탁발 수도원이었다. 비록 초기 수도원들도 가난에 대한 맹세를 시도했지만, 그 맹세는 수도원이 아닌 개인적인 맹세에 그쳤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은 부유했다. 새로운 수도원들은 수도원 자체도 모든 재산을 포기했다. 더욱이 수도원 운동은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돕는 방편이었지만, 새로운 운동은 평신도의 복음화이며 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는 것이지 수도원 생활을 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았다. 새로운 수도원들은 가난과 그 결과로 거할 수도원 건물이나 땅이 부족했기 때문에 교황청에 헌신하여 그들의 상비군 역할을 했다. 이것은 프란시스의 본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종교재판”: 종교재판이 확립되면서 그릇된 교사들에 대해 세속 권력을 합법적으로 오랫동안 사용했다. 종교재판은 이단으로부터 받아 내는 교회의 도덕적 권위 앞에 행해진 항복문서와 같았다. 중세교회의 신학적 실재론과 교회적 절대주의로부터 발전된 논리적 근거를 종교재판 이면의 합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단자는 살인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였다. 그 이유는 살인자는 단순히 몸만 죽이지만 이단자는 몸과 영혼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너무나 잔인해서 난폭한 세속 권위자들도 치를 떨곤 했으며, “자비”라는 말은 그 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종교재판에 의해 쫓겨 잡힌 자들은 반체제자들로서 로마 교회를 성도들의 피에 취한 여자로 묘사했다(계 17:6). 종교재판은 로마 카 톨릭의 현상이라면 기독교계의 가장 큰 교회로서 기독교인들의 얼굴에 수치를 안겨 준 것이다. 종교재판이 기독교의 한 현상이라면 복음을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드는 그 어떤 역사적 제도보다도 더 괴로운 것이다. 종교재판적 절차는 세속 법정보다도 신속하고 끔찍했다. 종교재판은 세속적이면서도 종교적 독재자들의 편리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권력이 위태롭게 되면 폭력이 나타난다”(한나 아렌트)는 말처럼 종교재판을 설립하면서 서방 기독교회는 세속적 세력을 이용하여 영적 주도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신학은 이제 정치적 이론이 되거나 아니면 정치적 결과들을 낳은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정치적인 사건들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근동에서는 이스라엘인, 소비에트인, 시리아인 그리고 이집트인들의 움직임을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의 예언적인 면에서 해석하곤 했다. 기독교인들은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정치적 구조를 변형시키는 권위로서 신학적 교리를 인용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이단은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Reflection: 십자군 운동은 교회의 세속화의 절정을 의미했다. 스콜라 철학은 영지주의의 재출현고 같다. 특히 스콜라 철학이 주장한 “화체설”은 교황이나 사제들의 권위를 성경 위에 두는 역할을 했다. 십자군 운동은 “폭력”을 교회가 정당화한 것이다. 이 폭력이 무엇을 남겼는가? 기독교회의 신뢰를 실추시켰다. 이런 교회에 저항하면서 나온 “보고밀”과 같은 열정을 교회는 폭력으로 무릎 꿇게 할 수 없다. 개인 경건을 강조하는 운동이 일어나도 교회가 이러한 흐름 앞에서 힘을 쓸 수 없다. “종교재판”으로 또다시 폭력을 행사하지만 “권력이 위태롭게 되면 폭력이 나타난다”는 격언을 증명할 뿐이다. 한 국가에서 교회가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인식될수록 교회는 십자군의 “폭력”이 던진 유혹을 받게 된다. 교회 내부에서는 종교재판이 성행하게 된다.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폭력 행사가 자행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힘”을 과시하는 일들이 많아지면, 교회의 세속화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 맹세와 달리 수도원 자체가 부유했던 것처럼, 개인의 경건을 무시하고 경건을 강조한 단체가 “부”의 유혹에 넘어가 개인가 단체의 “부”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현실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제15장 경건한 이단자들
베긴 운동은 종교적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고 싶었던 평범한 여인들의 자발적인 표현이 나타났다. 여인들의 작은 단체들이 영적 지도자의 주위에 모여 비공식적인 종교적 모임을 구성하였다. 북유럽에서는 남자들로 이루어진 비슷한 작은 단체들이 있었다. 남자들은 베가드(Beghards) 또는 롤라드들(Lollards)이라 불려졌다. “베긴회”(Beguines)란 이름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다. 교황에게 인준을 얻어 수도원적 맹세를 하지 않지만 가난과 순결을 위해 함께 모여 사는 경건한 여인들의 조그만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이러한 여인들은 정통적이었고 훈련받지 않은 이름 “베긴회”라고 명명되었다고 한다. 교회에서 제시하는 헌신과 전통적 의식과는 달리, 베긴회와 베가드의 특정인 가난과 심오한 개인적, 영적 삶에 헌신이 결합된 모습은 14-15세기에 널리 알려져 있던 현상이었다. 이것은 평범한 기독교의 삶이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필요성을 채워 주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정치적 이단 교황 보니페이스 8세(1294-1303)는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위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전적인 주장을 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추기경들을 이단자라고 불렀고 그러한 자들을 향해 십자군을 발진시켰다. 하지만 교황을 지지하는 자들이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자들보다 수적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필립 4세는 이런 기회를 파악하여 교황을 사로잡았다. 다시 군중에 의해 교황을 회복시키려고 했으나, 보니페이스는 몇 주 후에 죽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주장하는 자를 난폭하게 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필립은 그런 자에 대한 사후 이단 소송 절차를 시작했다. 다음 교황인 클레멘트 5세는 실추된 교황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자기 스스로 중세의 이단을 소송하는 면에서 왕의 도구로 활동하는 것을 즐겨했다.
