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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by 【고동엽】 2022. 3. 4.

하나님의 뜻

제럴드 L. 싯처, 윤종석 역, <하나님의 뜻>, 성서유니온선교회, 2001


제1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라
1.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인생의 첫 20년을 나는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확신하며 살았다. 나는 의사가 될 참이었다(15).

미래를 예측 못하는 우리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생각에는 꼭 취해야 할 것처럼 보이는 길이 중서부의 날씨만큼이나 급변할 수 있다. 그러나 길을 가는 내내 하나님께 귀기울이며 반응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1학년 작문 시간에 괜찮은 글을 써내는 것만큼이나 사소해 보이는 일들도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이런 작은 일들에 충실한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미래에 대한 집착은 어줍잖은 방해거리인지도 모른다(17).
스무 살 때 나는 의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으나 실은 목사가 되었다. 서른 살 때 나는 목회의 길에 그대로 남으려 했으나 지금은 대학 교수가 되었다. 마흔 살 때 나는 왕성한 작가가 될 생각이 없었으나 지금 다섯 번째 책인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걸음걸음마다 나는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했다. 다 아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내 삶은 내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다(17).
내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번번이 놓치는 나쁜 습관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 자체에 대해 그릇된 개념을 갖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18).
나는 하나님의 뜻의 실체를 오해해왔다는 결론을 내렸다(18).

상실의 고통
나는 ‘우리가 발견하여 따라야 하는 미래의 길’로 언급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말이 성경에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0).

전통적 접근
전통적 접근에서 보는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가 따라야 할 미래의 구체적 길로 규정된다. 하나님은 그 길을 아시며 우리가 따르도록 정해 놓으셨다. 우리의 책임은 그 길-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따를 수 있는 많은 길들 중 정작 따라야 할 한 길을 찾아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획해 놓으신 그 길을 말이다. 바른 선택을 내리면 그분의 은혜를 얻고 그분이 주신 사명을 이루어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다(21).
자연히 이 모델에 따르면, 결정을 내릴 시점이 되면 삶은 갑자기 미로가 된다. 출구는 하나뿐이다. 다른 길은 다 막다른 골목이요 잘못된 선택이다. 물론 하나님은 옳은 길을 아신다. 처음부터 당신 뜻대로 정하신 길이 아니던가. 우리는 그 뜻을 찾아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의 결과는 막중하다. 바로 선택하면 그분의 복을 누리며 성공과 행복을 얻는다. 잘못 선택하면 길을 잃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놓친 채 영원히 풀 수 없는 미로에 갇혀 있게 된다(21).
그래서 우리는 갈 길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하고, 표징을 바라고, 조언을 구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성경을 읽고,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 하나님이 분명한 신호를 보내주실 거라는 희망 속에 기다린다(21).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통적 접근에 문제점
1. 이 접근은 날마다 내리는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결정 대신 미래의 중요해 보이는 결정에 마음을 쏟게 한다(22).
“내가 어느 길을 택하든 그것이 정말 중요한가?” 나는 못 돼먹은 의사들과 목사들을 알고 있었다. 즉 어느 길도 내게 훌륭한 인품이나 숭고한 대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것이다. 점차 깨달은 사실이지만, 어느 직업이고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은 별로 없다. 의사와 목사도 예외는 아니다. 한편으로 나는 제2의 알베르트 슈바이처나 제2의 빌리 그레이엄이 될 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2의 나치당 의사나 제2의 사기꾼 전도자가 도리 수도 있었다. 어느 길을 가든 결국 내 직무 수행은 내 성품의 질과 믿음의 깊이와 능력의 정도에 달린 일이었다(24).
날마다 내리는 작은 선택-부지런한 학생, 자상한 남편, 훈련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충실하지 않는 한 어느 길을 택하든 내가 내 삶에 진정 이루기 원하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에는 이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24).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가능성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현재 이미 알고 있는 일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 반응하지 않으려는 태도다(24).
우리 앞에는 그런 선택이 많이 있고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그 선택이 나머지 모든 것의 궤도를 결정한다. 성경에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말은 별로 없고, 오늘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그토록 많이 나와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25).
2. 하나님관이 잘못되어 있고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전통적 접근 방식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이유로든 당신의 뜻을 숨겨두고 우리가 찾게 만드신다. 마치 우리와 천상의 숨바꼭질이라도 하시는 듯하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숨기시고 우리는 그것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 과정에 서 그분은 우리의 일을 어렵게 만들기를 즐기신다. 그분은 발견되는 것보다 숨기는 것을, 우리를 즐겁게 하시는 것보다 낙심케 하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25).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설득하시는 것만도 하나님께는 이미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 뜻을 숨기심으로 당신과 우리를 더 힘들게 하실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27)
난관과 고난에 부딪칠 때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27).

내 고통은 하나님이 뜻하신 것인가?(28)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욥을 믿는 모험을 감행하신 것이다(29).
3. 전통적인 접근은 문제는 앞날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통제할 수 없는 미래를 내 힘으로 통제하려는 욕심과 다르지 않다. 미지의 미래가 우리 앞에 서서히 펼쳐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모험보다는 미래를 미리 아는 안전을 원한다(30).

2. 우리의 놀라운 자유
우리는 계획을 세울 수 있지만 그 계획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34).
10가지 중요한 결정을 앞 두고 100가지 취할 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해 주었으면 하고 기도하지만, 예수님의 요구는 단순하다. 마음이 깨끗하고 동기가 순수하며 바람직한 대한 중 선한 양심으로 어느 길을 선택하든 여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다(36).
성경의 신앙 인물들에게 고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고뇌가 아니라 그 뜻대로 살려는 고뇌이다(39).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자신의 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문제로 크게 씨름한 것 같지 않다. 그의 내면에 열정과 두려움을 자아낸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39).
하나님의 뜻을 이런 관점으로 본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선택의 부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무엇도 우리의 그 책임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우리는 본성상 어쩔 수 없이 먹이를 사냥하고 남쪽으로 날아가고 둥지를 트는 그런 본능적 동물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선택해야 한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39).
놀라운 결론
하나님의 뜻은 미래보다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그분의 뜻은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미래보다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그분의 뜻은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동기를 살핀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도록 우리에게 진정 주어진 유일한 시간은 현 순간이다.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힘쓰라고 명하시는 기본 책임이다(40).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가정과 직장에서의 몸가짐, 시간과 재능의 사용, 허드렛일도 마다 않는 태도, 봉사의 각오, 희생적 삶에 대한 헌신 등 우리가 날마다 내리는 선택으로 결정된다. 그 선택이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기 위한 것인가? 미래가 아무리 희미해 보여도 우리는 일상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고 있다. 내일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해서 오늘 그분의 뜻대로 살 책임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41).
하나님의 뜻을 이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놀라운 자유가 생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미래에 대해 어떤 길을 선택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 우리가 취하여 따를 수 있는 길과 방향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하나님을 구하는 한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그분의 뜻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길-우리가 택하는 길-만이 그분의 뜻이 된다(40).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대해 품고 계신 뜻은 하나가 아니라 많다(41).
빌과 결혼하든 에드워드와 결혼하든 그것은 우리의 자유다. 컴퓨터 전문가가 되든 보육원 교사가 되든 우리의 자유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우위에 놓을 자유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첫째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삶 전체를 그분께 내어드리기만 하면 갑자기 세상은 온통 가능성의 천지로 변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유익을 위해 미래를 비롯해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중요한 단 하나의 조건은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따르는 것이다(42).

