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넓음으로의 인도
행 16:6-10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
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
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
로 인정함이러라.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선 하나님의 생각은 원대하고 넓고 미래적이고 비전과 뜻이 있고 사랑이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오늘 여기에, 현재에, 내 이익, 내 입장에 집착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의 깊으신 생각과 섭리가 이해도 설명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요구가 아브라함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순종하자니 내 자식을 죽여야 하고 거역하자니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야 하니 그때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고민하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면 결과가 좋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없이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훈련하신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 아브라함이 그때를 생각하고 “아 그래서 그랬구나” 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어렸을 때 꿈을 많이 꾸었습니다. 그 꿈속에는 장차 있을 하나님의 섭리의 메시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면서 장차 내게 큰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나타난 현실은 기대와는 상반된 종으로 팔려가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이유를 모른 채 감옥에서 10년을 지냅니다. 그때 요셉은 별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 꿈들이 모두 개꿈이란 말인가”하고 하나님에 대한 회의도, 모든 것을 포기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을 보내는데 어느 날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기다리는 것은 황금 마차였습니다. 요셉이 그 마차를 타고 도착해서 보니 재상자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험난한 길을 걸어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이 미래에 주어질 그 길의 의미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요셉이 총리가 되고 나서 비로소 “아 바로 그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아 그랬구나”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이 상상도 못하는 길로 안내하고 인도하고 이끌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 점을 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어느 날 다메섹에서 회심시켜서 사도로 활용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바울이 아주 어려서부터 선택하시고 장차 사용할 그릇으로 양육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장차 이방 선교를 위해서 태어날 때부터 환경을 조성하시고 그를 헬라의 문화적 환경에서 헬라의 지성적 환경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마치 출애굽을 위해서 모세를 잉태 때부터 조성하셔서 양육하신 것처럼, 세례요한을 주님의 예비자로 잉태 때부터 조성하셔서 양육하신 것처럼 바울도 어려서부터 조성하시고 양육하셔서 성장한 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활용하십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의 인생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절묘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길리기아 다소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납니다. 그곳은 규모는 작았지만 정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 가이사도 클레오파트라도 방문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한때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그 시의 지사로 재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소는 경제중심지로 넓은 평원에서 거둔 모시와 베로 모직이 성업이었습니다. 특히 염소 털로 된 천막용 모직 생산이 많은 천막 생산지였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천막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자비량 전도를 하였습니다. 또 그 다소는 지성인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아구스도의 스승인 스토아학파의 아데노도루스(Athenodorus)라는 사람이 그곳 출신입니다. 그곳에서 배출된 철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이 로마로 가서 가르쳤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소는 당시 헬라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바울의 집은 부자였고 유복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집안은 어려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진 가정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시민권은 부자나 명사의 집안에 시민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세계의 정치 흐름을 익히고 헬라철학을 몸에 익히게 되는데 그것이 후에 바울로 하여금 장차 로마로 가서 이방인들을 전도하게 하기 위한 섭리였음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 유학
다소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라면서 좀 더 큰 도시로 유학을 갑니다, 그 당시 다소는 오늘의 터키 땅으로 예루살렘까지 유학을 갑니다. 예루살렘은 종교의 중심지입니다. 그 당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상당히 발전한 것입니다. 눈과 생각과 의식이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출생을 비록 소아시아의 길리기아 수도인 다소에서 했지만 그는 순수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가정은 유대교 중에서도 엄격을 자랑하는 바리새파의 유대교를 신봉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유학할 때 예루살렘의 교육은 바울로 하여금 열렬한 바리새주의자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스승 가말리엘은 당시 율법교사중에서 학식이나 인격이 뛰어났고 엄격한 바리새인이었는데 바울은 그 스승 보다 더 율법에 대해서 심취하였고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한 가지 야심을 품게 됩니다. 그것이 집안배경이나 교육 그리고 학식 등을 감안할 때 유대교에서 최고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야심입니다. 그래서 더 공로를 세우려고 그리스도인들을 더 강하게 핍박했습니다. 그 첫 번째 공적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을 지휘한 일입니다. 당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을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여겼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모세의 권위를 무시하고 율법을 파괴하는 행위로 여겼습니다. 당시 유대교에 심취한 바울은 기독교의 주장은 절대로 인정도 타협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박해 지경을 넓혀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에 보내는 지령을 받아(행 26:12) 기독교인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가다가 마침내 도중에서 회심하게 됩니다.
저는 무슨 일에나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이 좋습니다. 분명 바울이 가던 길은 잘못된 길이었습니다. 그의 열심도 잘못된 열심입니다. 그러나 무엇에나 이렇게 열심이고 적극적인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바로 잡고 방향만 잘 잡으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이나 결단력이나 삶의 방법이 흐리멍덩하고 목표가 불분명한 소위 개갈 안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어느 목회자가 충청도에 있는 교회에 처음 부임해서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니까 곧 교회가 가득찰 것 같더라고 합니다. 가서 인사하고 전도했더니 모두가 순순히 다음 주일 교회에 가겠다고 하더라고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주일날이 되었는데 한사람도 안 오더라고 합니다. 그 목회자가 충청도의 기질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충청도 사람은 뭐라 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되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가자고 하면 욕하고 때로는 핍박도 하고 안 간다고 열 올리는 사람들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 날 회심만 하면 엄청난 파워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신 것 같습니다.