12세기 십자군 운동은 유명한 군사적 수도원들을 낳았다. 템플 기사단은 힘으로써 순조로운 시작을 가졌다. 그들의 막강한 힘과 부에 대하여 프랑스 카페 왕조와 다른 군주들은 눈독을 들였다. 틈만 있으면 템플의 세력과 소유를 빼앗기 위해 프랑스 왕인 필립은 그들에 대하여 이단이라는 혐의뿐만 아니라 호모섹스라는 부도덕성 을 내세워 고발하였다.
이 시기에 나타난 것과 달리, 초대교회는 어떤 정치적 세력도 소유하지 않았던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였다. 후기 중세교회는 세력을 가진 법인단체였다. 수세기 동안 교리적 논쟁이 없이 조용히 지냈던 서방의 교회는 모든 면에서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이단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본질적인 교리적 이슈가 없었던 곳에 힘, 위신 그리고 재산의 문제들이 교리적 문제 대신 자리를 잡았다. 1215년 화체설의 선포로 인하여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성례의 후견자로 변형을 시작했다. 기독교인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고전 4:1)라고 말할 때 바울은 교리적 신비들을 심중에 두고 말한 것이다. 교회에서 화체설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교회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모든 영적 필요성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보인다. 이러한 합리적인 망상으로 인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자체와 구원에 대한 후견자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심어 준 것이다. 점차적으로 이단에 대한 인식을 기독교 교리의 진리에 도전한다는 것보다 청지기들의 세력과 정지기 자신에 대한 공격과 도전으로 보았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보존하려는 12세기 동안의 노력과 영적 권위는 교회를 위한 주장을 지켜주는 데 쓰임으로 사라져 버렸다. 후스도 이러한 맥락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후스는 교회가 초기 세기의 본연의 성체식으로 돌아가자는 것을 주장했다. 왜 이것이 그렇게 그들에게 위협이 되었을까? 화체설을 설명하면서 교회가 자신의 역할만을 너무 강조했기 때문에 다른 해석에 대해서는 그 어떤 관용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 위클리프와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존 후스는 희생양들이었지만 카톨릭이 그토록 싫어했던 운동의 선구자들이었고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은 곧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확장되었다.
Reflection: 초대교회의 부흥은 정치적 세력을 소유한 데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반면 부흥이 없고 타락한 교회는 힘과 돈과 명예가 본질적 교리를 대신한다. 1215년에 선포된 화체설이 대표적이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보존하려는 노력은 교권을 지키려는 정치 앞에 그 자리를 빼앗긴다. 성경을 자기 언어로 읽도록 하고, 예배를 하나님 중심으로 드리겠다는 상식이, 이단으로 정죄받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와 우리의 교회는 무엇을 본질로 인식하고 있는가? 드러난 고백과 달리 힘과 돈과 명예가 교회의 소망이 되고 그 중심에 서 있지는 않은가?
제16장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당시에 교회가 이단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다른 많은 운동들은-발도파들, 프란시스칸 영성파, 그리고 베긴희-기본적으로 정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것보다는 보다 사도적이고 순수한 기독교를 갈구했는데 새로운 교리적 측면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씩 이단자들로 정죄를 받게 되었고, 어떤 때는 뇌물을 바침으로 그러한 형벌에서 풀려나기도 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관심은 우리의 상식에서 볼 때도 이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루터는 카톨릭에 대해서 면죄부를 비난했고 후스처럼 화체설이 아니었다. 그래서 루터는 후스의 견해와 다르다고 여겼고 후스처럼 여김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루터가 원했던 것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축적된 이단적 교회를 청결케 하지는 의도였다. 그렇다면 루터는 후스와 같은 이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는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다. 루터는 자신이 재발견했던 진리들을 카톨릭주의 내부에서 찾으려고 힘썼다. 하지만 카톨릭주의가 그 진리들을 발견할 수도 없었고 발견하지도 못했다. 이제는 기독교 내부에서 이단이 실제로 어떤 자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개념상의 이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먼저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 교회를 이단이라 부르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를 개혁하기 원했던 것이지 전복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교회 스스로가 기독교의 단일성을 전멸시켰던 교리에서 탈선의 죄를 지었다고 천명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이단이라고 고소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츠벙글리가 발견한 “탈선” -면죄부를 이용 하여 남을 등쳐먹는 행위, 그리고 사순절을 핑계로 살을 빼려는 작태 등은 기독론이나 예정론과 같은 초기 문제들과 비교해 볼 때 하찮은 것처럼 보인 다.
종교개혁으로, 빵과 잔이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로 바꾸는 능력을 사제들이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존경심은 이제 자신들을 속이고 있을 뿐 아니라 영원한 구원마저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다는 분노로 바뀌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사제직의 사상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종교개혁자들은 갈보리에서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단번에 행하신 희생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이 비교할 수 없는 대제사장이심을 말했다. 신약성경에서는 모든 믿는 자들을 제사장들이라고 재천명하면서 성직을 받은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구별을 무너뜨렸다. 안타까운 것은 루터파나 개혁파들이나 이 원리를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정부적 또는 행정적 권위를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와 공조하는 공식적 교회 조직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재세례파들은 세속적 정부와 그 어떤 공조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루터파나 칼빈주의의 국가 교회들보다 루터가 말했던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직에 대한 의미에 근접해 있었다. 기존의 프로테스탄티 즘은 곧 새로운 학문적 교권주의와 전문적 교권주의를 탄생시켰지만, 결코 공식적 세력을 부리면서 희생제를 주례하는 사제직을 대치하지는 않았다.
