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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롬 8:31-39)

by 【고동엽】 2022. 2. 8.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롬 8:31-39)

 

2002년 월드컵 경기 때 우리나라하고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있었는데 1:0으로 지고 있다가 결국에 2:1로 역전 승했습니다.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티비에 이탈리아의 감독이 물병을 걷어차고, 옷을 집어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마에 유학 간 학생들이 그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집안에 숨죽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슈퍼에 가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다고 합니다. 교민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며칠 동안 보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패배한 분노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승리해서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공짜로 설렁탕을 대접하는 식당도 있었고, 선착순 몇 명에게 갈비를 무료로 주는 식당도 있었습니다. 기쁜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고 자동차 경적을 울리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패배의 아픔과 승리의 기쁨이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한번 밖에 살지 않는 인생. 길지 않고 짧은 인생을 사는 여러분, 패배의 인생이 되지 말고, 승리의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할/ ◀제목소개!▶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질입니까? 권력입니까? 지식입니까? 물론 물질의 힘도, 돈의 힘도 큽니다. 또 권력의 힘은 더 무섭습니다. 지식의 힘도 대단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입니다. 그러나 더 큰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믿/
우리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잘 압니다. 마틴 루터는 청년 때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습니다. 그는 변호사나 법률학자가 되기 위해서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오고 천둥번개가 치더니만 벼락이 때려서 앞서가던 친구가 즉사해 버렸습니다. 그 때 마틴 루터는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서 '오 하나님! 만일 저를 살려 주시면 저는 저의 평생을 바쳐서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난 다음에 그는 살아나고 그 이후에 자기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끝없는 죄책감으로 번뇌를 했습니다. 아무리 고행을 해도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의식을 행해도 죄인이란 인식에서 해방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경을 읽다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성당 증축자금을 위해 산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그 면죄부를 돈주고 사면은 그 만큼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도 면죄부만 사면 연옥에서 천당으로 올라온다고 그런 너무도 터무니없는 논리를 전개하고 면죄를 팔았습니다.
그는 거기에 대해서 의문하여 1517년 95개 조항을 발표하고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은총.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해서 종교개혁을 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깨달은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로움과 영광을 얻고 천국 백성이 되고 영원복락의 소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만일 우리보고 대가를 지불해서 용서를 받고 의로움을 얻고 천국을 값 주고 사라면 천국에 갈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루터는 막강한 힘을 가진 로마 교황청과 싸웠습니다. 당시 교황청은 단순한 종교적인 교권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카톨릭은 유럽 전부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거대한 교권에 맞춰서 마틴 루터가 혼자서 싸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한 사람이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보통 종교개혁하면 마틴 루터 한 사람만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마틴 루터와 더불어 짝을 이루어 함께 동역했던 친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사에 등장하는 '필립 멜란히톤'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루터보다 열다섯 살이나 아래였습니다. 그러나 굉장히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얼마나 친했느냐하면 두 사람을 죽은 다음에도 유언에 따라서 부부지간도 아닌데 비텐베르크 교회의 한 무렵 안에 나란히 붙일 정도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일종의 행동 주의자였다면 '필립 멜란히톤'은 이론적인 학자였습니다. 루터는 종교 개혁을 하다가 종종 실망하고 좌절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때도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자기의 어린 후배였지만 친구였던 멜란히톤은 루터 곁에서 말하기를 '당신이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한다면 그 진리는 반드시 이길 것을 믿어야 한다'고 늘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쓸 때마다 말할 때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멜란히톤은 마틴 루터에게 성경 한 구절을 꼭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둘이 다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말씀이 있는데 그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의 31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할/ 그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힘을 얻고 그 큰 힘의 집단인 로마 카톨릭과 싸워 마침내 종교 개혁의 물꼬를 트게 했습니다. /할/
우리는 동일한 확신을 바울사도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살고 있던 시대는 로마의 막강한 힘이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도 바울은 그 로마를 복음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본문 3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할/ 신앙의 힘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신앙을 붙들기만 하면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도 이기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다시 31절 끝을 보세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고, 37절을 보면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요16:33절을 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아멘!/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요일5: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할/
전쟁터에 나간 참전용사들이 이기고 돌아오면 참전하지 않았던 백성들도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전쟁에 지면 싸움에 참전하지 않은 모든 국민도 함께 굴욕과 패배의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대장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며 본문의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참 행복한 성도 여러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말씀 부여잡고 대망의 2009년도를 이기고 승리하는 축복의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주시니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31절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리고 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 말씀은 험악한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희망과 용기와 힘의 원천이 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인생은 한결 윤택하여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사람이 우리를 위함이 아니요, 만군의 하나님!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고 선포하시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멘!/
여기서 '위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요, 도와준다는 말이요, 내편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활동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 이것은 우리 인생의 방패요 견고한 성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이 말씀 속에 '우리'라는 말은 나를 포함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위의 두 구절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찾게 됩니다. '대적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풀이를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면 누가 우리를 위하리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주시는 한 그 어떤 대적자도 나를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풀어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셔서 나를 지키시면 내 사업이 붙일 듯 일어납니다. 내 건강히 새롭게 회복됩니다. 나의 범사가 활짝, 활짝 열리게 됩니다. /아멘!/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내 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든든하게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백그라운드가 되십니다. 이 세상 어느 빽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힘입니다. /믿으시면 크게 아멘!/
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시면 우리의 믿음이 새롭게 됩니다. 그분이 붙잡아야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면 그 누구도 어떤 것도 나를 위해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를 해치려하는 원수가 많고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키려고 다닐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시는 한 아무도 우리를 대적 할 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단도 이깁니다. 세상도 이깁니다. 죄도 이깁니다. 적도 이깁니다. 이단도 이깁니다. /할/
'마틴 루터'가 말한 대로 하나님을 대적하고는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력, 금력, 과학, 의학,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식도 이단도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너지고 패했습니다. /믿/
이런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우리가 붙잡히도록 믿음으로 바로 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막연히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허황한 바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중심을 보십니다. 그 어떤 형식과 의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경외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섬기고 있는가?'를 불꽃처럼 보시는 분입니다. /믿/

