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이 다른 이유 롬14:17
▲구약에 약속된 복
신명기 28장으로 대표되는 복.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무병장수, 부귀영화, 만사형통,
자손번창, 머리 되고 꼬리 되지 않는 등의 여러 복들을 주신다.
▲신약에 약속된 복
구약성경에 나타났던 엄청난 복들은, 신약성경에 잘 보이지 않는다.
신약성경 어디를 뒤져봐도, 만사형통, 무병장수를 찾기 어렵다.
대신에, 부자 되려고 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서, 가난한 자가 복되다고 하신다.
(신약에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만 나오네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
오래 살 생각 말고, 주를 위해 언제든지 생명 바칠 각오 하라!
세상에서 환난, 핍박당해도 그것이 복이니까 기뻐하라....
어떻게 된 영문인지, 구약의 복이 신약에 와서 그 의미가 돌변했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킨다.
▲복을 보는 기준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한 마디로 답하면 → 하나님의 나라 때문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팔레스틴에 지상천국을 이루고 온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세상적 왕국은 꿈꾸었지만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먼저 가르치신 것은
회개하라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다.
그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복음서에 ‘하나님의 나라’가 110회 이상 반복되어 나온다.
이유는, 우리는 지상메시야왕국을 꿈꾸는 구약시대에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로 인해 복을 보는 기준이 바뀌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병장수가 무슨 절대적인 복이 되겠는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사형통이 그렇게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귀영화 누린들, 세상 부귀가 그리 중요한가?
물론 무병장수, 만사형통, 부귀영화 이런 것들이 좋긴 좋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그런 것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도리어 우리 신앙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한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자칫 못 들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다.(롬 14:17)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먹고, 마시고, 즐기고, 쌓아놓고 살고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는 것이 본질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백성들에게 진짜 복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축복, 마음의 평강,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 이런 것들이 진짜 복이다.
▲구약적 복은, 안 믿는 사람도 잘 받아 누리더라.
무병장수하는 사람들을 보라.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이 무병장수한다.
(어쩌면 믿는 사람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무병장수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받는 복일수도 있다는 뜻.
부자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안 믿는 사람도 부자 많이 된다.
하나님과 관계없이도 얼마든지 부자 될 수 있다.
▲믿음 좋은 사람도, 구약적 복을 못 받을 수 있다.
그 복 주면, 아마 득보다 해가 더 많다고 판단하셔서 안 주시나 보다.
대표적으로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했지만
구약적 복을 많이 못 받아 누린 것이 사실이다.
그는 헐벗고 굶주렸고 병들었다.(고전 4:11)
칼빈은 세계를 바꾼 십대 인물에 속할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의 신학이 워낙 탁월하고 성경적이어서 칼빈주의 계보가 생겼다.
그의 개혁신학은 장로교 및 미국 청교도 신앙과 사상의 뿌리가 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the 신학자'였다.
더욱이 가톨릭의 탄압에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인물이라면
하나님이 구약적 복을 듬뿍 부어주셔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의 전기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31세에 결혼했는데, 조건으로 오직 ‘믿음 좋은 여자’만 찾다보니
자식을 7명이나 둔 과부와 결혼했다. (부인 복 없었다)
그녀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몇 년 못 살고 죽었다.(자식 복도)
부인도 결혼 후 9년 만에 자식 7을 남긴 채, 먼저 소천했다.
그 후 그는 15년 동안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두통, 천식, 소화불량, 열병, 담석증 등 여러 질병에 시달렸다.
약 십년 동안 그는 위가 안 좋아서 하루 한 끼만 먹고 살았다.
(건강 복도 못 받았다)
그러다가 54세로 소천했는데, 생전에 그는
수 백 명 사람들이 수 백 년 동안 못 했던 일을 자기 혼자서 해냈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참 신앙인의 유언을 남겼다;
내 무덤에는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으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런 위대한 신앙인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구약적 복을 안 주셨다.
명예의 복은 주셨지만, (그것도 주로 죽은 뒤에)
건강의 복, 장수의 복, 가정의 복, 물질의 복- 아무 것도 안 주셨다.
그렇다면 칼빈을 보고, 우리는 복을 못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장수의 복을 못 받은 사람,
배우자를 먼저 사별하는 슬픔을 겪은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재물의 복이 없는 사람들이여
“나는 신앙이 형편없어서 그런지 복을 못 받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런 복은 절대복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런 차원의 복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없다고 ‘나는 복을 못 받았다’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는 복은 세 가지다.