성경만이 믿음과 도덕적인 면에서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는 원리는 기독교계의 옛 원리였으며 로마 교회 자체로부터도 거부되지 않았던 원리였다. 종교개혁은 모든 사람이 이를 수 있는 문학이 나 교육에 새로운 강조를 두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성경을 접하고 그 의미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중심 교리인 이신칭의,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직 그리고 성경만의 권위 등은 니케아와 칼케돈 회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사도적 가난을 이단적이라고 공인한 “비인 회의”의 입징에서 본다면 확실히 이단적이다. 이런 면에 서 볼 때, 그룬드만(Gmndmann)의 견해처럼 “이단의 역사는 루터와 함께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한 지역에서의 정통이 다른 지역에서는 이단이 되었기 때문에 “이단”과 “정통”에 대한 본래의 의미가 상실되고 말았다.
만일 니케아와 칼케돈 신조들이 정통을 점검하는 기준이며, 프로테스탄티즘이 그것들을 수용하고 그것에 맞추어 갔다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정통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 신조들에 무관심하고 그것들을 거절한다는 것은-현대 프로테스탄트들 가운데 늘 있지만-현대 프로테스탄트들을 “보다 프로테스탄트적”이라는 것보다 프로테스탄트적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정통 프로테스탄티즘의 존재 이유는 로마 카톨릭교보다 진보적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마 카톨릭교보다 역사적, 기독교적 믿음에 더 가깝고 보다 고대적이다. 카톨릭주의가 “성도들에게 단번에 준 믿음”에서 과도하게 이탈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로 빚어진 교회의 분열은 용서받을 수 있다.
칼빈은 루터, 메노 시몬스(Memo Simons)와는 달리 어떤 교파든지 만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사상들은 루터보다도 프로테스탄티즘에 끊임없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칼빈은 루터와 츠빙글리와 많은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으나 동시에 많은 면에서 그들과 다르다. 성체에 대한 문제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정확하게 확언하지만 그 어떤 상징적이냐 기념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Reflection: 카톨릭의 세속화에 반발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운동은 이단으로 정죄받기는 했으나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지키려는 몸부림이었다. 오늘날에도 제도권 교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이러한 운동들이 일어난다. 문제는 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운동을 바라보는 제도화된 교회는, 비판 이전에 “교회의 본질적 교리”에 충실한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에 헌신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제17장 정통시대
프로테스탄티즘의 처음 요충지는 서유럽의 독일 국가들이었다. 이 곳은 법이 구축된 곳이고, 지역 또는 국가 정부로부터 보호받거나 재정적인 후원을 받았으며, 그 곳의 사역자는 국가로부터 훈련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 네덜란도 스칸디나비안 국가들, 스위스 그리고 서독일에서도 동일했다. 다양한 공식 기구들이 있게 되고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많이 받게 되므로 공식적 프로테스탄티즘는 서유럽에서 영적으로 연약한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가끔 작지만 정부의 후원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회중들은 큰 기존교회들보다 더 많은 예배자들을 확보했다. 최근의 발전 경향을 보면, 비기존적 프로테스탄트들, 복음주의자들, 특별히 오순절파들이 프로테스탄트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시작부터 정부의 후원에 전적으로 의존했다고 하지만 지금도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는 곳마다 연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칼빈주의는 루터주의보다 성경적 개혁을 일관성 있게 이끌고 있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칼빈주의는 루터주의보다 많은 분열이 일어나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인하여 많은 분파들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칼빈주의는 유니테리안주의와 같은 신학적 자유주의를 낳기도 했다. 이에 비하여, 루터주의는 믿음과 예식 면에서 엉뚱하지는 않았으나 프로테스탄트 다음 시대 동안 칼빈주의보다 적지 않은 이단들을 낳았던 것도 사실이다.