 

2.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32)

 

한마디로 독생자 예수님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것을 미루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것을 내놓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던 것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찌릿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무엇이든지 좋은 것으로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그래요! 본문의 요지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놓으신 하나님이시라면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주지 못한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린 아이라도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큰 것을 주면 그보다 못한 것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내어놓은 사람을 덜 귀한 것은 쉽게 내어놓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가장 큰 것, 가장 귀한 자인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 나머지들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믿어집니까?/아멘!/
▶아들이 다섯이나 있는 집사님이 아들이 하나도 없는 친구와 얘기하는 중에 그 친구가 아들 하나를 달라고 하자 엉겁결에 아들이 다섯이나 있으니까 하나를 줄 테니 양자로 잘 키워보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부인에게 이야기했더니 벼락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집사님이 약속을 해 놓고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잠자고 있는 다섯 아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아들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바라봅니다.
그래서 바라보면서 생각해 보니 줄만한 아들이 없었습니다. '첫 아들은 장남이라서 안 되고, 둘째 아들은 다섯 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지혜로운 아들이라서 안되겠고, 셋째 아들은 다섯 중에서 제일 미남인데다 자기를 쏙 빼 닮았기에 도저히 셋째 아들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넷째 아들은 보니 늘 병약하고 비실한 아들인데 그런 아들을 남에게 주는 것이 도저히 불쌍해서 안 되겠고, 다섯째 아들을 보니 막내를 어떻게 남에게 줄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어 하나도 줄 수가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답니다.
바로 그 순간 이 집사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독생자를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32절은 '자기의 외아들까지 내어 주신 분이 다른 작은 것들을 왜 주시지 못하겠는가?' 이런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삶의 도상에서 역경과 고난의 폭풍우와 비바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은 약속합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분이 외아들과 함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왜 아니 주시겠느냐? 이말 입니다. /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모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더 깊이 깨닫기 위해서는 28절을 다시 한 번 돌아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할/
'모든 것'입니다. '물질, 건강, 재능, 조건, 환경' 등을 포함합니다. 언제 주십니까? 우리가 원한다고 주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의 길을 갈 때 주십니다. /믿/ 그렇습니다. 우리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32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자식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시골 가정에서 무남독녀 외동딸이 시집을 갔습니다. 어느 날 시집 간 딸과 사위가 찾아왔습니다. 처갓집에 온 사위가 갑자기 씨암탉 한 마리를 잡아 달라고 말합니다. 그 집에는 그 닭이 생계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재산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 처해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라고 호통을 쳤을까요? 아니면 씨암탉을 잡아 주었을까요? 틀림없이 씨암탉을 잡아줍니다.
만약 잡아주지 않는다면 외동딸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귀한 무남독녀 외동딸을 사위에게 주었는데, 그 까짓 씨암탉 한 마리 못 잡아주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면 하나님께 버르장머리 없다고 야단치실 까요? 절대로 야단치지 않습니다. 예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광 가운데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엡3:20절에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주시는 분'이라고 했고, 빌4: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마7:9-11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할/
주님은 각양 좋은 것들을 쌓아놓으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베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건강이 문제입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구하십시오.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 풍성하게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2009년도 우리는 32절에서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을 꼭 만나시기 바랍니다.

