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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3 한경직 목사 설교 예화 61-90

by 【고동엽】 2022. 3. 3.
[처음 목차 돌아가기]
 
 

61.소크라테스의 노년기

사실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같은 이는 나이 많을 때에 새 악기를 배워서 음악을 했다고 합니다. 고대의 유명한 정치가 케토 같은 사람은 여든 다섯에 헬라 말을 배웠다고 합니다. 여기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시대의 유명한 학자 피토락 같은 사람은 일흔 살 때에 라틴어를 처음으로 배웠다고 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김성무 권사 님은 회갑 지나서 신학을 졸업했습니다. 우리교회 김성준 장로님은 환갑 지난 지 4, 5년 되었는데 금년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나이 많을지라도 계속해서 새 것을 배워야 됩니다. 여러 천년들과 접촉해야 됩니다. 청년들의 꿈과 이상에 감화를 받아야 됩니다. 나이 많아도 계속하여 배우세요.

 

 
 



62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제일 중요한 것이 물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점점 많아지면 육체도 쇠약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런 말씀으로 권면(勸勉)했습니다.“겉 사람은 부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록 힘쓰라”고. 이렇게 하려고 하면 특별히 여기에 대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시편 71편9절에 보면“나를 늙을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떠나지 마소서”이렇게 우리도 기도하십시다. 의로운 길을 가야만 합니다. 잠언 16장 31절에“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의로운 길로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너무 염려하지 맙시다.
이사야 46장 4절에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백발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이 많아진다고 너무 염려하지 맙시다.

 

 
 



63 타고르의 말

인도의 유명한 시성 타고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나는 점점 나이가 많아 가므로 내가 젓는 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돛대를 높이 달고 바람을 의지하노라”그래야 됩니다. 나이가 점점 많아감으로 내 육체가 쇠약해서 간다고 한탄하지 말고 내 노력을 너무 의지하지 말고, 믿음의 돛대를 높이 달고 하나님께서 바람을 주시는 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 때에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하늘 나라를 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젊을 때에 게시를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이 많을 때에 밧모 섬에 가서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될 때에 하늘 나라의 영광이 그 눈앞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은 누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다 허락된 축복입니다. 기억하세요. 나뭇잎은 떨어질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과실은 가을에 다 익을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곡식도 거두게 될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햇빛도 서산 낙조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노년 시대는 인격과 믿음이 완숙하고 아름다워질 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원만하고, 이해성이 많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기를 때입니다. <노년기와 신앙 생활>에서

 

 
 



64. 회개와 사죄

주후 2-3 세기에 교회를 소란하게 하던 영지주의자(노스티시즘이라고 합니다) 등은 주장하기를,“사람이란 영과 육이 합해서 사람이 되었는데 육은 물질이요, 영은 선하지마는 물질은 악해, 그러니까 내가 죄를 지었지마는 이것은 육신이 지었어! 이것은 육신의 책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다”이렇게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은 후에 여러 가지 다른 데로 책임을 돌립니다. 어떤 때는 이것을 유전의 책임이다, 나는 유전이 나빠서 이런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기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의 책임이라고 합니다.“내 처지가, 그저 내 입장이 내 죄를 짓게 만들었어! 나에게 책임이 있나!”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에다 돌립니다. 국가에다“ 나사는 사회가 나를 꼭 이렇게 만들었다! 사회가 책임이 있고 국가가 책임 있지 나는 죄 없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신문지상에서도 굉장히 떠들어 잘 알지만 유대 사람 6백만이나 학살한 아이히만 같은 사람, 이스라엘 법정에 서서도 당당히 주장했습니다.“내가 죽이기는 하였지만 그야 내 책임인가? 나치스의 책임이지. 나야 죄가 있나? 죄 없다”이렇게 사람들은 사특(邪慝)한 지혜를 써서 죄를 짓고도 죄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으로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아담아, 어찌하여 네가 이 금과를 먹었느냐?”곧 대답하는 말이“여호와께서 주신 그 여자가 그것을 나에게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여자를 만나서“어찌하여 네가 그 금과를 주었느냐?”여자에게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여자는 이에 대답하는 말이“그건 제가 그렇게 했나 요,? 뱀이 나를 꾀어서 그렇게 하였지요”저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죄라고 하는 것은 별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진화되기 전에 가졌던 습성이다. 그 것이 무슨 죄가 되나?”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 가운데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65.펠라기오의 잘못