종교개혁의 존재의 정당성은 전통적 로마 카톨릭주의보다도 성경적 메시지와 역사적 기독교에 훨씬 신실하다는 것과 이렇게 되기 위해 강력한 논쟁으로 이루어 갔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은 영지주의, 마르키오니즘, 그리고 몬타누스주의를 동시에 직면했던 2세기 이래 교회가 경험한 교리적 혼란보다도 훨씬 많은 혼란을 경험했다. 칼빈주의는 루터에게 기대했던 것보다도 더 일관성 있는 방법으로 그리고 더 철저하게 교회를 개혁해 나갔다. 하지만 칼빈의 열정과 견실함에서 벗어나 반삼위일체론, 즉 삼신론과 유니테리안주의로 점철되는 폴란드의 비주류교회로 발전된 것도 사실이다. 정통을 너무 강조하는 가운데 종교재판이 탄생된 것이고 종교적 관용 속에서 정통의 높은 기준에 대한 열망은 기독교인들이 지킬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 폴란드에서 일어난 바벨탑과 같은 신학을 낳고 말았다. 비록 루터주의는 종교재판적 절차나 그러한 경향이 없었지만 정통을 수호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따금 언어가 과격하고 그 방법이 무례했지만 연합적, 정통적 전통을 만들기 위해 초기 루터주의가 교리적인 형식을 배출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루터주의처럼 칼빈주의 역시 나름대로의 정통과 스콜라적 전통을 발전시켰지만 루터주의처럼 연합적이고 동질적인 모습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루터파들의 경우에는 “복음”, 그리고 칼빈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언약”을 강조했다. 루터주의는 루터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칼빈주의, 즉 개혁파 운동은 다른 수많은 지역의 다른 분파로 시작되었다. 예정론과 자유의지 간의 관계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내적 논쟁은 결코 가라앉은 적이 없었고, 오늘날에도 초기 경쟁자들의 후손들이 여전히 논쟁하고 있다. 16세기에 루터주의는 회심시 신적 은혜와 더불어 협력하는 인간 의지의 능력에 관한 신인협력설 논쟁을 맞이했다.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개혁파 내에, 즉 칼빈주의 내에 있는 알미니안주의(Aminianism)란 주요한 입장이 나타났다.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후계 자였던 데오도르 베자의 제자였다. 베자는 칼빈의 예정론을 급진적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칼빈과 어거스틴과 함께 하는 자리로 격상시켰고 자신의 신학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가 주장한 선정타락설은 우선적으로 신적 예정이나 목적은 운명을 미리 정해 놓는 것-어떤 사람은 영원한 복을 받R으며 다른 사람은 영원한 형별을 받도록 저주하는 것-이다. 선정타락설이 하나님께서 타락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라는 논리에 대해서 베자는 아담이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조주는 악과 죄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인문주의자 코른헤르트의 비평에 대하여 베자의 선정타락설을 변호할 임무를 부여받은 알미니우스는 베자의 견해가 잘못되었다고 하며 다른 제안을 내어놓았다. 최초의 하나님의 예정은 미리 예정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피조물들이 타락하도록 허용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은혜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고, 네 번 째는 구원받을 사람을 예정하는 것이었다. 알마나우스가 죽고 난 후에도 그의 명성은 변호되었다. 개인적으로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를 변호한 사람은 그보다 조금 어렸던 콘라드 보르스트(Konrad Vorst, 1569-1622)였다. 그는 소시니안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자유 의지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진 합리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극소화했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나온 수천 명의 전문신학자들이 자기 비우심(케노시스)의 개념에 대하여 논쟁하는 동안 그 중에 몇몇 신학자들는 평범한 신자의 영적 삶이 무시당하고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건주의가 태동하게 된다.
Reflection: 서유럽의 프로테스탄티즘이 던져주는 교훈처럼 교회가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재정적인 후원을 받을 때 교회는 힘을 잃는다. 그리고 정통을 너무 강조하여 종교재판을 서슴치 않는 교회는 관용을 베풀었을 때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기독교 신앙이 위협을 받을수록 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대로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본질적인 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정죄보다는 관용의 정신을 베풀 필요가 있다. 교회를 서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은 언제가 겸허하게 자신의 행위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스스로 재판을 가하고 주님께만 목숨을 의지해야 하는 시점에 한국교회도 서 있다.
제18장 경건주의와 이단
경건주의는 루터주의에서 출발했다. 경건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세 인물은 모두 루터파들이었다. 루터주의는 완고한 스콜라 철학적 정통을 산출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경건주의가 일어났다.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그리고 루드빅 폰 진젠도르프(Ludwig von Zimendorf)가 중심이다. 이들을 이은 사람은 감리교의 창설자인 존과 찰스 웨슬리다. 만일 우리가 경건주의를 지성적, 사회적 운동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계몽주의와 같은 당시에 경건주의가 거슬렀던 시대의 영성과 비슷하다는 점에 놀라움을 가질 것이다. 보수적이지만 경건주의에 대하여 많은 의혹을 가졌던 칼 바르트는 계몽주의의 종교적인 측면으로부터 멀리 나아갔고 놀라울 정도로 그것을 싫어했다.
경건주의가 역사 속에 나타난 것은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정통 프로테스탄티즘 내에서다. 영적 출발은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기를 바라는 자들의 마음 깊은 속에서 일어났다. 경건주의는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복음주의적 삶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 경건주의 운동의 선구자는 「진정한 기독교」를 쓴 존 아른트이다. 아른트는 어떤 면에서 신비주의자였고, 교리보다는 개인적인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더욱 중요시 했다. 경건주의는 평범한 루터파 정통과는 구별되는 어떤 강조점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중생에 대한 교리와 회심을 의식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강조였다 이러한 사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경건주의는 개인성을 매우 강조한다. 공적인 종교적 헌신을 심오하게 만드는 개인적 임무를 행하기 위해 개인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행함으로써 사회의 보다 나은 시민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시민 교육의 유용한 도구로 세속 정부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개인적 기독교를 억제하는 것보다 경건주의는 기독교의 개인성을 배양시키기 시작했으며 기독교적이기보다는 로마적인 경향을 띄었다. 참된 진리가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경건주의는 “교리 가 아닌 삶”을 강조하게 되었고 교리를 망각하는 데까지 나갔다. 경건주의는 긍정적인 측면을 많이 갖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 가장 바람직한-사회적으로 인정받는-면들은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발전된 것이 아니고 경건주의자들의 후예들로 시작되고 발전되었다. 성경이 인쇄되어 가정으로 배분되고 외국 선교지까지 배분되었으며, 고아나 어린이로부터 장애자들이나 연로한 분들을 위한 병원이나 가정에까지 이르는 모든 사업을 경건주의자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성취해 나갔다. 계명을 따라 복음을 전하되 고통 중에 있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보살폈다. 부정적인 측면 에서 본다면, 계몽주의와 보조를 같이한 개인주의적 경건주의는 공동체로서 의 교회의 의식을 파괴시켰다는 것이다.
