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호준 교수 /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원장
1. 정경으로서 오경
비록 구약과 신약이라는 명칭을 쓰긴 하지만 “정경으로서 성경”(Bible as Scripture)은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기독교정경의 첫 부분은 오경이다. 물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각각 “히브리 성경”과 “구약성경”이라고 부르는 문헌을 공유하긴 하지만 그들의 성경관은 확연히 다르다. 유대인들은 신약성경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성경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정경”이라고 말할 때는 구약과 신약을 함께 묶어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유일한 성경을”(one Scripture) 정경으로 갖고 있다는 뜻이다.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정경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분명하거나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1) 성경신학적으로 말해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논의보다 더 중요한 논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합하여 구성된 문헌으로서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정경의 첫 부분인 오경은 단순히 구약성경의 첫 번째 부분만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전체로 들어가는 대문(大門)이요 입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달리 말해 오경은 구약성경 전체뿐 아니라 구·신약 성경 전체에 대한 기저음(基底音)을 들려주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경은 어떤 책인가? 어떤 의미에서 성경전체로 들어가는 대문일까? 이 대문으로 들어가면 성경전체에 대한 전망이 보일까?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오경을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적 기록물로만 보게 하지 않는다. 물론 비평적 연구의 덕택으로 우리는 그 자료가 복합적이고 복잡할 뿐 아니라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달리 말해 오경은 어느 한 순간에 책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전승과정의 역사를 지닌 책이라는 뜻이다. 서구 사회의 계몽주의의 발달과 함께 지난 250년 동안 이 과정을 재구성하려는 수많은 학문적 노력들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노력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역사적” 연구였다. 역사실증주의라는 시대정신에 따른 성경문헌에 대한 소위 “역사 비평”(historical criticism)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연구는 그 자체로서 무익한 시도들은 아니었다. 또한 앞으로도 완전히 무시될만한 시도들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오경 자체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시는 야웨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그분에 대한 것들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오경은 매우 역사적 산물이다.2)
그러나 오경을 포함하고 있는 성경이 기독교회의 유일한 “정경”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성경을 단순히 역사적 기록물로서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비록 전승의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그 과정 자체는 “정경적 전승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월터 브루그만의 말을 빌리자면 “신학적 항구성”(theological constancy)을 담지하고 있는 정경적 전승(cannonical tradition)이라는 것이다.3) 바로 이 시점에서 학문적 작업으로서 성서학 연구(biblical studies)가 교회의 정경으로서 성경 연구(search for the Scripture)로 전환한다. 나는 이미 다른 곳에서 이 두 가지의 상호보완이 성경해석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 적이 있었습니다. 달리 말해 성경에 관한 공시적 연구와 통시적 연구를 같이 병행해야 하는 필요성에 관한 것이다.4) 브루그만도 이 점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보여준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우리의 성경본문읽기는 이들 두 가지 직무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편을 침묵시키거나 비난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내게 분명한 것은 이런 시각들 가운데 어떤 것도 지성적으로 보다 더 인정을 받아야할 것으로 특권을 부여받는 경우는 없다는 것인데, 책임 있는 해석이라는 지대한 노력에 요구되는 것은 다양성과 복잡성에 대한 비평적 배려와 더불어 지속성과 일관성을 향한 ‘정경적’ 자극 모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5)
본 발표에서 나는 오경의 “신학적 항구성”이란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본 학술대회의 부제인 “신학, 설교 그리고 실제”라는 점에 부합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전문용어 “토라”
오경을 전문적이며 보편적인 용어로 “토라”라고 한다. 전문적이라 함은 전통적으로 구약성경을 삼등분(“타나크”)하여 첫째 부분을 “토라”라고 하기 때문이다. 일명 “오경”(Pentateuch) 혹은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모세오경”이라는 함은 현대적 의미에서 저작권(authorship)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수여자며 중개자인 모세의 권위(authority)를 가리킨다는 점에서이다. 한편 보편적이라 함은 토라를 단순히 “율법”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뜻을 포함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토라로서 오경 안에는 단순히 율법들과 규정들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대중들이 흔히 잊고 있는 사실은 토라에 해당하는 오경은 대부분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안에 율법과 규례와 계명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토라를 단순히 “율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토라의 의미를 축소 환원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고, 이런 생각을 확장한다면 신약에서 말하는 율법을 “율법과 복음”이라는 단순구조화 된 이분법의 부정적 요소로만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6)
2. 한 권의 책으로서 오경
토라는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까지를 포함하는 구약의 첫 다섯 권으로 된 “한 책”(單券)이다. 오경이 “한 책”이라는 뜻은 일관성 있는 독서를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전통적인 오경이해와 상충되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을 개별적인 책들의 모음 정도로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학계의 흐름은 모세오경을 한 권의 대하(大河) 이야기로 읽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먼저 토라를 히브리어 뜻 그대로 “가르침”(교훈)이라고 생각하자.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중재자인 모세를 통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신 신적(神的) 가르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은 주로 “내러티브”(이야기체)와 “율법”(규정들과 규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자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아마 후자는 전자 속에 삽입되어 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문제는 내러티브와 율법들의 결합처럼 보이는 이 “토라-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읽어가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달리 말해 내러티브 섹션과 율법 섹션을 어떻게 일관되게 설명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모래와 철골 사이의 관계라 할까? 아니면 살과 뼈와의 관계라 할까? 이 두 가지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관한 화학공식에 관한 논의가 학계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이미 여러해 전에 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지적한 일이 있다. 벌린(Berlin)의 말을 들어보자.
