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넬료처럼 살자! (행 10:1-8)
새해 첫 주일입니다. 새해에는 참 새롭고 희망차고 산뜻해서 좋습니다. 새 것이 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야누스'라는 신이 나오는데 '시작의 신'이라고 합니다. 한해가 시작되는 1월을 영어로 '제뉴어리'라고 하는데 독일말로는 '야누아르'인데 이 말은 야누스의 이름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야누스는 얼굴이 두개라고 합니다. 그래서 '양면 신'이라고도 부릅니다. 한쪽 얼굴은 앞을 보고 있고, 다른 쪽 얼굴은 뒤를 보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지난날을 너무 잊어버려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지난날에 너무 얽매여서 집착하지도 말라는 의미입니다. 또 너무 앞만 보고 달려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자신 있게 달려가다가 교만해서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축년 새해에는 지난날의 어두웠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앞을 보고 가는데 주님과 동행하는 새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새해가 오면 여러 가지로 다짐도 하고 결심과 결단도 하게 됩니다. 좋은 것들을 결심하고 결단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새롭게 도전하는 도전정신이 필요합니다. 작년에 실패했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시도해보고 도전해 봅시다. 끊을 것을 끊겠다는 새로운 도전이 아름답습니다. 새벽기도도 한 번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우리 모두 다 도전해 봐야 합니다.
▶어느 여자 집사님이 체중이 계속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음식을 절제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찾았습니다. 잠 못 이루며 고민을 하다가 하루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 다이어트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냉장고 안에 아주 날씬한 Small-s 라인의 몸매를 가진 여배우 사진을 붙여놓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효리의 사진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 때부터 음식을 먹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그 날씬한 이효리를 보면서 다짐하기를 '나도 저렇게 날씬해져야지'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냉장고문을 다시 닫고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그 결과 한 달만에 5㎏이나 체중이 줄었습니다. 너무 신이 났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도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한 달 동안에 남편의 체중이 5㎏나 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편은 냉장고 안에 붙어있는 S라인의 이효리의 몸매에 푹 빠졌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냉장고 문을 열고 음식을 주워 먹다 보니 남편이 비만에 걸리고 말았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프랑스의 화가 이야기입니다. 그는 전원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솜씨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나무, 넘실거리는 호수, 푸른 하늘, 공중에 나는 새'들을 그대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림이 팔리지 않아 배가 고팠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아까운 소질을 농촌에서 썩히지 말고 도시로 나가 보게! 돈을 벌 것일세' 그는 이 말 한 마디에 파리로 나갔습니다. 꿈을 가졌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행복을 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도시로 와 보니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습니다. 잘 팔리는 그림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았더니 누드화였습니다. 귀족들이 누드화를 좋아해서 비싸도 사서 벽에 걸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누드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의 마음을 늘 '이게 아닌 데'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런 어느 날 화실에 앉아서 누드화를 그리고 있는 데 옆에서 화가들이 '저 친구는 누드화만 그리는 삼류 화가'라고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고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결심을 하기를 '굶더라도 하나님의 자연을 그리자' 하고 그 날로 보따리를 싸들고 다시 농촌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하고 가장 자연적이고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밀레의 만종'입니다. 그 그림은 정말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행복한 부부의 대화가 들리고 그들의 기도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그 그림이 그렇게 유명합니다. 좋은 결심, 좋은 도전은 빛을 발하기 마련입니다. /할/
그리고 올 새해에는 더 열심히 일하며 삽시다. 사람이 행복해지는 대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 생업 위에 맡겨진 일들을 열심히 하십시오, 또한 하나님의 일도 열심히 하십시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매달리고 1년 365일 매달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 예배 때마다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이웃의 영혼을 섬기는 마음으로 전도하고 봉사하고 나 자신의 영성개발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기축년 올 새해에는 열심히 일합시다. 가정의 일도, 직장의 일도, 사업의 일도, 하나님의 일도 열심히 하십시다. 그런데 열심히 일해도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출발합시다. 그런데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인생을 망하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때로는 인생을 성숙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채근담에 보면 역경과 순경(탄)이라는 말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먼저 역경은 사람이 불우할 때 참 공부를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어려운 것이 아프고 괴로운 것이 그대로 약이 된다는 설명입니다.