주후 4세기 어거스틴 때에 영국 신학자 펠라기오(Pelagius)라고 하는 사람은“사람이 자기가 짓는 죄는 있지마는 원죄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기네가 율법을 잘 지키고 의식을 온전히 지킨 까닭으로 자기들에게 죄가 없는 줄 생각했습니다. 독선주의에 빠져서 남의 죄는 보고 자기의 죄는 보지 못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그릇된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혹은 사교도(邪敎徒)들 가운데“나는 벌서 온전한 사람이 되었는데 무슨 죄가 있나?”그래서 어떤 사람은“나는 예수다! 나는 새 주다”혹은 자기는 무슨 감람나무라고 하여 죄 없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북에서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런 그릇된 신비주의에 젖어서“우리는 다 온전히 중생하고 이제는 온전해 졌고 죄 하나도 없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남녀 신도가 다 한방에서 동숙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합니다.“누구든지 죄 없다고 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속이는 것 뿐이라”고 남이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손바닥 같이 분명히 내려다보십니다.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은 마치 매에 쫓긴 꿩이 쫓기다 숲 속에 머리를 박고서 몸통과 깃은 다 내어놓고 저 혼자 숨은 줄 알고 자기는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속이는 것 분입니다.

 

 
 



66.스펄존의 회개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스펄존(Spurgeon) 목사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우리가 어떤 때에 나는 참 죄인이다, 나는 참 나쁘다, 나는 악하다,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당신은 그것 보다 더 악하다고 하는 사실을”사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나는 죄인이다라고 내 죄를 깨닫고 부끄럽게 알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보실 때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67.흉악한 벌레 같은 죄인

미국의 초대 역사의 유명한 인물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라고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 초대학장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이의 설교 가운데“흉악한 벌레 같은 죄인”이란 말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후에 비평을 했습니다.‘아 그 너무 과한 말을 썼다’고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빛이 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 적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사상을 다 알고 있습니다. 손바닥 같이 보고 게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앉았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보실 때에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생각, 보는 상상, 모든 공상, 모든 망상, 야심, 음욕, 허영심, 공명심, 교만, 시기, 욕심, 이것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날 터이니 사람처럼 흉악한 벌레가 어디 있겠어요? 흉악한 벌레 이상으로 흉악한 것이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68.디 엘 무디의 일화

미국의 유명한 부흥가 디 엘 무디라고 하는 사람이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가 어떤 곳에서 부흥회를 가졌는데 하루 저녁 설교를 마치고 자기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자기를 보기를 원해요.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물어보니 그 청년은 “저는 어떤 회사에서 회계 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 재무를 보는 가운데 그만 큰 시험에 들어서 주인의 돈 1,500달러를 훔쳤습니다. 오늘 저녁 말씀을 듣고 제가 꼭 이 죄를 회개하여야 되겠는데 1,500백 달러를 훔쳐서 얼마는 쓰고 지금은 950달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있으면 제가 다 가지다 드리겠는데 950달러밖에 없으니 이것 가져다 드릴 수가 없고, 그래서 제 생각은 이것을 가지고 좀 몰래 장사를 해서 이를 남겨서 1,500달러가 된 다음에 이것을 완전히 주인에게 갚으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렇게 의논을 합니다.
그 때 무디 선생 하는 말이“그저 그 생각도 할 수 있기는 하지마는 내 생각에는 그 도적질한 돈으로 장사를 해야 그 장사가 잘 안 될 것 같애 ! 그러니까 그 남은 것이라도 갚을 수 잇는 대로 우선 갚아 들이세요. 그러면 아마 그 주인이 용서해 줄 것입니다.”그러니까 그의 하는 말이“아, 저는 부끄러워서 감이 갈 수 없으니 무디 선생님, 저와 같이 가주십시오”
그래서 이튿날 그이와 같이 회사 주인을 찾았다고 합니다. 가서 무디 선생은 먼저 들어가서 그 사정 이야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더니 그 주인이“아, 나는 그이가 그런 일을 한 것은 전연 몰랐었다”고.“그러나 이번에 그이가 회개하는 말을 들을 때에 참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며“뭐 그 950달러 있으면 그냥 가져오면 내가 다 용서해 주겠다”그 다음에 그 청년을 청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셋이 같이 앉아 기도를 하고 온전히 주인은 그 청년을 용서 해주고 그 다음부터 그 청년은 옳은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69.회개와 보상