불확실하게 하신 까닭
1. 삶을 불확실하게 하신 데는 실제로 좋은 이유들이 있다. 우선 불확실성은 우리로 삶을 성과 속으로 구분하지 않게 해준다. C.S 루이스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저 종교적인 것 몇 가지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자 구원자로서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요구하시며 당연히 우리를 지배하신다. 삶 전체가 종교적이며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 자신을 원하신다(44).
17세기 당시 신앙 생활의 스승이자 현명한 상담자로 알려졌던 프란시스 드 살레는 참된 헌신의 효과란 당연히 삶 전체로 넘쳐흐르게 마련이며,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모든 구분을 없애준다고 믿었다. 그는 참된 헌신이란 삶 전체를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으로 정의했다(44).

2.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밀쳐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45).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뒤로 미루는 태도는 나쁜 습관으로 굳어진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계속 연기할 것이다. 늘 지금이 아니라 항상 나중이 되는 것이다(46).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할 시간은 지금이다. 한번도 나중이 아니라 항상 지금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기란 적어도 처음에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연습을 통해서만 쉬워질 수 있으니 지금 시작하는 것이 좋다.”(46)
3.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의 불확실성은 우리에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와 확신과 안전을 가져다 준다. 진실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구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길을 선택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47).
시간이 가면서 우리는 하나의 유형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살아온 그 길이 곧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유형은 이미 살아온 삶을 되돌아봄으로써만, 지나온 인생을 회고함으로써만 볼 수 있다. 그때까지는 우리의 에너지를 현 순간에 집중하자. 하나님은 분명해져야 할 순간에는 분명해지실 것이다(49).

3. 장애물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는 집착은 다분히 현대의 산물이요 서구의 특징적 현상이다. 우리의 혼돈은 어느 정도 포스트모던 세상의 삶의 결과다(50).
우리가 사는 세상의 세가지 특징
1. 선택의 길이 너무 많다.
2. 바쁘다.
3.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

전통
“우리는 어떻게 균형을 잃지 않을까?” 그것은 “전통!”이다(52).
“우리는 각자가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아는 것”도 전통 덕이었다(52).

과도한 선택 폭
경험을 통해 누구나 알다시피 선택의 자유는 짐이 될 수 있다(53).
<만인이 불평하는 이유>(Why Is Everyone So Cranky)의 저자 C. 레슬리 찰스(Leslie Chares)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삶이 가져다 줄 수 있고 마땅히 가져다주어야 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높여놓았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얻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이기적 법칙의 불문율에 따라 살아간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할 때에 얻을 자격이 있다. 나는 최신, 최대, 최고, 최다의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내 권리다(55).
선택의 폭이 넓은 만큼 살기 좋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선택의 가짓수는 기만일 수 있다. 양이 곧 질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을 수 있는 길이 열 가지가 주어진다면 그 넓은 선택 폭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까?(55)

정신없이 바쁜 삶
선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다. 하지만 삶이 너무 바빠졌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바쁜 삶은 우리의 판단을, 특히 현명한 선택에 필요한 분별력을 흐려놓는다. 우리는 할 일이 너무 많다(56).
신문 칼럼니스트 엘렌 굿멘(Ellen Goodman)의 말처럼 예전에는 “어떻게 지내십니까?”하고 물으면 “잘 지냅니다!”하고 답하던 것이 요즘은 “바쁩니다!”로 바뀌었다(56).
프란시스 드 살레의 경고도 귀담아 듣지 못했다. “충동적으로 급히 하는 일 치고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57)
현재의 바쁜 삶으로 모자란다는 듯 우리의 새로운 책임을 수락해야 할 끊임없는 압력에 시달린다. 거절할 경우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나 않을까 우려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택에 수반되는 의미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각각의 새로운 책임은 우리를 산만한 삶의 스트레스와 과잉 헌신의 늪 속으로 더 깊이 몰아넣는다(58).
생산성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덕목인가?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언제나 선한 일인가? 영혼을 잃는 대가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과연 가치 있는 일인가?(59)
그렇게 정신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정신없이 바쁘게 살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까? 결국 자신의 영혼 자체를 잃는다 해도 야망을 이루는 것이 그토록 중요할까? 분명 그것은 너무 비싼 대가다(61).

공동체의 상실
우리는 또한 분열된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넘나드는 삶을 살고 있다. 동네, 교회, 직장, 클럽, 팀, 위원회 등 4-6개의 분리된 우주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61).
“한 인간을 진정으로 안다고 누가 감히 자신할 수 있을까?”(쉐레브, <조종사의 아내>).
공동체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공동체 의미는 전통 사회와는 다르다. 우리는 다수의 공동체와 관계하지만 일단의 사람들 이 내 삶의 전체를 보거나 나를 잘 알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가 공동체를 경험하는 방식은 우리의 개인적 삶만큼이나 분열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날마다 서로 보면서도 말이다(63).
척 콜슨(Chuck Colson)은 이렇게 말했다. “타인과의 관계가 갈수록 선택적이 되어 가는 문화에서 불신과 의혹인 점점 깊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알지도 못하는 이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64)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우리의 씨름에는 우리가 겪고 있는 분열과 소외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진공 상태에서 결정을 내린다(65).
현대 생활의 자유가 더 좋다. 하지만 그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67).