제가 오랜 목회 생활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또한 오랫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는 것은
또한 인생을 오늘까지 살면서 경험을 통해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얻는 복이다.
▲1.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엡 1:3)
다른 말로, 구원의 복, 영생의 복이다.
흠 없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우리 죄를 다 씻어 주시는 구속의 복,
성령으로 우리를 인 치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만들어주시는 복.
이것은 엄청난 복이다.
이 모든 복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졌다.
천상의 복, 영원한 복, 절대적 복이요, 반드시 받아야 되는 복이다.
이 세상행복과 바꿀 수 없고,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는 복이다.
이 세상 명예와도 바꿀 수 없다.(찬송가 102장)
구약의 모든 복을 다 끌어와서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복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대법원장이 되고나서 너무 신앙적인 발언을
하지 말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대법원장이니까.
그는 아랑곳없이 국회 청문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라고 선포했다.
그는 새생명축제 같은 기독교집회에도 대법원장 신분으로 담대하게
초청강사로 왔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간증을 매듭지었다;
“만일 누가 나에게 예수님과 대법원장 자리를 놓고 어느 것을 선택
하겠느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주저없이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된 영생과 모든 영광은
세상 만사형통으로, 대법원장 자리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북한 성도들은 처절한 핍박가운데서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다.
아스팔트를 닦는 롤러 차 밑에 밀어 넣어 가루로 만들어 죽여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 이것을 놓치면, 아무 소용없으므로
그들은 담대히 핍박을 이기는 것이다.
▲2. 자족하는 복
자기 형편을 놓고 팔자 타령하지 않고 만족하고 감사하는 복이다.
온 세상을 다 얻어도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
평범한 아파트에 살아도, 만족하고 자족하며 살면 행복자이다.
아무리 화려한 명예를 가지고도 불만족스럽게 사는 사람보다는
무명한 자기 존재를 놓고 감사하며 살면, 훨씬 복 받은 사람이다.
교회 안에도 보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자족하는 복을 많이 주신 것을 깨달았다.
만사형통, 부귀영화, 무병장수 잘 안 주셔도, 이 복은 주셨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감사하고 만족하는 복이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배고플 때도, 배부를 때도
인기가 있을 때도, 인기가 떨어졌을 때도
몸이 건강할 때도, 몸이 약할 때도
어떤 형편에서도 스스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복이다.
이것이 보통 사람은 불가능하지만, 예수님 은혜로 가능하다.
▲3. 수고의 대가를 주시는 복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 126:5)
이것은 하나님의 자연법칙이다. 자연법칙에는 무임승차가 없다.
가을은 뿌린 자에게만 축복이 된다. 열매는 고생한 자들만 거둔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되,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살아야 한다.
자족하는 복이 남용되어, 노력 없는 삶에 변명이 되어선 안 된다.
노력도 하지 않고, 경쟁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
자기 한계를 뛰어 넘는, 열심을 다하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훌륭한 정치인, 과학자, 경제인, 예술가, 목회자가 배출되야...
그런 위인이 되려면 남다른 노력 없이는 절대로 안 된다.(자연법칙 무시 말아야)
그런데 우리가 노력한다고 노력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수고의 대가를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누릴 수 없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시 127)
여호와는 죽이기도/살리기도, 가난하게도/부하게도
높이기도/낯추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삼상 2:6~7)
우리에게는, 우리가 수고한대로 30배, 60배, 100배로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큰 복이다.
▲결론 :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오벳에돔은 정성을 다해 법궤를 자기 집에 모신 결과
3개월 만에 큰 복을 받았다.
성경에 오벳 에돔 이름 뒤에는 종종 ‘복’字가 따라 다닌다.
그래서 주님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서 석 달 동안 머물렀는데,
그 때에 주님께서 오벳에돔과 그의 온 집안에 복을 내려 주셨다(삼하 6:11)
(그 외 삼하 6:12, 대상 13:14, 대상 26:5)
그러나 앞서 아비나답은 20년간 법궤를 자기 집에 모셨지만
전혀 복을 받지 못했다.
신약시대 우리 성도들은 우리 영에, 우리 가정에
법궤보다 더 생생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우리는 아비나답의 가정인가? 오벳에돔의 가정인가?
하나님을 ‘귀찮은 뒷방 영감’ 정도로 여기면서 억지로 가정예배를
드린다면... 아비나답처럼 아무런 복을 받지 못할 것이다.
텔레비전보다 못한 하나님을 섬기면서 복 받기를 기대하겠는가?
우리는 오벳 에돔처럼 하나님을 기뻐하며 섬겨야겠다.
그러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을!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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