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시 62:1-12)

by 【고동엽】 2022. 2. 8.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시 62:1-12)

 

오늘 우리는 대단히 시끄럽고 요란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요즘 우리 국민들은 못살겠다고 야단입니다. 사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가 하면 직장에서 툭하면 잘리는 세상입니다. 또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지요, 국회는 난장판이지요, 저 김정일 도당들은 이젠 개성공단도 문을 달을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혼란합니다. 밤에는 오토바이 폭주족들 때문에 정신이 없고, 수시로 바뀌는 입시제도! 그러다 보니 국민들은 정책 없는 정치에 대하여 원망의 소리가 높습니다. 누가 이 시끄러운 세상을 잠잠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돈 많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권력을 쥔 사람이 가능합니까? 돈이나 권력으로 될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 땅의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을 잠잠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을 잠잠케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바다의 풍랑도 잔잔케 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사람들은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으면 누구에게 하소연하면서 자기의 진실을 밝히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리 큰 허물도 아닌데 자신에 대하여 비방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실 할 말이 많지만 말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이럴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의 1절과 5절에 보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입니다.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풍전등화 위기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골리앗 손에서 건져낸 구국공신입니다.
그는 그 공로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국군 총 참모장이 되었고, 사울 왕의 사위가 되어 명실 공히 이스라엘의 제 2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울이 민가를 시찰하다가 여론을 들어보니 다윗의 인기도는 만만 인데 비해 자신의 인기도는 천천으로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찔하게 생각했던 사울이 그때부터 다윗을 죽이려고 가진 모략과 증상을 퍼부으며 그를 20년 간이나 못살게 했습니다. 다윗은 영문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 고생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는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누구를 원망하지 말고 우리도 다윗처럼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제목 소개!▶

 

'하나님을 바라라'는 말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1. 주님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바라보고, 이웃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①자신을 먼저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말 없이 식사도 안하고 출근을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니까 이번엔 아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건너 방으로 간다면 그 가정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경우에 대부분 큰 소리가 납니다. 불평과 원망을 말하고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을 꾸짖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책망하고 탓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성숙한 인격자는 모든 문제들을 먼저 자기에게서 찾습니다.
'저 사람이 왜 그럴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이렇게 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비단 부부문제만 아니라 우리들의 이웃 간에 관계에서도 먼저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의 결점을 잘 보지만 자신의 결점은 잘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책망하거나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7:4절 이하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보다도 내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봐야 합니다. /아멘!/
그런데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남이 지적해 주면 곱지 않은 마음이 듭니다. 사실 자기 자신은 자기가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남이 봅니다. 그래서 지적해주면 감사해야 되는데 우리 마음이 그러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볼 수 있습니까? 자기 스스로는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약1:23절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했고, 고전10:11절에서는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다시 말하면 성경이 거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사건들이 나오고,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하여 거울로 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브라함을 통해 '나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살았는가?' 비취어 보고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하고, 사울 왕을 통하여도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성경에 좋은 인물, 좋은 사건은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교훈이요, 나쁜 인물, 나쁜 사건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믿/
사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은 누가 뭐래도 자신이 제일 잘 압니다. 내 자신이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 제일 정확하게 진단을 할 수 있습니다.
눅5장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윽고 날이 새고, 먼동이 밝아오고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타고 복음을 전하신 뒤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순종한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아 두 배에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몬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순종하고 보니 갈릴리바다를 다 보고 계시는 그분이야말로 메시아임을 깨닫게 되었고, 자기는 죄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거울인 말씀 앞에 설 때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 그리고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영원한 축복을 받습니다.