“토라는 여러 율법들이 모인 것이고, 내러티브들은 그들 사이를 일종의 풀처럼 접착하는 기능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토라는 일차적으로 내러티브이고, 여기저기에 율법 자료들이 삽입된 것일까? … 내러티브는 율법의 배경인가 아니면 율법이 내러티브를 설명해 주는 것인가? 이는 수수께끼 같은 그림 속 대상이 항아리인지 사람의 윤곽인지 묻는 것과 유사하다. 토라에서 계시 내러티브 없는 율법은 없으며, 율법 없는 계시 내러티브도 있을 수 없다. 율법은 계시 내러티브 없이는 존재이유를 갖지 못하며, 계시도 율법 없이는 어떤 함축적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각각의 율법과 율법의 모음을 계속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는 한, 우리는 역시 율법이 그 내러티브와 더불어 만들어 낼 수 있는 보다 깊은 의미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7)
벌린은 오경연구에서 중요한 문제를 제기를 했다. 그러나 문제 제기로 끝을 맺었다. 누가 이런 문제를 다룰 것인가? 다룬다면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는 학자로 나는 두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려 한다. 한 명은 미국 컬럼비아 신학교의 구약학 은퇴교수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고 다른 한 명은 미국 칼빈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인 에리 레더(Arie Leder)이다. 두 사람 공히 내러티브와 율법의 혼합으로 구성된 오경을 신학적으로 일관성 있게 읽을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경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상당히 다르다.
1) 월터 브루그만의 오경이해
먼저 브루그만은 정경의 문맥 안에서 기독교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오경을 읽을 것을 제안한다. 특별히 오경(토라)이 “내러티브”와 “계명”(율법)으로 있다는 사실에 대한 브루그만의 이해를 살펴보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그에 따르면 오경 안에 있는 내러티브의 주인공은 언제나 야웨 하나님이고, 내러티브의 주제음은 그분이 행한 기적들을 낭송하는 내용이다. 이것을 입증할만한 자료로서 그는 후대의 시편들을 지적하는데(예, 시 136), 이런 시들은 토라에 대한 고도로 양식화된 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시들 안에는 위험에 직면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야웨의 확고부동한 사랑(“헤세드”)을 노래하며 그가 그들을 위해 베푸신 놀라운 경이와 기적들을 회고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경이와 기적에 대한 응답으로서 감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브루그만에 따르면 이것이 온갖 대내외적 위협과 위험에 직면하면서도 토라에 의해 지탱되고 견디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특성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토라에 의해 지탱되어 왔던 공동체는 언제나 “하나님의 기적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인 감사”로 특징지어졌다는 것이다. 토라 자료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야웨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들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이 암시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과 이스라엘의 감사”라는 신학적 항구성이 오경의 저변에 깔려 있는 주제라는 것이 브루그만의 주장이다.
그에 의하면 비록 “기적과 감사”라는 신학적 항구성이 오경 안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교회는 오경을 읽고 설교하고 교육할 때 바로 이 점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위험천만한 삶의 여정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의 신실함이 과시되는 기적에 자신들의 존재의 근거를 두었다. 즉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삶의 기초는 항상 하나님의 신실함의 시현(示現)인 “기적과 경이”이며, 이러한 기적과 경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적절한 반응이 “감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라 전체는 “기적과 감사”의 상호 반응적 순환의 연속을 반영하고 있는 문헌이며, 이런 점에서 토라는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신앙 교육”(catechism)을 위한 지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오경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Magnalia dei)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으로서 감사”에 대해 목회적으로 설교하고 상담하고 교육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브루그만은 내러티브와 율법으로 구성된 오경에서 “율법”(계명문헌)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1)라는 단 한 가지 계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계명들은 이에 대한 주석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승과정을 통해 이 시내 산의 단일 계명을 설명하고 확대 해설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삶의 모든 국면 – 사적이든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이 야웨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순종의 영역임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율법(계명)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유일한 주(主)와 왕이 야웨이라는 점을 대내외에 천명하며, 후에라도 다른 주군들 – 애급,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시리아 등 -의 압제와 협박과 충성강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가 율법(계명)이었다는 것이다.8) 이처럼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적 신실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된다.