참 회개에는 할 수만 있으면 보상이 따릅니다. 제 교역 생활에 있어서도 이북에 있을 때에 또는 이남에 있을 때에 여러 청년들이 와서 자기가 이와 같이 남의 것, 남의 물건 안 가질 것을 가졌다고 저에게 와서 자복(自服)을 하면서 도로 돌려준 경우가 많습니다. 안 가질 돈을 썼더라도 그 돈을 도로 찾아준 예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관청의 공무원으로 있는데 다른 사람이 다 받았으니까는 뇌물을 다 같이 받았다가 그후에 양심이 너무 무거워서 다시 돌려주려고 하니까는 그 사람을 찾을 수도 없고 그러니 내가 이 돈을 연보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런 무제를 가지고 와서 의논한 청년들도 있습니다. 참 회개에는 할 수만 있으면 봉사하는 것이 참 회개의 열매입니다.
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70.술 두 병을 훔친 여인의 괴로움

전에 어떤 여자가 어려서 남의 집에 식모 노릇을 합니다. 아마 그때 그 주인집이 안 믿는 집이었던 모양입니다. 술 두 병을 훔쳤습니다. 그 후 이 여자는 장성해서 출가한 후에 아들 딸 낳고 잘 삽니다. 또 그후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를 다 자복하고 옳은 생활을 꼭 하려고 하는데 항상 이 여자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니 언제나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그 술 두 병이 떡 나타나곤 합니다. 하나님께 고백은 하였지만 그 술 두 병은 그냥 있거든요. 아,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생각하다 못해 목사와 의논을 하고서 그거 별 수 없으니 그런 경우에는 그 술 두 병 아주 갖다 주라고. 아 가져다주려니 그 집주인 할아버지 할머니다 세상을 떠나고 없단 말이요. 그 자손들만 사는 집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다 하고 술 두 병을 도로 갖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이야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이렇게 보상할 수 있는 경우면 보상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에 심히 마음이 무거운 것은 어떤 죄는 보상할래 야 보상할 수 없는 죄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다음에 그 명예를 어떻게 다시 온전히 회복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71.젊은 여 성도의 회개

바로 몇 달 전에 어떤 여자 청년이 예배 필한 다음에 저를 보자고 했습니다. 그 여자의 사정을 들으니까 어떤 회사에 근무하는 여자입니다. 그 집은 잘 믿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그 회사에 책임자로 있는 사람이 큰 시험에 빠졌습니다. 이 여자를 그르쳤습니다. 마음가운데 무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그가 아무래도 이 자리에 꼭 떠나고 새로운 생활을 하여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말했습니다. 곧 그 자리를 떠나도록 기도를 하고 그 상대자도 내가 만나고 그 사람에게 꼭 회개하도록 권면을 했습니다.

 

 
 



72.톨스토이의 《부활》

톨스토이의 유명한 《부활》이라고 하는 소설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청년 귀족이 자기 정욕을 만족하기 위해서 철없는 여자를 그르쳤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 여자는 그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타락하고 타락해서 윤락 여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죄에 빠지고 또 빠졌습니다.
그 후에 이 청년이 알고 보니 몇 해 전에 자기가 그르친 여자올시다. 이 여자를 다시 회복해서 좋은 여자를 만들기 위하여 이 청년이 온갖 수고를 다 합니다. 그러나 일생을 그르친 그것을 다시 보상해 줄 수 없어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나의 일생을 그르쳐 준 죄를 무엇으로 보상합니까?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가서 전도한 동기가운데 하나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내가 이 보상의 하나로서, 백인의 하나로서 나아가서 이 사람들에게 참으로 봉사하겠다는 그 정신이 있습니다.

