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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익 목사 준비중

더 품위있는 종말

by 【고동엽】 2022. 2. 27.

 더 품위있는 종말

 

 

 

 

                                    딤후 4:6-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

 

                   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

 

 

 

 

 오늘 사람들에게 가장 무거운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종말과 죽음의 문제일 것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실로 이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봄이 오면 곧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옵니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고 창조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모든 자연은 봄이 오면 새싹이 돋고 여름이 오면 모든 식물들은 충천합니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고 겨울이 되면 삶을 마감합니다. 이것도 모두 자연의 질서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삶을 살고 때가 되면 죽습니다. 이것도 순환의 법칙이고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말 신앙이 분명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인생은 천년 살 것 같이 계획성 있게 살고 동시에 내일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심정으로 살라”고 했습니다. 종말의 모습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마음대로 된다면 멋있게 죽을 것인데 그것이 아니기에 고민이 많아집니다. 오늘 사람들이 종말을 맞는 모습을 보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치매라는 질병이 오늘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몸은 건강한데 정신이 허약해집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며 분별력을 잃습니다. 요즘은 젊은이들에게도 이 병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지내는 것도 불행한 모습입니다. 혼수상태로 병석에 몇 년씩 누워있는 것은 더욱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존엄사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상하게 죽을 권리”를 존엄사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살기도 힘들지만 마지막에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노년의 마지막 때에 추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들이 많습니다. 혹시 병석에서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식물인간처럼 누워있기라도 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 입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그것도 흔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할 일입니다. 그래서 9988234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 아프고 사흘째 되는 날 죽는다는 소원입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입니다.

 

 

 77세 된 김 모 할머니가 지난해 2월 식물인간이 되어 병석에 누운 이래 지금까지 1년이 넘게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분은 평소 진실한 신앙인으로 남편이 임종하기 전에 병원에서 인공호흡기를 달 것을 권장하였지만 단호하게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인공호흡기를 단다고 해서 얼마나 더 살겠는가, 환자 본인만 더 힘들다 해서 단호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경우에는 인공호흡기를 달지 말라고 자손들에게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의식을 잃게 되었을 때 자녀들이 인공호흡기를 달도록 동의해서 오늘까지 연명은 하고 있으나 2년 가까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누워 1년이 지나면 몸에 욕창이 생겨서 특수 매트리스에 누워 2-3시간마다 한 번씩 자세를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서 1분에 12회 정도 도와주어야 연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떼어내면 1-2시간 안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니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은 또 무슨 고생입니까. 그래서 마침내 자녀들이 너무 고생하시니 품위 있게 숨을 거두게 해 달라고 호흡기를 떼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병원은 거부했습니다. 인간의 생사를 병원이 결정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는데 며칠 전 대법원에서 마침내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도 좋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판결이 나오기까지 평소 환자 자신이 그런 경우 인공호흡기를 달지 말라는 소신을 피력 한 것이 참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실행된다면 존엄사를 인정하는 첫 적용자가 되는 셈입니다. 자손들이 인공호흡기를 떼어내게 해 달라고 제소하게 된 이유는 손자녀들이 병원을 방문해서 병석에 누워계신 할머니의 호수 줄로 연명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평소 할머니 모습이 아니다, 흉측하다”라는 반응에 부모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손들이나 본인 모두가 신앙인들인데 이렇게 더 살게 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에서 평소 본인 소원대로 보내드리자 라는 합의를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종말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적 모습

 

 

 

 

본문은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은 인생의 종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고백하며 인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이 고백은 영적으로 갈 길을 다 만족하게 갔고 전도자의 삶에 최선을 다 하였으며 후회 없는 믿음생활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이제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을 것”이라고 천국에서의 상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이런 사람은 종말이 두렵지 않습니다. 주저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천국을 보았고 헌신의 삶을 만족하게 살았고 오직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았으니 미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종말은 이렇게 영광으로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의 종말 모습은 이렇게 멋이 있어야 합니다. 칼빈은 “오늘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말씀을 외우며 임종을 맞았다고 합니다. 아이작 뉴턴은 마지막 시간에 정신이 몽롱해져서 아무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선생님은 지금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말씀입니까”하고 물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기를 “다른 것은 몰라도 두 가지는 알지, 하나는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라는 것은 알고 있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임종이 가까워 오자 병원에 입원하여 호수를 끼우고 시간 연장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목사로서 마지막 보여주어야 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불러 놓고 분부를 하였습니다. “이것 다 빼라, 그리고 퇴원 준비를 하라.” 그리고 집에 가서 종말 준비를 다 하고 조용히 임종을 맞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종말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종말

 

 

 

 