적어도 이 두 가지가 오경(토라)을 구성하고 있는 “내러티브와 율법” 각각에 대한 브루그만의 신학적 의미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는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에 대한 브루그만의 대답은 과히 자극적이다. 그에 따르면 토라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규범적 상상 행위”(normative act of imagination)로 기능한다고 설명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어떤 방식으로 토라가 “규범적 상상행위”라는 것일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타국으로 유배(流配, exile)되어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가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벨론 유수이다. 그곳에서 그들에게 닥친 위기는 외적인 압력도 있었겠지만 실제적으로는 내적인 몰락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까지는 그나마도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과 그에 대한 특별한 감사로 삶을 지탱해왔는데, 이제는 그 공동체가 이국에서 이교주의의 깊은 물속에 빠져들면서 야웨 하나님의 경이로운 기적들에 대해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내적 붕괴(맨붕!)가 더욱 무서운 위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라는 이들에게 “기억”을 더듬어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계명(율법)으로 훈련시켰으며 어떻게 기적적인 큰일을 통해 그들을 구원해 내었는지, 그 역사를 “낭송함으로써 회상”하게 해주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규범적 상상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토라는 포로기 공동체 안에서 특별히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근본적이고 희망적인 존재방식을 구성하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토라가 “규범적 상상 행위”라는 브루그만의 주장은 목회적 차원에서 함축된 의미를 지닌다. 설명하자면 바벨론 포로기에 강제이주민 일 세대들은 그나마 과거에 대한 심각한 신학적 성찰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 그곳에 사로잡혀 갔던 어린아이들, 그리고 그곳에서 교육받고 자랐던 포로민 2 세대들은 어떤가? 그들은 이미 이교주의의 깊은 늪지대 한 가운데서 살면서 고국에 대한 더 이상의 향수도 그리움도 돌아가야 할 열망도 많지 않았다. 그들이야말로 제국의 지배 문화에 취약적으로 노출된 세대들이 아닌가? 누가 이들을 위해 일한 것인가? 누가 이들에게 바벨론 유수라는 천지개벽 같은 사건에 대해 신학적 성찰을 하도록 인도한단 말인가? 잡혀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엘리트 그룹이었으므로 자생적인 성찰 운동이나 각성 운동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스라서에서 이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예언자들도 이런 일에 일익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 자극을 줄 수 있었던 집단으로 가장 유력한 사람들은 아마 제사장들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그들의 본래적 직무는 “토라”를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후대에 전수하는 임무였기 때문이다. 넬슨이 잘 지적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고 유지되고 존속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는 제사장들이었다. 그들은 왕들이나 선지자들도 더 오래 남아 있을 수 있었다. …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삶의 매 순간 순간들을 연결지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다. … 제사장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율법들과 노래들과 예식들을 전수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전승들을 보전하고 보호했던 사람들이었다.”9)
이교의 지배문화 아래 살고 있었던 포로민들, 특별히 강제 이주 2세대들은 그 땅에서의 생존과 출세라는 지대한 유혹에 노출되었을 것이며, 이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가르쳐줄 사람들로는 제사장들이 있었다. 그들은 토라를 가지고 민족의 기원(출애굽 사건)에 대해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브루그만은 중요한 언급을 한다.
“토라의 최종형태는 민족 공동체로부터 돌아서서 지배문화로 들어설 준비가 되어 있던 포로 공동체의 젊은이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10)
이러한 통찰력은 지금의 교회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내용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작업처럼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오늘날의 기독교 청소년들은 이교적 문화 – 편의주의, 개인주의, 배금주의, 쾌락주의, 외모지상주의, 성공주의, 철저한 현세지향성, 다원주의, 관용주의 등 –의 깊은 수렁에 빠질 위험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들려주어야할 사명이 교회에게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토라가 “규범적 상상 행위”라는 브루그만의 주장은 목회적 차원에서 또 다른 함의(含意)를 지닌다. 토라가 보여주는 세상은 야웨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원해내시고 유지하는 세상이다. 그에게만 충성을 바쳐야할 매우 배타적 세상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으로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세상이다. 한 마디로 토라는 야웨께서 거주하시고 다스리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토라는 현실 세상에 대한 “대안(代案)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현실인가? 폭력이 난무하고 억울함이 하늘에 사무치고 불의와 부정으로 얼룩진 세상이며, 하나님의 세상에 대해 반항적인 세상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저항적이며 언제나 자율적이기를 바라는 세상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해 순종할 준비조차도 되지 않은 세상이다. 권력과 이데올로기로 억압된 세상이며 약육강식의 세상이며 정글의 법칙만이 통용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 안에서 젊은이들은 굴종(屈從)을 통해서라도 성공과 승진의 사닥다리를 기어오르려고 애를 쓰는 세상이다. 마치 바벨탑을 쌓듯이 스펙을 쌓고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진실과 인애도, 정의와 명예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상이다.