4. 삶의 길인 단순한 순종
두 가지 자유
우리는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대중문화가 정의하는 자유란 외적 구속의 부재 그리고 개인 권리의 보호와 확장이다. 헌법에 규정된 권리다(69).
자유는 글자 그대로 상품이 되고 있다. 물론 광고는 우리가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과 살아야 할 방식은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70).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이와 대조적이다. 진정한 자유란 그리스도의 종이 될 때 찾아온다(71).
참된 자유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자신의 의지를 순종된 삶에 헌신할 때 얻을 수 있다.
많은 선택의 길이 매력 있어 보일 수 있지만 옳고도 충분한 길은 하나뿐이니 곧 순종의 길이다(언더 힐, 72).
기독교는 미국의 가치관-‘마음의 습관’을 빚었고, 미국인들이 자유를 악의 구실로 이용하지 못하게 막아줄 수 있었다(알렉시 드 토크빌, 73).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통적 접근 이면에 숨은 가정은, 선택 폭이 넓은 것은 좋은 일이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옳고 참된 길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짐이다(73).
결국 하나님의 뜻이란 한 가지 분명한 명령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하나님을 우리 삶의 절대적 중심에 모셔야 한다는 명령이다. 아이러니이지만 바로 그것을 선택할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발견한다. 그것은 순종의 자유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74).

성경이 말하는 자유
자유는 순종에서 온다(74).
자유란 내 맘대로 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 자유를 얻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 순종이 곧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76).
진정한 삶이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릴 때 주어지는 것임을 그분은 아신다(79).

예술가와 운동선수의 본
우리 문화가 정의하는 자유는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게 해준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정의하는 자유는 우리에게 우리의 창조주 구원자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게 해준다(80).
무슨 일을 하든 삶의 열매를 결정짓는 것은 순종의 강도다. 순종은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순종할 때 자유가 찾아온다(83).

제2부 삶의 소명을 분별하라

5. 직업과 사명의 구분
직업이란 세속적인 용어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 말을 자주 사용한다. 직업이란 수입을 제공하고, 교육이나 훈련이 필요하며,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한 사람의 특정한 일의 분야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직업에는 대개 모종의 권한과 지위가 뒤따른다. 직업은 내가 사회에 소속하여 기여하는 일원이라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사명이란 신학적인 용어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덜 친숙하며 의미도 더 모호하다. 사명이란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재능을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하라는, 하나님이 주신 목표라고 정의할 수 있다(90).
속세에서 인간의 일을 평가하는 방식에는 위신과 권력의 위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이 소명을 평가하는 방식에는 그런 위계가 없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일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벌어들이는 수입과 필요한 교육과 문화적 지식인들로부터 받는 시선과 무관하게 모든 일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똑같이 유용하다(95).
인생의 사명을 이룰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 사명은 지문처럼 나만의 독특한 것이다. 사명은 나의 기질과 재능과 인생 경험에서 자란다. 궁극적으로 사명이란 하나님에게서 온다. 사명이란 우리 존재의 일부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두신 것의 일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나라를 섬기는 방식의 일부다(96).
부크너는 사명을 “한 인간이 세상에서 부름 받은 일, 평생 하도록 부름 받은 일”로 정의 한다(96).

존 칼빈은 하나님이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구체적 사명을 주시며, 그 사명이 우리에게 자신이 행할 의미 있는 일과 세상을 섬길 방식과 신적 목표의식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모든 개인의 삶의 영역은 평생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송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정해주신 자리다•••••그러므로 늘 사명을 되새기며 살 때 우리는 현세의 삶을 가장 잘 다스릴 수 있다.”(97)

직업의 문제
직업은 사회에서 유익을 주는 모종의 일로 이루어진다(98).
직업은 전체 사회의 필요와 복지와 이익에 이바지한다(98).
직업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첫째, 모든 소명이 다 구체적 작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자신의 가장 깊은 관심이나 동기와 별 상관없는데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하는 경우가 있다(98).
둘째, 때로는 직업이 오히려 사명의 발견이나 추구를 방해할 수 있다. 직업은 그 분야 사람들을 하나로 연대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 단순히 ‘가족 부양’에 충분한 수입을 원한다며 파업을 정당화하는 프로 농구선수에게서 우리는 그런 연대의 결과를 본다(99).
셋째, 어떤 사명은 결코 공식적 직업이 될 수 없다(100).
직업은 협력보다는 경쟁률 나눔보다는 부를, 봉사보다는 권력을, 진실보다는 이념을 강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직업은 사리사욕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직업을 갖는 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전복 당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101).

사명의 의미
하나님의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를 ‘일반 은혜’라고 부른다. 이것은 구원의 은혜가 아니라 창조의 은혜다. 그리스도인은 물론 불신자들도 자신의 재능을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많다(102).
신념과 동기가 어떠하든 불신자들도 공동 선에 기여할 수 있고 실제로 기여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당신의 목적을 이루신다(102).
사명은 이 땅의 삶에 적용된다. 아무리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사명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뭔가 긍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그분을 높인다(102).
직업은 사람들의 수입과 권력과 직위와 위신을 생각하게 한다. 사명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필요와 도덕적 기준과 전체적 시각을 고려하게 한다(104).
인간은 직업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사명도 직업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을 규정하고 그 인간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104).
사명이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105).
내가 주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내 소명의 방향이 들어있다(105).
우리는 깊은 사명 의식에 이끌려 발견의 여정에 올라야 한다. 그 길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이르러야 한다. 꼭 따라가야 하지만 쉬운 길은 아니다(107).

6. 생의 본분 찾기
사명을 발견한다는 것은 여정을 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삶의 사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은 경험 자체를 통해서다. 사명을 발견하는 것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여인이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시도와 실험과 실행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사명이란 여정과 불가분의 관계다. 어떤 의미에서 사명 자체가 하나의 여정이다(110).
점차 펼쳐지는 정치
“내가 믿기로 하나님은 내 준거틀 안에서 나를 부르신다. 나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 있으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가-모든 것이 내 준거틀이 무엇인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올바른 접근 방식 선택에 관한 한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어도 좋다(엘리자베스 엘리엇, 115).
사명 찾기는 과학이며, 동시에 이에 못지 않게 예술이기도 하다. 그것은 간편한 단계와 손쉬운 공식을 거부하는 직관적 과정이다. 우리는 힌트와 느낌과 방향 감각을 제시하는 여러 신호에 유의해야 한다. 틀림없이 도중에 아리송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런 상황에 부딪칠 것이다. 그러나 계속 가야 한다. 계속 가면서 계속 찾아야 한다(117).

