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1)
- 존 플라벨 / 조계광 역 -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불가사의하고 영광스러운 신비이다. 성경은 “지극히 높으신 주는 두려우시며 온 땅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시로다.”라고 말씀한다(시 47:2). “주는 높이 계실지라도 겸손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교만한 자는 멀리서도 아시는도다.”라는 말씀대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신 것도 심원한 신비이기는 마찬가지이다(시 138:6). 그러나 시편 57편 2절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두 가지 신비가 서로 만나 하나가 되었을 때 신비 중의 신비를 이룬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로다.”(시 57:2) 이 말씀에서 우리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괴로움에 처한 비천한 인간을 위해 만사를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주관하시며, 가장 부패한 생각과 반역을 일삼은 우리 인간을 다스려 복되고 행복한 상태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성도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세상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살아야 할 이유나 가치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지는 시편 57편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위대한 사례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시편 57편은 표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윗이 기록했으며 기록한 시기는 그가 사울의 추적을 피해 동굴에 은신했을 때이다. 이 시는 “악장에게 준 다윗의 막담. 알다스헷. 그가 사울을 피하여 동굴에 있을 때에 지은 시.”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데, ‘알다스헷’은 저자의 의도를, ‘믹담’은 주제의 장중함을 암시한다. ‘알다스헷’은 “죽이지 말라” 혹은 “살육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사울을 염두에 두고 다윗이 부하들에게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는 의미일 수도 있고,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위급한 상황에서 영혼을 쏟아놓으며 “저를 죽이지 마소서”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한편 ‘믹담’은 “황금 장식”을 의미하는데, 이는 시편 57편의 탁월한 주제와 매우 잘 어울린다.
시편 57편의 전반부는 다윗이 처한 극도의 위기, 극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절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이 기도의 논거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다윗이 처한 극도의 위기는 표제와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이 이 시를 기록한 시기는 사울의 추적을 피해 동굴에 몸을 숨겼을 때이다. 그가 숨었던 동굴은 엔게다 광야에 있었는데, 그곳은 야생 염소가 서식하는 암석지대로 은밀하고 황량한 바위틈이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은 그곳까지 다윗을 추적해 갔다(삼상 24:12).
오랫동안 자고새처럼 쫓기던 다윗은 마침내 그물에 걸리고야 말 운명인 듯 했다. 원수들이 동굴 밖으로 몰려들었다. 그곳 외에 다른 출구는 없었다. 사울이 다윗 일행이 몸을 숨기고 있던 동굴의 입구까지 다가왔다. 다윗의 눈에 사울의 모습이 보였다. 참으로 긴박하고 위급한 상황이었다. “내 혼이 사자들 가운데 있으며 심지어 내가 불 위에 놓인 자들 가운데 누웠으니”라는 탄식이 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시 57:4). 죽음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가운데서도 자신의 의무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간절한 기도로 “내게 긍휼을 베푸시고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다(시 57:1).
다윗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조차도 불안해할 법한 상황에서 이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 반복 어구는 극도의 위기 상황과 기도자의 간절한 심정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적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긍휼, 그분의 긍휼뿐이었다. 극도의 위기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주님의 긍휼을 얻기 위해 몇 가지 논거를 제시했다.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 위한 그의 첫 번째 논거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오 하나님이여, 내 혼이 주를 신뢰하오니 내게 긍휼을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소서. 참으로 이 재난들이 지나갈 때까지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 내 피난처를 두리이다.”(시 57:1)
다윗은 모든 체면을 내던지고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했다. 다윗의 태도는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즉 자신의 날개 아래 피하려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이런 태도는 “주께서는 생각을 주께 고정시킨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자에게 주어진 보호의 약속을 믿는 신앙과 일맥상통한다(사 26:3). 다윗이 이러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신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어라
두 번째로 다윗은 위기에서 벗어났던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소망과 용기의 근거로 삼았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로다.”(시 57:2)
이 말씀에서 생각해 볼 점은 두 가지이다. 확고한 결심과 그러한 결심을 갖게 된 동기가 그것이다. 다윗은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라고 결심했다. 그의 단호한 표현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강렬하고 열정적인 기도를 암시한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거룩한 열정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뜻한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의 귀에 신속히 상달된다(시 18:6)(히 5:7)