이교주의 안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 세계”에 잘 길들여져 있다. 그들에겐 토라가 제시하고 있는 “대안의 세계”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그들에겐 이사야 선지자가 꿈꾸었던 “야웨의 세상”, “토라에 의해 인도되는 세계”(참조, 사 2:2-4)를 받아들일만한 역량이 없었다. 그렇게 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야웨의 길을 따르는데 따라오는 큰 위험을 두려워하며 그 땅(“포로 된 땅”)에서 안주하려 한다. 거꾸로 말해 토라는 그들에게 “전복적(顚覆的) 세상”을 보여준다. 그렇다. 제자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때론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창조하신 “대안의 세상”, “부활의 세상”, “기적의 세상”을 보지 못한다. 토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사로잡혀 있는 포로 공동체에게 “규범적 상상행위”로 기능한다는 브루그만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에도 매우 적실성이 있어 보인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기독교 후시대에 살고 있는] 교회는 이제 낯선 문화적 환경 안에서 분명한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교회는 이 같은 긴급한 상황에서 특히 신약성경을 주목하려 하지만, 토라에 대한 연구는 이미 신약성경보다 훨씬 오래되고 깊은 이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이 자료, 즉 토라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포로였던 유대인들은 이방 땅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는 일에 좌절을 느끼고 있음을 스스로 표현했다(시 137:1-3).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진보적 기독교가 직면하는 유혹은 지배문화를 수용하는 것이고, 보수적인 기독교가 직면하는 유혹은 지배문화와 단절된 채로 남아서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적절하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상상하면서 기억하는 일이 우리를 견디게 만드는 힘을 준다.’(sustaining power of imaginative remembering)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다.’는 신선한 이해이다. 토라를 설교하고 가르치고 공부하는 목적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정립하여, 다른 방식으로 신뢰하고 다른 방식으로 두려워하고, 자신을 대안의 세상에 관한 이야기에 조율하기 위함이다.”11)
종합하자면 브루그만의 오경 논의는 온건한 비평적 오경읽기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학적 접근으로 시작한 정경 신학적 읽기였다. 브루그만은 오경이 최종적으로 결집된 사회사적 배경을 바벨론 포로기에 두고 그 상황 아래서 토라가 당시의 포로 민들에게(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어떤 기능을 했는지를 매우 실존적으로 설명하는 신학적 해석을 보여주었다. 그의 다양한 글에서 자주 사용되는 “유수(流囚)와 귀향”(exile and homecoming)이란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에겐 바벨론에로의 사로잡힘(exile)의 경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현대의 크리스천들에게도 실존적 위기를 대변하는 가장 좋은 은유가 된다.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 특별히 이교문화권 가운데 살고 있는 기독교 후기 기독교인들에게 토라는 상당히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에리 C. 레더의 오경이해
최근에 오경(토라)을 한 권의 책으로 새롭게 읽는 방식을 제안한 학자가 있다. 에리 레더 박사이다.12) 브루그만의 오경이해가 사회학적 접근에서 출발하였다면 에리 레더는 좀 더 본문 중심적 접근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레더는 오경 전체를 일종의 거대 내러티브로 본다. 오경을 내러티브로 본다는 말은 내러티브가 어떤 사건이나 갈등과 함께 시작되며, 이 갈등은 결론 부분에서 해결되면서 끝이 난다는 뜻이다. 물론 해결된다는 것이 항상 긍정적인 끝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열려진 끝”(open end)도 끝이다. 어쨌든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내러티브의 갈등은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다는 것과 그 결과로 그들이 에덴동산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추방되었다는데서 시작된다. 오경의 첫 부분에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추방”이라는 내러티브상의 근본적 갈등이 제기되고, 오경의 나머지 부분들은 이 근본적인 갈등이 어떻게 수많은 또 다른 갈등들의 터널을 지나면서 종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문제는 창세기 초반부에서 제기된 내러티브상의 갈등, 즉 “하나님의 임재로부터의 추방”이라는 본질적 갈등문제가 오경의 마지막인 신명기의 끝부분에 가서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대표되는 모세와 이스라엘은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모압 평지에서 약속의 땅을 기다려야 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마치 아담과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쫓겨나 유랑자처럼 살았듯이 그들도 그렇게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도 들어가지 못한 채로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지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기다리는 공동체로 남아있다.
이런 패턴은 오경에 이어 나오는 역사서(여호수아-열왕기)에서도 반복된다. 역사서의 맨 마지막 부분 역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낯선 땅으로 추방된 이스라엘을 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다의 추방(exile)으로 역사서가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왕하 25장). 그들은 추방(exile)되었던 이국땅에서 약속의 땅에로의 “귀향”(homecoming)을 기다리는 공동체로 남아 있다. 창세기의 시작과 함께 발생한 내러티브상의 갈등은 신명기 결론부분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채 열왕기서 마지막 부분에서도 다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추방된 인류의 첫 조상들과 그들의 “추방됨”(exile)을 짊어지고 사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모두 함께 내러티브상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신약의 교회 공동체는 비록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내주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현재적으로 그리스도는 부재하고 계시고 또한 아직도 교회 공동체는 영원한 안식을 기다려야하는 광야의 순례자 집단이기 때문이다.13)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오경의 내러티브상의 갈등소재는 오경을 넘어 이스라엘의 전 역사로, 그리고 그곳을 넘어 성경 전체 내러티브를 포괄한다. 레더는 이것이 오경을 단순히 유대교의 경전이 아닌 기독교의 경전으로 기독교적으로 읽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따라서 모세오경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이 내러티브를 읽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모압 평지에 다시 서게 한다.”14)