②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즈음은 이웃이 없습니다. 누구의 도움이나 간섭을 받기를 싫어합니다. 그저 자기만 편하면 됩니다. 앞에 살고 있는 이웃도, 옆에 살고 있는 이웃도, 나와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입니다. 절대로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감옥 속에 가장 큰 벌은 독방에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게 이웃의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눅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참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를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게 됩니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얼마나 맞았는지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행스럽게도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냥 가버리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니까 레위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 사람 역시 못 본체하고 가버립니다. 그들은 강도 만난 자들의 동족입니다. 같은 백성입니다. 그들은 정작 도와주어야 할 때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사마리아인이 지나갑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와는 원수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잘 돌보아주고 주막에 데려다가 쉬게 하고 모든 경비를 댑니다. 한 마디로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그들은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그때 주님은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런 관계가 없어도, 아니 나와는 원수 관계에 있다고 해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나의 이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관심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할/
그런데 가장 큰 관심은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주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 이 믿음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이웃에 대해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롬9:1절 이하에 보면 "그는 이웃을 어찌나 사랑했던지 그 사랑하는 마음을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이웃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웃에 대하여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 절대로 이웃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웃을 바라보면 실망되기도 합니다. 내가 나를 보아도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웃을 볼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를 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보고 이웃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멘!/
이제 우리가 자신을 보았고, 이웃을 보았다면 누구를 보아야 하고 어디를 보아야 합니까?


③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베들레헴의 양치는 목자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또한 그는 사울 왕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 충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휘하의 신하들에게 배신당하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인 자기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뼈아픈 슬픔도 겪었습니다. 자기가 믿었던 나라, 자기가 믿었던 친구, 자기가 믿었던 신하가 전부 배신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많은 사건과 시련 속에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세상에 믿을 것은 하나도 없구나!'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노년에 본 시62편을 썼다고 합니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 믿을 것이 못되는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인생, 흔들리는 담 장 같은 인생, 아무 것도 아닌 인생,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쫓아다녔을까? 내가 나를 생각할 때에도 믿을 것이 못되는데 다른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세상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이런 인생을 철든 인생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담담하게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향한 외침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육체입니다. 다른 것은 다 흔들린다 해도 건강만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이 건강마저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합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다 흔들리고 다 병들어도, 나의 영혼아 너만은 건강하고 건실하게 바로 서 있어다오'라는 절규입니다. 영혼만은 바르게 서 있어야 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다윗의 철학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쓸데없는 미련을 가지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못 믿을 것을 왜 믿으려고 하느냐? 새삼스럽게 왜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시46: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 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원하든 원치 않던 그 분은 높임을 받으실 분입니다. /믿/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그 분을 기다리며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마음과 정성을 드리며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만 바라는 생활을 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평안할 때, 건강할 때, 형통할 때는 하나님을 잘 바라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엉뚱하게 점치는 무당에게 찾아가서 자기의 운명을 맡기는 안타가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영혼입니까? 그러나 본문의 다윗은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외칩니다.
⑴여기 '잠잠 하라'는 말은 '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좀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또 부모를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합니다. 원망과 불평은 마귀들이 좋아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백성들에게 당부한 말도 잠잠 하라는 당부였습니다. 수6:10절에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의 입에서 불 신앙의 소리가 뛰어나올까 봐 입 단속을 한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잠잠 하라는 말은 '너희 판단을 중지하라.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일단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하나님을 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 현실 속에 하나님말고 바랄만한 그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우리의 근본문제와 모든 문제는 하나님말고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믿/
⑵욥은 고난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사람들이 고난을 말하지만 욥과 같은 고난은 없습니다. 그는 모든 소유를 잃었습니다. 10자식도 잃었습니다. 그 많은 재산도 잃었습니다. 그 좋던 건강도 잃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까지 자기를 저주하고 떠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 찾아와서 그를 조롱합니다.
욥13:5보면 그때 욥이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그리고는 자기는 '전능자에게 말하고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욥은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았지만 그는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억울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사람 앞에서 잠잠하고 먼저 하나님께 말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2.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호12:6절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 짤막한 이 한 구절 속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①'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렇습니다. 돌아와야 합니다. 가까이 와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시력이 제 아무리 좋아도 거리가 멀면 희미해집니다. 10리나 100리 밖을 제대로 볼 수는 없습니다.
미혼 남녀가 결혼하기 위해 선을 보는 경우 직접 얼굴을 대면해서 봅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고 해서 10미터쯤 떨어져 보지는 않습니다. 선은 마주 앉아서 봅니다. 선은 낮에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유는 밤은 불빛아래서 상대를 보기 때문에 대부분 상대가 아름다워 보인답니다. 그리고 선을 보려면 돌 사진을 먼저 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즘은 성형수술로 얼굴을 다 뜯어고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가까이 겉으로 와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얼굴이 멀어지면 정도 멀어집니다. 교회가 멀어지면 신앙도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은 성전 중심, 예배 중심 신앙 중심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②'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하나님께 가까이 돌아온다는 것은 방향전환이며 곧 회개를 의미합니다. 돌아와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애와 공의를 지켜야 합니다. 인애는 사랑의 행동이고 공의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실천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할/
③'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 항상 하나님을 바라 바야 합니다. 여기 '항상'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변치 말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누가 응답 받습니까? 항상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축복을 받습니까?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순종하는 사랑입니다. 누가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까? 항상 변치 않은 믿음입니다. /할/
욘2:4절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이것은 요나의 자기 고백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다시 구원받는 은총을 입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매를 맞더라도 뛰쳐나가면 버림받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용서를 받게 됩니다. 실패했더라도 포기하고 절망해 버리면 재기할 소망이 없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믿/ 욥5:18-19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 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할/