그리고 순경은 사람이 좋은 환경에 있으면 타락하기 쉽고, 그 주의에 있는 즐겁고 달콤한 것들이 모두 칼이 되고, 창이 되어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평안하고 즐거운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새해에는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다가 역경을 만나더라도 절대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열심히 일하면 때가 되면 분명히 거둘 날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열심히 씨를 뿌린 사람은 때가 되면 반듯이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오늘부터 출발하는 첫 주간, 열심히 일하면서 출발하다가 다음 결산의 달 12월에 많은 열매를 따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제목 소개!▶
이 세상에는 가정처럼 소중하고 귀중한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가정을 제일 먼저 건설하시고 그 가정을 통해서 복을 주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고넬료라는 사람의 가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가정은 하나님께 크게 복을 받은 가정입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정규사관학교를 졸업한 로마의 고급장교입니다. 그는 유대 땅에 점령군으로 파견되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방문했습니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지금 욥바라는 곳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다가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초청해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이에 놀란 베드로는 모든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써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가장 큰복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믿/ 오늘 고넬료를 배우면서 우리 모두 기축년 새해에는 고넬료처럼 믿음으로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1. 고넬료는 어떤 사람인가?(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여기 '가이사랴'는 당시 두 곳에 있었는데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가이사랴로써 욥바 항구에서 약 50Km 떨어진 곳에 있는 지형이었습니다. 또 한 군데는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을 한 가이샤라 빌립보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힐몬산 밑에 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살았던 가이사랴는 '털이 많다'는 뜻으로 로마의 총독부와 군 기지가 있는 곳으로 갈멜산 남쪽 지중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로써 대 헤롯 1세가 화려한 로마도시로 건설하여 로마황제 아우구스에게 바친 도시로서 '가이사랴 세바스데'라고 불리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러한 도시에 이달리아대라는 군대의 로마군 백부장이었습니다. 이 부대는 로마인으로 구성된 부대로서 총독보호를 위해 배치된 황제 직할부대입니다. 약 6,000명의 보병으로 편성된 사단병력에 해당되는데 여기 고넬료는 100명씩 편성된 백부장입니다. 오늘날 중대장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고넬료는 로마의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그야말로 알아주는 장교입니다.
2. 그의 신앙의 인격은 어떠한가?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가' 누구입니까? 고넬료입니다. 고넬료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우리도 그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①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이란 '좋은 예배 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 자세를 가리켜 경건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웃 앞에서 경건,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 자기 자신과의 경건'을 의미합니다. 그래요! 자신 앞에는 진실이 있어야 하고, 이웃 앞에서는 성실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신실이 있어야 합니다.
'경건한 사람'이란 확신에 가득 찬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입으로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생활이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경건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경건이란 말은 헬라말로 '유세베스'라는 말인데 그 뜻은 당시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했을 때 사람들이 지니는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금욕주의에 버금가는 무욕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주어진 것에 자족하며 만족하며 사는 자를 말합니다. 고넬료는 로마군인인데도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할/
여러분, 진정한 행복이나 즐거움이나 누림은 자족하는 마음에서 얻어집니다. 어느 것에서도 자족하게 되면 행복해지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자족은 80평 아파트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아파트를 가지면 더 큰 아파트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우상에게 붙잡힌 마음입니다. 20평 아파트에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최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에서 삶의 질이 나오고 행복의 강도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웰빙이라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불행하게도 자족의 지혜가 없는 시대입니다. 탄산음료를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지듯이 사람들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마음의 갈증은 강해집니다. 가지면 더 갖고 싶고 누리면 더 누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의 바다는 끝이 없습니다.
바울은 빌4:11-13절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고넬료라는 사람은 참 인간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세속으로부터 불러내셨습니까? 왜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불러내셨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가장 큰 의무는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성도의 첫 번째 할 일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배는 경건과 밀접한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경건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경건은 무단한 자기와의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딤전4:8절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할/
운동선수들은 피나는 훈련과 연습 끝에 챔피언이 되고 금메달을 따고 일등을 해서 전 국민을 기쁘게 합니다. 어린 김연아선수는 얼마나 귀엽습니까? 지난 번 북경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안겨준 선수들이 얼마나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까? 그런데 그 영광과 감동은 잠시뿐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안에서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경건하게 살면 범사가 잘 풀린다는 말씀입니다. /할/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살다가 천국에 가서도 풍성한 부름의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것입니다. /믿/
그래서 우리는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은 훈련입니다. 훈련은 반복해야 효력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끊임없이 경건에 연습이 필요합니다. 기도도, 봉사도, 헌신도 다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아멘!/
경건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경건에는 모양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⑴경건의 입술이 있습니다. 입술에서는 나오는 말로 금방 경건을 알 수 있습니다. 경박한 말은 경건이 아닙니다. 음담패설도 경건이 아닙니다. 쌍소리도 경건이 아닙니다. 성경적 언어가 경건의 입술입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경건의 모양이 나옵니다.