경건주의는 오랜 역사의 과정을 통해 발전되고 변화되었다. 경건주의는 19세기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면서 외적으로 보다 개인적이고 보다 덜 지성적으로 변화되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가장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직계 조상은 바로 19세기의 경건주의이다. 처음부터 경건주의는 정통의 교리적 확신들을 공유했으나 교리보다는 삶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초기 경건주의는 정통을 유지하면서 “죽은 정통”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만일 어떤 것이 정통이 아니라면, 정통 신학을 자라게 했던 올바른 교리에 대한 관심조차도 반대하기 시작했다. “교리가 아닌 삶”과 “사실이 아닌 믿음”이란 슬로건은 전통 교리를 고수하는 사람들과 믿음이 사실과 일치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었지만, 이제 교리와 역사적 사실들 모두를 경시하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사용한다.
경건주의는 어떤 면에서 보나 결코 이단은 아니었지만 개인적 경험과 종교적 정서를 강조함으로써 이단에 이르는 많은 장애물들을 옮겨다 놓았다. 경건주의는 신자들에게 영적 실행으로 말미암는 주관적 확신을 찾아야만 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때때로 새로운 율법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갖기도 했다. 특별히 프랑케 이후로 경건주의는 완전주의-참신 자는 현 생활에서 모든 죄를 피해야만 하고 피할 수 있다는 교리-의 경향을 띄게 되었다. 경건주의는 기독교 신지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회심의 분명한 체험을 가지게 함으로써 활력 있고 행복하며 효과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기 원했다. 이 일을 위해 프로테스탄트 정통의 진리를 미리 전제했지만, 진리보다 삶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추종자들은 점점 경건한 삶을 이루는 교리적 기본을 잃고 말았다. 개인적, 종교적 체험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러한 제힘을 보장하고 뒷받침해 주는 객관적 기준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의 노선을 매우 충실하게 유지했지만, 개인주의는 정통을 짓밟고 계몽주의 정신에 가깝게 다가갔다. 비록 하나님 중심과 경건주의의 영적 열정이 인문주의와 반대가 되고 계몽주의의 냉정한 이성주의와는 반대노선을 걸었지만, 경건주의는 계몽주의의 회의주의에 대하여 정통적 교리들의 진리를 변호하는 데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체의 터전마저 위태롭게 만들고 말았다.
만일 슈페너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경건을 향한 갈구를 실천하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잔인하고 난폭한 신학적 분파주의로 인하여 갈기갈기 찢어져 있을지 모른다. 경건주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들 중 하나는 프로테스탄티즘을 학문적 전문성이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것과, 믿음, 헌신 그리고 성경의 지식에 평범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경건주의는 개인적 기독교를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의 삶을 체험적으로 바꾸었으며 단순히 신비적인 사색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도왔다. 만인제사장직과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의 필요성은 영적 발전소의 길을 열어 놓았을 뿐 아니라 기독교 교육, 사회적 활동 그리고 국내외 선교의 영역에서 수많은 업적을 감당할 수 있도록 했다. 계몽주의와 종교적 회의주의의 등장과 함께 옛 프로테스탄트 정통은 결국에 가서는 존재의 자취 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의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동기 부여가 생존하는 곳에는 언제나 경건주의적 형태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현대 보수적 프로테스탄티즘은 기원적으로 경건주의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 다고 하겠다. 동시에 경건주의는 종교적 개인주의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개인주의로 인하여 프로테스탄티즘 안에 신학적, 윤리적인 복수주의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신조보다도 행위를 강조하게 되면 현대 프로테스탄티즘은 영적 무지의 도덕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신학적 교리들의 진리에 관심을 가지면 강한 보수적 경향을 가져 가끔 근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 이단이라 볼 수 있는 교리도 없고 이단자라고 볼 수 있는 교사도 없는 신학적 분위기에서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 진리를 변호하고 선언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경건주의가 없었다면 프로테스탄티즘은 18세기에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건주의 때문에 프로테스탄티즘은 결국에는 그 자체를 포기 할 수 도 있다.
Reflection: 경건주의는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크다. 긍정적인 측면, 부정적인 차원 모두에서 그렇다. 무엇을 알려주는가? 경건주의적 삶 없이 외치는 정통은 외면당할 것이다. 실천없이 외치는 교리는 생명을 열매로 맺을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경험만을 강조하면 기독교의 기독교됨을 잃게 된다. 어느 시대보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뜨거워보인다. 그러나 얼마나 그 뜨거움이 사람의 “사고”를, “세계관”을 바꾸었을까?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를 이루지 못한 열정과 부흥은 참된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를 생존하게 한 기여는 있다 할지라도 우리나라의 경건주의는 늘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지키고 그것에 순종하는 데도 그 열정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정통의 진리와 뜨거움을 함께 열매로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제19장 계몽주의 이단
종교개혁과 비교해 볼 때, 계몽주의는 라틴계 국가들뿐만 아니라 독일계 국가들을 포함하는 그야말로 유럽적인 현상이었다. 한편으로 독일과 영국에 끼친 계몽주의의 충격과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끼친 충격 간에는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었다. 라틴계 국가에서 “이성의 시대” (Age of Reason)는 단연코 반종교적이었다 독일, 적게는 영 국에서의 계몽주의는 기존 종교와 타협하는 현상을 나타냈다. 그것은 종교 를 공격하기보다는 변형시켰다: 그 결과 자유 프로테스탄티즘이 생겨났다.