레더는 오경 안에 내러티브와 율법조항들이 혼재되어 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고,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나름대로 해결점을 제안하다. 사실 이 문제는 오경 연구사에서 지속적인 관심사였다.15) 내러티브와 율법조항들은 서로 아무런 문학적 관련성 없이 마구 섞여 있다고 생각했던 전 시대의 학계의 동향과는 달리 최근에는 어떻게 일관성 있게 오경 전체를 읽을 것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레더는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하벨(Habel)의 욥기 주석 방법론을 인용한다.16) 욥기서는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내러티브로 되어 있다. 전자는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후자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려주는 3인칭 내러티브 본문이다. 그 가운데 들어 있는 내용은 대화와 독백과 같은 2인칭 본문이다. 서로 다른 장르지만 아무런 의도 없이 이렇게 현재의 상태로 놓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내러티브로 기록된 세 곳의 주석적 설명들(욥 1:22; 2:10; 31:40c)을 주목하면서 세 개의 큰 단락들이(욥 1:1-2:10; 2:11-31:40; 32:1-42:17) 욥기의 플롯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7)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레더는 오경 전체를 일정한 플롯을 지닌 거대 내러티브로 읽는다. 그에게 있어서 오경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로부터 추방”이란 주제를 중심으로 변주곡(變奏曲)을 연주하고 있는 오중주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모세오경 각 권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주제를 더욱 심화시킨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한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 에덴동산에 관한 이야기로 그 첫 부분을 장식한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임재로 새롭게 특징지어 구별되는 또 하나의 처소(성막)에 대한 설계와 중건을 묘사한다. 레위기와 민수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약속의 땅을 향한 삶을 형성하는 토라를 이스라엘에게 상기시킨다. 마지막으로 신명기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법도와 율례를 이스라엘에게 반복하여 가르친다.”18)
그러나 문제는 신명기의 마지막이 보여주듯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의 후손들은 “아브라함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형태로, 광야에 새롭게 마련된 하나님의 처소(성막)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추방된 “시원적(始原的, protological) 문제”에는 대답을 얻게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 땅으로의 진입을 간절히 갈망하고 기다리는 공동체로 광야에 남아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경(토라)의 목적은 인류의 본질적 문제, 즉 시작부터 하나님께 반역하고 배반하여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추방되었다는 본질적 문제, 정처 없는 나그네의 신세로 아직도 광야에서 살고 있는 존재라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대답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공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적인 땅으로서 안식의 땅(가나안)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공간이야말로 인간이 거처를 삼아야할 진정한 본향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토라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토라)을 주의 깊게 경청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레더는 레위기가 오경의 중심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레위기가 오경의 중심축을 이룬다는 말은 나머지 책들이 레위기를 중심으로 동심원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창세기가 “열방나라들과의 분리”(창세기의 톨레돗 구분법), “복 주심”(아브라함의 선택과 소명), “약속의 땅을 목도함”(야곱과 요셉의 임종), “자손들과 그 땅”(창세기 마지막 단락인 요셉의 임종고백, 창 50:22-26)을 주제로 삼고 있는 반면에19) 신명기는 이러한 창세기의 주제들은 그대로 반복하고 강화한다.20) 한편 출애굽기는 민수기와 한 쌍을 이루면서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배교와 재앙들”, “바로와 박수와 술객” “장자/레위인”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는데 민수기가 출애굽기의 주제로 회귀하여 그 주제를 보완하는 형국이다.21) 이런 구조 안에서 레위기는 오경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제사” “정결” “거룩”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22) 레위기가 오경의 중심축을 이루는 이유를 레더는 이렇게 설명한다.
“오경 내러티브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측면에서 이야기 하자면, 레위기의 규례들과 중앙 성소에서의 제의의 실행은, 아담 후손들이 받아 마땅한 추방과 부정함 그리고 죽음을 미연에 막아줌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안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레위기에 기록된 규례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면서 발생하게 될 빈 공간들을 채워준다. 하나님이 창조를 설계하시고 그 임재를 통해 복으로 가득한 거룩한 집을 마련해 주셨던 것처럼(창세기의 천지창조), 또한 하나님 당신께서 거하실 처소를 직접 설계하셨던 것처럼(출애굽기의 성막건립), 야웨 하나님은 그 임재 안에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될 공간을 마련하신다.”23)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삶은 성막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제의와 정결과 거룩을 주제로 하는 레위기는 성막에 관한 책이다. 그렇다면 레위기에 앞선 출애굽기는 어떤가? 출애굽기는 바로를 주군으로 섬겼던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받음으로써 언약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고(19-24장) 곧이어 이스라엘 안에 임재하시는 천상왕의 왕실로서 성막 건립에 관한 자세하고 긴 지시사항들을 담고 있다(25-40장). 출애굽기 역시 성막이야기로 절정을 이룬다. 동시에 이 성막은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연상케 하는 “야웨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건축물”로 기능한다.24)
한편 레위기 다음에 나오는 민수기는 천상의 왕 야웨 하나님을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군사작전을 연상케 하는 대열로 정렬하여 앞으로 진군한다. 성막은 군사작전에서의 지휘소(Command Post) 역할을 한다. 야웨의 군대로서 이스라엘은 모든 명령을 지휘소로부터 전달받는다. 그들은 야웨 하나님의 임재를 광야에서 경험하면서 약속의 땅으로 나아간다. 오경에서의 성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성육신하시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 임재와 현존으로서 성육신의 궁극적 목적은 건물로서의 성막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그들이 이 교훈적(내러티브)이고도 제의적인 명령(율법)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성막의 도움이 없이도(요 2:21; 고전 3:16; 6:19; 고후 7:1)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기에 합당한 정결함과 거룩함을 실현하기를 원하신다.”25)
앞서 이야기했듯이, 토라로서 오경이 제기하는 문제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추방당한 제사장적 인류(아담과 해와)”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의 멀리 떠나 나그네처럼 사는 모티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 이야기의 동맥을 이룬다. 그들은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의 성취를 멀리서 보면서 이방의 땅에 산다. 창세기는 생명창조의 찬란함으로 시작하지만 낯선 땅 애급에서 관으로 끝을 맺는다(창 1:1; 50:26). 창세기(創世記)가 멸세기(滅世紀)로 끝을 맺는 모습이다. 그러나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복음처럼 죽음의 영토에 있던 언약의 자손들을 야웨는 구원하신다. 출애굽기는 바로와 야웨와의 왕권 대결에서 야웨의 승리를 노래한다. 야웨는 자기의 백성을 되찾아 제사장 백성으로 삼는다. 그리고 시내 산에서 그들에게 율법(토라)을 주신다. 그들의 삶을 구성하고 형성하는 유일한 규범으로서 토라가 주어진다. 그들은 토라를 통해 하나님께 전적인 복종을 배우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하나님을 삶의 중앙에 모셔 들이는 상징으로 성막을 건립하게 하신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약속의 땅에까지 간 것은 아니다. 그들은 광야의 백성으로 남아 있다. 야웨의 군대로서 그들은 사령관의 지휘소인 성막을 중심으로 전열을 개편한다. 약속의 땅의 접경지대에 도달해서 그들은 다시금 야웨의 토라를 듣는다.