⑵경건의 옷이 있습니다. 화류계 여성들이 입고 있는 옷은 성적 충동을 자아내는 옷입니다. 미니스커트 입은 여인을 보고 경건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군복을 입고 있을 때 경건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수영복을 입고 있는 모습도 경건은 아닙니다. 어떤 옷이 경건입니까? 깨끗한 옷, 수수한 옷, 거부감이 없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은 허리부터 넓적다리까지 보이지 않는 옷을 입으라고 하나님은 명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의 인격을 거룩한 옷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으면 거룩한 행동이 나옵니다.
⑶경건의 자세가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는 경건한 자세입니다. 팔짱을 끼고 설교를 듣는다 거나, 코를 후비며 기도하는 것은 경건한 자세가 아닙니다. 조용히 앉아 경청하는 자세, 팔을 올리고 기도하는 자세, 눈을 하늘로 향하여 부르짖는 자세가 경건의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경건한 말, 경건한 옷, 경건한 자세'는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런데 경건의 능력도 있습니다. 경건의 모습이 있는 진정한 경건이 없으면 경건의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외식입니다. 가식입니다. 진정으로 경건해야 합니다. 믿음에는 경건이 더해져야 좋은 믿음이 됩니다. /아멘!/
②가정 복음화를 이룬 사람입니다.
가족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가족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 가운데 가장 귀한 은총은 가정이요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귀한 가정과 가족이 다 같이 천국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단번에 온 가족이 예수를 믿는 경우는 드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예수를 믿어 그 가족들을 구원시키는 일이 허다합니다. 고넬료가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고넬료가 되어야 합니다.
'온 집안이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온 집'이라는 말은 가족 구성원 전체를 말합니다. 자녀는 물론이고 그의 부하나 노예들까지 모두를 가리킵니다. 도 여기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나타내는 '두려움, 존경, 공경'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그의 독실한 신앙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혼자만 독실한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모두 다 독실한 가족입니다.
인간들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절대자이지만 인간은 상대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자이지만 인간은 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 자이지만 인간은 무능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창조자이지만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며 올리기도 하십니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이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넬료는 로마의 장교로서 식민지 백성을 통치하는 장교입니다. 로마는 다신론입니다만 황제를 신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넬료는 유일신인 유대교의 하나님을 온 가족이 믿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막연하게 경건의 의미를 생각할 때 가족관계나 이웃과의 관계는 다 망가져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좋으면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올바른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 못지 않게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이 아주 좋은 것같이 하나님과의 사이도 무척 좋은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과의 관계가 늘 좋지 못해서 비난받고 따돌림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 경건한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 고넬료처럼 새해를 삽시다. 혼자만 경건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집안 식구들이 다 경건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느낍니까? 가정의 부모가 믿음으로 바로 서면 그 가정은 축복 받은 가정입니다.
흔히들 자식 때문에 속상해 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고 삽니다. 그러나 부모 때문에 속상해 하고 탈선하는 자식들의 이야기는 적은 것 같이 생각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의외로 부모 때문에 탈선하는 청소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은 집으로 치면 기둥과 같습니다. 기둥이 썩고 흔들리면 그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밤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잠자던 부부를 흉기로 위협하고 전기 줄로 묶어 놓은 후 강도 짓을 하다가 붙잡혀 온 10대 두 명을 취조하던 수사관이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유는 유명한 모 인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타락하게 된 원인은 간단합니다. 부모는 별거상태였고, 아버지는 딴 여자를 첩으로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춤바람, 남자바람까지 났습니다. 살림은 가정부가 하였고, 따라서 이 아이는 고아아닌 고아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부모에 대한 반발로 가출을 했고, 닥치는 대로 못된 짓을 골라가며 저질렀다고 자백했습니다.
부모는 그 가정의 기둥입니다. 벽이 무너지면 다시 쌓고 바르면 되지만 기둥이 썩으면 안 됩니다. 고넬료는 훌륭한 가장입니다. 자신도 신앙생활 경건 생활을 잘 했을 뿐 아니라 가족도 잘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넬료 개인만 경건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가정 전체가 경건의 가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우선 가정이 경건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어떤 가정은 어딘지 모르게 집안 분위기가 경건합니다. 그 식구들의 삶도 경건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은 우선 분위기부터 세속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가정을 기뻐하십니다. 고넬료는 자신만 아니라 온 집안을 신앙 중심으로 이루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가정은 경건한 가정입니다.