 첫째는 준비입니다. 준비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있습니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이 문제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혼인잔치 비유는 주님의 재림 때의 이야기입니다. 준비된 사람들은 갑자기 신랑이 왔어도 침착하게 맞이했습니다.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잠을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기름을 찾아 허둥댑니다. 그러는 사이 문은 닫히고 버려짐을 받았습니다. 종말의 준비가 이루진 사람은 종말의 때가 다가와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준비가 안 된 사람은 허둥댈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낭패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는 신앙이 발휘되지 못하고 불안감만 휩싸여 옵니다. 그래서 신앙 중 가장 생동감 있는 신앙은 종말신앙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종말이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젊어도 건강해도 종말은 가까이 와 있습니다. 종말은 젊음과 건강과 상관이 없습니다. 젊다고 건강하다고 종말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이 종말에 대해서 준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음은 선한 삶입니다. 노후준비나 보험이 준비된 사람은 노년이 다가와도 걱정이 없습니다. 이미 준비가 되어 있고 쌓아놓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그토록 자신 만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얼마나 수고하고 땀 흘리고 희생하였습니까. 평생 전도자의 삶을 살고 주님을 위해서 희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준비되었으리라”고 당당하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심은 것이 없이 혼자만을 위해 즐기고 쉽게 인생을 살고 아무 공적이 없다면 종말의 때가 되면 마음이 평안할 리가 없습니다. 반드시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때가 되면 나는 인생을 헛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선한 씨를 많이 뿌려야 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심어야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많이 쌓아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시신도 기증하였습니다. 장기도 기증하였습니다. 유골도 납골원에 안치하도록 다 조치하였습니다. 이제는 미련이 없습니다. 그 말은 나는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종말의 문제에 있어서는 마음이 가벼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미래를 위해서 준비된 사람, 쌓은 것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가벼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유사시 무서운 결단을 내려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종말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할까요? 하고 가족들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목에 구멍을 내고 호수를 꽂아야 합니까. 그러면 얼마동안 연명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1 2년의 시간이 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의 그 김 모 할머니는 그렇게 한 것이 1년이 넘게 병석에 누워 있게 되어 자손들이 인공호흡기를 떼어 내어 품위 있는 종말을 맞이하게 해 달라고 소송까지 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종말의 준비는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또 몸이 이상해서 진단을 해 보니 암 말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쇠해서 수술해도 2-30% 밖에 성공률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신앙적인 준비만이 지혜로운 결단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암이 말기라면 그리고 노쇠한 분이라면 수술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인생이 이미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초연함으로 기다려야 할 시간입니다. 수술 후 고생하며 좀 더 연명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 인생이 더 고생하고 삶을 며칠 더 연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인은 인생을 전적으로 하늘에 맡기고 때로 무서운 결단을 내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준비하고 계획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노쇠한 후에 암이 왔다면 그때는 수술하지 말고 그 암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암도 살겠다고 내 몸에 왔는데 노쇠한 나이에 그 암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면 암도 화를 냅니다. 함께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늙은 때에 찾아온 암도 잘못 찾아왔습니다. 암도 먹을 것이 있어야 하는데 다 늙어서 먹을 것이 없으면 잘 번식을 하지 못합니다. 무좀이나 암은 노인에게는 잘 오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와도 잘 번지지도 않습니다. 그냥 같이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다급하게 살면 안 됩니다. 진지하게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강북에서 강남에 갈 때에도 일에 매여 살다가 시간이 촉박하게 떠나면 허둥대게 됩니다. 가면서도 마음이 불안합니다. 길이 막히면 더 짜증이 나고 진땀이 납니다. 그런데 1시간 더 여유를 갖고 가면 가는 동안 여유가 생깁니다. 차가 밀려도 염려가 되지 않습니다. 그때 비로소 한강이 눈에 보입니다. 보니까 배가 떠다닙니다. 윈드서퍼를 타는 사람들이 시원하게 물을 가르고 떠다닙니다. 그때 “야 시원하겠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준비가 없고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그런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메시지를 남기는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지막으로 폼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종말의 때입니다. 그때 멋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멋 중 하나는 명분입니다. 명분을 잃은 종말은 추합니다.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종말이나 죽음은 멋은 커녕 있어서는 안 되는 모습입니다. 자살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의 종말모습은 아닙니다. 자살하는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죽을 이유는 있겠으나 그리스도인의 종말의 모습은 아닙니다. 특히 공인의 죽음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자살했다고 해 보십시오. 거기에 무슨 명분이 있고 주어지는 메시지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도 그 시대의 공인들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되어야 하는 공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유 있는 죽음을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메시지를 남겨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화가 날 때 누구나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있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마음뿐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공인들이 화가 난다고 다 자살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다 힘들고 화나고 살아가기 힘듭니다. 그럴 때마다 다 자살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공인에게는 삶도 죽음도 내 마음대로 살고 죽을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메시지를 남겨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공인의 삶은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담담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멋은 자신감과 확신과 남들이 보지 못한 세계를 바라보는 삶입니다. 종말의 시간에 담담함으로 맞이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여행을 한번 가 본 사람은 여행하기가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즐기는 마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처음 여행자는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둘이 가는 것도 아니고 혼자가야 하는 여행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종말은 다 알고 가는 길입니다. 종말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 어떻게 어떤 길을 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여유가 있고 그 가는 길이 자신 만만함이 있습니까. 어느 목사님은 자신의 장례식 때 사용할 마지막 육성을 미리 녹음해 두었습니다. 장례식 때 준비한 테이프로 고인의 육성을 들려주었습니다. 녹음기를 틀자 고인의 육성이 흘러 나왔습니다. “내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먼저 갑니다, 가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가실 때 식사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여유만만 합니까. 거기에 해학까지 곁들여 있지 않습니까. 손님들이 돌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과연 신앙인들은 종말 앞에서도 저렇게 여유 만만할 수 있다는 말인가”하고 큰 충격을 받고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멋이고 품위이고 이것이 세상에 메시지를 남기는 모습입니다. 이런 죽음 앞에서는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하는 장송곡이 아니고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하고 찬송해 주어야 합니다. 그 종말의 모습에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자 삶을 정리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리라.” 얼마나 만족하고 얼마나 멋있는 고백입니까. 갈 시간이 다가오면 모든 사람은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모두 며칠 더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고 각종 호수를 꽂고 미련을 버리지 못 합니다. 아이들이 면회 와서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말합니다. “평소 할머니 모습이 아니다.” “평소 아버지 모습이 아니다, 흉측하다.” 이것은 우리들이 소망하고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존심을 지켜야 하고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일어설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날 때에는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때 그 종말의 모습에서 강력한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 때가 되었으면 준비를 해야 하고 때로는 중대한 신앙적 결단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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