다윗의 확고한 결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다윗의 믿음은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다윗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울은 왕이라는 높은 신분이었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사울이 자신의 터럭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윗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혹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먼저 돕지 않으시면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윗에게는 사울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나 그의 공격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는 구원을 베푸실 방법이 무한히 있으시다. 바로 이것이 다윗의 믿음을 지탱해준 근거였다(시 59:9).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과거의 경험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로다”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이루시는”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어근은 ‘완전하게 하다’, ‘중단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일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면 일하던 사람은 일손을 멈추고 일을 중단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과거에 직면했던 어렵고 불확실한 문제를 모두 완벽하게 해결해주셨다. 다윗은 그런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눈앞의 위기를 완벽하게 처리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주께서 나에 관한 것을 완전하게 하시리이다.”(시 138:8)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은 섭리의 개념을 가장 적절하고 확실하게 표현한다. 다시 말해 섭리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은혜로운 목적과 약속을 이루시는 사역을 의미한다. 다윗의 믿음에 큰 용기를 준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시고 이루셨다는 사실이다. 다윗은 역경과 시련이 많은 인생을 살았으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어떤 곤경에 처했든지 결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다윗은 비록 눈앞의 위기가 과거에 겪었던 어떤 시련보다 더욱 어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라 (2)
존 플라벨 / 조계광 역
섭리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룬다
하나님의 섭리는 성도가 직면한 상황에 보편적이고, 효율적이며, 유익하고, 고무적인 영향을 미친다.
먼저 본문은 성도가 직면한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섭리의 보편성을 암시한다. 섭리는 한두 가지 상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아우른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과 관련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신다. 중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까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처리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가까운 일이나 먼 일을 막론하고, 성도와 관련된 일이면 무엇 하나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본문은 섭리의 효율성을 암시한다. 섭리는 성도가 직면한 상황을 다룰 뿐 아니라 완전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사역을 시작하시면 계획에 따라 완벽하게 행하신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섭리를 가로막을 수 없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 섭리의 진행 과정이 방해를 받는 상황은 절대로 없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아울러 모든 섭리의 결과는 성도를 이롭게 한다. 섭리는 성도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룬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섭리를 섣불리 판단하고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곤경과 시련에 처할 때면 우리는 흔히 “모든 상황이 내게 불리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성도의 진정한 유익과 행복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
섭리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말씀을 이룰 뿐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주님의 작정과 약속에 위배되는 상황을 연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은 오로지 성도의 행복을 지향한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이라는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위기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많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마음에 소망과 용기를 주어 큰 시련 앞에서도 기도할 수 있게 만든다.
다윗은 죽음이 목전에 이른 상황이었다.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도무지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고 기쁨을 잃지 않았다. 분노에 사로잡힌 무자비한 권력자가 다윗을 바위 동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까지 바짝 쫓아왔다. 다윗은 언제 동굴에서 끌려나와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굶주린 사자들에게 둘러싸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자기를 도와주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떠올리며 용기와 희망을 얻었고, 주님을 향해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로다.”라고 간절히 도움을 호소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항상 묵상하라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특히 시련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이다.”
교회는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셨사오니”라는 말씀대로(사 26:12), 하나님의 긍휼이 풍성하신 섭리의 손길에 의해 인도된다. 경건한 성도는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대한 기억을 늘 귀한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한다. 리처드 백스터는 [성도의 영원한 안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체험한 경험을 꼭 책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기록해야 한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만 해도 은혜로울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고 경험하면 얼마나 은혜롭겠는가?”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기도의 힘으로 아말렉을 물리친 사건을 책에 기록했을 뿐 아니라, 희생단을 쌓고 그곳을 “여호와닛시”(하나님은 나의 깃발)라고 칭했다(출 17:14,15).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각 세대, 각 가족, 각 지방, 각 도시에서 이 두 날을 기억하여 지키고 또 부림의 이 날들을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치지 아니하게 하며 이 날들을 기념하는 일이 자기들의 씨에게서도 없어지지 아니하게 하였더라.”라는 말씀처럼 부림의 날을 제정해 하만의 계략에서 구원을 얻은 사건을 영구히 기념했다(에 9:28).