 

 
 



73.마음속의 큰 기쁨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가 개인으로 보상할 수 없으니 사회적으로 봉사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의 죄를 깊이 참회하는 가운데 자기의 일생을 어떤 공공 사업이나 자선 사업이나 문둥병 자를 위하여, 걸인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서 참회의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회개에는 이 보상이 따릅니다. 먼저 죄를 깨닫고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이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남겨진 손해를 할 수 있는 대로 보상할 때 그것이 참 회개입니다. 그는 “미쁘셔서”약속대로 지킵니다. 예수 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이에게 약속대로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시편 32편을 기록한 기자는 이런 자기의 체험을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衰)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야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였나이다”그리고 끝에“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큰 기쁨이 올 것입니다. <회개와 사죄>에서

 

 
 



74.성도의 유일한 자랑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된 것을 멸하고 화목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사실 그 십자가의 수직선은 높은 하늘에서 땅 끝까지 미쳐서 죄는 사함이 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그 십자가의 횡선은 인간괴 인간이 다시 화목하게 되고 인간 사이에 참된 화평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그러나 오직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결단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75.독일 어느 예배당의 어린 양

제가 들으니 독일의 어느 예배당 정문 위에는 조그마한 어린양을 돌에다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배후에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예배당 지붕이 좀 상해서 고치기 위해서 일꾼이 올라가서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만 일을 하다가 일꾼 가운데 하나가 발을 헛디뎌서 그 높은 지붕에서 떨러졌다고 합니다. 그 예배당 옆에는 풀밭이 있었는데 거기 마침 양 때가 있어서 풀을 먹고 있었다고 합니다. 떨어진다는 것이 어린 야의 위에 떨어져서 그 양은 눌려 죽었습니다. 그 대신 일꾼은 살았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께서 어린양과 같이 우리 대신 죽음으로 우리 인간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76.모세와 불 뱀

모세가 한 번은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서 죽는 사람이 많을 때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높이 장대 끝에 달아서 누구든지 그 구리 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비록 불 뱀에 물렸지마는 죽지 않고 살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구리 뱀과 같이 높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서 바라보는 가운데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로부터 오늘날까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오직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사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섬 프랜시스 같은 이도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신령한 은혜를 받고 죄 사함을 체험을 얻은 것입니다.

 

 
 



77.모라비아 교회 창시자

모라비아 교회를 처음에 설립하고 온 세계, 우리 신교도 가운데 제일 먼저 세계 선교의 봉화를 든 진젠돌프 같은 사람도 자신이 젊었을 때에 어떤 미술관에 들어가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큰 은혜를 받고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 도덕 재무장회로 전략이 되어서 좀 섭섭하지만 옥스퍼드 운동이라고 처음에 많은 좋은 일을 한 운동이 있습니다. 이 운동을 처음에 일으킨 프랭크 북한, 그 사람도 십자가를 신령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기의 교만을 깨닫게 되어 온전히 죄 사함을 얻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우리가 다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78.성 프랜시스의 손의 못 자국

우리는 이 렌트 기간에 특별히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를 묵상합시다. 성 프랜시스는 십자가를 얼마나 묵상하였는지 그 손바닥에 못 자국이 생겼다고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우리도 자랑합시다.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높이 들 것은 십자가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암흑의 세상에 광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이 불안과 공포의 세상 가운데서 마음의 안심과 평화를 얻을 곳은 오직 십자가 앞에 나아갈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환난과 고통과 죄악과 절망에서 헤매 이는 모든 인류에게 우리 위로 십자가를 높이 들어서 모든 인류들로 하여금 이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우리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재생의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새 사람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험악하고 나의 과거가 아무리 추악하지마는 십자가 앞에 나오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79.밀턴의 명언

존 밀턴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영혼의 존귀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까닭이요,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까닭이다” <성도의 유일한 자랑>에서

 

 
 