“우리 하나님 야웨는 오직 유일하신 야웨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라.”(신 6:4-5)26)
봉신(封臣, vassal)으로서 이스라엘은 주군(主君, suzerain)이신 야웨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한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신명기는 마친다. 열려진 끝이다. 창세기의 끝이 그렇듯이 신명기의 끝도 그렇다. 약속의 땅을 기다리면서 끝을 맺고 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직도 광야에 위치하고 있다. 그들은 광야에서 희망 공동체로서, 믿음 공동체로서, 사랑 공동체로서 서로를 보듬으면서 그들의 유일한 주권자이신 야웨와 그의 토라에 전적 순복을 하며 살아가는 순례 백성이다.
3. 종합적 모색
브루그만과 레더는 오경 이해에 밝은 빛을 비추고 있다. 브루그만은 “추방과 귀향”이라는 관점에서 오경을 읽을 것을 제안하면서 토라가 “상상력의 규범적 행위”로 기능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토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동인이며, 특별히 이교적(바벨론 유수적) 상황아래 놓여 있는 교회 공동체와 수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그들의 젊은 세대들에게 천지를 창조하신 한분 하나님, 그들을 구속하신 구원자 하나님께만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강력한 부르짖음을 담고 있는 문헌이다. 교회 공동체는 지금이야 말로 포로기적 상황인 것을 기억하고 그들의 기원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기억하여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일차적으로 “기억 공동체”(community of memory) 혹은 “전승 공동체”(community of traditions)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부지런히 “말씀 교육”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설교를 통해, 교육을 통해, 상담을 통해, 선교를 통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신 8:3) 해야 할 것이다.
한편 레더의 오경 이해는 “광야적 삶”에 대한 액센트가 강하다. 오경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추방되어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다. 인류의 조상으로서 아담과 해와의 실낙원 이야기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방 땅에서의 유랑이야기로부터, 애급이라는 객지에서 타향 생활하는 야곱의 자손 이야기로부터, 애급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지만 아직 그곳에 도달하지 않은 “여정의 공동체”의 이야기까지 오경은 아직도 “길”위에 있는 순례 공동체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소망하며 지금 여기 광야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오경은 이런 의미에서 근본적인 질문과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들은 광야에 살면서 땅을 소유하지 않는다. 아니 소유할 수도 없다. 언제나 이동 중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땅에 정착하고 땅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계획을 다 세운다. 땅을 차지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만의 삶의 터전을 확보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땅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살이가 결국 땅따먹기가 아닌가? 불편한 진실을 말하자면, 인류는 에덴의 동편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도부터 늘 부정과 부패와 폭력과 압제와 학대와 착취라는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피조세계는 인간의 죄의 폭력성으로 인해 더러워졌다. 에덴동산은 거룩한 성소였다. 아담과 하와는 제사장적 커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성소를 더럽혔다. 거룩한 것을 더럽힘(不淨)으로써 그들 역시 부정하게 되었고 성소, 곧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
불안정한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면서도부터 인류는 역설적으로 인간(“아담”)의 본질인 땅(“아다마”)에 정착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왔다. 특별히 자기들만의 땅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요즈음 말라 하자면 자기만의 “삶의 공간”(lebensraum)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영토전쟁을 치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영토 확장이라는 땅 따먹기에 몰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땅을 차지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인가? 오경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그 대신 오경은 사람들의 본원적인 문제는 땅을 차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천명한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유랑과 방랑, 어둠과 죽음의 영토에 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류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을 문젯거리로 전락시켰다.
그렇다. “땅”은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유혹이며, 과제인 동시에 위협이기도 하다.27) 이스라엘은 출애굽은 하였지만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오경의 마지막인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은 요단의 경계에 서 있다. 요단의 경계에서 그들은 다시금 토라를 듣게 된다. 브루그만의 통찰력 있는 지적에 따르면 요단의 경계는 토라의 장소이기도 한다.