 

3.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뜻이 무엇인가?

①갈망을 의미합니다. 간절한 소원을 담아 이루어 줄 것을 믿고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간절한 마음이 은혜를 받고 능력을 받습니다. ▶행3장을 보면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 곁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어느 날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는 베드로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행3:5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물론 그의 소원이나 갈망은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줄 것인가?' 그러나 그는 베드로를 바라보다가 엄청난 구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믿/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기대하고 바라보십시오, 은혜를 주시고 응답주시고, 축복주시는 주님을 기대하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멘!/할/
②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하20장에 보면 유다 왕 여호사밧의 고난과 극복이 나옵니다. 그는 유대 제 4대 왕으로써 25년 간을 통치한 왕입니다. 그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찾는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게 유다 나라의 주변 부족인 '모압 자손, 암몬 자손, 마온 사람들이 아람사람들과 연합하여 여호사밧 왕을 치러 온다.'는 보고를 받고는 군대를 먼저 소집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호사밧 왕이 성전으로 들어가 기도를 드렸습니다.
▶12절을 보세요!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했다고 합니다. 여호사밧은 우리의 운명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살기 힘든 이때에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까? 우리를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시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할/
대하20:15절에 보면 하나님만 의지했던 여호사밧에게 즉각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그 날 여호사밧 군대는 적군을 진멸하고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믿고 감사하며 성가대를 앞세워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긴 것입니다.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전쟁도 이긴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한한 용기를 줍니다. 돈이 있다고 이기고 총칼이 있다고 이기고 경험이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할/
③선택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상대나 물건을 선택합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선택은 일생을 좌우합니다.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삶과 죽음을 결정합니다.
내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왕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우자 선택이 실패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때 내 눈이 멀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주님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왕으로 선택했다는 의미입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아멘!/
④동참을 의미합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하는 목사를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은혜 받고 축복 받고 능력 받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를 돕는 방법입니다. 설교시간에 딴 짓을 하는 사람은 설교를 방해하고 설교자는 실망시키는 것입니다.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관중들이 열광하여 무대를 바라보는 것은 가수는 신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주님의 뜻에 따르고, 사역에 동참하겠다는 것입니다.
출33:8절을 보면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한 일이나 하나님께 말씀드릴 일이 있으면 회막(성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백성들은 자기 장막 밖으로 나와 모세가 회막 안에 들어갈 때까지 서서 바라보았습니다.
여기 깊은 뜻이 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땀 흘려 기도하는 모세를 보면서 어떻게 장막 안에서 편히 있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서 일제히 밖으로 나와 모세의 행보를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모세와 행동과 삶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여 뽑아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귀한 직분과 사명을 주였사오니 그 사명에 동참하겠다는 결의입니다. 또 당신의 뜻대로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아멘 입니까?/
⑤소망의 의미입니다. 민27:1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신32:49절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산에 올라 느보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바라본다는 것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행군하면서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을 소망하며 모든 고생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잡니다. /할/


4. 어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①십자가에서 내 죄 때문에 피 흘려주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고전1: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②부활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③재림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④치료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아담 이후 인간은 다 병이 들었습니다. 영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몸이 병들고 생활이 병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가정이 병들고 사회가 병들고 역사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병은 누가 치료할 수 있습니까? 서울 대학이 치료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안기부가, 서울시장이, 이 대통령이 치료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들도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간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고치셨습니다. 소경을 고치시고, 문둥병을 고치시고, 각양각색의 어떠한 질병도 다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죽었던 자를 살리시는 창조주의 능력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육신이 아픕니까? 그 분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치료의 여호와니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병을 온전케 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⑤환난에서 건지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풍랑을 만났던 제자를 구해주신 주님이 우리들의 가정의 풍랑을 잠재워 주시고 사업의 풍랑도 잠재우십니다.
시91:15절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할/
⑥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히6:14절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보라"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던 그 땅, 그가 밟은 모든 땅은 모두가 옥토로 변하여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⑦감사하면서 바라보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느니라!" 주님은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떡 다섯 개를 들어 하나님께 감사 드렸더니 기만 명이 먹고도 12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감사가 축복입니다. /할/

 

5. 왜 우리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까?