가장 깊은 동기
사명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살펴야 할 6가지 신호
1. 자신의 내면을 살펴 어떤 일에 동기를 느끼는지 알아야 한다(117).
영적인 삶이란 현실 세계와 별리된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삶의 한 부분이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인간은 온전한 인간일 수 없다. 자신의 능력을 전부 다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언더 힐, 119).
2. 사명의 발견에 있어 중요한 또 다른 요소는 재능이다. 적절한 재능이 반드시 필요하다. 좋은 의도만으로는 안 된다. 일을 해내려면 은사가 있어야 한다(120).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마땅히 그 일에 필요한 재능도 주시지요.”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 꼭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닐 수 있다.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그냥 놓아두는 편이 더 좋을 일들에 매달리게 된다(121).
물론 재능만으로는 안 된다. 재능은 사명의 단서는 되지만 사명의 필수 조건으로는 부족하다(121).
3. 인생 경험도 비슷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우리를 사명으로 떠미는 경우도 있다(122).
4. 사명의 발견과 관련된 넷째 요소는 기회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기회를 ‘환경’이라 표현했다(124).
기회란 소위 ‘열린 문’으로 찾아온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124).
기회란 베푸는 자의 호의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125).
파커 파머(Parker Palmer)는 사명에는 한계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하나의 사명은 선택할 때 우리는 다른 가능한 소명들을 제외시키는 것이다. 선택을 내리려면 좋아 보일 수 있는 다른 대안들을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을 분별해야 한다. 파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나는 되고 싶은 대로 다 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도 없다”(127)
5. 사명의 발견에 도움이 되는 다섯째 요인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명이 공동체와 동떨어져 발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128).
6. 마지막 신호가 기쁨의 신호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찾는 것을 사명의 발견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쁘게 살기 원하신다. 그분은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을 통해서도 사명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기쁨을 발견할 때 소명을 알게 된다(130).
행복과 기쁨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한 행복을 경험할 수 없다. 세상은 괴로운 곳이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다(131).

듣는 법을 배운다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듣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리들에게 대부분 사명이란 세월의 흐름과 경험을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단순히, 살면서 배움으로, 성공뿐 아니라 실패를 통해, 실험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들음을 통해 사명을 발견한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아니라, 내면의 동기, 재능, 삶의 경험, 기회, 공동체, 마음의 기쁨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132).
듣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테레사 수녀는 침묵의 자세를 취할 것이야말로 기도를 시작하는 최적의 방법임을 깨달았다. 침묵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침묵으로 기도를 시작한다. 하나님은 심령의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침묵의 친구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133).
7. 다양한 사명의 관리
사명과 사명의 충돌
각 사명은 저마다 중요한 것이다. 인생의 단 한 가지 중심 사명에 시간과 정력을 다 쏟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139).
우리의 사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140).
충돌의 일부는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찾아온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엄청난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140).
성경은 우리에게 분별력 있는 행동 지침을 일러줄 뿐 결정을 내리는 것은 우리의 자유다(142).

단순성
단순성을 소중히 여기면 복수의 사명을 더 잘 관리하는 길을 배울 수 있다. 인생에 정말 중요한 것은 많지 않다. 우리의 많은 선택들이 그 순간에는 중대해 보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덜 중요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143).
단순성은 삶의 복잡성과 요구를 감안하여 내 인생을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큰 인정을 받으며, 자신이 추구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의 초점을 잃지 말아야 한다(145).
성경이 말하는 단순성을 가꾸는 탁월한 방법이다 .일과를 모두 마친 후 그날 하루를 하나님의 임재에 비추어 되돌아보며, 매일의 평범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는 방법이다(147).
이냐시오는 우리의 삶이 아무리 복잡해도 여전히 내면의 단순성을 연습할 수 있다고 믿었다(147).

균형
균형이란 적절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가장 시급한 일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일을 택하는 것, 자신이 가장 전념하는 것 중심으로 삶을 재판하는 것을 뜻한다(148).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이 세상에 본질적으로 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악이란 단순히 선을 뒤집어놓은 것이요 삶을 혼란케 만드는 것이다(148).
이름이 보통명사처럼 유명해진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큰 일을 이루었지만 남편이나 아내, 아버지나 어머니, 친구로서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150).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균형이 유지돼야 한다. 할 일이 너무 많고 시간은 충분치 않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균형에 힘쓴다면 우리는 선한 우선순위를 바탕으로 삶에 질서를 창출해 낼 수 있다(150).

유연성
우리는 유연성 있게 살 필요가 있다. 종종 상황이 갑자기 돌이킬 수 없게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152).
통제란 신화다. 그것은 세상이 합리적이며 예측과 통제가 가능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란 전혀 그런 곳이 아니다(152).
인생이란 언제나 탄탄대로가 아니다. 큰 위기-작은 위기라도-하나에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듯한 꿈이 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최선을 다해 산다. 그러다 갑자기 일이 터진다(153).
인생이란 우리가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목에는 놀랄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153).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삶을 홀가분한 자세로 살려고 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꿈을 추구하고 경로를 구상하고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따라야 하며,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믿는 일을 행해야 한다(155).
영영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충실한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이다. 아무리 인생의 경로가 자주 바뀌어도 우리는 늘 하나님께 진실하고자 노력해야 한다(157).
단순성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는 것-를 일깨워줄 것이다. 균형은 우리에게 선한 우선순위를 좇아 삶의 질서를 찾도록 해줄 것이다. 유연성은 길가다 부딪치는 뜻밖의 일들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향한 헌신을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158).

제3부 신비를 포용하라
8. 역설과 더불어 사는 삶
하나님의 계시된 뜻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셨다.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한다면 우리가 미래에 관해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 우리는 많은 길들을 따를 수 있고 다양한 대안을 좇을 수 있다. 방향만 제대로 가고 있다면 모든 대안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길만이 실제로 그분의 뜻이 된다. 바로 우리가 선택하는 길이다. 지나고 난 후 회고해 볼 때, 비로소 우리는 길이 하나뿐이었음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이자 곧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이다(163).
그러므로 인생의 기본 방향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163).
성경은 상황마다 일일이 우리가 할 바를 말해주지 않는다. 지침과 원리는 주지만 장황한 행동 목록은 없다. 전체적 방향만 제시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와 동행을 믿으며 여전히 많은 실제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164).

