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운동의 비평(옛신앙)
은사운동은 예언, 방언, 병고침 등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가 역사상 계속 있었고 오늘날도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오순절파 뿐만 아니라 또한 전통적 교단들 내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그러나 은사운동은 다음과 같이 비평되어야 한다.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됨
첫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계속 있었다거나 회복되었다는 주장, 특히 하나님께서 성경 외에 다른 계시들과 예언들을 주셨고 또 주신다는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 최종적 권위의 말씀, 즉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라는 믿음에 모순된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계시하신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계시의 필요성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도 시대 후 1900년 기독교 역사상 성령의 내면적 활동을 통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로운 계시 활동을 통해 동일한 내용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고 말씀하심으로 성경이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하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또 요한계시록 22:18-19은 이 책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라고 교훈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할 자는 없다. 주신 이도,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거두신 은사도 다시 주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1900년 동안 거두어 가신 것은 그의 섭리의 방식이었다.
사도 시대 이후 기독교 역사는 기적 행함의 역사가 아니고 십자가의 말씀을 전한 역사이었다.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하였다(고전 1:22-23). 중생과 회개의 내면적 기적은 늘 있었지만, 외적 기적은 오랫동안 사라졌었다. 특별한 경우, 기도의 응답으로 병고침을 받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충족한 말씀으로 일해 오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과 새생활을 위해 충족한 수단이었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신자들은,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난 적이 없었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잔잔한 내면적 활동 속에서 만족을 누렸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계속을 주장하는 은사운동은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되며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에 반대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사들이 아니고, 성경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성실한 순종이다.
신앙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킴
둘째로, 은사운동은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무시하고 성령 체험을 강조한다. 즉 신앙생활을 성경말씀보다 은사 체험에 의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 체험에 근거하지 않고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에 근거한 새 생활이다. 사도 바울은 기적을 전하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했다(고전 1:22-23). 또 사도 시대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진리들을 전달하고 확증하기 위함이었고 부분적, 일시적, 초보적 성격의 것들이었고 그에 비해 성경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의 말씀이다. 또 방언, 예언 등의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인격과 삶이다(고전 13장).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 또 진리대로 사는 바른 삶을 강조해 왔다. 그것이 옛길이며 건전한 길이다. 그것이 성경적 기독교이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소유한 교회이었지만(고전 1:7) 영적으로 어린아이였다(고전 3:1). 영성의 표는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삶이지, 어떤 은사가 아니다. 은사는 영성의 표나 척도가 될 수 없다.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의 저자이며 십 수년 전 한국의 대형집회의 강사이었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받았다고 주장했던 펄시 콜레 박사의 한국 비서 전미란 씨는 콜레 박사가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으며, 식사 기도는 물론 성경조차 오랫 동안 읽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다고 말하였고 “펄시 콜레 박사가 주장하던 2천명 교인의 ‘하나님의 성경 교회’나 750명의 학생이 선교 훈련을 받고 있는 선교대학도 모두 거짓말”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218)
할렐루야 기도원 김계화 원장과 함께 6년 동안 사명자로 있었던 김정희 전도사는 할렐루야 기도원 김계화의 정체라는 그의 책(기독교 이단문제 연구소, 1998년)에서, 그는 남산 도깨비 무당과 의형제를 맺은 자이며 그의 성령 수술은 속임수요 주술행위이며 영화배우 남정임의 성령수술 치료는 거짓이었고 그는 헌금 갈취와 재물에 눈이 먼 자이며 병자 안수를 가장하여 재산을 갈취하였고 언어폭력, 행동폭력을 지령하였고 사명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백원짜리 동전을 하나님이 주신 세뱃돈이라며 장사를 하였고 한약을 불법으로 제조하여 판매하였고 지하수를 능력의 생수로 속여 장사를 하였고 현재도 유부남과 불륜을 맺고 있다고 증거하였다.219)
신구약성경은 초자연적 은사들의 경험보다 성도들의 바른 지식과 바른 인격과 삶을 더욱 중시하고 강조한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 직역).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못했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서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모하거나 구하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오직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믿고 순종하고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알자. 오늘날도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새롭게 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성장케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자. 교회의 참 부흥은 다른 것을 통해서가 아니고 오직 신구약 성경의 성실한 강론과 전파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누가복음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초자연적 은사들의 실재성이 의문됨
셋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역사상 계속 존재하였고 오늘날 교회들 안에도 과연 존재하는가? 기독교회들은 성경에 증거된 계시와 예언, 방언, 병고침 등의 모든 은사들을 역사상 계속 경험하였고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가?