자유적 기독교는 18세기 동안 시작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인간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적인 환상들이 흔들리게 되었고, 정통 교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잠재 능력에 대한 불신임을 하기에 이르렀다.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와 이성주의에 대한 반응이었고 옛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와는 엄격히 다른 것이지만 프로테스탄트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자유적이라 불려진다. 전통적 프로테스탄티즘과 같이 신정통주의는 정통 교리를 인정하지만 성경의 절대적 권위성이나 완전 영감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신정통주의를 실존주의적 신학과 옛 형태의 자유주의와 함께 “자유주의”로 통틀어 말해 버릴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많은 오해를 자처할 것이다.
정통 프로테스탄티즘과 비교해 볼 때 자유주의가 분명히 이단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이는 이유는 정통 신조들의 중심 교의들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신정통주의는 그것들을 재확언하기도 하지만, 기독교 정통보다는 이따금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를 연상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정통주의는 정통과 구별될 수 없으며 수용하는 전통적 신조들과 비교해 볼 때 이단성이 있다고 볼 수도 없다. 보수적 프로테스탄티즘 내에서 신정통주의를 모두 자유주의나 현대신학으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성경적 비평주의를 수용하고 있으며 성경의 영감설과 권위성에 대한 옛 개념들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과 로마 카톨릭주의는 대부분의 교회들 간에 일치하는 어떤 것이 있었으며, 동방정교 역시 서방 교회와 활동적으로 연합하지는 않았어도 일치하는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주요한 교회들은 각각 범교회 회의의 산물인 신조들, 사도신경, 니케아 그리고 칼케돈 상징들을 수용했으며, 그것들로부터 표현된 교리들은 모두 진실하며 필수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교리적 논쟁이 쉴라이어마허 이후에 일어나지 않아 덕분에(?) 기독교는 프로테스탄트 유럽에서 생존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는 단순히 정서라는 종교로 인식하는 측면에서 존재하게 된다. 더 이상 신약성경의 기독교나 범교회 신조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보수주의 개혁신학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지도 아래 네덜란드에서 새로운 초점을 가지고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보수주의 개혁신학이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 꽃피게 되었다: A. A. 핫지, C. 핫지, B. B. 워필드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러한 신학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기독교의 생명력은 그러한 발전들보다도 오히려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휩쓸었던 부흥운동들에 의존했다. 정통의 부흥들은 지성적인 경향보다는 감정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시금 감정에 의해 쇠퇴하고 말았다. 정통은 이제 생존을 위해 일시적인 부흥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이어지는 부흥들 을 통해 생존하는 것이 정통적인 길이냐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루터의 메시지를 인정했을 것이고, 루터도 슈페너의 메시지를 인정했을 것이지만, 과연 그들 중 누가 쉴라이어마허의 메시지를 인정할 것인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복음주의자들과 그들의 부흥들은 누구를 모본으로 삼고 있는가? 그들이 모방하고 싶어했던 인물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 인물들은 누구인가?
Reflection: 성경의 절대적인 신뢰 없이도 종교적 체험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늘어간다. 정통의 부흥들은 지성적인 경향보다는 감정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시금 감정에 의해 쇠퇴하고 말은 사실에서, 우리가 외치고 목격하는 “부흥”이 과연 정통의 진리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중국의 교회 역시, 감정의 뜨거움에만 집착하다가 종교적 감성주의에 빠질 우려도 있다. 정통과 이단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따라, 정통을 지키려는 기독교는 경건주의적 삶을 늘 생각하면서 정통 교리를 지키려는 열정을 보여야 할 것이다.
제20장 부흥된 전통이냐, 정통의 부흥이냐?
위대한 권위적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범교회 신조들을 수용했으며,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의 대부분은 비록 신조들을 사용하지는 않았어도 그 교리들을 수용했다. 칼케돈 이후 2천년 동안 니케아와 칼케돈을 거부했던 이단자들은 자발 적으로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로부터 추방당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250년 내에 상 황은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16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에 꽃피웠던 소시니안들은 기독교인으로 여겨지기를 원했으나 카톨릭주의자들과 프로테스탄들의 이단자라는 판단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겨야만 했다. 그들은 본질적 기독교 교리들을 부인했기 때문에 기독교의 영역 밖으로 추방당했다. 18세기에 이르러 젬믈러 등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같은 교리들을 부인하면서 여전히 교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신학적 논쟁의 기본틀을 변화시켰다. 19세기에 이르러 프로테스탄티즘의 형식적 구조는 정통적이었으나, 지성인들과 학자들은 대체로 정통을 거부했다. 19세기에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형식적 정통,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전통주의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무시하면서도 교회에 남아 있는 반대자들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비록 기독교계를 통해 수백만의 개인 영혼들을 구원하는 경우가 있지만, 기독교는 사회 정신이나 개인 정신의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삶이 변화되었고, 교회들이 변형되었고, 주요한 입법들의 변화가 이루어졌지만 교리의 터전들은 아직도 든든히 서 있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세계와 삶은 점차적으로 상실되었고 콘스탄티누스 이후 처음으로 기독교는 개인적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수십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는 부흥이 일어났지만 그 정도는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고 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과 복음주의자들의 세계적 목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이나 부흥주의자들은 모두 또는 개인적으로 정통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마음들을 변화시킨 것이지 정신들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며, 감성을 부흥시킨 것이지 교리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부흥주의는 마음의 냉랭함을 치료했을 뿐 회의주의를 치료하지는 못했다.