한편 베드로가 천사의 지시를 받고 고넬료의 집에 가보니 이미 가족과 하인들과 부하들까지 그리고 이웃 가까운 친구들까지 모아 놓고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준비하고 기다렸습니까? 베드로가 도착하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온 가족이 준비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24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기다리는 신앙, 사모하는 신앙이 귀합니다. 주석가 '베이커'는 고넬료가 베드로를 기다린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를 기다린 것이요, 하나님의 종을 기다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단순한 방문객으로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자로, 하나님의 대리자로 믿고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고넬료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준비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쏟아집니다. 시42: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한 사람만 준비하면 한 사람만 은혜를 받게 되지만 가족이 함께 준비하면 함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그릇대로 물이 고이는 것과 같습니다.
고넬료의 경우는 그릇이 좋았습니다. 자신도 준비된 그릇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들도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해 온 가족과 친구들이 은혜를 받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사람은 길어서도 오다가다 만날 수 있지만 기다리고 준비된 만남은 정말 행복한 만남입니다. 마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다섯 처녀만 신랑인 주님을 맞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준비와 기다리는 자세였습니다. 열 사람 모두 처녀였고, 신랑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처녀만 기름을 준비했기 때문에 신랑을 맞을 수가 있었습니다.
▶미국 백화점 왕 '존 워너 메이커'는 자신이 경영하는 뉴욕의 백화점에 큰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그 내용은 전 사원들에게 알립니다.
⑴주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회사에 출근하지 말고 교회에 출근할 것.
⑵교회에서 5불 이상의 헌금을 드릴 것.
⑶매주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배울 것을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워너 메이커'가 세계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축복은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이 받게 됩니다. /아멘!/
▶그 다음 고넬료는 주의 종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했습니다. 25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고넬료는 로마의 고급장교입니다. 그는 식민지 유대를 통치하려고 온 장교입니다. 로마는 다신론입니다만 제일 우선적으로 황제를 신으로 신봉합니다. 황제에게만 총성을 맹세하고 경의를 표할 때만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분을 가진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고넬료의 인격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아무나 그렇게 못합니다. 얼마나 겸손한 인격자입니까? 여러분 믿음을 가로막고 은혜와 축복을 가로막는 최악의 장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만입니다. 이 교만이 천사를 사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교만은 천사를 하늘에서 땅으로, 지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갈릴리 어부 베드로, 가난한 전도자 앞에 넓죽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내가 나를 낮출 때, 주님이 나를 높이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기억합시다. /할/
그러니까 고넬료는 하나님의 종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의 가정으로 모신 것입니다. 신앙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33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얼마나 경건한가를 보여줍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구도자의 간절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주의 종을 사모하고 기다렸던지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시107:9절에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여기 '좋은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사 고칠 것을 고치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씀이 들려 오는 창문을 닫으면 안됩니다. 말씀은 눈으로 듣고, 귀로 듣고, 가슴으로 듣고, 그리고 영혼의 귀로 듣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인적으로 들어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오늘 고넬료의 말씀을 받는 태도를 보세요!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그 설교 단이 바로 '하나님의 앞'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신전의식' 이 자세로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요셉이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고넬료는 예배의 자세가 바로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받는 태도가 참 좋습니다. 우리가 성경 읽는 자세도, 듣는 자세도 바로 되어야 합니다. '칼 바르트'는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성경을 읽는 것 같지만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주시는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믿/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세는 그 사람의 신앙자세와 비례합니다. 말씀 듣는 자세가 바르지 못하고 불 경건하면 그 사람은 건강한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말씀 듣는 자세가 몇 가지 있습니다.
⑴말씀을 들어야 할 시간에 딴 생각이나 딴 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⑵자신에게는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만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⑶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어떤 철학 강좌나 교양강좌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⑷듣긴 듣되 하나하나를 비판하고 분석하고 난도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⑸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5번째가 고넬료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듣고 믿어야 합니다. 이런 고넬료의 예배 분위기는 경건 분위기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떨어집니다.
44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할/ 우리가 살길은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믿/ 여기 '성령이 내려오시니'란 말은 '위에서 떨어지다. 덮치다. 압도하여 사로잡다'는 뜻입니다.
▶행2장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심으로, 일심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셨고, 또 행8:17절을 보면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중에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시니 그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십니까? 말씀과 성령은 동전 양면과 같습니다. 말씀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높이는 사역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증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증거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듣는 자에게 임하게 됩니다. 요일5:7절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할/아멘!/
▶46절에서 성령을 받은 결과 '모인 사람들에게 방언'이 터졌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이 터진 것과 같이 고넬료가에 성령이 임하셔서 모인 사람들에게 방언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본문의 사건을 '가이사랴의 오순절, 고넬료가의 오순절'이라고 부릅니다.