“전승에 따르면 토라는 시내 산에서 온 것이지만, 그것은 요단 경계에서 새롭게 제시되고, 해석되고, 강조되었다. 토라는 이스라엘이 땅에 들어가게 될 때 결정적인 방법으로 그들과 관계하게 된다. 그 관계는 조상들의 열망이나 종살이의 어려움, 불안한 우거(寓居)가 아니라, 그 땅에서 오직 야웨와 함께 하는 것에서 이루어진다.”28)
“야웨와 함께 하는 것”, “하나님의 임재 아래 사는 것”, 이것이 토라가 가르치고 내용이며 가리키는 목표이다. 그러므로 광야에 체류하고 있는 순례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은 토라를 중심으로, 그리고 그 토라가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을 중심으로 삶을 구성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그들에게 토라는 광야에서의 삶의 방식이다.
1) “광야에서”29)
그렇다면 광야는 단순히 역사-지리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이 땅에 뿌리 내린 정착민으로 여기지 말 것을 가르치는 신학적 실체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비로소 그들이 이방인인지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구별 짓게 되는 시험장소가 된다(마태 6:32).
하나님이 광야와 사막을 선택하여 그의 종들의 출생지로, 그의 백성의 요람으로 삼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은 샘물이 풍부하고 비가 흡족하게 내려 풍요로운 초지를 이루고 있었던 갈대아 우르 지방으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강수량이 거의 없고 목초지가 되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네게브 광야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의 후손 이삭과 야곱 역시 네게브 지역을 떠돌면서 살았다.
이스라엘인들이 애급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가면서 광야와 사막을 횡단한 것은 단순히 속박으로부터 자유에 이르는 동안의 잠정적인 중간 과정만은 아니었다. 광야는 하나님 아래서 국가로 태어난 그들의 출생 장소였다. 그리고 그들이 교육받고 양육되어진 가정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야웨 하나님을 일차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광야의 하나님, 사막의 하나님으로 인식하였다.30) 그곳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연약함, 무능력, 무기력을 철저하게 경험해야했던 장소였다.
그리고 그곳은 그들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배우도록 준비된 교육의 장소였다. 광야의 경험 없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밤의 냉기, 건조함과 메마름, 고통스런 광야의 열풍 등과 같은 적대적 세력과 악조건 아래 살아야만 했던 곳이다. 달라 말해 생명은 늘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 연약한 숨을 쉬고 있었던 장소였다.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이 잘 지적했듯이, “광야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인 것이다. 광야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곳은 인간의 미래와 운명이 철저하게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만 움직여지고 조정되는 곳이다. 언제 어디로부터 내일을 위한 오늘의 양식이 차려질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광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를 알아 볼 수 있었던 최상의 적격 장소였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사는 줄”(신 8:3)을 뼈저리게 배웠어야만 했던 곳이 광야였다.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양식을 주셨으며, 주시되 정규적으로 규칙적으로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신실과 인애(“레헴과 헨” “에메트와 헤세드”)은 항상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으로 응답되었다. 그들의 성격은 급하였고, 인내하는 능력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들의 마음을 사막처럼 척박해져갔고 그들의 생각은 광야처럼 단단해져갔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광야에서 능히 식탈을 준비할 수 있겠는가?” “그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배할 수 있겠는가?”(시 78:19,20)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조소하였다. 그들이 누군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 아닌가?
2) “토라영성”(Torah Spirituality)
그들의 실패는 다름 아닌,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道, 데렉)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은 길이 없는 광야에서 길을 인도 받아 가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가야할 “길”을 잘 알고 있어야했으며, 그 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토라)에 대한 전적 순종을 통해서만 알려진 길이었다. 하나님의 토라는 광야의 “길” 그 자체였다. 하나님의 토라는 광야를 걷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유일한 “길”이었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길‘은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곧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생명의 길, 자유로 가는 길은 곧 그분의 선포된 “말씀”(토라)이었다. 이 사실은 왜 광야 여정의 시작에 토라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는지를 설명한다. 달리 말해 출애굽한 후 대략 오순절이 지난 즈음에 시내 산자락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중재자로 삼아 이스라엘에게 토라(율법)를 수여하셨다. 그들에게는 지금부터 가야할 길이 아득하였기 때문이었다. 길이 없는 것을 걸어가야 하는 그들에게 토라는 곧 “길”(道)을 의미했고 생명을 의미했다.
신약의 저자 가운데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소재로 신약교회의 정체성을 가장 감동적으로 그려주고 있는 사람이 히브리서의 저자이다.31) 광야를 지나는 천성의 순례자의 모습으로 신앙 공동체를 묘사하고 있는 그의 마음에는 기나긴 행렬의 순례자들의 대장정이 한 폭의 영상처럼 깊이 각인 되어 있다.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신약교회는 “하늘 나그네”(天客)들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살면서 약속의 땅에서의 안식을 고대하였던 것처럼 장차 올 안식을 소망하며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들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광야에서 울려 퍼졌던 “그 말씀”(토라)에 귀를 기울여 순종할 때만 진정한 의미에서 “안식”을 얻게 되었다. 히브리서 3장 11절에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다”는 말 대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광야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래적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준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광야를 가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안식을 지금 여기에서도 미리 맛보며 살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을 전혀 안식할 수 없는 곳, 광야의 상황 아래서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3:8-11에서 시편 95:7-11을 인용하면서 구약의 광야교회 시절을 그려내고 있다. 구약의 중요한 예전적(禮典的, liturgical) 전통 중 하나인 “역사낭송”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베벨론 포로기와 포로후기,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유랑하던 유대인들이 그들의 회당에서 낭송되었을 이 시편은 그들 마음속에 깊은 실존적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시였다.