 

3. 그런데 우리에게 대적자를 통하여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35-36).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 대적자는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일곱 가지의 공격 무기의 명세표가 본 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등입니다.
⑴환난은 밖에서 무섭게 밀어닥치는 인생 고를 말합니다. 여러분 환경이 어렵습니까? 자식이 속을 썩입니까? 남편이 속을 썩입니까? 아니면 어떤 문제가 터졌습니까? 환난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환난은 알곡 성도를 만드는 기계랍니다.
환난은 원래 로마시대에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타작키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도리깨를 말합니다. 땅에 곡식을 깔아 놓고 도리깨로 힘껏 내리치면 곡식알들이 전부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환난은 알곡 성도를 만듭니다. 환난은 오히려 성도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더욱 기도하게 만듭니다. 성도는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롬5:3-4절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할/
⑵곤고는 안에서 일어나는 심적 고통입니다. 정신적인 고통도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러나 곤고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위로해 주십니다. /아멘!/
⑶핍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괴로움입니다. 천당 가는 길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찬383장에 보면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우리는 주위로부터 노골적인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손보십니다. 우리는 그 핍박을 잘 견디면 하늘의 상급이 큽니다. 시50;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할/
⑷기근은 배고픔과 굶주림입니다. ⑸적신은 벌거벗은 수치입니다.
⑹위험은 아찔아찔한 위기입니다. ⑺칼은 권력 앞에 죽는 것을 말합니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칼 앞에 죽어 갔습니다.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서 죽었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초대교회 300년 동안 로마의 무서운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순교를 끝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을 보고 그 당시 황제 '율리아누스'는 '그대 갈릴리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승리했다'고 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순교자들 중에는 약하고 어린 부녀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죽은 것 같지만 위대한 순교자의 길을 간 것입니다. 그 거룩한 순교자의 길도 주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천국에서의 최고의 훈장은 순교자에게 돌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순교자의 그 길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다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입니다. 만 왕의 왕이신 그분이 우리의 아빠가 되시고, 우리 곁에서 내편이 되어주십니다.
남들이 아무리 우리를 비난하고 조롱해도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내편이 되시고, 나를 믿어주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오늘도 나를 끝까지 지지해주시고, 믿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넉넉히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왜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까?

 

4. 누가 감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할 수 있는가?(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여기 송사란 법정 용어로써 고소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감히 누가 '송사할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우리는 요8장의 간음한 여인을 잘 압니다. 그 여인을 끌고 온 무리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손에 들었던 돌을 힘없이 내려놓고 모두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너를 고소하던 이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할 자가 없느냐?' 여인은 감격하며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면서 그를 돌려보냈습니다.
여기 '송사 한다'는 말은 검사가 피고인을 송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마귀가 '참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든지 죄와 허물을 들추어내서 벌을 받게 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말입니다. 검사가 아무리 기세가 등등한 것 같아도 판사가 '무죄' 판결을 내리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죄가 있다고 해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분은 의에 재판장이십니다. 만 왕의 왕이십니다.
약4: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고 하셨고, 요5:27절에 주님은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 했고, 고후5:10절에서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또 계1:7절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때' 피할 수 없이 그 앞에 드러나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입법자가 되시고 재판자가 되시는 주님이 '의롭다'고 판결을 내리시면 그 어떤 참소하는 마귀도 송사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법정에서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면 그 이상 재판권을 가진 법정이 없기 때문에 아무 송사를 못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감히 누가 송사할 수 있습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도 특사 권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사면해 주라고 하면 재판장의 어떠한 형량도 별 볼일 없습니다. 여기 '송사 못한다'는 말은 '송사할 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송사해도 그 송사가 받아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할/

 

5.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편이 되어주셔서 우리를 의롭다고 변호해주십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를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할/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변호사를 찾습니다. 변호사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변호사가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변호사이신 주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변호해주십니다.
▶논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하면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공자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면 그는 나쁜 사람입니까?' 역시 '아니라고'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냐'고 묻자 '훌륭한 사람이 그를 훌륭하다고 하면 훌륭한 사람이고, 나쁜 사람들이 그를 나쁘다고 하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공자는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누가 인정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옳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실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이 옳은 사람이 됩니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라고 인정하면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이고 어느 누구도 우리를 의롭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때대로 넘어지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합니다. 목사인 저 자신을 돌아보아도 참으로 한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금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고, 변호해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믿/
세상 사람들이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때로는 아프게 할지라도 세상 방법으로 대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인해함으로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하게 하십니다.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대적했던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멋쟁이 하나님이십니다. /할/