감리교파의 창설자인 존 웨슬리와 그의 동생 찰스는 헤른후트(Herrnhut)의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단으로부터 강한 충격을 받았다. 존 웨슬리는 1737년 런던에서 모라비안과 교제하면서 웨슬리적 개종을 하고 난 후 그 다음해 여름 헤른후트에서 두 주간을 보냈다. 휫필드는 영어권의 설교자들과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존 웨슬리와는 달리 예정론을 믿었다. 그들은 이 문제로 결별을 하게 된다. 휫필드와 웨슬리가 시작한 운동은 당시의 앵글리칸주의가 쇠퇴하고 무기력한 곳에서 급속하고 유형적인 결과를 도출했다. 그들의 운동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영어권 여러 나라에서 복음주의의 시작을 의미했다. 복음주의적 운동은 어떤 기본적 교리들을 강조하고 개인적 개종을 강조하면서 모든 사회 분야에 큰 충격을 안겨다.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사회복음”에 반대한다 라는 사실은 복음주의자들이 18세기와 19세기의 선조들보다적극적인 활동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리와 웨슬리안 부흥의 직접적 영향으로 인하여 북아메리카의 감리교회는 번창하고 강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엄격주의자였던 에드워즈는 예정주의적 칼빈주의를 회개와 회심을 위한 절박한 초청을 강조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부흥운동은 19세기 보수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이었다. 우리 시대까지 생존했던 전통적 프로테스탄트 정통들보다 활동적이고, 보다 감동적이고, 보다 호소력이 있어 보인다. 초기 경건주의 운동은 비록 죽은 정통의 해독제로 의도되었지만 매우 정통적이었으며, 정통을 회복시키기를 원했을 뿐 또 다른 길을 택하려고 하지 는 않았다. 하지만 현대 경건주의 운동은 죽은 정통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수의와 낭만주의와 싸워야만 했다. 자신의 영역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자유주의의 합리성을 공격할 때 그 운동은 감성, 즉 보다 로마 카톨릭적인 분위기를 빌려오는 새로운 종교를 사용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웅에게 예배드림으로써 그 합리성을 기독교화 하려고 노력했다. 이 운동은 우주성을 상실하고 애국적이기를 원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의 우주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종교 전쟁들을 일으켰던 복잡한 교리들과 신조들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현대 부흥주의자들이 정통이 되고 또 개인적으로 정통일 수 있지만 정통은 현대 부흥적 또는 복음적 운동의 주요한 특성 또는 부흥 주의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은 반드시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 운동은 자유적이기를 거부했는지는 몰라도 정통이기에는 너무 신학적이지 못하다.
Reflection: 사람들은 “부흥”을 보기 원한다. 에드워즈가 경험한 부흥, 로이드 존스가 주장하는 부흥을 갈망한다. 그러나 “현대 부흥주의자들이 정통이 되고 또 개인적으로 정통일 수 있지만 정통은 현대 부흥적 또는 복음적 운동의 주요한 특성 또는 부흥 주의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은 반드시 기억하기를 바란다.”는 브라운 교수의 강조는, 이제 “부흥”이 정통이 되었다는 진단을 해 준다. 정통의 부흥은 아닌 것이다. 정통의 부흥은 요원한가? 이것이 멀다고 하여 피니의 부흥 등, 주님의 은총에서 멀어진 부흥이 이 시대의 정통이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청년대학생들과 청소년들 사이에서 뜨거워지는 선교열정에서도도 “부흥”이 정통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정통의 부흥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제21장 정통의 소생과 퇴보
후기 칼케돈 신학의 위협은 기독교가 새로운 이단들-정통이 저항할 수 있는 이단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보다는 이단의 개념을 철폐하고 그것이 중요했고 그 중요성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만일 19세기 후반에 정통이 자유주의에 직면하여 후퇴하는 면을 보였다면, 카톨릭 교회 내에서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들 가운데 20세기 초반 수십년 간 자유주의의 영역은 그 어느 정통의 주장들보다 더 불안했다. 자유주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되심과 과정의 영속에 대한 그의 완전하심을 무 시했다. 세계 제1차 대전으로 프로테스탄티즘과 카톨릭주의는 함께 자유주의에 대한 반응을 시작했다. 프로테스탄트 계열에서는 20세기 초에 북아메리카에서 “근본주의”가 탄생되었지만, 프로테스탄트 전통주의의 실재적 강점은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있기보다는 부흥주의와 국제 간의 선교운동의 퍼짐으로 표현되었다.
바르트는 신약성경의 중심 내용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이라고 강조했지만,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누구이심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고 계속해서 강조했다. 이 점에서 볼 때 바르트는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많은 곳에서 언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존재나 그의 속성을 다루는 “존재론”적 질문에 관하여 적게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 최근의 신학 동향에 대해 교묘하게 거슬러 헤엄쳐 나갔다. 바르트는 성경적 메시지를 정당화하 기 위해 적절할 뿐 아니라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칼케돈의 언어들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신비를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 그리고 그의 위격의 단일성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론을 확언할 뿐 아니라, 마리아를 데오토코스(하나님을 낳은 자, 하나님의 모친)라고 보는 반 네스토리우스파의 슬로건을 확언했다. 그렇다고 칼케돈을 열렬하게 확언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는 속성들의 교통에 관련된 신비를 함에 있어 개혁파보다는 루터파에 가깝다고 보인다. 비록 데오토코스를 확언했지만, 기독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단성론적이기보다는 네스토리우스에 가까운 전형적인 칼빈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정신적인 면에서나 말에서나 기탄없이 칼케돈적인 성향을 가진 마지막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라고 볼 수 있다.