시편 95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때 불리던 노래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에 의하면 시편 95장은 장막절에 불리던 시편이라고 한다. 초대교회 이후로 기독교회는 종종 시 95장을 예배의 시작을 선언하면서 낭독하곤 하였다. 시 95장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 음성 듣기를 거부하지 말 것을 선언하면서(1-7절) 옛적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회중들에게 기억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오는 예배하는 무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오는 것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오는 것이 동일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모습과, 후에 시편저자 당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에 들어오는 모습을 동일한 선상에서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두 가지 모습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들어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다. 달리 말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함이었고, 성전에 들어가는 이유도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즉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참된 안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가나안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잠정적 안식(provisional rest)의 표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최낙재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잘 정의하고 있다.
“그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은 아니고,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현세적인 것으로 표시하는 표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생각나게 하고 그것을 깨닫게 할 만한 상징물이 된 것이다.”32)
결국 하나님의 안식은 단순히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따라서 가나안을 안식의 대명사로 사용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당치 못하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였을 때 그들은 진정으로 안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약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안식의 때는 아직도 미래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히 4:1,3,8,9). 이처럼 구약과 신약은 안식을 앞으로 성취되어야할 미래의 것으로 보는 동시에 지금 여기 광야에서 경험하는 실체라고도 한다.
4. 나가면서
기독교정경을 여는 첫 번째 책으로서 오경(토라)은 광야 교회를 위한 정경이다. 오경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추방당한 인류, 정착민으로서가 아니라 유목민으로서 광야적 삶을 살았던 족장들의 이야기,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생하였지만 광야에서 훈육되었던 이스라엘의 삶, 광야 여정의 초기에 토라를 수여받고 토라의 길로 가야만 했던 하나님의 백성들,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이스라엘, 요단의 경계선상에서 약속을 땅을 기다리는 소망공동체로 남겨진 광야교회에 관한 책이다. 아직도 가야할 땅의 실체를 기다리며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고 살아가야하는 광야의 순례공동체가 “다시 들어야할” 이야기다.33)
그러나 거기서 오경의 끝은 아니다. 새로운 이스라엘로 오신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옛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적 삶을 다시 살아내셨던 이야기가 계속된다. 교회 공동체는 지금도 계속되는 광야 이야기의 한 장을 엮여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광야 백성으로서 교회는 광야에서 주어졌던 토라에 의해 형성되는 “토라영성”을 소유해야한다.
무엇이 토라 영성인가? 교회는 공동체적으로 광야를 지나면서 그들이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배우고, 세상과 구별되게 살며 자기를 부인하는 법을 배워 가야 한다. 이것이 신약에서 말하는 공동체적 제자도의 핵심이지 않는가? 광야 교회로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전에서 한분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에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광야 시절을 야웨 하나님만을 경외 하는 법을 배우는 배움터로 삼아야 한다.34)
토라영성은 토라의 가르침으로 자기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한길로만 걷는 공동체가 소유하는 영성이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119:54) 이 토라영성은 시편기자가 “토라 시”(Torah Psalm)에서 그렇게도 사모하고 읊조렸던 야웨의 가르침(토라)에 대한 열정적 헌신 안에 반영되는 공동체 영성이다.35) 자신들의 삶의 행복을 오로지 야웨의 토라에서 찾으며, 주야로 야웨의 토라를 읊조리는 공동체이다(시 1:2). 한번 들어보라. 토라에 대한 이런 헌신적 갈구를 느껴보라.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119:20)
“내가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입니다.”(119:45)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입니다.”(119:56)
“고난 당하기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119:67)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나이다.”(119:103).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나이다.” (119:105)
토라영성을 반영하고 있는 이상의 구절들은 단순히 개인적 고백이 아니다. 시편이 포로기 이후에 새롭게 구성되고 회복된 공동체를 위해 편집되고 사용된 제의서(祭儀書)로서 “찬양과 기도서”였다면, 그들은 이 찬양과 기도서가 그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다섯 권으로 구성된 “단권 토라”가 이스라엘의 역사 초기에 그들이 삶을 형성하고 이끌어가고 교육시켰던 유일한 신앙교육문서(catechism)였던 것처럼, 다섯 권으로 구성된 “단권 시편” 역시 토라처럼 포로 되었던 이방 땅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하나님의 가르침(토라)에 응답하는 찬양과 기도를 가르쳐주는 신앙교육문서(catechism)로 기능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역사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토라와 시편은 그들의 공동체적 영성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36) 이를 굳이 현대적으로 적용하자면, 새 언약의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그에 대한 반응인 찬양과 기도로 구성된 예배 행위를 통해 공동체적 영성과 신앙을 제대로 양육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정경으로서 오경은 지금도 신학적 항구성을 갖고 요단경계에 서있는 광야 교회에게 말씀하고 있으며 우리 역시 그 말씀을 다시 귀담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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