하나님의 숨은 뜻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하나님의 숨은 뜻은 온 우주에 대한 그분의 주권적 통제로 이루어진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그 섭리로 모든 역사를 다스리기 때문이다(165).
하나님의 숨어있는 것은, 그분이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방식을 우리가 주어진 순간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작부터 끝을 보시며 모든 측면을 지배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 속에 들어가 그 내용이 서서히 전개되는 대로 경험하기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165).
프란시스 드 살레(Francis de sales)도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하나님의 숨은 뜻을 구분했다. 그는 그것을 각각 하나님의 ‘선포된’ 뜻과 ‘하나님의 순전한 기쁨의 뜻’으로 표현했다(165).
하나님이 믿으라고 명하시는 진리, 우리가 받게 될 복, 순종하며 살 때 피할 수 있는 벌, 우리가 세워야 할 우선순위, 순종해야 할 계명 등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 우리가 그런 원리를 아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행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선포하고 계시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포된 뜻은 그 분의 ‘갈망’일 뿐이므로 인간은 거기에 순종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선포된 뜻을 따르기 원하실 때면, 우리에게 간청하고 권하고 재촉하고 감화를 끼치고 거들고 부추기신다. 그러나 당신의 뜻을 거역하도록 허용하실 때면, 그분은 단순히 우리를 우리의 생각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살도록 놓아두신다”(166)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결과로서만이 알 수 있는 궁극적 또는 허용적 뜻이다. 그런 사건들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드 살레는 우리가 하나님의 숨은 뜻을 고난을 통해 체험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고난 속에서도 기꺼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려는 마음이야말로 ‘최고 수준의 사랑’의 표현이다. 고난이 찾아오는 이유와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려는 마음이 곧 믿음이다(166).

하나님의 주권인가 인간의 자유인가?
역설과 더불어 사는 삶
역설이란 두 가지 말이 겉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동시에 진실인 상태를 말한다(169).

성육신의 역설
하나님이 자신의 소설 안에서 어떻게 동시에 저자도 되고 등장인물도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시공을 다스리면서 동시에 시공의 제약을 받을 수 있을까? 역설이다(173).

하나님의 구원의 뜻
수많은 성경 인물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행하는 삶을 택했다. 그들은 종종 그럴 만한 이유가 없어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숨은 뜻을 모른다는 것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결국은 그 숨은 뜻이 그들의 순종을-또한 불순종을-둘러싸, 다양한 악기가 저마다 제 몫을 감당하는 영광의 심포니를 만들어냈다(179).
우리 중 하나님은 심포니의 전 악장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미 계시된 뜻을 행할 만큼은 그분을 알고 있다. 하나님을 믿고 그 계명에 순종할 만큼은 알고 있다. 기도가 항상 효험이 있어 보이지 않을 지라도 기도할 만큼은 알고 있다. 가족과 친구들이 고집을 부릴지라도 그들을 돌봐야 할 만큼은 알고 있다. 대가로 아무것도 돌아오는 것이 없을지라도 허물 많은 이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보여야 할 만큼은 알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연주해야 할 악보의 일부다. 우리는 잘 연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179).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이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땅은 하늘의 작업실이요 하늘의 모태다(크리프트, 181).
하나님을 믿어서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내가 선택을 잘못 내리면 잃을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알았다(183).

9. 제한구역이 없는 고난
고난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없다. 부당한 고난은 특히 그렇다. 위험한 모험은 비극을 부를 수 있다. 어리석은 선택은 고난을 낳을 수 있다(184).
고난은 삶을 한없이 힘들게 한다(185).

고난의 논리와 비논리
고난은 하나님의 뜻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악이나 고통을 지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분이 고난을 사용해 구속의 계획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이 표면상의 모순은 고난의 문제에 간단한 답을 원하는 이들에겐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에 대해 난처한 질문들이 뒤따르기 때문이다(187).
우리의 고난 경험은 정해진 합리성의 기준이나 분명한 예측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고난을 옳고 그름의 경계, 무죄와 유죄의 경계, 정당함과 부당함의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다. 죄는 이 사람이 짓고 결과는 엉뚱한 사람이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188).
죄는 인간의 마음을 유린한다. 고난은 죄의 산물이다. 그러나 한 인간에게 닥쳐오는 고난은 그 사람이 저지른 과오와 논리적 귀결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밥 먹듯 지으면서도 비교적 행복하게 살아간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말이다(190).

하지만 고난은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용하신다. 고난은 종종 그분의 계시된 뜻과 상충되어 보이지만 똑 같은 방식으로 그분의 숨은 뜻을 성취한다. 아무리 처참하고 부당한 고난일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여 당신의 구속의 뜻을 성취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사건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더 커다란 계획에 소용된다(191).
고난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바깥에 있다. 고난은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세계에 의도하신 것과 어긋나면서도 역사에 대한 그분의 섭리와 계획에 들어맞는다. 이 역설의 전형적 예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는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대한 순간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엄한 도전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다. 끔찍한 불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와 자비의 궁극적 표현이다(191).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사람이란 자신의 고난을 견딤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향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발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알게 된다고 말이다. 고통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고통을 알 때 우리의 자만심과 교만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깨어지는 법이다. 고통은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며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얼마나 절실히 의지해야 하는지 알게 해 준다(192).

하나님의 주권과 화해하기
인생이란 때로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다. 고난의 일부는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고난을 피할 수는 없다(195).
고난은 우리를 겸손케 하고 소망을 품게 하며, 순종을 가르치고, 훈련과 회개에 이르게 한다. “가난, 추방, 투옥, 비난, 질병, 친지의 죽음, 기타 유사한 재앙 등 어떤 고난을 당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고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196)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을 통해 구속을 이루신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다(197).
그렇게 그들은 행복한 듯 불행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197).
고난이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인생은 그렇게 끝날 필요가 없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끝내실 때까지는 끝날 수 없다. 당신의 구원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분은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다. 죄와 비극과 고난과 그 모든 것은 결코 최종 단어가 아니다. 최종 단어는 하나님께 있다(197).
고난은 시야를 가린다(198).
고난은 우리를 완전히 에워싸고 압도하여 그야말로 고난 자체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고난은 집요하고 무겁고 가차없다(198).

고난도 숲처럼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그래서 고난에 부딪칠 때 계속 전진하려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일이 있다. 첫째, 지도를 봐야 한다(199).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지도다. 성경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의 체험이 기록되어 있다(199).
고난이 마지막 이야기가 아니라 머잖아 선하게 반전될 더 큰 이야기의 한 부분임을 깨닫는 것이다(200).

끝까지 하나님을 믿으라!
길을 따라가야 한다. 바로 믿음의 길이다. 성경에 일관성 있게 흐르는 주제가 하나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살도록 부르신다는 것이다(200).

10. 고난의 유익
“믿음이란 요술 지팡이나 환불 보증이 아니다. 믿음이란 단지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네가 하루하루 걱정하지 않으며 산다는 뜻이다. 좋을 때나 힘들 때나 하나님을 붙든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닥쳐오든 다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인생을 있는 그대로-하나님이 만드신 그대로-존중한다는 뜻이다(204).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징후를 보도록 자신의 눈을 훈련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205).