80.어느 성도의 유언

우리 교우 중에 잘 믿는 어떤 자매 한 분이 장사 차 멀리 갔다가 그만 임산기(臨産期)가 되어서 그 곳에서 해산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일이 있습니다. 이 분은 잘 믿는 분으로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스스로 깨달은 다음에는 같이 갔던 자기 남편을 위로하면서 “나는 이제 오래지 아니해서 주님 계신 데로 갈 터인데 나를 위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라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면서“내가 십일조를 드리던 것이 어디 있는데 그것을 교회에 가져다 드리고 또 여전도 회비를 내가 어디에 마련해 둔 것이 있는데 그것도 꼭 여전도회에 가져다 바쳐 주세요”
그 때에 이 부인이 어린애가 일곱이 있었습니다. 여섯이 딸이고 하나가 아들입니다. 일곱 살쯤 아들이 있는데 그 남편보고 이 아들은 잘 길러서 이 다음에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하고 또 자기 육체는 세상 떠난 다음에 영락 묘지에(강원도 외지에서 별세) 좀 불편하지만 옮겨서 꼭 묻어달라고 그런 유언을 하고 고이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사망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찬송가를 부릅니다.“요단강 건너가 떠나리”이렇게 안 부릅니다. 왜 그런고 하니 믿는 사람에게는 사망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간 성도를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의 사망도 끓을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81.죄의 고백과 그 축복

여러분, 이미도 말했지만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은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큰 범죄를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도 큰 유혹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전감(前鑑)이 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믿었든지, 우리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하였든지 조심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어떻게 하여서 시험에 들었다고 하면 우리가 이 죄를 가리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 죄를 덮으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곧 그 자리에서 깨달아 아는 대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솔직히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값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를 범한 다음에 값이 없는 줄 스스로 속지 맙시다. 물론 무신론자들은 죄를 부인합니다

 

 
 



82. <주홍글씨》와《세조대왕》

지금부터 약 30년 전에 전 세계적으로 극단의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해질 때에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에도 죄를 경히 여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프로이드를 비롯해서 많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심리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육체의 모든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많은 육체의 질병과 여러 가지 정신적 이상이 어떤 때에는 자기도 모르는 내적 분열과 내적 충돌에 의해서 여러 가지 육체의 질병과 여러 가지 심리적 고장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갓입니다.
내적 분열, 내적 충돌은 결국은 어디서 원인이 되는 줄 압니까? 속에 죄가 깊이 묻혀 있을 때에, 결국은 속에서 분열이 생기고 내적 충돌이 생깁니다.
어떤 때에는 자기 자신도 잊어버려서 그 죄를 잊어버리지마는 사람의 심령 속에는 죄를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고통이 생깁니다. 번민이 생깁니다. 오뇌가 생깁니다. 유명한 소설 토스토에프스키《죄와 벌》을 읽어보십시요. 미국의 유명한 소설, 호오돈(Nathaniel Hawthorne)이 지은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 라고 하는 소설을 읽어보세요. 혹은 우리 한국의 소설 가운데 춘원 (春園) 선생의 <세조대왕>(世祖大王)을 읽어보세요.
죄에는 값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 피할 수 없습니다. 값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는 솔직히 하나님 앞과 또한 부득이 어떠한 경우에는 사람 앞에서라도 온전히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죄의 고백과 그 축복>에서

 

 
 



83.모르켄 박사의 강연에서

이번에 버어마에 가서 같이 수양회를 인도할 때에 홍콩에서 일하는 모르켄(David E. Morken) 박사라고 하는 분도 같이 와서 수양회를 인도했는데 그이가 그 때 목사들한테 강연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오스트레일리아에 어떤 젊은 여자가 불행히 소녀 때에 중한 병을 만나서 그만 처음에 두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불행히 이 병이 손으로 올라와서 부득이 두 팔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여자는 그와 같은 가운데서 믿음이 더욱 독실해지고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남의 봉사를 받고 사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팔을 자르고 조금 남은 데에다가 만년필을 붙들어 매고 글쓰기를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자르고 남은 데를 붙들어 매고 글을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글쓰기를 배운 다음에 이 분이 드러누워서도 편지를 쓰는데, 자기가 전에 안면이 좀 있는 이들 가운데 별로 믿음이 없고 교회에 잘 나오지 아니하는 이런 친구들에게 간절하게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고 전도하는 편지를 쓰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가만히 드러누워서 편지를 일년에도 여러 수백 수천 장을 씁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누워서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하면 어떤 방면으로든지 하나님께 봉사하고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에서

 

 
 