 

①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다윗은 극한 환난 속에서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처지는 3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자신의 처지를 '넘어지는 담, 흔들리는 울타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환난 속에서 그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힘을 얻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여기 '반석'(추르)은 큰 바위를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반석은 무엇입니까? 든든하다는 말입니다. 견고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모든 집이 무너지되 하나님을 의지하는 내 영혼이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는 그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부부의 행복은 반석 위에 행복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반석이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시험에서 환란에서 건지시고 홍해의 재난에서도 건지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산성이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계시기에 다윗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면서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의 '피난처'가 되시기에 백성들로 하여금 '시시로' 저를 의지하라고 하였습니다(8). 여기 '시시로'는 '항상'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곧 역경 중에서나 순경 중에서도 변함 없이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약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구원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민21:4-9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이 에돔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대들다가 불 뱀에게 물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뱀에 물려 죽는 사람이 많아지자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떠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민21:9절에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바라본 사람은 살았습니다. 바라보는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⑴믿음이 있을 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불 뱀을 바라보면 산다는 믿음이 있을 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히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⑵기다려야 합니다. '바라본다'의 히브리어의 동사는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대부분의 믿음의 성취가 기다림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기도의 응답도 기다리십시오. 축복도 기다리세요! 우리 교회 부흥도 기다립시다! 천국도 기다리다 보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할/
②소망으로 인도하십니다.
5절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 출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몹시 시끄러웠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애굽의 바로 군대가 뒤쫓아오기 때문입니다. 바로를 섬기고 살 때가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큰 소리로 외친 말씀이 출14:13절입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그 날 홍해는 갈라지고 애굽의 군대는 수장되고 이스라엘은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할/ 하나님의 사건은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 같은데 그 길이 살길입니다. 다니엘의 사자 굴도, 그의 친구들이 들어간 칠 배나 뜨거워진 풀무불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 두 손들고 꼼짝도 못했습니다. /할/
③인생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9절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성도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소망과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믿을수록 배신감은 더욱 커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요, 사랑의 대상입니다. 밉든 곱든 그저 사랑할 뿐입니다.
9절에서도 인생의 부패성을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부패한 인생은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경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인생이 어떻게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2: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인생을 의지하는 자의 결말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
④하나님이 모든 것을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12절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십니다. 갈6:7-8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⑤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시42:5/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할/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승리합니다. '커밍 워크'라는 학자는 인간의 성공 요인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했습니다.
⑴지능, 즉 아이큐(IQ)입니다. 지능이 낮으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현대는 '지능과 지능의 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능이 기본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⑵지식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공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공을 하려면 필요한 많은 지식을 두뇌에 입력해서 축적시켜야 할 것입니다.
⑶기술입니다. 누구보다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실천능력이 없으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런 능력을 몸에 익히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기술은 창조되지 않습니다.
⑷태도(자세)입니다. '커밍 워크'는 이 네 가지 요인 가운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에 적어도 93퍼센트 이상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네 번째 요인인 태도(자세)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자세! 삶의 자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 이웃 앞에 진실, 내 자신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믿/ 그렇습니다. 성실과 진실이 신앙의 바른 자세의 기본입니다.
㉡긍정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할 수 잇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할 수 있다고 믿는 그 믿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가능하다고 보는데 유독 자기만 불가능하다고 우기는 사람, 모두가 다 바르게 보는데 유독 자기만 삐딱하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하나님도 손든 사람입니다. 그래요! 만사를 어둡게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겸손한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이 감사를 낳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며 족하게 여기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고마워하는 마음은 겸손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온유하고 겸손해질 때에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성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만 바라봅시다! 다윗은 항상 주님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시25: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