1926년 불트만은 우리가 예수님의 실제적 삶과 가르침을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입장에서 기독교 신앙은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실재적 예수님에 대한 불가지론을 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역은 본질상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위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법인 “신화적” 언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부활과 관련된 설명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조작된 것이고, 그러한 사실들을 실제로 증명할 수도 없으며, 제자들이 그와의 밀접한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불트만의 견해는 이단이라 부르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 불트만의 견해를 이단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아마 그를 양자론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단순한 사람으로 믿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인격적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 싫어하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실재 세계에 그러한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것을 토론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한 토론은 신화적인 것이고 현대인들에게는 이해되지도 않을 뿐더러 터무니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불트만의 입장에서 본 신학과 기독론은 정통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단과도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불트만의 표현은 그 어떤 것이나 그 어떠한 사람에 관한 교리도 아니다. 이러한 것은새로운 방법으로 인간 자신을 이해하려 하는 급진적인 접근 방법이며, 그 방법은 기가 막히는 이야기를 직면하면서 이루어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접근 방법에서 보면 “신학”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19세기의 유물론자 루드빅 포이에르바흐(1804-72)에 의하면, 모든 신학적 설명들은 인간론적인 면을 가장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불트만은 포이에르바흐의 분석을 철저히 수행했다. 그에게 신학은 더 이상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되었다. 그의 신학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시라 라는 것과 무관하다. 신학적으로 불트만과 맞붙어 싸우려는 모든 시도들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택한 영역에서 그와 함께 대결하는 것은 실패를 자초할 뿐이다. 전통적인 신학과 기독론이 찬양하고 변호하는 것을 곧 하나님의 객관적 실재이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사실은 불트만의 영역 안에서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Reflection: 오늘날에는 칼케돈 신학이 말해 준 “이단과 정통”의 기준이 잊혀지고 있다. 불트만은 예수님에 대해서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을 인간으로, 그것도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된 존재로 보기에 그의 신학은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불트만의 입장에서 본 신학과 기독론은 정통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단과도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는 브라운의 표현과 같이, 이제 기독교신학은 어떤 면에서 “인간학으로 변해버린 신학”과 싸워야 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그러나 브라운의 말처럼 과연 이 싸움에서 승산이 있을까? 우리가 객관적인 실체를 강조한다면 자유주의 신학은 “만들어진 인물”을 놓고 싸우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교회를 위한 신학이 더 없이 요구된다.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해서 근본주의 신학이 탄생했으나 감동을 주지 못했고, 부흥주의는 감동을 주었으나 후기 경건주의처럼 진리 자체에는 관심을 덜 가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신앙의 열정과 함께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이 요청된다. 가슴없는 신학적 논쟁과 교리 없는 뜨거움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여 예수님을 지성과 마음으로 고백하도록 하는 일이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과업이라 하겠다.
후문: 그의 재림의 조짐들
이스라엘의 새 국가가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 현시대가 이제 종말을 고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재림의 때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경고하신 예수님은 동시에 늘 그 때에 대하여 “경성”하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이러한 훈계 속에서 칼케돈 신학의 붕괴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의 재림에 대한 조짐이 아닐까? 바울이 예언한 “배역의” 때가 시작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경성해야만 한다. 그 조짐의 사실 여부는 예언된 대로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색적으로 그 사실을 판정할 수는 없다. 지리학적으로 본 예루살렘은 6일 전쟁이 1967년에 다시 한번 예루살렘을 유대인의 주도권 아래 가져오기 전에 수많은 전투를 수행해야만 했다. 칼케돈의 역사적 교리는 “실존적 해석”과 “사신신학”이 있기 전에 수많은 투쟁을 직면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생존하기 위해 많은 고충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천년을 맞이할 때마다 수백만의 기독교인 들은 종말의 조짐을 예상하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 종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200년도 1260년도 종말의 연도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은 달력에 나타난 연대보다도 더 중요한 역사적 시간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칼케돈”도 그러하다.
Reflection: 주님께서 우리에게 종말을 말씀하실 때에, 특히 마태복음에서, “깨어있어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기독교인이 역사를 통해서 경계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면 과연 무엇에 대해서일까? 브라운은 “칼케돈의 역사적 교리”라고 본다. 칼케돈 공회의는 삼위일체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규정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많은 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뿐만 아니라 역사적 실존 자체, 그 가르침의 진실도 부정해 버리기 때문에, 칼케돈의 붕괴는 기독교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다. 불트만의 작업은 브라운이 말한 것처럼 이단에서도 논의하지 않는, 전혀 다른 범위의 이야기다. 이러한 논리가 이제는 교회 안에서 더욱 강하게 주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칼케돈의 붕괴는 “배역의 때”를 암시한다. “칼케돈”의 역사적 사건은 주님의 재림을 가늠하게 하는 종말의 표시라는 점에서, 성경적인 역사의식을 갖기 원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에게 하나의 지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예장서울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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