거꾸러트리심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노중에서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너무 강한 빛으로 오셨습니다. 바울은 그 빛이 너무 강하여 눈이 멀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 누구십니까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바울은 그때 생전 처음 찬란한 영적인 빛과 영적인 음성을 듣고 예수의 실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시내로 이끌려 들어가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충격 속에 있다가 계시를 받고 찾아온 선지자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고 눈을 뜨여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날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고 핍박하던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나고 그가 얼마나 충격에 빠졌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바울이 그토록 박해하던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앙인이 회심하는 방법이나 모습을 보면 가지각색입니다. 어떤 사람은 회심의 순간도 모르고 자신이 회심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원파에서는 그 시간을 대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갈등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대부분 모태신앙자들의 경우입니다. 그런데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솔직하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믿습니까,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세주이심을 믿습니까, 장차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믿습니까.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모두 아멘이라면 염려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모두 거듭났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것이 시간과 장소까지 분명하고 확실한 스타일이 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입니다. 너무 강하게 반대하고 예수 소리만 들어도 열이 뻗치던 사람들은 대부분 회심할 때 그냥 조용히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울처럼 요란하게 거꾸러트리시는 것입니다.
지난 23일 이어령 씨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던 분이 지난 50년 동안 탐구해 오던 지성의 언어에 한계와 지식의 허구를 느끼고 지식이 병들어 실명해가는 자식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고민할 때 생전 처음 밖으로부터 심장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성령의 힘을 느끼고 세례를 받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제멋대로 그리스도인을 죽이며 돌아다니는 것을 어느 기간 동안 방치해 두었다가 어느 날 큰 빛으로 다가와서 거꾸러트리신 것처럼 이어령 씨도 지식을 탐구하고 온갖 말재주를 부리며 돌아다니도록 놔두었다가 딸이 병들어 실명하는 것을 두 손 놓고 보기만 하고 지식으로부터의 공허감, 깊은 한계를 느끼며 고민하던 그 심장에 어느 날 성령이 물밀듯 밀려들어와 생전 처음 신적 권위에 압도되었다는 고백을 남기고 요란스럽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불러내셨던 하나님이, 이어령 씨를 꼼짝 못할 환경으로 몰아넣어 손들고 나오도록 불러내셨던 하나님이, 우리들이 오늘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내내 섭리하시고 인도하시고 나의 삶에도 개입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눈을 좀 크게 뜨고 바라보면 우리의 삶 속에는 이런 신비와 오묘함이 들어있다는 것을 보고 느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로 훈련
바울이 회심 후 아라비아 산중으로 들어갑니다(갈 1:17). 그곳에서 바울은 깊이 묵상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3년여의 시간이 경과한 후 (갈 1:18) 나와서 고백합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 로라” 아주 확실한 회심의 각오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모든 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우선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새로웠습니다. 그동안 전혀 상반된 입장에서 살던 베드로, 야고보를 만납니다. 이제부터는 삶도, 사람도, 일도 다 새로웠습니다. 취미도 관심도 다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회심하면 다 바꾸어야 합니다. 친구도 취미도 놀이와 관심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와 더 넓은 교제를 하고 다양한 사람, 다양한 삶의 모습을 익혀야 합니다. 집에서 왕으로 군림하던 분들이 교회에 처음 와서 남자들이 안내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고백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남편이 저렇게 가정위주로 살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생활을 보고 신비하게 느꼈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다 새롭게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자 다시 고향 다소로 가서 길리기아에 교회를 세웁니다. 헬라인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는 안디옥에 그리스도인이 많아지자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바울을 초청하여 1년간 함께 기도합니다. 그때 그곳에 그 유명한 안디옥교회가 세워집니다. 후에 이 안디옥교회가 바울의 전도여행의 근거지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역사상 최초로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펴본 이 내용과 삶의 진행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다 오늘 여기까지 와서 살고 있는 이 삶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섭리하시고 함께 하심을 믿고 발견해야 합니다.
전도자의 삶
그때부터 전도자의 삶을 사는 바울을 철두철미하게 성령이 안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성령은 바울을 꼭 붙잡고 이끌고 다니십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6절을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로 가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니까 7절을 보면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였다”고 했습니다. 나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성령은 자꾸만 그 길을 막고 마게도냐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말은 성령이 전도의 길을 아시아 쪽이 아니고 유럽 쪽으로 가도록 이끄셨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시아를 정복하려는 마음이 앞섰는데 성령은 허락하지 않고 유럽전도를 더 시급하게 여겨 인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조성하시고 훈련하시고 오늘 부르신 이유는 아시아 전도 때문이 아니고 로마전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령은 바울로 하여금 복음이 아시아에서 머물지 않고 세계로 확산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참 신비한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바울을 아주 어려서부터 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당시 세계 전도에 투입하게 하시기 위해서 바울을 출생은 길리기아 다소로 민족은 유대인으로 이름을 사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가서 전도해야 하기 때문에 이름을 로마 이름인 바울이라고 개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로 하여금 아주 어려서부터 로마시민권자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성령은 오늘도 이렇게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각종 사건들을 눈여겨 보십시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오늘도 성령은 우리에게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속에서 내 인생이 만들어지고 나의 갈 길이 주어지고 나의 할 일이 주어지고 나의 삶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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