시편에서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지은 시’라는 표제가 달린 시가 발견된다(시편 70편). 또한 자녀에게 지어준 이름을 통해서 자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던 사실을 떠올렸던 부모도 있고(삼상 1:20),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났던 장소에 새 이름을 붙여 그곳에서 경험한 은혜와 구원을 영원히 기념하게 했던 예도 있다. ‘벧엘’이 바로 대표적인 경우이다(창 28:19). 곤경에 처한 하갈도 광야의 샘 곁에서 천사를 만나 도움을 얻고, 그곳을 “브엘라해로이”(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샘)라고 일컬었다(창 16:14).
뿐만 아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그분의 성호를 새롭게 일컫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라는 호칭을, 기드온은 “여호와살롬”이라는 호칭을 각각 사용했다(창 22:14)(삿 6:24). 하나님께서는 이따금 자신을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나오신 하나님”, 혹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신 주 하나님” 혹은 “북쪽 나라에서 그들을 데려오신 하나님”으로 일컬으시는데(느 9:7)(렘 31:18), 이 역시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행하신 은혜로운 섭리를 상기시켜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은 온전하고 완전한 이해이다. 이는 섭리 사역 전체와 세부를 모두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해는 완전한 상태에서나 가능하다. 장차 하나님의 산에 이르면 광야와 가나안(즉, 우리가 들어가게 될 영광스러운 왕국)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종착지에 이르게 된 과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도는 섭리 사역의 전체와 세부를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린다. 그때가 되면 개개의 섭리 사역이 왜 필요했고, 또 서로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었는지는 물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구원 계획이 효율적이고 질서 있게 이루어진 과정을 낱낱이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분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선을 위하여 함께 일하느니라.”(롬 8:28)
배가 나침반으로 올바른 항로를 유지하듯이, 하나님의 섭리는 약속을 이정표와 북극성으로 삼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나간다. 하우(John Howe, 1630-1706)는 [의인의 축복]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차 영원한 기록이 공개되고, 우리가 궁구했던 심오한 지혜의 은밀한 계획과 사역의 결과가 밝히 드러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아마도 ‘저것 좀 봐, 저런 계획이 있었다니! 그토록 복잡하고 당황스러웠던 일들이 저렇게 절묘하게 연관을 맺고 서로 의존하고 있었을 줄이야!’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이해이다. 영광에 이르는 길을 가는 동안에는 한 가지 행동이나 혹은 관찰이 가능한 일련의 행동과 몇 가지 상황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릴 수 밖에 없다.
이 두 이해의 차이는 톱니바퀴가 서로 어긋나고 시침과 분침이 제멋대로 떨어져나간 시계와 각각의 부품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질서 있게 작동하고 있는 시계의 차이와 같다. 혹은 절개된 인체의 핏줄 몇 가닥과 관절을 바라보는 무지한 구경꾼과 정맥과 동맥이 흐르는 길을 정확히 알고, 전체 속에서 세부를 바라보며 각 기관의 올바른 위치와 형태와 용도는 물론 그 상호 관계를 꿰뚫고 있는 전문 해부학자 사이의 차이와 같다.
세상에서 알 수 없었지만 장차 섭리의 전 과정을 한눈에 바라보며 개개의 상황이 서로 적절히 관련을 맺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기쁘고 황홀할 것인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3:7).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당시의 특별한 상황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섭리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고 당혹스러운 섭리 앞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분노를 느끼곤 한다. 그럴 때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행복을 짓밟으려는 줄 알고 비통해하며 쓸데없는 불평불만을 쏟아 놓는다. 하지만 험난한 광야 길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사 그들이 거주할 도시에 이르게”하는 통로가 되었듯이(시 107:7), 우리도 장래에는 모든 섭리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때와 비교한다면, 현재 섭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시야는 매우 불완전하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벧엘을 “하늘의 문”이라고 일컬었던 것처럼(창 28:17), 현세의 섭리 역시 ‘작은 하늘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놀랍고 은혜롭기만 하다.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의식을 통해서는 물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도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한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이루어낸 뜻밖의 결과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곤 한다.
또한 과거에 겪었던 사건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셨다면, 나는 설령 죽진 않았더라도 큰 고통을 받았을 거야.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다면 난 어떤 피해를 얼마나 많이 당했을지 몰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대로 내버려두어 멸망하게 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도로 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린다.
- 존 플라벨 저 <하나님의 섭리>(규장)에서 발췌 -
- 존 플라벨 저 <하나님의 섭리>(규장)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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