첫째, 계시와 예언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2:18은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경 외에 계시와 예언을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교회 역사는 은사주의의 주장에 반대된다. 초대교회에 몬타누스파는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장했으나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18세기 에드워드 어빙이 설립한 카톨릭 사도교회는 사도적 은사들을 주장하였고 예언도 하였으나 어떤 예언들이 성경과 충돌하고 또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정죄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안식교, 몰몬교, 및 여러 신비주의 집단들이 성경 외의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들을 말하지만, 다 이단 혹은 불건전한 단체로 간주되었다.
1997년 신년 첫날, 릭 조이너와 그의 동료들은 아홉 달 안에 재난이 미국의 남부 캘리포니아를 강타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또 테러범들의 공격과 거대한 지진에 대한 암시를 가진 몇 가지 경고들도 하였다. 두려움이 남부 캘리포니아주의 은사주의 교회들을 휩쓸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220) 그것은 거짓 예언이었다.
둘째, 방언에 대하여, 은사운동은 성령세례의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하며 이 은사는 모든 성도들의 필수적 은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이었다. ‘방언’이라는 헬라어 글로싸 는 ‘언어’를 가리킨다. 또 그 단어는 빈번히 글로싸이 (방언들)라는 복수로 사용된다. 마가복음 16:17, “새 방언들을 말하며.”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방언들]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것은 그것들이 여러 개의 언어임을 나타낸다.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이 사도행전에 증거된 방언과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추측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 고린도교회가 경험한 방언 은사는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과 동시대의 현상이며, 따라서 사도행전의 방언과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덧붙여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실도 방언이 언어적 성격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언어가 아닌 소리를 통역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오늘날 방언 현상은 대체로 외국어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도날드 버딕은 현대 방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① 반복이 매우 심하다, ②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적 배경이 비슷하다, ③ 한두 개의 모음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④ 언어적 구조가 부족하다, ⑤ 방언에 비해 통역이 현저히 너무 길다, ⑥ 동일한 구절의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다, ⑦ 영어 통역시 주로 17세기 초의 흠정역(KJV) 문체가 사용된다.221) 미쉬간 대학의 언어학자 케넷 파이크와 미국 성서공회의 언어학자 유진 니다 등은 오늘날의 방언이 언어학이 다룬 어떤 실제적 언어와도 비슷하지 않다고 지적하였다.222)
더욱이, 방언 현상은 역사상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어떤 불건전한 단체나 이단 종파에도 있었고 기독교 밖에도 있었다. 2세기의 몬타누스파는 방언을 하였다. 그 후 17세기 말까지 방언현상은 교회역사에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가 1776년 미국 뉴욕주 트로이 부근에 앤 리가 설립한 쉐이커 공동체는 남녀가 나체로 춤추며 방언을 하였고, 카톨릭 사도교회에서도 방언을 했다. 몰몬교 장로들도 유타주 성전을 봉헌할 때 방언을 하였다.223) 그러므로 방언 같은 현상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덧붙여서, 오늘날 은사운동에서 흔히 방언 훈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인위적이며 비성경적이다. 성경 시대의 방언은 훈련을 통한 것이 아니고 심지어 방언하기를 구한 것도 아니었다. 방언 훈련은 명백히 인위적인 일이다.