믿음의 실제적 측면
믿음은 필요를 인정한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인간적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206).

기쁨의 산
그는 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증거가 거의 없을 때에도 담대히 그분을 믿어야 한다. 삶이 힘들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란 어려운 일이다. 믿음이란 당면한 상황을 너머 과거와 미래를 보는 것이다(209).

이 땅에서 맛보는 하나님의 선하심
삶이란 평탄치 않다. 그것이 본연의 모습이다. 오히려 삶은 어렵고 냉혹하고 잔인할 때가 많다. 그러나 결국은 잘될 것이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기 때문이다(215).

제4부 시간을 붙잡으라
11. 바꿀 수 없는 것
과거는 현재의 우리 모습을 만들었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과거나 과거가 나에게 미친 영향을 바꿀 수 없다. 미래는 언젠가 될 모습의 비밀을 안고 있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고사하고 통제하거나 알 수도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현 순간의 삶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우리의 기억 속에 살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우리의 상상속에 살고 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사실이다(220).

하나님의 초월
하나님은 우리처럼 현재에 매여있지 않으신다.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신다. 그분은 영원 속에 거하신다. 그분께는 모든 시간이 현재다(220).

과거의 위력
우리는 시간에 매여 있다. 과거가 우리에게 엄청난 위력을 행사함에도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 과거는 우리가 내린 선택들에 대한 일련의 결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한번 선택하면 그것으로 끝일 뿐 지금 와서 결코 되돌릴 수 없다(221).
실제로 결과를 당할 때까지는 그 영향이 구체적으로 어떨지 알 수 없지만 각 선택의 결과는 평생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221).
인생의 많은 일들은 당시에는 사소해 보이는 단 하나의 선택이나 사건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네가 작은 것 하나를 선택하면 그 이후에는 모든 사건이-어쩌면 평생 동안-너를 선택할 것이다(222).

후회의 감옥
우리가 과거에 통제권을 내어주는 방식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후회하며 사는 삶이고 둘째는 원한을 품고 사는 삶이다(226).
후회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자신의 과거를 바꾸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영영 이룰 수 없는 소원이다. 과거란 소중한 가보를 잃은 것처럼 이미 우리 손밖에 있어 돌이킬 수 없다. 우리는 그저 ‘할 걸, 하지 말 걸’ 의 탄식만 읊조릴 수 있을 뿐이다(230).

원한의 독소
과거가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길은 후회만이 아니다. 원한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후회는 대개 우리 자신이 내린 선택과 관련된다. 원한은 대개 타인이 내린 선택에서 비롯된다. 내가 당한 일을 섬뜩하게 깨우칠 때 원한이 치솟는다.
원한은 인간의 마음을 분노와 복수의 도가니로 만들 수 있다.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231).
원한을 품은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 피해자의 논리다. 한 사람의 행위가 결혼의 파경, 몸의 불구, 실직, 정신적 상처 등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모두가 너무 불공평하다. 피해자들의 말이 맞다. 사건은 억울하고, 고통은 현실이며, 상실은 되돌릴 수 없다. 원한을 품은 자들이 나름대로 옳은 부분이 있다. 분노를 느끼는 것도 정당하다. 사실 우리 사회 전체는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기술이 탁월하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만은 독특해 보이는 법이다(233).
그러나 옳다고 해서 그 자체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옳을 수 있지만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고서야 승리를 얻는 옳음이다(233).

전진의 선택
과거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아무리 원한을 머금고 비난하고 공격해도 이미 당한 일은 늘 그대로일 뿐이다. 아무리 복수극을 연습하고 또 연습해도 처음 고통을 유발했던 사건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후회와 원한과 복수는 우리를 파멸로 몰아갈 뿐이다(234).
슬픔이 아무리 깊을지라도 그는 “그 모든 슬픔이 사태를 조금도 달라지게 할 수 없다”고 믿었다. “잃어버린 것은 나한테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이다. 남은 것이라고는 빈자리를 확인시켜주는 상처뿐이다. 우리는 계속 전진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계속 전진할 경우에도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상처를 그대로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깊은 상처와 상관없이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과거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235).

12. 과거를 구속함
우리가 기회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구속하실 수 있다. 과거의 구속이란 하나님이 이미 벌어진 일의 악을 사용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말한다(236).

실패는 우리에게 소명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237).

구속의 경험
우리가 하나님을 삶 속에 모셔 들이고 그분의 은혜를 구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과거를 구속하실 수 있다. 그분은 과거의 악을 취하여 선으로 바꾸신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은혜의 사역이 일어나게 하신다. 단 우리가 세 가지 일을 기꺼이 할 때에 한해서 그렇게 하신다. 우리는 용서를 받아들여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며, 하나님의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도록 기다려야 한다.
첫째, 우리는 기꺼이 용서를 받아들여야 한다(238).
용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른다(239).
용서를 받아들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239).
둘째, 우리는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 원한은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원한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항생제는 용서다(240).
용서란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 걸릴 때도 있다. 그럼에도 용서는 결단으로 시작된다. 용서할 마음이 내키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용서하기 원해야 하며 용서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용서란 잘못을 무조건 덮는 것도 아니고 악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저질러진 잘못은 그야말로 잘못이며 마땅히 심판과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용서의 전제다. 다만 가해자에 대한 심판과 처벌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 사람을 진정한 한 인간으로 보며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용서다(스미디즈, 240).
참을성이 없는 마음은 치유의 과정을 가로막는다(243).
삶이란 언제나 우리 예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한다. 시간은 걸리지만 결국 선을 이루신다(246).

13. 미래를 준비함
미래를 꿈꾸며 장차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속아서는 안 된다. 미래는 우리 앞에 엄청난 가능성으로 다가오지만 막상 미래가 현재가 되기까지는 그 중 어떤 길이 현실이 될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는 미래를 통제할 수 없다.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착각이다(253).
과거와 현재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현실이라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일어났다. 그래서 사실이다. 현재는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가능성이다(C. S 루이스, 255).

두려움의 위력
미래의 불확실성에 반응하는 건강치 못한 방식에는 최소한 두 가지가 있다. 바로 두려움과 염려다. 이 둘 중 두려움은 현실적 실체에 좀더 뿌리를 두고 있다. 신기하게 두려움은 합리적이기도 하다(257).
두려움은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두려움은 건강한 반사작용이 되어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두려움은 실존하는 위험에 기초한 것이다(257).
세상에서 역사하는 특정 세력들에 우리 모두는 마땅히 공포를 느껴야 한다. 그것을 우습게 보다가는 결국 자기가 위험해진다(259).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은 그것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바로 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259).