84.둘째 되는 큰 계명

제가 지금부터 근 30년 전에 청년 전도사로 신의주 제2교회에서 일 볼 때에 우리 가운데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곽산에 김진근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한 번 신의주에 들어오셔서 저하고 조용히 함께 이야기할 때에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해 준 그 말씀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85.두 목사 이야기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김 목사님이 그 때에 신학을 다 마치고 노회에서 이제 목사 장립(將立)을 받기 위해서 시취(試取)를 하는데 그 때 노회에서 시취하는 법은 무슨 시취 위원이 따로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노회 앞에서 아무나 이 사람도 묻고 저 사람도 묻고 그저 물어서 대답을 잘해야 그 다음에 목사 장립을 시키든 때라고 합니다. 그저 그렇게 시취를 자기와 어떤 다른 분하고 두 분이 받았습니다. 아 그래서 묻는 말을 자기 생각에는 무던히 애써 다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목사님들의 태도를 보니까 한국 목사들의 태도는 아 그저 뭐 목사 장립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분위기가 거이 그저 될 듯하더니 아 마지막에 어떤 선교사 하나가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고 하니 “거 나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 아직까지 목사 장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줄 생각합니다”하면서 반대를 합니다.
아 그러니까 그 때는 특별히 선교사의 발언은 소중히 생각되든 때인데 여러 한국 목사 장로들이 대체로 다 될 줄 이렇게 공기가 돌아가더니 아, 아, 이 선교사의 말 한 마디에 공기가 갑자기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는“한 노회 기간동안 연기하기를 동의합니다.”“재청합니다”이렇게 되니까 그만 목사 장립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 이제 자기 숙소로 돌아오게 되니까 가만히 자기 마음속에 분한 생각이 났단 말입니다. “아니 선교사로 와서 복음이나 전할 것이지 남의 목사 장립하는 데까지 참견할 것이 무엇 있나?”
그러나 얼마 후에 그날 저녁 이 일을 가만히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각을 해보니까,“그 선교사와 나와 무슨 개인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는데 그가 그와 같이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는 경험 많은 선교사인데 내가 아직까지도 좀 부족한 점이 있기에 한 동안 기다리라고 하겠지. 그것은 나를 미워한다 든 가 무슨 다른 생각으로 그런 것이 아닐 것 아닌가”이렇게 생각하여 양해가 되었고, 그리고“그 선교사가 내게 불리한 말을 했지마는 나는 이 노한 마음 분한 마음을 오래 품지 않겠다”하고 그것을 양해를 했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 때 똑 같은 일을 당한 다른 한 분은 그 양해가 도무지 되지 않았습니다. 한 달 후에 만났는데도 그 때도 아직까지 분한 마음을 품고“에이! 그 선교사, 그놈! 아, 그저 그 분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그냥 오래 기지고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마는 하여간 그 후에 그 다른 분은 결국은 교회 일을 보지 않게 되었더랍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좌우간 우리가 무슨 일로 분한 마음이 들든지 그때 분한 마음을 풀지 아니하고 오래 두면 손해는 결국 내가 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서 떠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내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태도입니다. 내가 내 형제의 죄를 용서 해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하면 내가 다른 사람도 용서해야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시기하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언제든지 시기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86.현미경과 망원경

어떤 사람이 시기는 현미경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 같은 것도 보통 눈으로 보면 맑지마는 현미경으로는 암만 맑은 물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더러운 벌레도 많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많습니다. 시기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암만 좋은 사람이라도 여러 가지 결점이 많이 나타난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 대신 사랑은 망원경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방금 저 사람이 좀 부족한 것이 있지마는 이 앞에는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사람은 멀리서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으로 본다고 하면 내가 다른 이웃도 사랑으로 보아야 하는 말이올시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하는 말이지마는 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선 우리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이내 물 가져다 마시고 추우면 이내 외투 가져다가 입히고 더우면 부채질하고 피곤하면 이내 자리에 누어서 쉬고, 또한 병이 나면 이내 약 가져다 먹고, 혹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으면 변명하느라고 분주히 돌아다닙니다.
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그러합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 하는 말은 내 자신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내 이웃도 소중히 여겨라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을 보호하고 보양하고 평안하게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내 이웃의 명예나 생명이나 재산을 보존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하는 그 말이올시다. <둘째 되는 큰 계명>에서

 

 
 