▶47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③백성을 많이 구제한 사람입니다.
여기 구제는 '착한 행실'을 의미하는데 '불쌍히 여기다', '측은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궁핍한 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왔다는 말입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귀족입니다. 지체 높은 권세자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나라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 유대나라, 피 식민지 백성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많이 구제했다는 것은 어떤 특정 개인을 구제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는 팔레스틴의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생활을 합니다. 그 백성들을 많이 구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규정으로나 로마의 자존심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로마의 귀족성은 절대로 타협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구호가 아니라고 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에 헌신한 것입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면서 이것 먹고 힘내라는 차원의 구호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의 권세와 부를 가지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영적인 사역입니다.
고넬료의 구제는 구제를 조금하고 자기 이름을 과시하기 위한 오늘의 현대인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고넬료의 구제는 하나님께 기억되는 구제(4,31절)였는데 그가 베푼 구제는 눈가림이나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구제를 했습니다. 이것은 곧 그의 '신행일치'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 신년 새해에 우리도 고넬료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이 성숙하게 되면 생기는 정신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초월하는 힘입니다. 신앙이 성숙하면 상대방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내 것을 나누게 됩니다. 누굴 위해서 희생할 용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웃의 영혼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한 모습입니다.
확실히 베푸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도 곱습니다. 이웃에게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베풀어주면 그 관심과 배려가 곧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람이 이웃과 관계를 맺고 관계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이웃이 있어야 합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존재입니다.
고넬료는 노예들까지 배려했습니다. 관심을 가졌습니다. 심지어는 유대인들까지도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둔군 장교임에도 군림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까지 관심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유대인들로부터도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런 그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에게까지 상달되고 응답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사가 그 가정에 좋은 소식을 들고 방문했던 것입니다. /아멘!/
④기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여기서 우리는 고넬료의 경건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항상 이란 말은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3, 6, 9시 우리 시간으로 보면 9시, 12시, 3시입니다. 또 '항상'이란 말은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또 '항상'이란 말은 '계속해서'라는 말입니다. 다르게는 '모든 경우에'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일을 시작할 때에 기도하고 일을 끝낼 때에 기도하고, 아침에 기도하고, 저녁에 기도하고, 시간 맞춰 기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이 항상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경우에 기도하고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고 규례를 따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이면서 그랬습니다. 참으로 멋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고넬료가 기도를 하되 자기 생각대로 그냥 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정통적으로 하는 기도를 배워서 했습니다. '제 9시쯤 되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 귀중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할/
고넬료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도 고넬료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 삶이 무게가 있고 깊이가 있고 은혜가 있고 삶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 되게 됩니다.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레오 날도 다빈치'에게 42세 된 밀라노의 '로드비치' 공이 예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가 왔습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서 완성한 후 친구에게 평가를 부탁했습니다. 친구가 그 그림을 보더니 감탄을 했습니다. '좌우에 제자들을 배치한 것이 좋고 무엇보다도 손에든 은잔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빈치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붓으로 그림을 지워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친구가 왜 아깝게 그림을 지워버리느냐고 하자 '이 그림은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잔이 중심이라니 실패작'이라면서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 살아가면서 솔직히 이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중심이 분명한가?, 나는 과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신앙인의 삶은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은잔이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는 액세서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저는 고넬료를 다시 한번 정리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요, 혼자만 경건한 것이 아니고 온 가족의 신앙상태가 경건했고, 이웃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만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온 집'이라는 말은 '내 가족, 종, 노예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넬료에게는 가족말고도 노예도, 종도, 부하들도 있었습니다. 그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웰빙이라고 생각합니다. /할/
'well being'이라는 말은 '잘 사는 것, 잘 사는 삶, 뜻 있고 행복을 이루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사람인데도 벌써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좋은 웰빙은 내 집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점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행복함, 즐거움, 재미하면 자꾸만 어디를 가야만 얻어지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내 집이 삭막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기축년 새해부터 경건한 삶을 사십시다. 온 가족이 예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예배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축복은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이 있습니다. 2009년도에는 온 가족의 복음화가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꿈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그리고 올 새해에는 우리 모두 경건의 주인공들이 되십시다! 그런데 이 경건이야 말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이란 훈련입니다. 예배도 훈련, 기도도 훈련입니다. 훈련을 잘 받은 군사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아멘!/ ( 신년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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