그러면 오늘날의 방언 현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과 성경의 충족성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일 가능성은 매우 작다. 오히려, 많은 비평가들은 오늘날 방언 현상이 심리적 현상이거나 위조품이거나 심지어 마귀에게서 기원한 것일 것이라고 생각한다.224) 특히, 오늘날 방언 현상의 비(非)언어적 성격이나 방언운동의 인위적 요소들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병고침(신유)에 대해서도, 오늘날 병고침의 은사가 있는가? 성경에서의 병고침의 사례들은 즉각적이고 비제한적이었다. 죤 맥아더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고침의 특징을 이렇게 열거한다: ① 한마디의 말씀이나 한번의 만짐으로 치료하셨다(막 8:22-26에 소경에게 두 번 안수하신 예외는 있었지만). ② 즉시 치료하셨다. ③ 완전히 치료하셨다. ④ 모든 사람을 치료하셨고 하실 수 있었다. ⑤ 신체 기관의 질병들도 고치셨다. ⑥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다.225)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의 소위 병고침과 신유의 은사들은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제이미 버킹햄은 40권 이상의 책을 저술 혹은 공동저술한 카리스마지의 자유 편집인이었다. 그는 1990년 4월 카리스마지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세미한 목소리로 “적어도 다른 하나의 50년의 삶을 네게 주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고 속삭이셨다고 하였고 “나도 하나님께서 내가 적어도 100살까지 살 수 있도록 약속하셨다고 믿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1990년 6월 그는 수술 불가능한 신장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7월 신장 수술 후 기적적 치료를 주장하였고 은사주의자 오랄 로버츠도 버킹햄이 치료받는 환상을 봤다고 주장했으나 1992년 2월 사망하였다.
또 병고침의 현상 자체가 성령의 은사임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병고침의 현상은 기독교 안팎의 신비주의적 집단들에서 있어 왔다. 신비주의 연구가 쿠르트 코흐는 사탄의 전술전략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악령에 의한 신비적 치료의 많은 사례들을 제시하였다.226)
교회연합운동과 함께감
넷째로, 은사운동은 교회연합운동과 함께 가고 있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반면, 바른 교리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천주교회를 배격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 교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1993년 순복음 강남 신학원 교수진에는 자유주의적 한신대, 감신대, 연대 신대의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27)
은사주의자 조용기 목사, 폴 크라우취, 잭 헤이포드, 죤 윔버 등은 로버트 슐러의 자서전에 추천사를 실었는데,228) 로버트 슐러는 자유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이고 연합주의적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를 조롱하는 기독교 일치 학교의 뉴에이지 연례대회에서, 또 문선명과 함께 통일교회 행사들에서, 또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간 조찬기도회의 주강사이었다.229) 뉴에이지 운동가들과 몰몬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은 그의 교회당에서 연설하였다.230) 그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과 결별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원하지 않는다.231)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232)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인물을 위해 추천사를 썼다.
1987년 성령과 세계전도 대회에 관한 북미 대회에서 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지어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통합을 선언하였다.233) 이러한 미혹의 예언은 그 대회에서 제재되지 않았다.
카리스마지 1998년 4월호에 의하면, 선교사 마틴 롬바도는 그의 동료 은사주의자들과 함께 이태리 로마에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을 연합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롬바도는,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천주교인들에게 부으시는 것을 본다. 천주교 은사주의 무리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234) 이와 같이, 은사운동은 잘못된 교회연합운동을 촉진시킨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성령의 충만하심 속에 살아야 한다. 에베소서 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라.” 만일 현대교회에 영적 침체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이의 주장처럼 ‘전통적인 경직된 성령론’ 때문이 아니고, 역사상 자주 그러했듯이, 목사들과 신도들의 죄와 불순종, 세상과 분리되기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며 세상과 타협하는 인본주의적 삶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된 부흥은 신자들의 성령세례나 은사 체험 같은 어떤 단회적 혹은 반복적 사건에 있지 않고, 오직 성경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회개와 참된 믿음과, 그 말씀대로 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은사운동은 하나님께서 현대교회에 주신 부흥의 표가 아니고 영적 어두움과 혼란을 추가시키는 일일 뿐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과 신자들은 마땅히 은사운동의 위험을 인식하고 그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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