87.영혼의 닻

배에는 꼭 있어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닻입니다. 큰 파도가 일어날 때에 이 닻이 깊은 바다 밑에 박혀있어야 배가 밀리지 아니하고 파선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고해와 같은 세상을 지나가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꼭 있어야 할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소망이올시다. 소망은 닻과 같다고 그래서 옛날부터 닻은 소망의 한 상징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올시다. 오늘 이 시간, 이 영혼의 닻을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88.닻과 소망

배마다 닻이 있습니다. 작은 배는 작은 닻, 큰배는 큰 닻이 있습니다. 물론 한강에 떠 잇는 노름 배 같은 것은 닻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사실 인생은 노름 배는 아닙니다.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작아도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라고 한다면 거기는 반드시 닻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바다를 반드시 건너야 하는 배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 소망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매일 일하고 사는 것은 소망이 있기에 그러합니다. 학생은 소망으로 공부를 합니다. 농부는 소망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상인은 소망으로 상업을 경영합니다. 실업가는 소망으로 공장을 경영합니다. 부모는 소망을 기지고 자녀를 기릅니다. 사실 모든 활동, 모든 사업의 배후에는 이 소망이 잠재합니다. 모든 노력의 배후에는 이 소망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울지라도 인내하여 무슨 일을 계속하는 그 배후에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인간적인 소망에 있어서는 설사 이런 소망들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본래 기대하던 것처럼 만족은 없습니다. 바로 여기 어떤 실업가가 새로 사업을 하면서 그가 꼭 이 사업에 성공을 하고 돈을 많이 벌겠다며 자지 아니하고 열심히 일하고 생각하며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런 이들 가운데 성공 못하는 이들도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도 성공한 이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그저 사업만 성공하고 돈만 모으면 천하를 얻은 것처럼 생각하지마는 정작 사업에 성공해 놓고 보면 또는 돈도 모아 놓고 보면 기대하던 것처럼 만족은 없습니다. 오히려 돈이 많으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가 많이 닥칩니다. 시기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돈을 내라고 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여러 가지 변태(變態)무쌍(無雙)한 사회는 항상 공포를 가져옵니다. 설사 사업에 성공하고 돈을 모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환멸의 비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89.이스트맨의 성공과 자살

여러분, 요사이 웬만한 젊은 사람은 다 사진기 하나씩 가지고 다닙니다. 아마 그 사진기 가운데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마는 아마 이스트맨 코닥(Eastman Kodak)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이 이스트맨이라고 하는 사람은 미국인으로서 제일 먼저 사진기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필름도 제일 먼저 만든 사람이올시다. 로체스터 뉴욕(Rochester New York) 에 가보면 이스트맨 코닥회사(Eastman Kodak Company) 가 한 들판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돈을 몇 억을 모은 모양이지요.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사람이 어떻게 크게 성공하고 돈도 많이 모았지마는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결국은 인생의 환멸을 느껴서 마지막에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 바라볼 때는 굉장한 것 같지마는 결국 얻어 놓고 보면 여기에도 참 만족은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래요. 우리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내가 어떻든지 이번에 꼭 석사가 되고 박사가 꼭 되어야지, 박사 학위를 내가 받아올 테야”열심으로 공부하고 굉장히 노력합니다. 그런다고 다 박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이들 가운데 더러 박사가 됩니다. 그러나 혹 박사가 된다고 할지라도 정작 박사가 되고 보면, 그것 뭐 별것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혼의 닻으로 삼는 이는 어떠한 실패, 어떠한 타락, 어떠한 환난, 어떠한 슬픔이 있을 지라도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그 배가 바람에 밀러 가지 아니합니다. 암초에 부딪치지 아니합니다. 파선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절망이란 말은 없습니다. 이 영원불멸의 영혼의 닻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이 닻을 붙잡았습니까? 내가 과연 이 닻을 붙잡았다고 하면 이 예배당 문 밖에 닻 없는 작은 배를 타고 노도광풍에 시달리는 가련한 우리 민족에게 이 영혼의 닻을 전파하여야 되겠습니다. <영혼의 닻>에서

 

 
 



90.하나님의 승리적 사랑

인간의 여러 가지 고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고도 역시 그렇습니다. 혹은 천재, 혹은 지변, 혹은 빈궁, 온갖 불행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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