염려의 문제
두려움이 고열이라면 염려는 미열이다. 두려움의 대상은 죽음처럼 특정한 실체일 수 있으나 염려의 대상은 막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261).
염려는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첫째, 염려는 비현실성에 뿌리를 둔 것이다. 미래에 대해 염려할 때 우리는 아직 있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젠가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측할 수 없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염려한다.
이런 염려는 글자 그대로 아무 쓸데 없는 염려다(262).
염려는 상상력을 정도 이상으로 풍부하게 만들어 희미한 가능성마저도 엄연한 현실로 둔갑시킨다. 염려는 심령을 축내고 마음을 어지럽히며 창의력을 떨어뜨리고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염려는 현 순간의 온전한 삶을 방해한다(263).
둘째, 염려는 우유부단함을 낳는다. 사람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263).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염려는 우리 내면의 은혜 사역을 소멸시킨다. 미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분이 만물을 주관하신다. 그분의 마음을 미리 추측하지 말라”(페네롱, 263).
끝으로, 염려는 우리 마음을 산만케 하여 정작 가장 중요한 것-현 순간-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못하게 한다(264).

염려의 극복
염려를 떨치는 쉬운 길은 없다. 염려란 자연스럽게 찾아오며, 염려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를 통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염려에 관해 기도할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고, 희망을 품고 사는 길을 배울 수 있다(265).
첫째, 기도는 염려를 덜어준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협력하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올바로 기도할 때 역사의 특정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우리는 기도로 세상을 바꾸는 자들이다(포스터, 265).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미래를 바꾸신다. 하나님은 미래의 변화에 우리를 사용하심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266).

미래에 관해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한 가지 방법은 현재를 잘 사는 것이다. 신앙 훈련에 힘쓰고, 성품을 개발하며, 지속적인 우정을 가꾸고,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267).
끝으로, 우리는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268).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 그러나 평생의 삶을 계획하라.”(269)
우리는 이 세상에 살도록 지음 받았지만 또한 천국에 살도록 구속된 존재다. 이 세상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타락한 곳이요, 종종 고난이 끝까지 득세하는 우중충하고 냉혹한 곳이다. 실망과 불안과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돌려 최후의 승리에 소망을 둘 것을 일깨워준다(270).

14. 현순간의 경이
하나님의 파격적인 은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그분의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포로가 되어 후회와 원한 또는 두려움과 염려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은혜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은혜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이끌어 그분의 뜻 가운데 있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 수 없을 만큼 죄가 많은 사람은 없다(275).
우리가 한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매우 중요하다. 진실한 회개와 믿음으로 그분께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다함 없는 은혜의 수혜자가 된다. 삶의 환경은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그 순간 이후로 우리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준다. 은혜야말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계획의 핵심이다(275).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만큼 그분에게서 먼 곳은 없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만큼 악한 행동도 없다. 하나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바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을 수 있다니 얼마나 위로가 되는 사실인가! 하나님의 은혜는 그만큼 파격적이다!(276)

악용 조심!
자칫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여 그분 뜻대로 사는 삶을 뒤로 미루기 쉽다. 은혜가 항상 내 앞에 있다면 계속 죄를 못 지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276)
악용을 삼가야 할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째, 은혜의 악용은 영적으로 위험하다(276).
둘째, 은혜를 악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277).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바꿀 자유는 없다. 사실 결과를 모면해보려는 어줍잖은 시도는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우리를 부정과 속임수의 내리막길로 내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필경 후회하게 된다(278).

시합을 꼬이게 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들에게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 내린 결정의 결과를 되돌린다는 것은 언제나 너무 늦은 일이다. 삶이란 이미 충분히 고달픈 것이며 위험과 고통과 혼란이 끊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했다면 능히 피할 수 있었을 상황에 스스로 뛰어들어 굳이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들어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278)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눈앞에 있는 좋은 수들을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아직 남아있는 좋은 길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계속 악수를 거듭 둔 것이다(283).

세월을 아끼라
때로 우리 눈에는 실패밖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좀더 큰 시각에서 보시며, 우리의 엉뚱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보다 큰 뜻을 이루기 원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은 지금 내가 처한 곳에서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당면한 환경 속에서 경건한 인생 노선을 정하는 것이다(283).
그들의 삶은 평범한 일들에 대한 축제다•••그들을 통해 나는 달콤한 사탕을 얻으려고 허겁지겁 뛰어다니지 않는 삶을 배우고 있다. 그들의 생활 방식은 말과 일치한다. 그것이 큰 차이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그대로 신념의 발로다. 그들의 삶은 하나의 예술이다(287).

예술이 되는 삶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드는 것, 그것이 현 순간을 사는 삶의 목표다(287).
누구든지 자신이 부름 받은 소명 안에 거하면 그 일이 사역처럼 성스러워진다. 사역의 성속을 결정하는 것은 일의 내용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이유다. 동기가 전부다. 다음으로 주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라. 그러면 사람은 절대 비속한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토저, 291).

제5부 결단하며 살라
15. 작은 것에 충실한 삶
평범이 곧 비범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날마다 내 주변의 일상생활 속에서 행하는 것이다(299).
우리는 앞으로 언젠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잠시 있다 사라질 ‘하나님 뜻’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거창하게 하고 싶어하는 큰 일이 아니라 날마다 해야만 하는 작은 일들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마다 순종하기 원하신다. 그분은 가난한 자를 섬기고 자녀를 사랑하고, 이웃의 친구가 되고, 부정직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며, 무엇보다 당신을 먼저 구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평범한 삶의 상황에서 날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이다(300).
주어진 상황 속에서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의 뜻의 주안점은 거기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는 상황 자체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301).

기초를 튼튼하게
우리 평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들은 삶의 방식-습관, 확신, 방향-과 관련된 것이다(302).
선택하는 소명의 분야보다는 자신을 준비하기 위해 날마다 하는 작은 일들이 더 중요하다(303).