 

6.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는 본문에서 네 가지의 확증을 가질 수 있습니다.
⑴'죽으실 뿐 아니라' 우리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고 나 때문에 대신 예수님이 정죄함을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대신 죽으시는 투자를 했으므로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명을 바쳤습니다.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정죄하게 내버려두시겠습니까?
⑵우리 의를 위해서 살아나셨습니다. 즉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사망은 예수님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자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우리의 옛사람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실 때,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거듭난 생명이 된 것입니다.
⑶'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편은 존귀한 자리, 영광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는 어떠합니까?
엡2;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우리들도 하나님은 지극히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기 하나님의 우편이란 하나님의 오른편, 왼편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영광의 자리에 계심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우편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⑷'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잠시도 쉬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순간까지 기도하고 계시니 누가 정죄할 수 있습니까? 롬8;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왜 정죄하지 못합니까? 예수님께서 정죄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이 사실 때문에 기독교는 존재합니다. 기독교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생명은 길고 강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는 한 나는 강한 자입니다. 나는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나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는 것이 바울의 신앙입니다.
바울은 고전15: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는 57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김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신앙은 하나뿐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믿으시면 죽어도 다시 삽니다. 죽음을 이기는 이 신앙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그 다음 왜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까?

 

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37).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에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부인이 이름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게 된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남편은 자신의 무능함에 너무 괴로웠습니다.
여러 날 고민하던 남편이 마음에 한 가지를 작정했습니다. 아내를 속이기로 한 것입니다. 남편은 값싼 인삼 한 뿌리를 구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산삼을 캐는 꿈을 꾸고서 산에 올라가 산삼을 캤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걸 먹으면 아마 나을 거야. 꼭꼭 씹어 먹어!' 아내는 고마워하면서 정말 잔뿌리까지 꼭꼭 씹어 먹었습니다. 자신의 거짓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처럼 밝은 얼굴로 인삼을 먹는 아내는 보며 남편은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인삼을 먹은 후 병세가 금세 호전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몹시 기뻤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내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아내의 건강이 회복되던 날, 남편은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남편의 말을 듣고 있던 아내가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염려하지 말아요. 나는 인삼도 산삼도 먹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사랑을 먹고 나은 거예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산소가 없으면 질식해서 죽는 것처럼 사랑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비록 가난하고 어려워도 사랑이 있으면 그 힘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며 사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적인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37절을 보세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말씀에 큰 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투쟁의 연속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십자가의 군병입니다. 군인은 싸움을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자신과의 싸움이요, 마귀와의 싸움이요, 세상과의 싸움'입니다. 이런 싸움에서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할/
▶그분이 사랑이 우리를 위대한 승리자로 만드십니다!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들의 이름들이 나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사망'입니다. 세상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시에도 바울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 벌벌 떨었습니다. 죽음이 모든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떠나게 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여기 '생명'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모든 아픔을 말합니다. 육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하여 별 짓을 다 하면서 사는 것을 총칭합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 바로 그 뜻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타락한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돕는 천사가 아니라 악과 해를 끼치는 사탄의 실체를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권세자들'도 우리를 공격하고 위협하는 어떤 영적인 존재들의 공격을 의미하는데 그 권세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일이나 장래일'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어떤 일도 미래에 경험하게 될 어떤 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굉장한 초자연적인 능력도 사건도 우리를 망하게 못합니다. 왜? 주님이 확실하게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여기 나오는 '능력'도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세상을 초월하는 어떤 영적인 실재를 의미하는데 '하늘의 권세 잡은 자'라고도 불리는 무서운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은 이 초월의 존재가 자기네들의 삶을 지배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여기 '높음이나 깊음이나'는 인간에게는 저 높은 곳과 깊은 곳에 대한 공포증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아무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는 확신에 찬 선언입니다. /할/
평생 동지라던 정치 집단도 산상조각이 납니다. 인연이 끊어집니다. 핏줄도 끊어집니다. 자연도, 학연도, 끊어집니다만 하나님의 사랑의 줄은 끊을 수가 없고, 끊어지지도 않습니다. 주님과 나와 맺은 줄은 사랑의 줄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본문에서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할/
요일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할/ 새해 2009년도가 활짝 열렸습니다. 올해 사랑하는 참 행복한 성도들은 '큰 믿음으로 위대한 삶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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