평범한 삶의 의미
“하나님은 부엌의 그릇들 중에 행하신다”(테레사).
사람들은 대부분 날마다 그릇들과 부대끼며 산다. 우리도 바로 그 그릇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정말로 사는’ 법을 배운다(304).
현 순간에는 우리의 가장 무모한 꿈마저 능가하는 무한한 부요가 담겨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는 만큼만 그것을 누릴 수 있다. 사랑이 많은 영혼일수록 더 갈망하고 더 바라며 더 찾는다. 하나님의 뜻은 매 순간 속에 나타난다. 매 순간은 거대한 바다며, 우리는 자신의 심령이 믿음과 신뢰와 사랑으로 넘치는 만큼만 그 속을 측량할 수 있다(306).
하나님은 우리를 일하는 자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선을 위한 것일 때 매일의 노동은 고귀하고 선한 것이 된다. 이 세상에서 그분의 신성한 목적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307).
‘티쿤 올람’(Tikkun Olam)이라는 유대인의 표현에 일의 신성한 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을 고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작은 파트너로 삼으셔서 당신을 도와 당신이 본래 의도하셨던 모습대로 세상을 회복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길 잃은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할 때만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정의를 위해 사우고, 쓸모 있는 제품을 생산하고, 유익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 때도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307).
로렌스 형제에 따르면 신앙 성장은 소위 영적인 일을 더 많이 하려고 지금 하는 일을 바꾸는데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 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데 달려있다. “우리의 성화는 일을 바꾸는 데 달린 문제가 아니라 평상시 자기 자신을 위해 하던 일을 하나님을 위해 하는데 달려 있다(308).
우리의 삶은 평범한 일, 곧 잊혀질 일, 지루한 일로 가득 차 있다(309).
우리는 평범한 삶 속에서 잘 사는 법-하나님을 위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311).

결과만이 아닌 삶의 과정
진정한 보람이란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데서 얻는 것인가 아니면 시도의 경험 자체에서 얻는 것인가?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성취에서 얻는가 아니면 단순히 그 일을 하는 데서 얻는가? 어쩌면 우리는 온갖 엉뚱한 곳에서 보람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312).

작은 일의 중요성
푸조(Mario Puzo)는, 영웅이란 단순히 자신이 할 일을 알고 그대로 행하는 자라고 말한 바 있다(314).
매번 15분간의 명성을 위해 우리가 일상에 들이는 시간은 수백 시간이 넘는다. 그것을 생각하면 15분간의 명성은 길지 않다. 그 15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는 별 것 아닌 것을 위해 사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하고 연습하고 일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데 들이는 시간이다. 날마다 작은 일들을 감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궤도에 서있는 것이다(315).

16. 선택
하나님의 음성
듣기란 기술이자 동시에 예술이다(319).
선택을 잘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319).
가장 분명한 답은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320).
때로 그분은 특이한 상황을 통해 말씀하신다(321).
하나님은 꿈과 환상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322).
하나님은 감동적인 메시지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323).
교회 전체가 예언자적 음성으로 말할 수도 있다(323).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거든 기꺼이 응하라. 절대 미리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325).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선택을 잘 내리는 적절한 ‘경우’를 세 가지로 지적했다. 때로 하나님은단순히 인간의 의지를 움직여 특정한 행동 노선을 취하게 하신다. 그러나 이냐시오는 그런 직접적 개입을 정상이 아니라 예외로 보았다. 그밖에 하나님은 ‘위로와 슬픔’의 경험을 통해 말씀하실 때도 있다. 하나님의 뜻의 분별에 인생 경험이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평범한 수단을 사용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듣고 응답할 수 있으려면 조용히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음이 어지럽고 산만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어렵다(325).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
프란시스 드 살레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이해하기가 쉽다고 믿었다. 알려는 마음만 있다면 기본 윤곽은 분명하다(327).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중심 개념은 분명하다(327).

바른 시각의 유지
끝으로, 바른 시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영원한 시각은 우리의 선택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원하는 일보다 필요한 일을, 즐거움보다 섬김을, 일보다 사람을 중시한다(328).
바른 시각은 마음 속에 전체 그림을 잃지 않게 해준다(329).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바른 시각을 제시하며 좋은 결정을 내리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교회는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활용할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이다. 그러나 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해 조심하는 마음도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권한 남용에 능한 자들이 있다(329).

선택과 믿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바른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내 선택이 하나님의 뜻임을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어떤 기준을 적용하여 선택의 성공을 판가름해야 할까?
성공이란 그 자체로 위험한 말이다. 선택의 지혜를 결과의 성공 여부로 판단한다면 우리는 금방 혼란과 환멸에 빠질 것이다(332).
프란체스코회 수사 베네딕트 크로쉘(Benedict Groeschal)은 성공을 기준 삼아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뜻인지 여부를 판가름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성공이란 종종 우리를 오도하며 실패도 마찬가지다. 성공은 우리를 안일과 교만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실패는 목표 달성을 위해 더 일에 매달리게 만들 수 있다(333).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시작하면 결과가 잘 풀릴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악한 뜻으로 시작한 일 뿐 아니라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에도 재앙은 닥쳐온다. 성공은 한번도 하나님의 뜻의 증표가 돼본 적이 없다.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충성으로 부르셨다.” 난관과 좌절에 부딪칠 때 원망 없이 계속 감당해 낼 은혜가 주어진다면, 그것이 곧 그 특정한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분명한 증표라고 나는 생각한다(333).
결정이란 한 번 내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다른 쪽을 택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며 뒤늦게 비판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선택의 결과는 중요하다.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334).
선택은 모험이다. 지혜롭게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가 언제나 좋았던 것은 아니며 그것은 성의를 다해 내린 선택도 마찬가지였다(334).
인생이란 언제나 우리의 기대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다. 최선의 의도와 결정도 낙심과 실패와 고생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삶이라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들쭉날쭉하면서도 놀라운 것이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335).
그 동안 우리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길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중 하나만이 하나님의 뜻이 된다. 바로 우리가 선택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그 선택을 복 주시고 구속하신다. 얼마든지 확신해도 좋다(335).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여 당신의 나라를 세우고 계신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고 계신다. 결국 우리는 오직 하나의 길, 오직 하나의 뜻, 오직 하나의 목적만이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우리가 선택한 길이요 우리가 걸어온 길이다(336).

17. 다 잘될 것이다
모든 것은 바른 시각으로 귀결된다(338).
하나님과 그 나라를 먼저 구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이 된다(339).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가 상황과 무관하게 현 순간에 어떻게 그분을 위해 사느냐의 문제다(339).
인간이 과정이라 부르는 그것을 하나님은 목표라 부르신다. 격랑의 한 복판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침착함과 평온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내가 이렇게 저렇게 손을 써서 이제 다 괜찮다”고 말하는 삶이 아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지금 그분과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다(340, 챔버스 <하나님의 솜씨>).
우리의 선택이 현명하든 어리석든 하나님은 우리에게 헌신되어 있기에 끝까지 그 선하심을 거두시지 않는다(341).
앞날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346).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 우리의 뜻은 실패해도 하나님의 뜻이 끝내 승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당신께 속한 자들의 선을 이루신다(346).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
글쓴이 : DMpasto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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